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더듬이 선생님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이수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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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거짓말을 하는 건 그 학생이 외톨이가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아이는 자신이 외톨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말은 나쁜 게 아니라 쓸쓸한 겁니다." (340쪽)

 

이건 충격이다. 거짓말이 나쁜 게 아니라 쓸쓸한 거라는 말. 거짓말을 하는 아이, 외톨이가 되지 않기 위해 그런 말을 한다는 것. 그렇다. 그 아이의 외로움을 알고 받아들여주는 교사, 그래서 교사는 속는 것이 아니라 속아주는 것이라는 무라우치 선생의 말. 이 땅의 교사들이 명심해야 할 말이다.

 

"교사는 언제든,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학생이든 그 아이를 외톨이로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342쪽)

 

이런 교사, 정말 만난다면, 그 상황이 좋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행복일 것이다.

 

"외톨이가 둘 있으면 그건 이미 외톨이가 아니라고,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한단다. 선생님은 외톨이 아이들 곁에 있는, 또 한 사람의 외톨이가 되고 싶어. 그래서 나는 선생을 하는 거야." (51쪽)

 

짠하다. 외톨이 곁에 있는 외톨이 선생. 그러면 외톨이는 없는 거라는 선생. 학교라는 공간에 얼마나 많은 외톨이들이 있는가. 한 학교에 꼭 그런 외톨이들이 있다.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그래서 더 외로운 외톨이. 외톨이임에도 외톨이로 지낼 수밖에 없는 외톨이.

 

당연하고 평범한 학교에서 당연하지 않고 평범하지 않은 학생이 외톨이가 된다. 이런 외톨이 곁에 있어주려고 선생을 한다는 무라우치 선생.

 

말을 더듬는 선생이다. 그것도 국어 선생이다. 치명적인 약점이다. 국어 선생이 말을 더듬다니. 그렇다면 무라우치 선생은 외톨이다.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는 정규직 교사도 아니다. 시간제 교사다. 일명 비상근강사. 우리말로 하면 기간제 교사다. 그런 그가 말을 더듬는 데도 교사를 한다. 중요한 것은 말을 더듬는 사실이 아니라, 어떻게 진실을 이야기하느냐다.

 

그는 중요한 것만 말한다고 한다. 자신은 중요한 것을 말하고, 곁에 있어주려고 교사를 한다고. 이런 사람을 교사라고 부르면 안 된다. 선생이라고 해야 한다. 앞서서 난 사람. 자신이 깨우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려는 사람.

 

그에게는 말더듬다는 사실이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장점이 된다. 그는 외톨이기 때문이다. 외톨이기 때문에 또다른 외톨이 곁에 있어줄 수 있다. 곁에 있어주는 일, 무슨 말이 필요하랴. 그냥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위안이 되는데...

 

꼭 해결할 필요는 없다. 소설에서도 해결을 하지 않는다. 그냥 진심만 전하고 있는 것이다. 진심이 통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생이 해야 할 역할이다.

 

지식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 곁에 있어주는 것, 무엇이 진짜 중요한지 알게 해주는 것. 읽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진다. 짠해지기도 한다.

 

마지막 소설을 읽으며 마음에 무언가가 꽉 들어찬 느낌을 받는다. 이런 선생을 만났다는 것, 그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너무도 좋지 않은 상황이겠지만,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마음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니, 행복한 일이다.

 

꼭 학생들만이 읽을 필요는 없다. 이 소설은 어른이 읽어도 짠해지는 소설이다. 외톨이가 어찌 학교에만 있겠는가? 학교 밖에도 외톨이는 많다. 이런 외톨이들 곁에 또 하나의 외톨이로 곁에 있어줄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세상에서 외톨이로 남겨지지 않을 것이다.

 

소설을 읽으며 그렇다. 중요한 것은 말로 전해지지 않는다. 마음으로 전해진다. 진심으로 통한다. 그리고 그렇게 중요한 것은 말없이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것이 된다.

 

학생들에게도, 어른들에게도,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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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스쿨 악플 사건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4
도리 힐레스타드 버틀러 지음, 이도영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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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플'이라는 말과 '악플러'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어떤 글에 상대를 비방하는 댓글을 악플이라고 했다. 악플을 다는 사람들을 악플러라고 했고.  이 악플로 마음 고생한 사람들뿐이 아니라 목숨을 끊은 사람도 많았다. 그래서 악플에 대항하는 운동인 '선플'운동도 벌이고 했었는데...

