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나무들이 옷을 갈아입는, 아니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던지는, 자기를 감싸고 있던 것들을 하나하나 내려놓는 그런 계절이다.

 

  내려놓지 않으면 다시 차릴 수가 없다. 자연은 그 점을 계절을 통해서 보여준다. 우리가 보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은 늘 보여주려 한다.

 

  햇빛에 비치는 잎들의 화려한 색깔들... 단풍이다. 세상이 흑백에서 칼라로 변해간다. 총천연색 칼라. 자연 색들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역시 가을이다. 아름다운 가을.

 

  내 삶을 짓누르는 무게들을 조금은 내려놓고 싶어진다. 무엇인가 나도 버리고 버리고 나를 가볍게 하고 싶다.

 

열매를 맺어 다음을 기약하고, 다가올 겨울을 대비하여 자신을 최대한 가볍게 하는 나무들을 보며 너무도 무겁게 살았구나, 너무도 많은 것을 지니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나무들은 화려한 색깔을 자랑하고, 열매들은 익고 익어 이제는 떨어져 가는 때에 세상이 환하지만은 않다.

 

부옇다. 바깥을 보면 부연 안개같은 것이 깔려 있다. 눈으로 멀리 보려 해도 보이지 않는다. 흐릿한 세상. 청명이라는 말이 사라져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세먼지라고 한다. 미세먼지 나쁨이 시도때도 없다. 이제는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그냥 우리 일상이 되고 있단 생각이 든다.

 

미세먼지... 환경오염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현상인데, 이 미세먼지로 인해 고통을 받으면서도 생활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마스크만 쓰고 다니면, 외출만 자제하면 다 되는 줄 안다. 아니, 중국에만 책임을 전가하려 한다.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양, 말하고 행동한다.

 

그게 아닌데... 미세먼지.. 그건 우리 삶이 초래한 결과다. 우리가 계속 이렇게 살아간다면 미세먼지 나쁨이 며칠이 아니라 매일이 될 것이다.

 

미세먼지를 안 보게 되는 날, 안 마시게 되는 날을 손꼽게 될 것이다. 환경오염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고.. 수많은 질병들이 왜 발생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벌써 미세먼지가 모이고 모여 우리 시야를 흐리게 하고 있으니, 이건 경고다. 조심하라는. 행동을 바꾸라는.

 

이 경고를 녹색평론이 20년 넘게 해왔다. 그런데 경고만 듣고 그냥 지나친다. 아직도 먼 미래라고 생각한다. 미세먼지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이번 호에서는 기후변화를 다루고 있다. 미세먼지 역시 기후변화와 관련이 있겠지만, 미세먼지가 개개인의 몸에 영향을 미친다면 기후변화, 특히 온난화로 인한 북극 빙하가 사라지는 일은 인류 전체에게 재앙이 될 것이다.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 자체의 생태계가 급격하게 바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냥 아주 먼 미래의 일인 양 치부한다. 당장 눈 앞에 닥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 잃고 외양간 고칠 수가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기후변화로 인해서는 고칠 외양간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 집도 없어질 수 있다. 우리 삶 자체가 송두리째 파괴될 것이다.

 

정말 심각한 일인데... 그 점에 대해서 다루지 않는다. 언론, 지식인들 침묵하고 있다. 이 침묵으로 인해 우리 삶이 꺼져들어갈 수도 있는데...

 

녹색평론이 목청을 높여 소리치고 있는데, 이 소리가 사람들 마음에까지 잘 가 닿지 않나 보다. 아직도 우리는 생활방식을 바꾸려 하지 않으니 말이다.

 

이번 호에서는 다양한 주제의 글이 실렸다. 천천히 읽으며 생각할 것이 많은 그런 글들이. 무엇보다도 다시 기후변화에 대해서 주목한 글이 새롭다. 기후변화는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안이라는 것.

