그리스인 이야기 1 - 민주주의가 태동하는 순간의 산고 그리스인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이경덕 옮김 / 살림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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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로마 신화를 읽은 다음, 이제는 인간으로 돌아온다. 신들의 이야기는 곧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인 이야기에 관한 책을 뽑아들었다. 시오노 나나미가 쓴. 이 저자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작가다.

 

꽤나 많은 부수가 발행된 책이었는데, 이제 나나미는 그리스인에 주목한다. 사실 민주주의 기초를 닦은 민족이 그리스인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통상 말하는 그리스인은 찾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지금 나라로 존재하는 그리스가 아니라 예전에 그리스인이라고 하면 많은 도시국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이라고 하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람들은 아테네인들과 스파르타인이다. 아테네는 민주주의, 스파르타는 군국주의라고 그냥 알고 있는데, 이들이 모두 그리스인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다들 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했던 도시국가인이었다는 사실. 이들은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연합하면서 많은 세월을 지내왔다. 각 도시국가들끼리 전쟁을 하다가 서로 멸망에 이르지 않기 위해 또는 평화 기간을 갖기 위해 4년에 한 번씩은 올림픽을 치렀던 나라가 바로 이 그리스였다는 것.

 

올림픽은 무기를 들지 않은 평화기간을 보장해 주었던 옛날 장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에 그리스인들을 그리스인이라는 의식을 갖게 해주는 민족이 있었으니 바로 페르시아 민족이다. 이 페르시아는 그리스인들에게 단합을 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1,2차에 걸친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통해 그리스인들은 펠레폰네소스 동맹과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게 된다. 도시국가들이 그리스인이라는 의식으로 뭉치게 되는 사건들이다.

 

이렇게 그리스 초기에 정치활동과 군사활동을 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 책을 이끌어간다. 수많은 그리스 도시국가들 가운데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스파르타인과 아테네인으로 나뉜다. 상대적으로 아테네가 더 잘 알려져 있어, 아테네 인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어쩌면 폐쇄적인 사회를 이루었던 스파르타보다는 개방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었던 아테네가 더 다양한 지도자들이 나올 수 있는 조건이었을 것이다.

 

스파르타에서 다루는 인물로는 스파르타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법을 기초한 '리쿠르고스'와 영화 300으로 잘 알려진 '레오니다스' 왕, 그리고 제2차 페르시아전쟁에서 페르시아를 격파한 '파우사니아스'가 전부라고 해도 된다.

 

철저하게 신분제 사회를 고수한 스파르타, 해외팽창보다는 자국의 안전을 중시한 스파르타, 강인하게 전사를 키운 스파르타에 대한 이야기가 인물들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리스인이라고 하면 우리는 아테네인들을 주로 떠올린다. 민주주의라고 해도 역시 아테네를 떠올리고...이런 아테네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데, 스파르타는 '리쿠르고스'라는 한 명에 의해 이끌어졌다면, 아테네에서는 여러 사람이 연달아 나와 민주주의를 만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솔론'. 그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시초하고 할 수 있고, 솔론의 뒤를 이은 '페이시스트라토스'에 의해 아테네는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그러나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참주라고 불리는, 절대 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에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는 '솔론'이 한 개혁이 지닌 중심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그래서 아테네는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과정에 들어서게 된다.

 

페이시스트라토스 다음으로는 '클레이스테네스'가 등장하고, 그는 특권계급에 속했다고 할 수 있지만, 개혁을 제대로 이끌어간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시오노 나나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난 반세기 정도 동안 서양의 르네상스, 중세, 고대 로마에 관해 쓰면서 깊이 생각한 것은 시대에 획을 그을 정도로 개혁을 본격적으로 실행한 사람은 모두 기득권 계급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기득권 계급에 속한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자기들이 누리는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는 일만 생각하는 단순한 보수주의자는 아니었다. 이 계급에 속한 사람 중에서 때로 자기들이 속한 계급의 결함을 직시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개혁은 기득권 계급이 가진 결함을 파고드는 것만으로 달성되지 않는다. 결함을 따지기 위해서는 그것을 피부로 느끼는 쪽이 유리하다. (108쪽)

 

이 말은 그람시가 말한 '유기적 지식인'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이런 유기적 지식인들에 의해 헤게모니가 발현되는 과정, 이것이 곧 개혁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개혁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지 않는다.

