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적, 정의를 훔치다 - 박홍규의 세계 의적 이야기
박홍규 지음 / 돌베개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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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들이 창궐하는 시대는 어지러운 시대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대다.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이 없다'고 맹자가 말했다던가. 적어도 먹고 살 수 있어야 다른 맘을 품지 않는다.

 

도적들도 마찬가지다. 박지원이 쓴 '허생전'애서 도둑의 무리들이 왜 허생을 따라 무인도로 갔겠는가. 그들에겐 최소한 먹고 살 것들이 있으면 되었는데, 그나마도 없어서 도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살게 해주겠다는 데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도적이 단지 경제적인 면에서만 나올까? 그렇지 않다. 먹을 것이 해결되어도 자유롭지 못하면 불만이 쌓이게 된다. 차별을 받다보면 당연히 반항하는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래서 반항하는 사람을 도적이라 부르기가 그렇다면 이들을 반항아, 혁명가로 부를 수도 있다.

 

도적에서 혁명가까지의 거리가 그리 길지 않다. 그들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양민과 도적이 동전의 앞뒤 면처럼 붙어 있다고 봐야 한다. 양민에서 도적이 되고, 도적에서 혁명가가 될 수 있다.

 

이 책은 그 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도대체 의적이 무엇인가 부터 시작하여 세계 곳곳에서 활동했던 의적들을 소개하고 있다.

 

어떤 이는 이들이 의적의 요건에 부족해서 의적이라 부르면 안 된다고 주장하지만, 저자는 의적이란 민중들의 마음에 그렇게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야기한다.

 

사실 관계를 떠나 민중들이 의적이라고 생각하면 그는 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민중들이 자신들이 억압받고 있는 현실에서 자신들의 바람을 대신 실현해주는 존재로 의적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의적에 관해서 역사적 사실 어쩌구 저쩌구 하기보다는 민중들이 어떻게 그들을 의적으로 인정했으며, 그들을 어떻게 기억하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우린 의적하면 홍길동을 떠올리는데, 홍길동은 나중에 자신이 왕이 되지 않았는가. 그리고 홍길동이 실존인물인지 아닌지, 진정 의로운 활동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역사에 달랑 한 문장으로 나온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민중들은 그를 의적으로 기억한다. 그에게 자신들의 마음을 담았기 때문이다. 이런 존재가 의적이다.

 

영국의 로빈 후드처럼 알고 있던 존재도 있지만, 시칠리아 의적이라고 하는 '살바토레 줄리아노', 멕시코의 '판초 비야', 헝가리의 '로자 산도르'는 처음 듣는 이름이다. 물론 이 책에 나온 더 많은 인물들을 처음 만나기는 했지만 말이다.

 

왜 이들이 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지를 당시 사회 현실과 관련지어 이야기해주고 있기 때문에 읽으면서 많은 사실을 알아가게 된다.

 

그리고 의적이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여전히 힘든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의적이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생활 환경을 바꾸어야 한다. 경제와 정치 또 다른 분야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그런 세상이 오기 전까지 사람들은 의적을 꿈꾸게 될 것이라는 것, 이 책이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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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30 09: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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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30 12: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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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은 능동태다
김흥식 지음 / 그림씨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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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책이다. 분량이 상당히 적다. 그럼에도 주장은 강하다. 자기 주장을 하는데 중언부언하지 않는다. 짧고 명확하게 주장한다. 그렇게 우리말을 살려야 한다고 한다.

 

그 핵심은 바로 제목이다. '우리말은 능동태다'

 

능동태. 스스로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한다는 것, 자기 말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우리말이 능동태라는 것은 자기 말에 책임을 지는 자세를 가진다는 것.

 

그런데 지금 우리말이 어떻게 쓰이고 있나 잘 살펴보면 수동태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수동태라니? 영어시간에 배운 것이 떠오른다. 수동이라는 말보다는 우리말 문법에서는 피동이라는 말을 쓰는데, 문장에서 수동태라고 하면 무언가 좀 이상하다.