 

미세먼지를 보며 기후변화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이제 우리 삶을 위협하는 요소가 코 앞에까지 와 있다. 대비해야 한다.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 문화 산책 - 단어 따라 어원 따라
이재명.정문훈 지음 / 미래의창 / 2016년 3월
평점 :
품절


세계 각국의 문화를 알면 낭패를 겪는 일이 줄어든다. 가령 이 책에 나오는 여행이라는 말(tour)이 탑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면, la Tour Eiffel이라는 말이 에펠탑 여행이 아니라, 에펠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연히 이 말을 보고 '에펠탑 투어 프로그램 제공 장소로 알고 그 앞에서 오랫동안 줄서 기다리는 관광객도 종종 볼 수 있다'(154쪽)고 하는 쪽에 속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렇듯 언어를 알면 그 나라 문화를 더 잘 알 수 있다. 덕분에 실수도 줄일 수 있고.

 

이 책을 읽으며 기억하게 된 한 가지 사실은 브라질에 있는 도시 '리우데자네이루'의 뜻이다. 아무 생각없이 그냥 어떻게 끊어 읽을까만 고민했는데, 이곳에 도착한 사람들이 바다를 강으로 잘못 알고 1월의 강이라는 뜻으로 붙였다고 한다.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는 포르투칼 탐험가들에 의해 1502년 1월 1일 발견되었다. 그들이 이 땅을 밟았을 때 리우데자네이루 앞에 있는 구아나바라(Guanabara) 해안을 강으로 착각하여 '1월의 강'으로 불렀는데 이 이름이 도시의 공식 명칭으로 자리 잡았다.' (54쪽)

 

이런 사실 말고도 프랑스를 상징하는 동물이 수탉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그밖에 언어에 실려 있는 각 나라의 문화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각 장들이 모두 흥미를 유발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단지 흥미만이 아니라 지식을 채워넣는데도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요즘 말로 하면 그야말로 '알쓸신잡'이다. 다만 '쓸'자를 '쓸데없는'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쓸 수 있는'으로 사용하는 것이 좋은 책이다.

 

어원이 나와 있어서 왜 그 말이 이런 뜻을 지니게 되었는지 알 수 있게 되고, 또 그 나라를 대표하는 음식이나 문화에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도 알 수 있게 된다. 특히 이 책에는 영어뿐만 아니라 스페인어와 프랑스어도 많이 나와 있어서 다양한 언어들에 대해서 알 수 있게 된다.

 

언어에 대해서 지식을 확장해 가는 것은 세계에 대한 지식을 넓혀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으면 앉아서 세계 문화를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이렇게 책 속에는 없는 것이 없다.

 

하나의 언어로 여러 문화를 알아가는 것. 이것이 이 책이 의도한 바이기도 할 것이다. 터키에 갔을 때 행운을 상징하는, 불운을 막아내는 상징으로 신발 모양의 기념품들이 있었는데, 신발은 이런 역할을 하는 하기도 하지만 중남미를 여행하다 보면 신발이 전깃줄에 걸려 있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고 한다.

 

이 신발을 자파토(zapato)라도 하는데, 대부분 이 마을에 마약 중개상이 있다는 표시(259쪽)란다. 이렇게 같은 물질이라도 때와 장소에 따라 전혀 상반된 의미를 전해주기도 한다. 그러니 다른 언어를 공부하는 것, 또 다른 문화를 공부하는 것은 우리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는 계기가 된다.

 

이제는 세계화 시대다.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가기엔 너무나 힘든 시대다. 그렇다고 모든 외국어를 다 섭렵할 수는 없다. 이때 이런 책을 읽고 간단한 어원을 통해, 낱말을 통해 그 나라 문화를 습득하는 것이다.

 

이렇게 알아간 지식들이 조금씩 조금씩 쌓이다 보면 엉뚱한 실수를 하지는 않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재미도 있지만 여러 유용한 지식을 전달해 주어, 외국 여행을 자주 하는 사람에게도 매우 유용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DMZ(demilitarized zone). 영어로 말하면 그것도 약자로 쓰면 잘 이해하기 힘든 말이다. 우리말로 쉽게 이야기하면 비무장지대라고 하면 될 것을...