 

인터넷,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다. 자신의 존재를 굳이 알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자유롭게 자기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다. 사람들 사이에 소통의 폭을 넓혀줄 매체로 인터넷을 이야기한 이유다.

 

하지만 모든 발명품은 사람들 뜻대로만 사용되지 않는다. 핵폭탄을 전쟁을 끝내기 위한 평화를 위한 수단으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어디 그런가? 오히려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 너무도 공포스러운 무기가 되지 않았던가.

 

해충으로부터 우리를 구제해 주어 먹을거리 걱정 없게 해주었다는 농약은 어떤가. 생태계를 파괴해 해충뿐만 아니라 우리 인류에게도 재앙이 되고 있지 않은가. 특히 암을 유발하거나 온갖 질병을 일으키고 있으니...

 

여기에 유전자조작식물들은 어떤가? 우리들 먹을거리 걱정을 해소해 주기는커녕 다국적기업만 살찌우고, 우리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게 만들었지 않은가. 기술발전이 인류를 꼭 좋은 방향으로만 이끌어가는 것이 아님을 많은 사례들이 보여주고 있는데.

 

인터넷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기도 하다. 소통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는 인터넷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무기로 바뀌기도 하는 세상이니.

 

온갖 정보들이 날아다니는 인터넷에서 자칫 잘못하면 애매한 사람이 고통받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잘못이 없더라도 그 사람을 바보 만드는데 인터넷만한 매체도 없다. 순식간에 퍼지고 사실 여부를 판단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트루먼 스쿨 악플 사건'

 

좋은 의도로 인터넷에 홈페이지를 만들고 학생들에게 자유롭게 의견을 이야기하라고 했다. 그러나 시작이 잘못되었다. 자, 학생들을 어떻게 이 사이트에 들어오게 하지?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학생들이 방문하지 않으면 학생들을 위한 사이트는 의미가 없어진다. 그렇다고 학생들은 이런 사이트에 별로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으면 또다시 사이트는 의미가 없어진다. 좋은 의도로 만들었지만, 학생들 방문이 신통치 않을 때, 이 때 할 수 있는 일이 학생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내용을 싣는 것이다.

 

최악의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투표를 하게 한다. 조금 흥미가 생긴다.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 간 사이가 좋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좋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게다가 교사-학생 간에는 갈등이 일어날 소지가 많고 또 어느 정도 인기투표 역할도 하기 때문에 학생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가 있다.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좋은 선생님이 아니라, 나쁜 선생님을 투표하게 했다. 첫 시작을 그렇게 하면 남을 트집잡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된다.

 

곧 '릴리'라는 여학생을 공격하는 글이 올라온다. 한 사람에 대한 공격이다. 판단을 어떻게 해야 할까? 표현의 자유를 무한히 허용해야 할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글을 삭제해야 할까? 그것이 검열일까?

 

이런 갈림길에 선 사이트 운영자들.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기로 한다. 표현의 자유, 이것이 곧장 '혐오 표현의 자유'로 넘어가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오죽하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이 불구경과 남 싸움 구경이라고 하겠는가. 그만큼 남을 비방하는 글은 쉽게 퍼진다.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하는데.

 

혐오 표현까지도 표현의 자유라고 허용해야 할까? 많은 사람들은 아니라고 한다. 아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표현의 자유는 상대에게 악의를 지니고 또는 악의를 지니지 않더라도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표현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그것은 범죄다. 분명 혐오 표현은 범죄다. 이런 인식을 하면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 더 생각하게 된다.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 혐오 표현... 그것이 자신이 당한 일에 대한 복수라고 해도 정당할 수는 없다. 그것도 과거에 살이 쪘다는 이유와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비방을 하니, 이는 더 용납될 수 없는 행위다.

 

이를 운영자들이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내버려둔 것도 문제다. 이런 과정이 계속되면서 결국 피해자는 견딜 수 없어서 도망치고, 경찰이 개입하게 된다. 경찰이 개입하더라도 문제가 완전히 해결이 될까?

