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캐치-22 - 전2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7
조지프 헬러 지음, 안정효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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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때는 제 2차 세계대전이다. 장소는 물론 작가가 창조한 공간이겠지만, 이탈리아 전선이라고 보면 된다.

 

주인공들은 공군 장교들이고, 그 중에서 폭격을 담당한 요사리안이 소설을 전체적으로 이끌고 있다. 이들은 전쟁에 참전하고 있지만, 빨리 귀국하고 싶어한다. 이미 전쟁의 승패는 결정이 된 상황이고, 이들에게 한 번의 출격은 목숨을 담보로 하기 때문이다.

 

30회의 출격을 마치면 귀국시켜 준다는 명령, 그러나 이런 명령은 지켜지지 않는다. 처음이 30회의 출격은 아니었다. 적은 출격횟수에서 점차 출격횟수는 계속 늘어가기만 한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려는 지휘관들의 욕심이 출격횟수를 계속 증가시키는 것이다. 이 출격횟수는 소설 말미에 가면 70회로 늘어난다.

 

30회라고 해도 많은데, 70회라면 어마어마한 횟수다. 한 번 출격할 때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하는 공군들에게 70번이나 자신의 목숨을 맡기는 일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국가라는 이름으로 공군에게 강요한다. 조종사들만이 아니라 항행사, 그리고 폭격수까지, 이들은 모두 국가를 위해서 출격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다보면 도대체 적군이 누구인가 생각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에 미국의 적군은 독일군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독일군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모두 공군 기지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간혹 공습 장면이 나오지만 이 공습 장면에서도 독일군의 모습이 묘사되지 않고 비행기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묘사되어 있다.

 

흔히 긴박하고 긴장감 넘치며 장엄한 비행기 안 모습을 상상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렇지 않다.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 치는 요사리안의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그는 공습에도 목숨을 걸지 않는다. 그의 특기는 어떻게 하면 대공포가 없는 곳으로 도망치나 하는 것이다. 자신의 목숨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의무를 소홀히 하지는 않는다. 그것을 소홀히 했다가는 자기 목숨도 위태롭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우정을 쌓았던 친구들이 하나둘 죽어나간다. 이미 고국으로 돌아가 후방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지휘관이 터무니없이 증가시키는 출격 횟수 때문에 공습에 나섰다가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적군은 이미 독일군이 아니라 점차 출격횟수를 늘리는 지휘관들이다. 이 지휘관들에게 반항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반항은 전쟁 상황에서는 통할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미치거나 죽거나,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이것뿐이다. 하지만 이 마저도 쉽지 않다. 병원에서만 지내길 원하는 요사리안이지만 그는 미쳤다는 판정도 받지 못한다. '캐치-22'라는 이상한 규정...

 

실제 존재하지 않는 규정이지만 이 규정은 모든 군인들을 옭아매고 있다. 이 규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적은 이제 독일군이 아니다. 이 '캐치-22'를 적용시키는 아군 지휘관들이다. 이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수많은 군인들이 죽어나가고... 그럼에도 비극이라기보다는 무언가 웃음을 유발하는 이 소설은, 상황을 삐딱하게 표현하고 있는 작가의 서술 때문에 전쟁을 비판적으로 보게 된다.

 

전쟁에서 이득을 얻는 사람은 누구인가? 사회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국가를 위해서 전쟁을 한다고 하지만, 정작 그들은 전쟁으로 죽어가거나 쫓겨가거나 길거리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직접 전쟁에 참여하는 군인들도 마찬가지다. 이들 역시 제정신을 가질 수가 없다. 이 소설에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바로 전쟁이 우리에게 온전한 정신을 가질 수 없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을 배경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이다. 전쟁이 얼마나 인간을 파괴하는지,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결국 결말부분에서 요사리안은 탈영을 시도한다. 그러면서 소설이 끝난다. 오래 전에 쓰인 소설이지만 전쟁이 일으키는 끔찍한 일들을 이렇게 비꼬면서 표현한 소설은 흔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란 말이 있듯이 전쟁에서 '캐치-22'로 대변되는 지휘관의 자의적인 명령이 사람들을 얼마나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갈 수 있는지를 이 소설을 통해 알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이런 전쟁의 위험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을까? 이 소설을 읽으며 전쟁은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좋은 반전(反戰) 소설이다. 전쟁의 모습을 풍자하고 있는 소설이라고 보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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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에 가본 지가 오래 되었다. 언제부턴가 지리산은 과거의 산이 되었다.

