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에서 만난 역사 창비청소년문고 16
김대현.신지영 지음 / 창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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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역사를 바꾼 재판들이 있다. 그 재판을 통해 구시대에서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게 되는 계기가 된 사건들이 있는데... 반대로 구시대가 너무도 강고해 새로운 시대가 재판이라는 틀을 통해 거꾸러지는 모습을 보이는 사건들도 있고.

 

유명한 재판, 중요한 재판들을 보면 역사를 알 수가 있다. 역사를 공부하는 재미도 있고. 이 책은 이러한 재판을 통하여 역사의 흐름을 짚어주고 있다.

 

중세부터 시작하는데, 중세를 발칵 뒤집어 놓는 사건, 그것은 바로 지동설이다. 한 시대를 다른 시대의 사고로 넘어가게 만드는 전환,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한다.

 

이미 다른 사고가 생겼고, 그것이 대세로 자리를 잡아가는 전환이 되는 것이다. 중세에서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지동설이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는데, 이런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화형을 당한 사람이 있다.

 

재판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여러 방법이 있는데, 중세에는 주로 거열형이나 화형이 주된 사형방법이었다니, 사형 방법 변천사도 인권의 발전과 더불어 함께 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주장이 다르다고 화형에 처하는 시대. 야만의 시대라고 해야 한다. 그것도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인간 중심이 아닌 신 중심, 그런 신에게 도전하는 인간은 용납되지 못하던 시대에 감히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사람, 조르다노 부르노. 이 사람으로부터 이 책은 시작한다. 지금은 지동설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에 지동설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이단으로 몰려 종교 재판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로 유명해진 갈릴레이도 종교 재판에서는 자기 주장을 부인하지 않았던가. 죽음에 맞서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브루노는 그래서 더 중요하다. 비록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에 가려 잊혀져 가고 있는 사람이지만 그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이렇게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넘어갈 때 권력을 쥔 자들이 나오는데 이들이 바로 절대군주다. 유럽에 나타나는 절대군주들. 이들 역시 재판을 통해 역사의 흐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신의 몰락, 그리고 절대군주의 몰락은 민권이 신장됨을 보여준다. 소수 권력자들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국민들이 중심이 되는 사회로 전환되는 것을 왕에 대한 재판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찰스1세, 루이16세, 니콜라이2세 등의 몰락은 절대왕정의 몰락을 의미하고, 주권에 대한 개념이 변해가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 사이에 여성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게 하는 재판이 하나 있다. '올랭프 드 주구'라는 여성. 프랑스 혁명 당시 여자도 남자와 같은 권리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여인. 결국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여인.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여성에게 있다면 자유 발언을 할 권리 또한 있다는 이 여성에 대한 재판은 여성의 권리가 한참을 지나야만 획득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국민국가 시대, 민족 개념이 형성되고 각 국가끼리 경쟁을 하던 시대로 접어들면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 전쟁은 내부를 단결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반대로 내부 경쟁자를 제거하는 역할도 하게 된다.

 

프랑스에서 '드레퓌스 사건'이 일어나고, 2차 대전때는 숄 남매의 저항이,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 냉전체제에서는 찰리 채플린이 탄압을 받는 그런 상황.

 

여기에 체 게바라와 아히히만 재판까지 현대사를 아우르는 재판들이 나온다. 때로는 공개 재판으로 때로는 비밀 재판으로 이루어진 이런 법정의 역사를 통해서 세계사의 흐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재판을 통해서 우리 현대사를 읽어갈 수 있지 않나? 찰리 채플린 이야기에서 극단적인 반공주의 매카시즘을 읽어낸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조봉암 재판, 통혁당 재판,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판' 등을 통해서 극단적 반공주의를 읽어낼 수가 있다.

 

여기에 '박근혜 탄핵'이라는 재판을 통해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어떻게 성숙되어 가는지를 살펴볼 수도 있으니, 법정은 단지 재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역할도 한다.