 

그렇지는 않다. 다만 소설은 해결이 될 실마리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다른 성격의 사이트를 만드는 것. 여기서는 토론 사이트를 만든다. 토론을 하게 하고, 운영자들은 혐오 표현이 들어가나 들어가지 않나를 살피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인터넷을 떠나 직접 대면하여 이야기하는 것. 자고로 사과는 서면으로는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터넷으로도 마찬가지고. 방송으로도 마찬가지다. 직접 가서 얼굴을 맞대고 진심을 담아 사과를 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다음 관계를 만들어갈 수가 있다.

 

읽으면서 우리나라 '서동요'가 생각난 것은 왜일까? 서동이 선화공주와 결혼해 잘 살았다더라로 끝나는 설화, 설화, 아주 옛이야기니까 망정이지, 사실 선화공주 처지에서는 비방을 당하고 쫓겨나는 계기가 바로 서동요 아니던가. 그야말로 잘못된 사실이 또다른 악플들과 만나 인생을 바꾸게 되는 계기. 그만큼 사람들 입은 무섭다.

 

익명의 공간인 인터넷에서는 더 무섭다. 그들은 '삼인성호(三人成虎)'라고 없던 호랑이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 거의 스마트폰 속에서 사는 요즘 세대. 한 번 읽어보면서 자신은 어떤 스마트폰 생활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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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해설을 읽어도 과연 그런가 하는 시집이다. 도대체 뭔 소리를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든 시집.

 

  내용을 이해하기 힘드니 감동을 받기는 더 힘들다. 반어니, 역설이니 이런 해설을 읽으면서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생각을 하지만, 반어는 우선 상황을 공유해야만 존재하는 것.

 

  상황을 공유하지 못하면 반어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것이 반어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반어임을 알기 위해서는 시인의 표현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반어임을 알고 아하, 하는 감탄을 내보낼 수가 있지. 역설 또한 마찬가지다. 역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지식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상한 소리라고만 생각하고 만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반어니 역설이니 하는 것들이 들어오지 않은 것은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내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독자를 잘못 만난 탓도 있지만, 그래도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시를 쓰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그냥 잘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마음을 파고드는 시가 있었는데, 그것은 '내 똥구멍 속 송아지'라는 시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시라는 생각이 드는데, 아버지의 삶에 자신에게 쏟아부은 송아지들, 이는 아마 대학이 우골탑(牛骨塔)이라고 불린데서 기인할 것이다. 자식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소를 팔았다고 하니... 그러니 시의 화자 똥구멍 속에는 얼마나 많은 송아지들이 들어 있을 것인가.

 

그 송아지들은 부모의 사랑에 다름 아니다. 부모 사랑이 자식 몸 속에 깊이 깊이 들어와 있는 것. 그러나 자식은 그 사랑을 다 소화시켜내지 못한다. 그래서 똥구멍 속 송아지 아니던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읽은 시인데...

 

이 시집에서 단 한 편의 시를 고르라고 하면 '수구적인 목재 집에 대한 단상'이라는 시를 고르겠다. 그만큼 이 시는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마음에 와닿기도 한다.

 

  수구적인 목재 집에 대한 단상

 

서른 해 가까이 장씨 일가를 품고 있는 목재 집이

나무 벌레 구멍에 빠져 좀처럼 헤어나질 못한다

같은 해 뿌리를 내린 뒷마당 밤나무보다

자꾸만 작아지던 목재 집은 이젠

처마 끝에 쥐고 있던 동태 꾸러미까지

고양이에게 낚아 채이는 허리 굽은 몸이 되었다

문틈에 깊게 고인 겨울 바람에 빠져본 사람들은

저마다 손이 미치는 곳만 골라

집 좀 바꾸라는 불평을 잠깐씩 박아보지만

가슴을 뒤덮던 푸른 나뭇잎 다 떨구어

산밭 일구듯 늘린 나이테

목재 집 기둥에 가득 채운 아버지에겐

열릴 때마다 온 힘을 다해 소리를 질러 대는

부엌문도

아랫목만 까맣도록 편애의 손길을 주는

외골수 구들장도

지켜야 할 전통일 뿐 결코 수구가 아니다

나는 아예 나무 벌레 하나라도 넘겨 볼 허점이 없는

보일러의 온기가 이 방 저 방을 편견 없이 넘나들

새 집을 지으려 하지만 목재 집은

온갖 벌레들을 불러들여 나의 설계를 방해하며

마음 한쪽에서 좀처럼 터를 내주지 않는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느 한군데 반듯하게