 

  지리산을 관통하는(?) 길이 뚫리고, 노고단 근처까지 차가 다니게 된 이후, 지리산은 내게서 멀어져 갔다.

 

  지리산을 종주하는 것이 산을 타는 보람이기도 했던 때가 있었는데, 지리산에서 수많은 죽음들을 생각하는 때도 있었는데, 밤에도 지리산 능선을 걷던 때가, 지리산에서 거센 바람을 맞이하던 때도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지리산 천왕봉에서 본 일출, 그 장엄한 광경은 마음 속에 영원히 남아 있는데... 노고단, 벽소령, 세석평전, 뱀사골, 피아골 등등.

 

지리산(智異山) 다름을 아는 지혜. 그 넓디 넓은 산은 다름을 포용하는 산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리산의 품에 안기고 싶어 그 산을 찾는다.

 

나만이 아니라 다른 것들과 함께 하는 삶. 그것을 포용하는 삶. 그렇게 하나 되어 함께 살아가는 삶. 지리산은 가만히 있어도 그것을 가르쳐준다. 그런 지리산 자락에 사는 시인이 있다.

 

이원규 시인이다. 오토바이 하나로 자유롭게 사는 시인. 그가 지리산에 살면서 지리산을 노래한 시들을 내었다. 이 시집은 '옛 애인의 집'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지리산에 관한 시들이 많이 실려 있다.

 

자꾸만 얕아지려는 삶 속에서 지리산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지리산은 그렇게 쉽게 가서는 안 된다. 지리산은 지금 내 자리에서 열심히 잘 산 다음에나 가야 할 산이다. 그냥 도망치듯이 가는 산이 아니라, 내가 치열하게 살고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려 할 때 비로소 가는 산이다.

 

그렇게 지리산은 지금 내게서 멀어졌다. 시인이 노래한 시의 마지막 구절처럼 '행여 견딜만' 한지도 모르겠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꽃 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의 물방망이를 맞으러

벌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지리산에 오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이원규, 옛 애인의 집, 솔. 2003년. 158-159쪽.

 

지리산 둘레길이 유명해졌고, 이제 사람들은 그 둘레길을 걸으러 많이들 간다고 한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지리산을 찾는 사람도 많아질 터이다.

 

그때, 지리산에 가기 전에 이 시 한 번 읽고 가는 것은 어떨지... 이 시를 읽고 어떤 마음으로 지리산에 가야하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지...

내게서 멀어진 지리산... 다시 가까이 하고 싶어졌다. 아니 가까이 해야 한다. 지리산은 멀리 할 수 없는 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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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0 09: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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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0 10: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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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화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6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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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누아 아체베가 쓴 소설이다.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 아프리카 소설이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우리처럼 근대화가 될 때 고난을 겪는 사실을 소설로 표현한 작품은 어떤 동질감을 느끼게 한다.

 

이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영국 지배에 있는 우무아로족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우무아로족이라고 하지만 이들은 하나의 부족이 아니다. 여러 부족이 하나의 신을 섬기면서 뭉쳐 있다고 해야 한다.

 

즉, 서로 전쟁을 하면서 죽이던 여러 종족이 울루신을 정점으로 전쟁을 그치게 되고 이들을 통합하는 대사제로 에제울루를 두게 된다. 에제울루에 의해 이들 종족들은 서로 평화를 지키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만 지속되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여기에 백인이 간섭을 하게 된다. 영국이 아프리카를 식민지 삼아서 정책을 펼치는데, 식민정책에는 늘 종교도 따라오니 기독교가 이들 전통적인 관습과 대결하게 되고, 또한 영국 정책이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변해야 한다. 분명 시대는 변해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 변화를 누가 이끌어야 하는가? 이 종족이 별 갈등없이 변화를 추구하려면 에제울루의 역할이 중요하다.

 

중요한 위치에 있고, 또 대사제라는 직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통합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반목하고 있는 부족들이 있기도 하고...

 

그런데 에제울루는 이런 변화를 이끌 능력이 없다. 그는 과거에 매여 있다. 울루신을 중심으로 그 자신의 영향력을 확인하려고만 한다.

 

백인들이 그들의 삶에 깊게 들어왔음에도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한다. 그가 얼마나 시대의 변화에 무지한지를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백인에 대한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백인 중에 단지 왼손잡이가 왼손으로 글을 쓸 뿐인데.. 그는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을 무슨 특별한 능력으로 여기게 된다.