 

기득권 세력 중에서 문제를 인식한 사람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나온다고 한다. 문제를 인식하는 순간, 해결책을 고민하기 때문이다. 이런 지식인들이 나타나는 때, 개혁의 순간이 된다. 어쩜 지금 우리 사회도 이런 '유기적 지식인'이 나와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그냥 자기 특권에 안주하는 보수적 특권층만이 아니라.

 

또 시오노 나나미는 이렇게도 말한다.

 

  오늘날까지 명성이 자자한 '아테네 민주정치'는 모두 최고의 엘리트들이 만들었다. 고대 아테네의 '데모크라시'는 '국정 방향을 시민(데모스demos)의 손에 맡긴다'가 아니라 '국정 방향은 엘리트들이 생각해서 제안하고 시민에게 그 찬반을 맡긴다'이기 때문이다. (108-109쪽)

 

이 부분에서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실시한 공론조사 - 원전 건설 중지와 대학입시 개편안-를 실시한 과정이 생각났다. 과연 엘리트들이 무슨 일을 했던가. 그들이 국정 방향을 제시했던가. 오히려 그들은 국정 방향을 시민에게 맡겨 버리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것이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법인 듯 여기지 않았던가.

 

어떻게 하는 것이 민주주의에 해당할지 더 생각해 보게 만드는 구절이었다.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고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 어떤 식으로 정치를, 국정 방향을 만들어가야 할지 고민하게 하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클레이스테네스 다음으로는 여러 사람이 나오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제1차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그렇지만 말로는 비참했던 '밀티아데스'다. 그 다음으로 제2차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되는 '테미스토클레스'.

 

그가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아테네가 강한 도시국가로 성장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고도 최고의 자리에서 제 때 물러난 사람이기도 하고. 물론 나중에는 추방당하기도 하고, 페르시아로 넘어가 그곳에서 최후를 맞기도 하지만... 그는 아테네가 강국으로, 특히 해상 강국으로 부상하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의 등장으로 아테네는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은 나름대로 민주정치를 완성해가기 시작한다.

 

아테네가 또는 그리스식 민주주의가 정착해 가는 과정에서 페르시아라는 나라가 차지하는 역할을 무시할 수 없고, 그 과정에서 정치와 군사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고, 이들에 의해서 기틀이 잡히게 됨을 흥미진진하게 서술하고 있다.

 

온갖 자료들을 해석하면서 자기 견해를 제시하기도 하면서 시오노 나나미는 그리스인들에 대해서, 그리스 민주주의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제 다음 권은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는 시기로 넘어간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페리클레스' 시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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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1 09: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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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1 09: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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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1 09: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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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겐 박봉우는 '휴전선'의 시인이라기보다는 '황지의 풀잎'의 시인이었다.

 

  제일 먼저 읽은 그의 시집이 바로 '황지의 풀잎'이었고, 이 시집에서 좋은 시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이었다.

 

  이 시집에서 '창(窓)이 없는 집'이라는 시를 읽고 시인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두고두고 인용하는 시로 만들기도 했는데...

 

  알라딘 온라인 중고에서 박봉우 시전집을 발견하고는 안 살 수가 없었다. 어찌 박봉우 시전집을 사지 않으랴.

 

첫시집부터 분단의 아픔이 절절히 묻어 나온다. 분단, 우리를 가르고 있는 장벽, 그 장벽으로 인해 우리는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던가.

 

박봉우는 이런 분단을 철조망에 걸린 나비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나비가 아니다. 연약한 나비가 제대로 날지도 못하고 철조망에 갇힌 상태. 이것이 바로 분단이다.

 

그러니 분단이 된 땅, 황지에 불과하다. 황지, 황무지, 불모지..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다. 우리는 그 황지를 옥토로 바꾸어야 한다. 지금, 바로 그렇게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나.