햇살에게 손을 내밀 창틀 하나 없는 목재 집이

뒷마당 밤나무만큼 땅 속 깊이 자라

대문 밖 내 풍경들의 배후에까지

도도히 뿌리를 뻗고 있다

 

장무령, 선사시대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다. 세계사. 2005년. 초판 2쇄. 57-58쪽

 

삶의 역사가 있는 집이다. 함부로 없애버릴 수구가 아니다. 이는 전통이다. 삶의 뿌리를 뻗고 있는 집. 그런 집은 불편하긴 하지만 자신들 삶이 녹아있기에 함부로 부술 수가 없다.

 

전통은 그렇게 가볍게 사라져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수구적인'이라는 말을 썼나 보다.

 

과거를 지켜야만 하는,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적인 것이 아니라, 삶이 녹아 있는 집을 함부로 없애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수구적인 것이다. '수구' 얼마나 변하기 힘든 단어인가. 그래서 시인은 전통이라는 말보다 수구라는 말을 써서 우리에게 목재 집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하게 한다.

 

내 삶터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시. 비록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목재 집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내 삶이 켜켜히 쌓여 있음을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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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줘, 제발 주니어김영사 청소년문학 1
엘리자베트 죌러 지음, 임정희 옮김 / 주니어김영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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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토록 끔직한 폭력이 일어나고 있다니... 어른들은 전혀 모르거나 또는 모른 채 하거나, 교사들은 알려고 하지 않거나 가리거나 그런 일이 비일비재 하다니.

 

독일이 배경일텐데, 교육에 관해서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앞서가는 그 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에서 우리나라와 비슷한, 아니 더 끔찍한 학교 폭력이 일어나다니...

 

다르다는 이유로, 별로 힘이 없다는 이유로 다른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받는 경우는 학교 교육이라는 제도가 생긴 이래로 계속 있어 왔다.

 

공동체 문화가 발전했던 예전에도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괴롭히는 존재는 어디에나 있었다. 다만 그것이 상대방이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이고 강도가 점점 세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빵셔틀이라는 말이 공연히 있는 것이 아니다. 돈을 주고 빵을 사오라고 하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 정도. 흔히 군대식 농담이라고 하는 100원주고 1000원짜리 빵을 사오고, 거스름돈 500원을 받아오라는 빵셔틀도 있었다고 하니.

 

학교라는 공간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지금도 간간이 학생들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또 폭력으로 숨졌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여전히 학교 폭력은 없어지지 않았다.

 

학교에서 학교폭력대책위원회가 건재하고, 해마다 소위 학폭이라고 하는 학교폭력대책위원회 회의가 열려 많은 학생들이 징계를 받고 있다. 문제는 이 학폭으로 인해 학교 교육이 망가지고 있다는 데 있다.

 

잘못한 학생을 처벌해야 하는데, 가해 학생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변호사를 대동하고 나타난다. 또 판정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건다. 학교는 뒤숭숭해진다. 그동안 피해 학생은 어떤 보호 조치를 받기 힘들다. 왜 판정도 나지 않았는데 그러느냐고 또 시비를 걸기 때문이다.

 

결국 피해 학생은 나름대로 자구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게 별로 없다는 것이 문제지만. 이런 상황에서 가해 학생들은 다시 버젓이 학교에 나오게 된다. 피해 학생이 함께 있는 학교에.

 

이때 피해 학생이 선택할 수 있는 일. 학교에 기대할 것이 없고, 부모에게도 다른 어른들에게도 기대할 것이 없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두 극단밖에 없다.

 

하나는 자살로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 또다른 하나는 가해 학생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

 

자살이나 살인이 다른 원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소설을 읽다보면 학교 폭력 희생자가 해결할 길이 없을 때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되는지가 너무도 잘 나와 있다.

 

자신의 무력감, 두려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 이런 상태에서 우선 도피를 하지만 가해 학생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피해 학생이 가는 곳마다 있기 때문이다.

 

가장 안전하다는 집으로 도피해 컴퓨터 게임에 빠져든다. 게임에서는 자신이 최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해 학생들을 죽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임에서는 아무리 보복을 해도 그들은 다시 되살아난다. 현실에서 괴롭힘이 없어지지 않는다.