 

수동태 문장을 많이 쓰는 것부터 우리말이 오염되었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수동태를 쓰는 것은 자기 책임을 회피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내 잘못이 아니라 대상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렇게 말하는 것, 이것이 바로 수동태다. 뉴스를 보면 피동형 표현을 많이 하는 것은 자신들은 그냥 전달할 뿐,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책임을 지지 않는 모습이 언어에서부터 나오니, 우리말이 잘못 쓰이는 것에도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또한 수동태 문장은 자꾸만 길어진다. 장황해지면서 무슨 의미인지 명확하게 전달이 잘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말을 살리기 위해서는 능동 표현을 해야 한다.

 

여기에 한자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다. 한자를 서양의 라틴어로 여긴다면 우리말의 뿌리를 아는 데 한자는 많은 도움을 준다. 그렇게 한자도 우리말에서 완전히 배제해서는 안 된다.

 

이 점은 인정할 수 있다. 한자가 우리말을 풍부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 영어에서 온 말은 우대하면서 한자어로 되어 있는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 생각을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우리말을 살리는 것이다. 그런 말을 쓰는 것이다. 그래야 함을 이 책에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짧은 분량에 주장은 간결하고 명확하다. 우리말, 우리가 잘 살려 쓰지 않으면 누가 살려 쓰겠는가. 우리말 사용에 대해서 다시 생가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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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에서 겨울로 가고 있다. 겨울이 다가오면 추위를 걱정해야 하는데, 이제는 추위보다는 미세먼지를 또 봄에만 잠시 시달리곤 하던 황사를 걱정해야 하는 때가 되었다.

 

  인류가 기술과학의 발달로 인해 봄에서 여름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열매를 수확한 가을을 넘어 겨울로 접어들기 시작하는 것인지...

 

  겨울이 올 줄 뻔히 알면서도 막 살아왔던 인류가 겨울이 눈 앞에 닥치자 그제서야 허둥지둥 대책을 논의하는데...

 

  겨울이 되어도 먹을것, 땔것, 지낼 곳이 충분한 사람들은 겨울 걱정을 하지 않듯이 이미 가질 것 다 가진 나라들은 자기 일이 아닌 양 뒷짐지고 있는 모양새.

 

겨울이 없는 사람에게만 오나? 없는 사람은 더 힘들겠지만, 그 사람들이 힘들면 힘들수록 있는 사람에게도 부담이 될텐데. 그래서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의 문제가 될텐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박남준이 낸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라는 시집. 이 시집 제목이 된 시는 봄에서 여름을 거쳐 겨울로 가고 있는 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시집에 실려 있는 시 제목은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그 여자의 반짝이는 옷 가게'(54-55쪽)이다.

 

강 따라 가는 길 전망 좋은 곳에 있는 간이트럭 휴게실. 사람들이 오다가다 모여 쉬다 가는 곳. 이제 살 만하다 싶었을 때 찾아온 아내의 암 소식. 아내가 바랐던 반짝 반짝이는 옷들... 그런 내용의 시.

 

처음 부분을 읽어가면서 마음이 편안해 지면서 섬진강물처럼 잔잔해 지는데, 2연에 가면서 그 잔잔함 속에 애잔함이 묻어나오게 된다. 이런 애잔함이 그렇게 만든 외부 요인으로 옮겨 가면 분노로 바뀌게 되는데...