 

  시인들이 이곳에 대한 시를 쓰면서도 제목을 영어로 붙인 이유는, 여전히 우리가 휴전 중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공동경비구역에서도 유엔이 관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

 

  그럼에도 이곳은 이제 평화의 구역이 되어가고 있다. 판문점에 있는 공동경비구역에서 총기 없이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기로 했고, 남북 간에도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곳에서 상대를 겨누던 포대를 닫기로 하고, 그것을 실행하고 있으니...

 

또한 올해 남북 정상들이 벌써 한 해에 세 번을 만났고, 서서히 군사적 긴장이 평화로 나아가고 있으니, 시인들이 4년 전에 썼던(시집을 읽다보면 2014년에 썼다는 표시가 가끔 나온다. 출판은 2015년에 되었지만, 시인들은 아마도 이 기획을 2014년에 했을 것이다) 이 시들이 이제는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오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한 소재를 가지고 이렇게 다양한 관점을 지닐 수 있고, 이렇게 다양한 표현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이 시집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이선관 시인은 '만일 통일이 왔으면 이렇게 왔으면 좋겠다'는 시에서 부부가 한 이불을 덮는 것처럼 통일이 왔으면 좋겠다고 했고, 김남주 시인은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절규했으며, 신동엽 시인은 '봄은'이란 시에서 통일은 외부에서 오지 않고 바로 우리들 자신에게서 온다고 했으니... 또 '껍데기는 가라'는 시에서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고 했으니... 이제 그런 쇠붙이들이 가고, 우리들에게는 평화가 와야 하지 않겠는가.

 

바로 그 지점에 우리가 서 있지 않은가.

 

이 시집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시인들이 말하는 비무장지대가 이제는 특정한 곳이 아니라, 155마일로 대변되는 곳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 아니 세계 전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앞에 언급한 시인들과 비슷하게 이 시집에서도 통일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너무 앞뒤 다 재지 말고 이렇게 하자고 한다. 그래, 통일은 이랬으면 좋겠다. 이런 믜미를 담은 두 시를 소개한다.

 

비무장지대에서 - 통일을 생각하다가

                                      - 김진성

 

남북의 사람들아!

남북의 사람들아!

 

사랑에 눈멀어

집나온 연인들처럼

 

다 버리고 오직

둘이 뜨거운 하나가 되기만을 원하는

이기적인 연인들처럼

 

그렇게 막무가내라도

서로 덥석 손잡는다면

통일인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

 

아무리 아무리 생각해도

통일을 이룰 무슨

뾰족한 수가 없기에…….

 

한국시인협회 엮음, DMZ 시인들의 메시지, 문학세계사.2015년. 102쪽.

 

 

 

비무장지대의 꿈

                              - 허홍구

 

보라! 여기 비무장지대

사람의 발길 끊기고 잡초가 무성한 땅

여기 사슴 행복하게 뛰논다.

 

총을 놓아라, 맘이 편안하다.

무기를 버려라, 전쟁의 공포가 없어진다.

적대감을 버려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 함께 어우러져

춤추고 노래하는 꿈을 꾸자

 

한국시인협회 엮음, DMZ 시인들의 메시지, 문학세계사.2015년. 30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끝과 시작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대산세계문학총서 62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른 책을 읽다가 쉼보르스카가 쓴 한 구절에 마음이 꽂혔다. 이렇게 한 구절에 마음을 빼앗기기는 오랜만.

 

그 구절이 내 마음을 쉼보르스카 시집을 찾아 읽게 만들었는데,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 "끝과 시작"은 쉼보르스카 시선집이다. 12권의 시집에서 고른 시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읽다가 내 마음을 끈 시구를 발견했다.