 

현실에서 상대에게 맞고, 게임에서 상대를 죽이게 되는 일이 반복이 되지만 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고 점점 커져만 간다. 가해 정도도 점점 심해진다. 불법까지 저지르게 한다. 안 하면 가혹한 처벌이 따른다.

 

결국 자살을 생각하지만 왜 나만 죽어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를 괴롭힌 존재도 같이 데려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되면 그때는 살인을 계획하게 된다. 계획에서 실행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이 현실에서 기대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피해자는 극단으로 가게 된다. 더이상의 선택은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가 학교 폭력이 극한으로 치달았을 때 생길 수 있는 일이다. 이 극단까지 가게 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문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관심, 전폭적인 이해. 말은 쉽다. 하지만 서로 살기 힘든 상황에서 별다른 권한이 없는 상황에서 이 일은 참으로 힘들다. 힘들지만 해야만 할 일인데...

 

가해 학생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유가 있다. 그들 역시 피해자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치유를 해야 한다. 이들의 행동을 알게 되었다면 문제를 개인에게 또 가정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사회가 함께 치유에 참여해야 한다. 사회 분위기가 포용적인 분위기여야 하고, 폭력에 단호하게 대처하는 분위기여야 한다. 여기에 피해자나 가해자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주는, 오랜 시간 그들과 함께 하면서 신뢰를 쌓을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하다.

 

가해자와 피해자, 동전의 양면같은 존재라는 생각을 해서, 피해자가 상처를 치유받고 존엄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가해자에 대한 치유 역시 함께 진행해야 한다. 그것이 비록 힘든 일일지라도.

 

또한 학교 폭력은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학교 폭력은 사회 전체의 문제다. 사회가 껴안고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말이다. 그런 점을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책임을 특정한 개인에게만 물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이 책을 읽고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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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이 결딴낸 우리말
권오운 지음 / 문학수첩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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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웠다. 읽으면서 내내... 도대체 이 시에서 어떤 말이 잘못 쓰였단 말이지 하면서 눈을 부릅뜨고 읽고 또 읽어도 내가 알고 있는 어휘 목록에서 잘못된 것을 찾아내기가 무척 힘들었다.

 

이렇게 시에서 잘못된 어휘들을 잘 찾아내다니... 이렇게 잘못 쓰인 언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시를 감상하기보다는 먼저 마음의 문이 닫히고, 벽이 쌓여 시를 받아들이기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말이 잘못 쓰이고 있는 현실을 너무도 안타까워 한다. 책을 읽다보면 이상하게 저자의 목소리와 이오덕 선생의 목소리가 겹쳐서 들리는 듯하다.

 

제발 우리말을 제대로 쓰라고, 잘 쓰라고.

 

그런데 어떻게 해야 우리말을 잘 쓰지, 제대로 쓸 수 있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좋은 글을 많이 읽으라는 것으로 대체해야 하는데...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 적확한 언어로 쓰인 글인가? 아니면 언어의 적확성을 떠나 마음을 울리는 글인가? 이런 의문이 든다.

 

그렇다고 사전을 통째로 외울 수는 없지 않은가. 여기에 저자는 사전도 비판을 하고 있으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 바른 우리말, 고운 우리말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저자처럼 어휘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그나마 믿을 만하다는 작가들이 쓴 글에서도 잘못 쓰인 어휘들이 수두룩하니 우리말을 잘 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학교 다니면서 국어 시간이 가장 많았고, 중요하다고 강조도 했는데, 국어 시간에 배운 어휘가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국어 시간에 표준어로 수업을 한다고 하는데,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쓰는 표준어가 얼마나 될까? 극도로 적은 양의 어휘들만 배우고 사용하고 학교를 마치지 않았는지.

 

일상에서 쓰는 말이 어휘의 보고라는 말이 있는데, 일상에서 쓰는 말 중에 잘못 쓰고 있는 말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일상에서 쓰고 있는 말을 시에 쓰고 있는 시인들이 저자의 비판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데...

 

여러모로 우리말을 아끼고 사랑하고 잘 써야 한다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우리말을 어떤 식으로 배우고 익히고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고 있다. 저자의 책만 읽으면 되나? 그런 생각을 하지만, 그건 저자도 바라는 일은 아닐 것이고.