 

역사를 학자들만이 공부하는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바로 역사임을 깨닫게 해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법정에서 만난 역사], 그런 재판 기록들을 보면서 구시대에서 새로운 시대로 넘어갈 때 재판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힘과 힘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앞을 보는 능력을 키워야 함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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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리


위로 올라가기 위해

얼마나 많이 내려가야 했던가

거침없이 내뻗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뚫어야 했던가

잎과 가지, 열매를 맺기까지

한발 한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어디에도 없는 길을 찾아

힘들게 나아가는 뿌리

몸통을 중심으로

처절한 대칭을 이루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는 것을 위해

제 일을 하는 뿌리

흙을 단단히 움켜쥘수록

없던 길을 내며 갈수록

더 많은 잎,

더 많은 가지

더 많은 열매가

있음을,

땅 속에서

하늘을 꿈꾸는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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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메시 - 인간의 운명에 도전한 최초의 영웅 어린이와 고전 1
오수연 지음, 조승연 그림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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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 신화라고 한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있었던 민족들. 그들에게도 어찌 신화가 없었겠는가.

 

신화라고 하면 그리스 로마 신화를 먼저 떠올리는 것은 최근에 강자로 떠오른 유럽 민족들 때문이겠지만, 역사로 따져보면 수메르 신화가 더 오래 되었다. 그리고 많은 부분에서 비슷한 점도 있고.

 

'길가메시'는 반인반신인 존재다. 반인반신이기 때문에 죽을 운명에 처해 있는 존재. 그러나 보통 인간에 비해 엄청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 그에게는 두려움이 없다. 그는 불멸의 이름을 남기고 싶어한다.

 

무엇하나 그에 대적할 상대가 없었으나 엔키두라는 호적수가 나타난다. 둘은 대결을 벌이지만 곧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엔키두와 함께 인간이 가 본적이 없은 곳까지 가서 삼나무 지기인 요정-거의 신적인 존재-을 물리치고 나무를 인간의 것으로 만든다.

 

그런 행위 때문에 그는 엔키두를 잃게 된다. 신들의 분노를 사서 둘 중 하나를 죽음에 이르게 하기로 했는데, 엔키두가 선택된 것이다.

 

친구 엔키두의 죽음을 보면서 길가메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빠진다. 죽음에서 벗어나고자 여행을 떠난다. 불사의 존재가 되고 싶어한다. 엔키두의 죽음 이전에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신적인 존재와 대결을 해 이름을 남기면 된다고, 이름으로 불멸의 존재가 되면 그뿐이라고 여기고 지냈다.

 

그러나 죽음을 목격한 이후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떨게 된다. 이름이 아닌 자신 몸이 죽지 않는 존재가 되길 간절이 원한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고 인간이지만 죽지 않는 존재가 되는 '우트나피슈팀'을 만나게 된다.

 

죽지 않는 인간, 그에 대한 이야기에서 대홍수 이야기가 나오고, 신들의 분노 얘기가 나온다.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와 비슷한 이야기, 또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대홍수 이야기와 비슷하다.

 

우트나피슈팀을 만나지만 불사의 존재가 되지는 못한다. 다만 젊어지는 풀을 얻게 되지만 그것도 아차 하는 순간 뱀에게 빼앗기고 만다.

 

인간이다. 길가메시는. 비록 신의 피가 섞였다고 해도 그는 인간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것을 깨닫게 되는 길가메시. 죽음 앞에 선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죽음에 도달하기 전에 최선을 다해서 삶을 살아야 함을 길가메시는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살다 죽어간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끊임없이 신에게 도전하지만 결국 죽음은 이기지 못하는, 어쩌면 유한하기 때문에 삶을 더욱 값지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신화이지 않을까 싶다.

 

엔키두를 등장시킨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만약 엔키두가 없었다면 길가메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평생을 살다 죽었을 것이다. 두려움이 없는 삶. 그것보다는 두려움을 이겨내며 사는 삶이 더 의미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신화라는 생각이 든다.