 

'박물관'이라는 시에 있는 구절이다. '왕관이 머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어요.'란 구절... 이 구절 다음에 '손은 장갑에게 굴복하고 말았어요. / 오른쪽 구두는 발과 싸워 승리했어요.'(70-71쪽)라는 구절이 따른다.

 

유한한 인간 생명. 인간이 지니고 있던 물건이 인간보다 더 오래 남아 인간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 것. 어쩌면 우리는 유한한 생명이기에 무한을 추구하는지도 모른다. 자기가 지니고 있던 것 중에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하는 것.

 

물질로 남길 수 없다면, 물질로 남기고 싶지 않다면 사람들은 이름이라도, 아니다, 이름을 남기고 싶어한다. 불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일. 그렇게 살아가도록 노력하는 일. 그래서 우리는 이름을 박물관에 남기게 된다. 인간 삶이라는 박물관에.

 

이렇게 반가운 구절도 만나고, 시대순으로 엮인 이 선집을 읽어가면서 많은 생각을 하기도 한다. 유럽 역사와 폴란드 문화와 성경에 있는 내용 등등. 참으로 방대한 내용을 시에서 다루고 있다는 것.

 

이 시선집에 실린 대부분의 시들이 사람들과 제대로 대화하고 싶은 시인의 마음을 시로 나타내지 않았나 싶은데...'단어를 찾아서'라는 시에서는 '적절한 단어를 찾아 헤맨다. / 그러나 찾을 수가 없다. /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15쪽)고 절규하고, '뜻밖의 만남'이라는 시에서는 '우리 인간들은 / 대화하는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84쪽)고 호소하기도 한다.

 

제대로 대화하지 못하는 인간들, 그들은 결국 가식적인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데, '미소'라는 시에서 '세상은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것에 / 더 많은 희망을 품고 있다. /거물급 정치가들은 늘 우아하게 미소 짓고 있어야만 한다. /.. ./ 일상적인 슬픔을 얼굴에 맘 놓고 드러낼 수 있을 만큼 / 이 시대가 편안하고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235-236쪽)라고 말하고 있다.

 

겉으로만 보이는 시대, 속을 드러낼 수 없는 시대. 너무나 많은 가식들과 위선들이 판치는 시대. 이런 시대를 끝내야 한다. 이런 시대가 계속되면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0세기를 전쟁의 세기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인류를 파멸 직전까지 몰아간 전쟁이 20세기에 일어나지 않았던가.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이 제대로 대화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고 겉모습만을 보이는 그런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쟁. 이런 모습의 결정판이다. 그러나 전쟁도 끝이 있다. 끝이 있으면 시작도 있다. 이 시선집 제목이 [끝과 시작]이다. 이렇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 어떻게? 끝을 보게 한 사람들이 비켜주면서 새로운 세대가 시작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하는 것.

 

'끝과 시작'이라는 시는 전쟁을 겪은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여전히 끝을 보지 못했다고, 끝까지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계속 존재한다면 새로운 시작이 얼마나 힘들어지는지... 시작을 위해, 몇몇은 끝에서 머무르지 말고 다시 시작해야 함을, 그리고 자리를 비켜줘야 함을 이 시는 말해주고 있다.

 

꼰대가 되지 않는 길... 바로 이 시에 나와 있다. 너무도 마음에 와 닿은 시다.

 

끝과 시작

 

모든 전쟁이 끝날 때마다 / 누군가는 청소를 해야만 하리. / 그럭저럭 정돈된 꼴을 갖추려면 / 뭐든 저절로 되는 법은 없으니.

 

시체로 가득 찬 수레가 / 지나갈 수 있도록 / 누군가는 길가의 잔해들을 / 한옆으로 밀어내야 하리.

 

누군가는 허우적대며 걸어가야 하리. / 소파의 스프링과 / 깨진 유리 조각, / 피 묻은 넝마 조각이 가득한 / 진흙과 잿더미를 헤치고.