 

결국 다양한 글을 읽고 다양하게 쓰인 어휘들을 비교해보는 경험을 해야 할텐데, 갈수록 쉬운 어휘만 쓰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만을 앍고, 짧고 명확한 문장만을 다루고 있는 교과서로 배운 사람들에게는 이도 힘든 일이다.

 

어휘에 대한 생각을 늘 하고 있어야만 잘못 쓰인 어휘를 찾아낼 수 있고 고칠 수 있는데, 그렇게 하기엔 청소년들은 입시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느라 여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고, 어른들은 먹고 살 걱정에 어휘에 대한 생각을 할 틈이 없다.

 

이래저래 우리나라 말들이 결딴나고 있는 현실인데, 작가들이, 언어로 먹고 산다는 사람들이 우리말을 살려내는, 더 풍부하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이 책을 읽으며 한숨만 나오고 말았으니...

 

그렇다고 저자가 한 주장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다. 잘못 쓰인 어휘도 시에서 큰 힘을 발휘하고, 우리에게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시인들이 의도적으로 낱말을 만들거나 틀리게 쓰기도 하고.

 

하여 시에서 하나하나 낱말에만 매달릴 수는 없지만, 저자의 주장을 생각해야만 하는 이유는 시인들은 언어에 대해 아주 인색하단 생각이 들 정도로 깐깐하기 때문이다.

 

자기 감정에 맞는 언어를 고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심을 하는가. 그래서 저자는 시인들에 대해서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는지도 모른다. 시인들마저 너무도 엉뚱한 실수를 저지른다면 우리말은 결딴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책을 써서 경종을 울리는지도 모른다. 우리보도 좀 생각을 하라고. 우리가 쓰는 말에 관심을 가지라고.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우리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다보니 내가 알고 있는 우리말 실력이 너무도 형편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부끄러움은 성찰을 이끌어내고, 성찰은 발전으로 가게 해준다고 그나마 위안을 할 수밖에.

 

가령 이런 말 '승부욕' 정말 많이 쓰는 말 아닌가. 승부욕이 강하다. 승부욕이 없다. 이렇게 잘 쓰고 있는 이 말이 잘못된 말이라니... '승부(勝負)'라는 말이 '이기고 짐'이라고 하니 여기에 바란다는 '욕(慾)'자를 쓰면 이기고 짐을 바라는 마음이라는 뜻이 되는데, 그렇다면 강하다, 없다라는 말과 함께 할 수가 없다. 조심해야 할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굳어져 있는 말인데, 이 말을 어떻게 고쳐 쓸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렇게 부끄러운 마음이 들게 하는 글들이 꽤 있었는데, 우리말이 결딴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좀더 관심을 가지고 글들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인들에게 발을 거는 행위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런 지적들을 통해 우리말이 제대로 쓰이도록 해야 한다는 저자의 열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게 우리말이 결딴나지 않게 하는 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했다.

 

덧글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 하나. 언어에 대해서 그리도 명확하게 주장하는 저자가 '고희'에 대한 설명에서는 내가 납득할 수가 없다.

 

고희(古稀), 나는 지금까지 일흔 살로 알고 있었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에서 온 말이라고... 만 70이 아닌 걸로 알고 있었는데...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일흔 살로 나오고.

 

237쪽. 고희(古稀)" '고래(古來)로 드문 나이'라는 뜻으로 일흔한 살을 이르는 말. 두보(杜甫)의 '곡강시(曲江詩)'에 나오는 말  이라고 나온다. 어째 좀... 오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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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승부욕(勝負慾)이란 말이 과연 잘못된 말일까?
    from 마음―몸―시공간 Mind―Body―Spacetime 2018-11-19 13:30 
    가령 이런 말 '승부욕' 정말 많이 쓰는 말 아닌가. 승부욕이 강하다. 승부욕이 없다. 이렇게 잘 쓰고 있는 이 말이 잘못된 말이라니... '승부(勝負)'라는 말이 '이기고 짐'이라고 하니 여기에 바란다는 '욕(慾)'자를 쓰면 이기고 짐을 바라는 마음이라는 뜻이 되는데, 그렇다면 강하다, 없다라는 말과 함께 할 수가 없다. 조심해야 할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굳어져 있는 말인데, 이 말을 어떻게 고쳐 쓸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 k
 
 
2018-11-19 10: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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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9 10: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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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9 09: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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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9 10: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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