 

두려움을 이겨내며 사는 삶, 그것은 운명을 그냥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운명을 내것으로 만드는 적극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런 삶을 길가메시 신화가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어린이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번안되었다고 보면 된다. 이 책을 통해 길가메시에 대해서 알고 좀더 자세히, 깊게 읽고 싶은 사람은 다른 번역의 책을 찾아 읽으면 된다. 이 책은 수메르 신화에 접근하는 징검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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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살의 용기 - 클로뎃 콜빈, 정의 없는 세상에 맞서다 생각하는 돌 1
필립 후즈 지음, 김민석 옮김, 엄기호 해제 / 돌베개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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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파크스'만 알고 있었다. 로자 파크스와 마르틴 루터 킹 목사. 이들이 버스에서 백인과 흑인의 좌석이 구분되어 있고, 심지어 백인이 타면 흑인이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법을 폐기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만 알고 있었다.

 

큰일(?)이 터지기 전에 작은일(?)들이 여러 번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로자 파크스의 거부가 어느 날 갑자기 터져 나온 일이 아니라는 사실. 킹 목사가 버스 보이콧 운동을 하는 것이 즉흥적으로 떠오른 저항 운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로자 파크스 이전에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로자 파크스에 이르러 흑백차별을 거부하는 운동으로 발전하게 될 수 있었다는 것.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된 사실이다.

 

흑인 소녀, 클로뎃 콜빈. 학교에 다니면서 흑백차별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이 미국 헌법에도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소녀. 어른들이 집에서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직접 행동으로 나서지 않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던 소녀.

 

어느 날,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라는 백인 운전사의 명령(?)을 거부하고 경찰에게 끌려간 소녀. 소년원이 아닌 성인 감옥으로 끌려가고, 끌려가는 도중에 수갑까지 채워진 소녀.

 

이 소녀에게 주어진 죄명에 굴복하지 않고 싸워나가는 소녀. 그러나 당시 판사는 - 당연히 판사는 백인이다 - 소녀가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것은 헌법에 견주어 불법이 아니라고 판결을 하지만 끌려가면서 경찰에게 상해를 입혔다고, 폭행죄로 유죄를 선고한다.

 

유죄. 고등학교 3학년인 학생에게 죄인 낙인을 찍어버리는 백인 판사. 여기에 흑인 어른들 역시 이 사건을 공론화 해서 흑백차별 운동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아직 어린아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기 힘든 클로뎃이라는 생각으로 어른들 역시 소극적이다. 다만, 이 일로 클로뎃은 로자 파크스를 만나 함께 일을 하기도 한다.

 

로자 파크스가 어느 날 갑자기 자리 양보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그녀는 흑인 인권, 흑인 권리를 위해 일을 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클로뎃은 처음에 영웅에서 점차 문제아로 낙인찍히게 된다. 머리를 백인처럼 펴지 않고 다닌다든지, 또 실수로 임신을 하게 되니, 이런 개인적인 행동으로 클로뎃은 흑인 민권 운동에서 멀어지게 된다.

 

뜻하지 않은 임신과 출산, 학교에서 제적... 버스에서 자리 양보를 하지 않은 행동으로 인해 클로뎃의 인생은 엄청난 시련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클로뎃.

 

버스 좌석 구분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소송을 할 때 클로뎃은 소송인 중 한명으로 그 재판에 참여하게 된다. 목숨을 걸고 참여하는 재판. 미국 백인우월주의자들, 일명 KKK단들은 폭력으로 흑인들을 위협하니 말이다.

 

이 재판에서 흑인들은 역사적인 승리를 하게 된다. 차별이 심했던 남부 앨라바마 주에서도 드디어 흑백 차별이 법적으로 잘못되었음을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지만, 클로뎃은 곧 잊혀지고 많다. 사생활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때나 지금이나 청소년들이 한 실수를 받아들이는 어른 사회는 드무니, 클로뎃 역시 이제는 생계를 걱정해야 할 때가 된 것.

 

여러 일을 겪으며 잊혀져 가던 클로뎃을 한 기자가 찾아낸다. 그리고 한 작가에 의해 클로뎃은 우리에게 다가오게 된다.