 

누군가는 벽을 지탱할 / 대들보를 운반하고, / 창에 유리를 끼우고, / 경첩에 문을 달아야 하리.

 

사진에 근사하게 나오려면 / 많은 세월이 요구되는 법. / 모든 카메라는 이미 / 또 다른 전쟁터로 떠나버렸건만.

 

다리도 다시 놓고, / 역도 새로 지어야 하리. / 비록 닳아서 누더기가 될지언정 / 소매를 걷어붙이고.

 

빗자를 손에 든 누군가가 / 과거를 회상하면, / 가만히 듣고 있던 다른 누군가가 / 운 좋게도 멀쩡히 살아남은 머리를 / 열심히 끄덕인다. / 어느 틈에 주변에는 / 그 얘기를 지루히 여길 이들이 / 하나둘씩 몰려들기 시작하고.

 

아직도 누군가는 / 가시덤불 아래를 파헤쳐서 / 해묵어 녹슨 논쟁거리를 끄집어내서는 / 쓰레기 더미로 가져간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 이제 서서히 이 자리를 양보해야만 하리. / 아주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 그보다 더 알지 못하는, / 결국엔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

 

원인과 결과가 고루 덮인 / 이 풀밭 위에서 / 누군가는 자리 깔고 벌렁 드러누워 / 이삭을 입에 문 채 / 물끄러미 구름을 바라보아야만 하리.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끝과 시작, 문학과지성사. 2007년. 325-327쪽

 

이렇게 쉼보르스카 시를 읽으며 우리 현실을 끊임없이 소환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 현실에서 무엇을 해야할지, 시인들이 무엇을 노래해야 할지, 또 기성세대들은 어떻게 해야할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제 우리도 전쟁의 끝을 볼 때가 되지 않았다. 끝에 다다렀으므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자꾸 '녹슨 논쟁거리를 끄집어내서는/쓰레기 더미로' 가져가게 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그 쓰레기 더미마저 치워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 '이삭을 입에 문 채 / 물끄러미 구름을 바라보'게 해야 하는 때, 우리가 '청소하고 잔해를 치우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읽기 시작하면서 시집에서 손을 떼기 힘들었다. 그만큼 많은 시들이 마음 속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번역의 힘인지.. 폴란드어를 알 수 없는 내게는 그래도 한글로 된 이 시선집을 읽으며 마음으로 느끼는 시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더 좋았다고나 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암울했던 시대 도서관에 틀어박혀 연구를 했단다. 카프가 무엇인지, 사실 카프에 대해서 연구가 금기시되던 시대, 그는 '한국문예비평사'를 통해 카프 문학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줬다.

 

단지 카프뿐이겠는가. '이상연구'는 또 어떤가. 이상에 관해서 그가 쓴 책도 많고, '이광수와 그의 시대'라는 책도 꽤나 알려져 있다.

 

여기에 먼저 작고한 김현과 함께 쓴 '한국문학사'에서는 우리나라 근대를 조선 후기로 올려잡기도 했으니...

 

최근에 들어서 표절 논란으로 새로운 세대 학자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가 이룬 문학적 성과는 부정할 수 없다.

 

김윤식이라는 이름은 무엇보다 엄청나게 많이 읽고 많이 쓴 학자로, 비평가로 기억될 것이다.


16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임화연구
김윤식 지음 / 문학사상사 / 1989년 12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18년 11월 01일에 저장
품절
한국 현대 현실주의 소설 연구
김윤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0년 12월
9,000원 → 8,100원(10%할인) / 마일리지 450원(5% 적립)
2018년 11월 01일에 저장
품절
한.일 근대문학의 관련양상 신론
김윤식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1년 7월
14,000원 → 14,000원(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2018년 11월 01일에 저장
절판
한국 근대문학 사상 연구 1- 도남과 최재서
김윤식 지음 / 일지사 / 1984년 9월
15,000원 → 15,000원(0%할인) / 마일리지 450원(3% 적립)
2018년 11월 01일에 저장
품절


16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