 

기독교 또는 백인의 생각을 알고 대처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교회에 보내기도 하지만 그는 제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아들에게 왼손으로 글씨를 쓸 정도로 잘 배워두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문화의 차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그는 변화하는 시대에 과거에 얽매어 추수할 시기가 지나도 사람들에게 추수를 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마을이 굶주림으로 시달리게 된다. 그냥 율법에만 얽매인 모습이다. 분명 추수를 할 수도 있을텐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마을 원로들이 와서 융통성 있는 방법을 제시하지만 그는 거절한다. 그것이 개인적인 원한이든 뭐든 그는 과거에만 매여 있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가 없다. 자신의 가족에게도 고통을 주게 되고.

 

결국 아들이 죽고, 그 죽음으로 인해 그는 정신을 놓게 된다. 정신을 놓게 되면서 소설은 끝나는데, 소설 끝부분에 사람들이 공물을 교회에 바치면서 추수를 하는 것으로 끝난다.

 

과거에 매인 지도자의 고집이 결국 그들의 삶을 서양의 삶에, 백인의 삶 속으로 집어넣고 만 것이다.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식민지로 전락했던 우리의 상황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기도 한데...  과거에 통합을 이루는데 큰 역할을 했던 에제울루가 시대가 변하면서 오히려 그들을 식민이라는 구렁텅이로 몰아갈 수도 있음을, 그래서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지도자가 얼마나 해악을 끼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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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 리더십 Color Leadership
신완선 지음 / 더난출판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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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라는 말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도자라고 하기엔 뭔가 이상하고, 그렇다고 통솔자도 아니고... 앞서가는 사람, 이끄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그냥 리더라고 하자. 남을 이끄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어떤 조직에서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러므로 리더는 어디에도 있어야 한다. 사람이 몇이 모여 일을 할 때에는 누구나 똑같은 역할을 지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좀더 큰 짐을 진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을 리더라고 하자.

 

그렇다면 리더는 참으로 중요하다. 어떤 조직에도 있어야 할 존재라면, 리더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에 따라서 그 조직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그렇다.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수시로 바뀌는 정치판을 생각해 보자. 자기 정당만을 이끄는 리더가 있고, 자기 정당을 사회 발전의 중심이 되게 이끄는 리더가 있다. 아니면 자기 욕심만을 채우는 리더가 있다.

 

정당에서 어떤 리더를 필요로 하는지는 명확하다. 자기 정당, 자기 욕심만을 챙기는 그런 리더는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당이 원하는 리더는 사회 비전을 제시하고 사회 발전을 위해 정당을 이끌 수 있는 리더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필요한 덕목이 무엇인지 찾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리더가 좋은 리더일 것이다.

 

정치 분야에서 리더가 필요하듯이 경제 분야에서도 리더가 필요하다. 경제 분야는 리더에 따라서 흥망이 결정되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생계가 걸려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교육 분야에서도 리더가 중요하다. 현재에 머물지 않고 미래의 모습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각종 분야에서 리더가 하는 역할은 중요하다. 그렇지만 과연 어떤 리더가 필요한가? 또 나는 리더의 자질을 갖추었는가 하는 질문에는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이 책을 보면 답은 명확하다. 모든 사람은 리더의 자질을 갖추었다. 리더가 한 가지 특성만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양한 종류의 리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리더를 일곱 가지 색깔로 정리해 놓고 있다. 그래서 칼라 리더십이다.

 

빨강(서번트 리더십), 주황(브랜드 리더십), 노랑(사이드 리더십), 초록(파워 리더십), 파랑(슈퍼 리더십), 남색(비전 리더십), 보라(변혁적 리더십)

 

각 색깔에 맞는 특징들, 유형들, 그리고 그런 리더들의 사례가 이 책에 실려 있다. 또 책 앞부분에는 자신이 어떤 리더에 해당하는지를 측정하는 수단도 있어서 직접 자신의 성향을 살필 수도 있어서 좋다.

 

무엇보다 한 가지 특징으로 제한하지 않아서 좋다. 사람은 단 한 가지 자질로만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여러 특성들이 한데 모여 있는데, 그 중에서 어느 자질이 좀더 강하냐 하는 것이다.

 

강함을 살리고 약함을 보충하면서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일을 하는 것, 또 조직의 성향과 사회의 상황을 살펴서 자신에게 맞는 리더십을 함양하고 발현하라는 것이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핵심이다.

 

그러므로 리더십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사회나 조직이 고정되어 있지 않듯이 개인도 역시 변화한다. 그러한 변화를 인식하고 상황에 맞게 행동할 수 있으면 그 사람이 바로 진정한 리더이다.

