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시'라고 한단다. '사진시'라고 해도 될텐데, 굳이 '디카'란 말을 쓴 이유를 생각해 본다.

 

  사진이라고 하면 예전에 쓰던 필름 카메라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와 대비되게 디카라는 말을 썼나 싶다.

 

  보통 필름 카메라는 사진을 찍는데 시간도 많이 들고, 또 현상하는데도 시간이 걸리니 순간적인 장면을 찍는데는 전문가들도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데 디지털카메라는 따로 조작할 필요가 별로 없으니 순간적인 장면부터 현상에 대한 걱정 없이 찍을 수가 있어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디지털카메라도 전문가가 되려면 여러 조작을 해야 한다. 많은 시간을 들여서 사진을 찍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 필름 카메라보다는 더 빨리, 더 쉽게 찍을 수 있어 우리에게 쉬운 카메라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요즘에는 휴대전화에도 다 카메라 기능이 있어서 언제 어디서든 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 디카시는 요즘 시대에 필요한 시의 장르인지도 모르겠다.

 

굳이 전문가이지 않아도 되고 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아도 되고, 아무때나 찍을 수 있으니 자신의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 디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디카로 찍은 사진에 글을 쓰는 것, 시를 쓰는 것, 그것이 바로 디카시라고 할 수 있는데...

 

요즘 길을 가다보면 뚫어져라 휴대전화만 보고 가는 사람이 많다. 차가 신호를 받고 지나가야 하는 횡단보도에서도 휴대전화를 보느라 차가 오는지도 모르고 느릿느릿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고개도 들지 않고 오로지 휴대전화 화면만 보면서...

 

자꾸만 작은 화면 속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디카시는 휴대전화만 보는 사람들 시선을 외부로 돌릴 수가 있어서 좋다. 휴대전화 화면에서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주변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디카시가 아닐까 한다. 인상적인 장면을 찍기 위해서도 휴대전화에서 눈을 떼고 주변으로 눈을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걷다가 인상적인 장면을 만나면 사진을 찍고 그 사진에 간단한 자신의 느낌을 적어놓는 것, 그러면 디카시 완성.

 

디카시가 좀더 널리 알려지면 사람들 시선을 주변으로 돌리게 하는 긍정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사진 장면을 글로 남기기 위해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언어를 고르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가꾸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종태의 디카시를 읽으며 또 보며 많은 생각을 한다. 이 시집에는 감동을 주는 사진, 글들이 만많다. 아니 이렇게 떨어뜨려 따로따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합쳐서 '디카시'라고 해야 한다.

 

마음 속으로 훅 치고 들어오는 디카시들이 이 시집에 많은데... 가까이 두고 천천히 보면서 마음을 다독이게 된다.

 

거의 모든 국민이 한 손에 들고 있는 휴대전화, 그 휴대전화만 뚫어져라 보면서 화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시선을 주변으로 돌리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디카시' 어쩌면 휴대폰 중독을 막을 수 있는 대안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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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의 함정 - 금태섭 변호사의 딜레마에 빠진 법과 정의 이야기
금태섭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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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언젠가 누군가로부터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네 개의 보기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하는 시험을 치르면서, 교칙을 위반하는 학생을 쉽게 적발하기 위해서는 머리카락 길이를 규제해야 한다는 신문 사설을 읽으면서, "다 너희 잘 되라고 때리는 거란다"라는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느꼈던 모순에 대해서 언젠가는 납득할 만한 설명을 들었으면 했다.' (263쪽. 후기에서)

 

절대적으로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객관식, 4지선다 문제를 신봉하던 사회, 요즘은 5지선다 문제가 나오니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좀더 넓어졌다고 위안을 해야 할까? 교칙을 위반하는 학생에게 벌점을 주는 학교... 잘못을 지적하면 벌점 주세요 하면 끝나는 학교 규칙.  머리카락 길이 제한은 없어졌지만 머리카락 색깔은 여전히 규제하는 학교... "다 너희 잘 되라고 공부하라는 거야"를 강요하는 학교...