 

이제 분단은 통일을 위한 한 걸음이 되고 있다. 분단은 평화로 가는 징검돌이 되고 있다.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종전선언을 하려고 하는 지금, 분단은 이제 끝내야 한다. 적어도 나비들이 철조망에 걸리는 일이 없이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수 있게.

 

전집 뒤로 갈수록 시가 단순해 진다. 그래, 어려운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시인은 단순한 말로 명쾌하게 하고 싶은 말을 우리에게 전달하려 한다.

 

분단에 대한 아픔도, 또 광주민주화운동의 슬픔도 그의 시 속에 녹아들어가 있다. 그렇게 우리 사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만들어간 시인. 그가 바로 박봉우다.

 

이번에는 '반쪼각의 달'이라는 시를 소개한다. 이제 우리는 반쪼각의 달이 아니라 온전한 달, 둥그런 달을 노래해야 한다. 노래할 수 있다.

 

  반쪼각의 달

 

내 얼굴은

상처뿐인 조국

지도를 그린다.

 

보름달도 되지 못한

항상 반쪼각의

달.

 

언젠가 한 번쯤……

 

우리들의 보름달을 위해

모든 옷

옷들, 훨훨 벗고

 

나비

춤추며 모이는

그런 날,

 

내 얼굴은

상처뿐인 조국

지도를 그린다.

 

박봉우 시전집, 현대문학. 2009년. 264쪽.

 

이제 그 상처가 더 이상 생기지 않게 해야 한다. 상처가 아물어서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반쪼각이 아닌 둥근, 둥그런 보름달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이제 평화를 위해, 통일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들이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는 그 날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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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전집 2 : 소돔 120일 혹은 방탕주의 학교 사드 전집 2
D. A. F. 드 사드 지음, 성귀수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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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가 있다. 방탕한 사회를 대표하는 이름. 결국 하느님의 진노로 멸망하게 되는 도시.

 

의인 열만 있어도, 아니 의인 다섯만 있어도 멸망을 면할 수도 있을텐데... 이미 썩어문드러질대로 문드러진 사회에서는 그런 의인을 찾기가 힘들다.

 

사드가 추구하는 사회는 어떤 사회였을까? 그는 귀족이었다고 하는데,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도 역시 귀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을 리베르탱이라고 한다. 자유주의자? 무엇을 위한 자유주의?

 

자기 욕망을 끝간 데 없이 추구하는 자유? 여기에 남은 없다. 남이 없는 자유는 방탕이 아니다. 남의 고통으로만 유지되는 자유다.

 

제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남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아니,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가. 내 욕망을 위해서는 남이 고통을 받아야 한다.

 

'냄비 속 개구리'처럼 욕망은 서서히 달궈진다. 서서히 달궈지지만 결국 파멸로 이르게 된다. 사드가 이야기하는 이런 방탕주의 학교는 결국 파탄으로 치닫게 된다. 그런데 누구의 파탄.

 

사드는 욕망을 추구하는 자들의 파탄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들이 점점 강해지는 강도로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면서 남들을 희생시키는 장면으로 전개한다.

 

가히 사디즘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사디즘을 옹호할 수 없게 만드는, 그런 내용 전개다. 그렇다. 욕망이 남을 파멸로 이끌면 그 욕망은 정당할 수가 없다. 그런 욕망 추구는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사드가 이 책을 통해서 그런 것을 의도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는 인간이 갈 수 있는 안 좋은 행위의 극한까지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 극한까지 가는 인간들의 말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이런 극한에까지 인간이 다다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점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저런 변태가 있나? 저런 악한이 있나?는 말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인간이 안 좋은 쪽으로 치달을 수 있는 그런 환경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어쩌면 이 책을 통해 사드는 우리 인간이 지닌 사악함을 폭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라는 말을 이 작품을 통해서, 아니 남의 고통을 통해 자기 욕망을 충족하는 인간들을 통해 너는 어떻게 사느냐고 질문을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 작품이 의미가 있다.