 

그러한 리더가 될 수 있도록 이 책은 다양한 사례들을 제시해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핵심은 '교육이 아니라 훈련이다'라는 말에 있다.

 

리더십에 대해서 아는 것에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실현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해야 한다. 그리고 실천해야 한다. 그러면 개인이, 조직이, 사회가 조금이라도 더 나은 쪽으로 움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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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하지 않아야 할 때 침묵하는 사람, 큰 사람이다. 말도 아닌 말을 너무도 큰소리로 내는 사람, 말에 대해서 책임도 지지 못하면서 자신을 점점 수렁으로 빠뜨리는지도 모르면서 말을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작은 인간들이 판치는 세상.

 

  원칙은 아름답다. 원칙은 있어야 한다. 세상에 원칙이 없다면 얼마나 혼란스러워지겠는가. 그렇다고 원칙만 지켜서는 안 된다. 원칙만 지키면 고루해진다. 변화에 따라갈 수가 없다.

 

  지금 세상에서 원칙을 지켜야 할지, 원칙에 융통성을 두어야 할지 판단해야 한다. 그런 때에 있다.

 

그런데 과연 원칙이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합의가 안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각자 자기 말만 한다. 자기 말이 원칙이란다. 그 원칙에서 한발도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니 원칙을 지키는데 최소한의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내로남불'만 존재한다. '내로남불'이 횡행한다. 자기가 행하면 원칙에 융통성을 준 것이고, 남들이 행하면 원칙을 위배한 것이 된다. 그렇다고 원칙을 지키자고 하면 시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한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하나? 루쉰 글이 생각난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침묵할 것. 그냥 헛웃음만 웃을 것.

 

유용주 시집 제목을 보며 요즘은 침묵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너무도 많은 말들이 커다랗게 날아다니고, 그 말들이 바위가 되어 사람들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다는 생각.

 

말들, 그것을 가짜뉴스라고 해도 좋고, 남을 비방하는 말이라고 해도 좋다. 그런 말들이 칼이 되어 날아다니고 있는 요즘이다.

 

사람들이 수많은 말의 칼에 상처를 입어 여기저기 나가떨어지고 있다. 내가 받은 상처를 남에게도 돌려준다고 하는 사람도 많이 생기고 있다.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 침묵할 것. 이제는 '크나큰 침묵'이 필요할 때가 아닌가 싶다. 말보다는 행동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고.

 

유용주 시집, 오래된 시집이다. 절절하다. 삶의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시집.. 이렇게 시인의 마음이, 말이 절실하게 묻어나오는 시집, 오랜만이다.

 

침묵이 필요한 시대에 유용주 시집에서 '종(鐘)'이란 시를 본다. 수많은 말들 중에 이렇게 종소리처럼 우리 마음에 울림을 주는 소리가 필요하다고.. 바로 그런 소리들이 크나큰 침묵이 아닐까 하고.

 

 

진저리치며

진저리치며

내 너에게 달려갔으나

싸늘한 새벽 하늘

빈 골짜기 바람 한움큼 만나는 것으로

되돌아왔다

얼마나 긴 오장육부를 쥐어뜯어야

이 울음 끝이 나는가

내 육신 굳어 바위가 되고

바위 부스러져 재로 변할 때까지

이 노래 멈출 수 없다

이 피울음 그칠 수 없다

 

유용주, 크나큰 침묵, 솔. 2002년 1판 4쇄. 38쪽.

 

온갖 재잘거리는 소리에 묻혀 진작 들어야 할 둔중한 종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종소리를 듣기 위해서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말을 줄이고 귀를 열어야 한다.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야 그때서야 종소리가 들린다. 종소리가 마음 속으로 들어온다. 그렇게될 때까지 종은 피울음을 멈추지 않으리라. 제발 제대로 된 소리를 들으라고.

 

말들의 시대... 말이 돌덩이가 되어 우리들 머리 위로 쏟아지는 시대. 말이 칼이 되는 시대... 그래서 침묵은 약자들만이 지닌 도피처인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침묵 속에서 우리를 깨우는 종소리를 들어야 한다. 종소리를 듣고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도대체 원칙이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내게 원칙이 있는가? 이 원칙을 지킨 상태에서 융통성을 발휘하는가?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 질문은 침묵 속에서 완성된다.

 

이 시집 3부에 실린 구멍 연작시들... 1편부터 13편까지 마음을 절절히 울린다. 아, 이렇게 내 마음에 구멍을 내는 시. 그 구멍을 메우게 하는 시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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