 

누가 미안하다고 말하지?  저자가 다녔던 학창시절과 지금 청소년들이 다니는 학창시절이 얼마나 다르지?  세부적인 면에서는 다를지 몰라도 큰틀은 같지 않나.

 

여전히 규제를 하고, 옳은 것은 교사나 학교에 있고, 학생들은 오로지 따르기만 해야 하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게 옳다고 확신한다.

 

교육에서 확신범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이런 확신범들이 아직도 우리나라 교육계를 장악하고 있으니 도대체 누가 미안하다고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아무도 미안해하지 않는다. 왜? 잘못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으니까.

 

이게 교육 분야에서만 그럴까? 여전히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정치 분야, 경제 분야, 예술 분야 등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상하게 확신범들만 넘치는 사회가 우리 사회 아닌가.

 

이런 것도 같고, 저런 것도 같고 하면 줏대가 없다느니 네 생각을 가져라느니 하면서 비난을 하는 사회에서, 권력을 쥔 사람들 의견을 따르면서 그것이 마치 자기 생각인 양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목소리 큰 것이 자랑인 이 사회를 다시 생각하면서 이 책을 읽었다.

 

"확신의 함정" 세상에 확실한 것이 있을까? 있겠지... 그렇지만 내 생각이, 내 주장이 확실하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가장 객관적이어야 할 과학자들도 자신의 관점에 따라서 관찰결과가 달라진다고 하는데...

 

복잡미묘한 사회 현상에 대해서 확실하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확신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다양한 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내 생각만이 옳다는 관점을 버리고 다르게 볼 수도 있겠단 생각을 지니고, 또 자신과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 말을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져야 한다. 적어도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에 대해서 한번쯤은 의심을 해봐야 한다.

 

이 책에서는 그런 다양한 사례들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런 사례들을 통해서 확신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달을 수 있다. 여기에 소설들을 소개해 주고 있다. 소설들과 법을 함께 언급하면서 읽는 사람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좋은 책은 다른 책을 읽게끔 만드는 책이라고 했는데, 이 책에서는 많은 책들이 소개되고 있어서 다른 책을 읽어 봐야겠단 생각을 하게 만든다. 다른 책을 읽게 만드는 것, 다양한 생각을 접하게 하는 것이니...

 

적어도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확신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을 하겠단 생각을 한다. 나만이 옳을 수는 없다. 내가 직접 눈으로 본 것도 확실하지 않은 때가 있는데... 그렇다면 좀더 다양한 관점에서 다른 사람들 말에도 귀를 기울이며 어떤 문제를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확신의 함정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이 많을수록 세상은 좀더 살 만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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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6 0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26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타이포 그래피' 낯선 용어다. 문자 디자인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한데, 여기에 '시'라는 말이 붙으니 더 낯설다.

 

  '타이포그래피 시'라는 말보다 '시각 시'라는 말을 쓰면 더 이해하기가 쉽단 생각을 하는데...

 

  시와 미술이 접목된 작품들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즉, 마음으로 즐기던 시를 이제는 눈과 마음으로 즐길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글꼴을 변형한다든지, 글자 배열을 다르게 한다든지 한 시들이 간혹 발표가 되기도 했지만, 시집 전체가 이를 추구하는 시집은 내가 읽은 시집에서는 이 시집이 첫번째다.

 

시의 내용을 디자인으로 표현해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조심해야 할 점은 눈이 먼저 작동을 하면 눈에 의해 마음이 가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눈으로 보고 의미를 해독하느라 감정이 움직이기보다는 이성이 작동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면 비록 눈으로 보지만 이성보다는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경우도 많은데, 아직 시에서는 그렇지 못한가 보다.

 

마음보다는 이성이 먼저 작동을 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는 '타이포그래피 시'가  필요없다는 얘긴가? 아니다. 요즘처럼 시각이 우선시 되는 시대에는 이런 시도 필요하다. 아직 친숙하지 않아 익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낯설 뿐이다.

 

조금 지나면 한글의 아름다움을 시로 표현하는 이런 '타이포그래피 시'들이 많이 나올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한다.