 

해설에서는 인간 질환을 연구하는 작품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지닐 수 있는 안 좋은 욕망의 끝, 병적인 행동, 이런 것들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 그것이 무엇인가?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으니,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풀어낼 수 있는, 다른 존재의 감정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소돔과 고모라는 망했다. 망해야만 했다. 만인이 만인에 대해 투쟁하는, 자기 욕망만을 추구하는, 그런 사회는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본주의가 태동하면서 사람들이 상품으로 전락하는 사회의 모습을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는데... 사람은 결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칸트의 말대로 목적이다. 우리 존재 자체가 목적이다.

 

이런 점에서 사드의 이 작품, 사람이 수단이 될 때 어떤 모습이 되는지 생각하게 해준다.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는 않은 책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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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유리 동물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8
테네시 윌리암스 지음, 김소임 옮김 / 민음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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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와 "유리 동물원"이라는 희곡이 묶여 있는 책이다.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는 어떻게 될까? 아마도 끝까지 버티는 고양이가 이기지 않을까.

 

죽음을 앞둔 아버지의 재산을 두고 벌이는 일... 그렇게만 판단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다. 이 희곡이 연극으로 상연되어 수많은 관객을 불러온 것은 단지 자식들 간의 재산싸움 때문은 아닐 것이다.

 

주인공들은 단순하다. 아버지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물려받으려는 큰아들 구퍼와 아내 메이, 그리고 브릭을 사랑하지만 아이가 없는 마거리트, 이들의 아버지, 어머니.

 

묘하게 큰아들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변호사로 살아가는 그에게 아버지와 어머니는 애정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술에 의존해 살고 있는 둘째 아들 브릭에게 모든 것을 건다. 브릭은 유망한 운동선수였다가 부상으로 지금은 술에 의존해 있다.

 

이런 브릭은 아내인 마거리트와 몇 년간 잠자리를 하지 않는다. 아마도 친구의 죽음 때문인 것으로 나오는데, 그렇다고 브릭이 동성애자는 아니다. 아마도 친구가 동성애를 고백했을 것이고, 브릭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충격으로 친구가 죽었을 거라고 짐작할 수는 있는데...

 

아내인 마거리트는 이런 브릭을 사랑한다. 처음에는 마거리트가 약자의 처지에 있었는데, 이제는 마거리트가 브릭을 돌볼 수 있다고 말하면서 희곡은 끝난다.

 

고양이라고, 뜨거운 양철 지붕 위에 올라간 고양이라고 마거리트를 이야기하는데, 죽음을 앞둔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마거리트의 몸부림이 처절하게 다가온다.

 

단지 재산 때문이 아니라 생활능력을 잃은 남편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아버지 재산을 포기할 수없는 마거리트, 그녀는 그렇게 그르렁거릴 수밖에 없다.

 

나중에 임신했다는 거짓말로 아버지를 안심시키고, 재산을 받게 되지만, 이 거짓을 현실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사람들의 심리가 잘 드러난 희곡이라는 생각이 들고, 이 희곡은 영화로도 만들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뒤에 실린 "유리 동물원"은 유리처럼 작고 연약한 로라를 등장시키고 있다. 회상조로 작품이 전개되는데... 유리 동물들을 통해서 로라의 연약함을 볼 수 있다.

 

언제든 부서지기 쉬운 유리 동물들, 그러나 자신의 빛을 간직하고 있는 유리 동물.. 로라는 다리를 저는 장애로 인해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등장인물인 짐의 말대로 열등감으로 자신을 유폐시키는 생활을 하는데...

 

짐은 그런 로라에게 자신감을 가지라고 한다. 그러나 짐과 로라는 맺어질 수가 없다. 짐에게는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짐과 함께 춤을 추다가 유리 동물인 유니콘을 깨뜨리게 되고, 로라는 그 깨진 유리 동물을 짐에게 선물로 준다.

 

유리 동물처럼 살아가게 되는 로라. 그런 순수함을 톰의 시선을 보여주는데...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로라, 그를 밖으로 내보내려는 어머니, 뚜렷한 결말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그렇게 누구나 자신만의 세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해준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을 때는 유리 동물들처럼 작고 연약할 수밖에 없음을. 그것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자그마한 충격에도 깨질 수 있음을.