 

로자 파크스가 한 일이 클로뎃을 부각시킴으로써 낮아지지는 않는다. 로자 파크스는 사회에 충분히 파급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하지만 클로뎃이 한 일이 묻혀서는 안 된다. 클로뎃이 한 행동은 다음 사람으로 하여금 이런 거부를 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어떤 일에서 특정한 사람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 그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음을 생각하게 한다.

 

특히 사회 변화를 이끌어내는 시발점은 어른들에게서가 아니라 청소년들에게 있었음을, 우리나라 4.19도 역시 고등학생들의 시위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이런 청소년들, 사회 문제에 무지한 것이 아니라 이들도 어른들 만큼 어쩌면 어른들보다 더 민감하게 사회 문제를 느끼고 생각하고 있음을, 이 책 클로뎃 콜빈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이것이 클로뎃 콜빈을 기억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청소년들을 어리다고 또 그들의 행동을 어른의 잣대로만 바라보면 안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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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카시'라고 한단다. '사진시'라고 해도 될텐데, 굳이 '디카'란 말을 쓴 이유를 생각해 본다.

 

  사진이라고 하면 예전에 쓰던 필름 카메라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와 대비되게 디카라는 말을 썼나 싶다.

 

  보통 필름 카메라는 사진을 찍는데 시간도 많이 들고, 또 현상하는데도 시간이 걸리니 순간적인 장면을 찍는데는 전문가들도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데 디지털카메라는 따로 조작할 필요가 별로 없으니 순간적인 장면부터 현상에 대한 걱정 없이 찍을 수가 있어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디지털카메라도 전문가가 되려면 여러 조작을 해야 한다. 많은 시간을 들여서 사진을 찍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 필름 카메라보다는 더 빨리, 더 쉽게 찍을 수 있어 우리에게 쉬운 카메라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요즘에는 휴대전화에도 다 카메라 기능이 있어서 언제 어디서든 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 디카시는 요즘 시대에 필요한 시의 장르인지도 모르겠다.

 

굳이 전문가이지 않아도 되고 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아도 되고, 아무때나 찍을 수 있으니 자신의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 디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디카로 찍은 사진에 글을 쓰는 것, 시를 쓰는 것, 그것이 바로 디카시라고 할 수 있는데...

 

요즘 길을 가다보면 뚫어져라 휴대전화만 보고 가는 사람이 많다. 차가 신호를 받고 지나가야 하는 횡단보도에서도 휴대전화를 보느라 차가 오는지도 모르고 느릿느릿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고개도 들지 않고 오로지 휴대전화 화면만 보면서...

 

자꾸만 작은 화면 속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디카시는 휴대전화만 보는 사람들 시선을 외부로 돌릴 수가 있어서 좋다. 휴대전화 화면에서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주변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디카시가 아닐까 한다. 인상적인 장면을 찍기 위해서도 휴대전화에서 눈을 떼고 주변으로 눈을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걷다가 인상적인 장면을 만나면 사진을 찍고 그 사진에 간단한 자신의 느낌을 적어놓는 것, 그러면 디카시 완성.

 

디카시가 좀더 널리 알려지면 사람들 시선을 주변으로 돌리게 하는 긍정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사진 장면을 글로 남기기 위해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언어를 고르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가꾸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종태의 디카시를 읽으며 또 보며 많은 생각을 한다. 이 시집에는 감동을 주는 사진, 글들이 만많다. 아니 이렇게 떨어뜨려 따로따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합쳐서 '디카시'라고 해야 한다.

 

마음 속으로 훅 치고 들어오는 디카시들이 이 시집에 많은데... 가까이 두고 천천히 보면서 마음을 다독이게 된다.

 

거의 모든 국민이 한 손에 들고 있는 휴대전화, 그 휴대전화만 뚫어져라 보면서 화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시선을 주변으로 돌리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디카시' 어쩌면 휴대폰 중독을 막을 수 있는 대안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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