 

시가 무엇인가?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그 무엇이 바로 시 아닌가. 그래서 이 시집은 시의 지평을 넓혀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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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의 눈
금태섭 지음 / 궁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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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 농단에 관한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세상에 삼권분립이 민주주의 기초라더니, 삼권분립은 커녕, 약자를 보호해야 할 사법부가 정권과 결탁해서 부정한 정권을 오히려 도와주었다니...

 

(학교 교육과 사회의 괴리가 이 정도로 심하다. 그러니 학생들이 교과서에 있는 내용은 오로지 시험용이라고 생각하고 실제 생활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지)

 

많은 정황증거들이 나오고 있는데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사법부 수장 출신들... 그리고 법원에 관한 수사를 구속영장 기각이라는 법 도구를 이용해 엄정한 수사를 방해하는 법원들.

 

(꼭 법원만 그럴까? 판사뿐만이 아니라 검사들 역시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현실이다. 검사 출신 중에 지금 비리로 또 권력 유착으로 감옥에 가 있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그럼 변호사는? 에고... 참)

 

사법부가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그냥 자신들 출세를 위해서? 아니면 정권 보호를 위해서? 이러니 사법부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오죽하면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재벌들은 아무리 많은 액수를 뇌물로 줘도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었다는 이유로 집행유예를 선고받거나 무죄 선고를 받는데, 일반 힘없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엄정한 처벌을 받는 현실에서 누가 사법부를 믿겠는가?

 

대법원장이라는 사람이 - 아직 법원에서 판결은 받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 재판에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법관 한 명 한 명이 살아 있는 법원, 즉 독립적인 판결을 한다고 믿고 있었던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금태섭 - 검사 출신이자 변호사 - 이 쓴 "디케의 눈"을 읽으면서 '법'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법은 정의다. 정의의 여신 이름이 디케가 아닌가. 한 손에는 저울을,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있는. 이 디케 여신은 눈을 가리고 있다고 하는데...

 

왜 눈을 가릴까? 금태섭은 책을 시작하면서 디케 여신이 눈을 가린 이유에 대해서 고민하는 말을 한다.

 

얼핏 생각하면 간단하다. 객관적인 평가를 하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서 눈을 가렸다고 생각하면 된다. 법관은 자신의 편견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것을 원점에서 시작하기 위해 눈을 가린다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눈을 가리면 보이지 않는다. 간혹 진실은 깊게 깊게 숨어 있기도 하지만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디케 여신이 눈을 가린 이유는 무얼까? 쉽게 볼 수 있는 진실을 놓칠 수 있음에도 눈을 가린 이유는 자신에 대해서 성찰하기 위해서 아닐까.

 

외부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내부를 보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눈을 가렸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눈을 감는 순간 외부에 현혹되기보다는 내부로 침잠해 들어가 조용히 성찰할 수 있게 되는데... 내가 하는 판결이 과연 정의로운지 고민하는 모습, 그것이 바로 눈을 가린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법부는 눈을 뜨고 외부에 너무도 신경을 쓴 것은 아닌지... 눈에 보이는 진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권력을 애쓰고 찾기 위해서 눈을 부릅뜬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한다.

 

"디케의 눈"은 법에 친숙하게 다가가게 하기 위해 쓴 글이다. 과연 정의란 무엇인가? 법은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사례를 들어 이야기해주고 있다.

 

법은 정의를 실현하는 도구고, 법관은 법이라는 도구를 이용해서 사회에 정의를 실현하려는 사람이다. 그들은 자신의 관점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관점을 고집하더라도 논리적이고 타당성 있는 근거를 들어서 주장해야 한다. 그냥 권력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건 사례와 판결 사례가 나와 있는데, 우리 흥미를 끄는 사건들, 판결들도 많다. 특히 '미란다 경고'에 대해서는 이 책을 통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성폭행범인 미란다가 변호사 입회 없이 자백을 했는데, 그 자백이 증거로 채택이 되지 않은 사건.