 

그래서 유리 동물의 세계에서 벗어나야 함을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내 안에 작은 유리 동물들과만 지낼 것이 아니라 밖에 있는 수많은 동물들과 함께 지내야 한다는 생각을 해주는 희곡이다.

 

그렇게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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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기념재단에 있던 영상을 보는데, 그 영상 속에서 김준태 시인이 나왔다.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시로 발표한 사람이 바로 김준태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라는 시. 모두가 침묵할 때 분연히 일어나 비록 많은 부분 검열로 삭제가 되었지만 신문에 발표한 시, 시인.

 

그것은 절절하게 광주민주화운동을 노래한 시였다. 그렇게 김준태 시인은 광주민주화운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 시인이 되었다. 그만큼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에 참여를 했다고도 할 수 있고.

 

김준태 시인을 알게 된 건, 젊은시절 읽었던 시 '참깨를 털면서'이고, 짤막하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시 '감꽃'도 잘 읽었다. 그렇게 김준태 시인이 기억 속에 남아 있었는데...

 

다시 김준태 시인의 시집을 읽는다. '밭'을 소재로 한 시다. 시집 제목도 '밭시'다. 그렇다고 밭이 계속 나오는 것은 아니다. 밭은 곧 땅이고, 땅은 모든 생명을 보듬고 살아가게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끝간 데 없는 사랑을 지닌, 모든 것을 주는, 자신의 몸이 헤쳐지더라도, 더럽혀지더라도 다른 생명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밭. 그런 밭은 우리가 밭으로 알고 있는 사전에 있는 그런 의미를 넘어 더 넓고 깊은 의미로 향한다.

 

밭은 사람도 될 수 있고, 나무도 될 수 있고, 하늘도, 별도, 달도, 그리고 동물도, 세상 모든 것이 바로 밭이 될 수 있다.

 

각자의 존재는 각자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나인 것은 남이 있기 때문이고, 사람이 사람인 것은 다른 존재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밭은 특정한 밭이 아니라 모든 것이 바로 밭이다.

 

우리는 밭과 함께, 밭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때로는 이 밭을 생각하지 못하고 지낸다. 마치, 눈 앞에 보이는 것만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살듯이.

 

밭과 통하는 것이 바로 길이다. 밭은 생명의 길인데, 그런 생명의 길을 줄여서 그냥 길이라고 해도 된다. 이런 길, 모든 것이 다 길이 된다. 시를 보자.

 

 

 

어디로

가야 길이 보일까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이 어디에서 출렁이고 있을까

 

더러는 사람 속에서 길을 잃었고

더러는 사람 속에서 길을 찾다가

 

사람들이 저마다 달고 다니는 몸이

이윽고 길임을 알고 깜짝깜짝 놀라게 되는 기쁨이여

 

오 그렇구나 그렇구나

도시 변두리 밭고랑 그 끝에서

눈물 맺혀 반짝이는 눈동자여

 

흙과 서로의 몸속에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바로 길이었다.

 

김준태, 밭시, 문학들. 2014년. 11쪽. 

 

길은 바로 우리 곁에 있다. 이 길을 찾아 가면 된다. 바로 곁에 있는 사람, 그 사람이 길임을 깨닫는 즐거움, 그만한 즐거움이 어디 있겠는가.

 

오죽하면 '반면교사(反面敎師)'라는 말이 있겠는가. 나하고 가장 거리가 먼, 내가 싫어하는 사람조차도 나에게는 길이 될 수 있음을 이 낱말이 가르키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시집을 읽으니, 김준태 시인의 시 한편한편이 모두 길이 된다. 밭이 된다. 나를 키워주는 밭이 되고, 내가 갈 길을 펼쳐주고 있다.

 

세상 모든 존재가 밭이 될 수 있음을, 길이 될 수 있음을, 시를 통해서 김준태 시인은 잘 보여주고 있다. 시를 읽으며 마치 오솔길을 느릿느릿 걸어다니는 느낌, 주변에 있는 자연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 시는 밭이다. 밭은 길이다. 길은 시다. 그러므로 밭은 시다. 시집 제목이 그래서 '밭시'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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