 

그래서 다음부터는 경찰들이 반드시 피의자의 권리를 이야기해 준 다음에 수사를 진행하도록 되었다는... 비록 죄인이지만 그 죄인도 자기 권리를 지킬 필요가 있다는 수사 사례. 그래서 이제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정착된 '미란다 경고'

 

이렇게 다양한 법 적용 사례를 이야기해주고 있어서 너무도 멀고 높게만, 그래서 접근하기 힘든 법이라는 것에 대해서 친숙하게 느끼게 해주고 있다.

 

법을 아주 모르고도 잘 살 수 있는 사회라면 참 좋은 사회겠지만, 오늘날처럼 복잡한 세상에서, 또 소송만능주의로 빠져든 이 사회에서 법은 삶에 필수적인 요소다. 어렵다고 멀리하지 말고 좀 알아야 한다. 적어도 내가 어떤 권리를 지니고 있는지는 알아야 눈 뜨고 법이라는 놈에게, 아니, 법을 좀 안다는 법관련 사람들에게 당하지 않을 수 있다.

 

이 책은 법에 한발 다가서는 디딤돌 역할을 해준다고 할 수 있다. 사법 농단과 관련해 읽을 만한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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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 '오늘'이라는 꼭지에는 두 개의 글이 있다. 두 글을 읽으며 가슴이 먹먹해 진다.

 

  소위 촛불 정권이라는 이번 정권에서 도대체 무엇이 더 나아졌는지 생각해 보게 하기 때문이다.

 

  부패한 정권을 시민들의 힘으로 몰아내고, 새로운 정권을 창출해 냈는데, 그 과실을 기존 정치권이 그대로 따먹어 버린 현실.

 

  쌍용차 해고자들의 복직을 약속했음에도 여전히 복직이 되지 않은 사람이 많고, 해고자들은 여전히 죽어나가고 있는 현실에서, 이번 호에는 벌써 30번째 죽음이 이야기 되고 있다.

 

복직이 된 사람도 어렵게 살기는 마찬가지... 누구는 복직이 되고 누구는 복직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또 해고자 출신들이 일을 잘 안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죽어라 일만 해야 하는 현실. 도대체 무엇이 나아졌단 말인가.

 

잘못은 경영진들이 해놓고, 책임은 노동자들이 지는 구조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니. 촛불이 정권만 바꾼 것이 아니길 바랐는데,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쌍용차만큼이나 암담한 현실이 바로 제주 강정이다. 강정 주민들은 여전히 분열되어 있고, 이들이 받은 상처는 치유되지 않고 있다. 비록 대통령이 사과 발언 비슷하게 했다고 해도, 마음 속에 응어리진 상처들이 쉬 사라지지는 않을 터다.

 

여기에 관함식이라고 해서, 우리는 욱일승천기를 단 일본 군함들이 참석하느냐 마느냐만 문제 삼았는데, 강정 사람들은 왜 관함식을, 군함 사열식을 강정에서 하느냐고... 민관이 함께 사용하는 기지가 아니라 아예 군사기지로만 사용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관함식을 평화를 추구하는 강정에서 해야 했을까? 그것도 처음에 주민들이 반대를 했음에도, 청와대 관계자들이 계속 내려와 주민들을 설득해 처음에 주민투표로 결정했던 것을 뒤집도록 해야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엇이 나아졌는가? 여전히 시민들을 정치 주체로 여기지 않고 자신들이 결정한 것을 따르도록만 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 생각들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권이지 않나 싶다.

 

이번 호에서 문재인 정권에 경제 정책에 대해서 짚어보고 있다. 경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으니... 우리는 여전히 어려운 경제에 허덕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

 

어떤 경제 정책을 펼쳐야 하는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고민이 이번 호에 실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정치나 경제나 조금 더 나아지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아직은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하나 중요한 축인 교육에 대해서 이번 호에서는 다루고 있지 않지만 교육 분야 역시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니...

 

촛불로 정권을 바꾼 지 두 해가 되어 간다. 두 해 동안 무엇이 달라졌는지, 무엇을 전 정권과 다르게 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삶이 보이지 않겠는가. 정치권에 기대만 해서는 안 된다. 적극적으로 우리 목소리를 내야 한다. 조금이라도 삶이 좋은 쪽으로 변해가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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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3 11: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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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3 11: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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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3 13: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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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3 13: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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