 

시집은 1부에서 자연을 노래하고 있다. 말 그대로 '노래'다. 자연 속에서 이루어지는 죽음과 삶은 그야말로 평화 자체다. 자연의 일부다. 그렇기 때문에 애잔함보다는 평온함이 묻어나온다. 그렇게 마음 편하게 잔잔한 미소를 띠며 읽다가 2부로 가면 시인 자신에 관한 이야기들과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노래에서 이야기로 넘어간다. 우리네 생활에서는 죽고 산다는 문제가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것과는 차이가 있기에 아무래도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늙어감에 대해서 두려운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렇게 사람에게 다가온 이야기들이 사회로 넘어가면 분노로 넘치게 된다. 몇몇 정치인들이 저지른 어마어마한 잘못들로 자연이 파괴되고, 우리들 삶이 무너져가는 것을 바라보는 시인이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렇게 3부에서는 4대강 사업을 비롯해 제주도, 또 전쟁의 비극을 다루고 있다. 자연을 노래하는 것에서 그런 자연 속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 현실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분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막기 위해서 행동으로 나아간다. 그런 행동들이 시로 다시 표현되고 있고.

 

세월이 흘러 막혔던 4대강들이 다시 열리고 있고, 동남아 국경의 거리를 자유롭게 걷고 있던 시인이 그보다 우리나라 장벽을 자유롭게 걷고 싶다는 바람을 표현했었는데,('국경의 거리를 걷고 싶다' 72-73쪽) 이제 그렇게 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으니...

 

시집은 봄에서 겨울로 가고 있었다. 겨울... 2010년대 초반... 우리에게는 정말 '겨울'이었다. 이 시집에 있는 다음 시들을 보라.

 

생명의 강이어야 한다, 운하 이후, 낙동강 바로 분단의 장벽, 해창 바다에서 광화문까지, 일순 깨어지고 남김없이 씻겨져서, 다시 또 여강에 몸을 던져 등등

 

하지만 자연은 순환한다. 어디 겨울만 존재하겠는가. 지구 역사를 살펴보면 빙하시대가 있었지만, 그 시대로 끝맺을 때가 있었으니...

 

우리는 이제 겨울에서 봄으로 가고 있다. 자연적 계절은 이제 겨울이지만, 우리 마음에서는 봄이 움트고 있다. 박남준의 이 시집, 그런 겨울에서 끝나고 있지만은 않다. 마지막에 실린 시가 바로 그렇다.

 

'지리산에 가면 있다'라는 시. 그렇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을 소개한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아직도 희망이 있다. 길이 있다. 자연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이. 그런 사람들이.

 

퐁퐁퐁 샘물에 목을 축이며 가는 길이 있다

막걸리 한두 잔의 인심이 낯선 걸음을 붙드는 길이 있다

높은 산을 돌아 개울을 따라 산과 들을 잇고

너와 나, 비로소 푸른 강물로 흐르고 흐르는

아직 눈매 선한 논과 밭, 사람의 마을을 건너는 길이 있다

 

 

박남준,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실천문학사. 2010년.

'지리산에 가면 있다 - 4연'. 130쪽.

 

시집은 다시 봄을 이야기하면서 끝난다. 그렇게 순환한다. 그런 순환을 멈추게 해서는 안 된다. 겨울 역시 마냥 부정해서는 안 된다. 겨울은 봄을 더 봄답게 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겨울에 봄을 만날 수 있게 해야 한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어거지로 겨울을 만들지 않도록. 우리가 겪었던 시행착오가 또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단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세계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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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이슬람 - 오해와 편견에 갇힌 16억 문명의 진실 주니어 인문과학 캠프 2
하룬 시디퀴 지음, 김수안 옮김 / 행성B(행성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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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 널리 퍼진 종교 가운데 가장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 종교가 바로 이슬람 아닌가 한다. 평화를 추구하는 종교라는 말도 있고, 전쟁을 추구하는 잔학한 종교라는 말도 있다.

 

어느 것이 옳을까? 옳고 그름을 떠나 이슬람은 우리에게 과격한 종교로 인식되어 왔다. 9.11테러부터 시작하여 사람을 참수하여 죽이는 장면을 공개하는 행위까지, 테러 또는 폭력, 또 여성에 대한 극단적 차별을 하는 종교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다.

 

하긴 얼마 전까지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여성이 운전을 하면 범죄라고 처벌을 받았다고 하니, 여성 인권이 잘 보장되지 않는 나라가 이슬람을 주요 종교로 믿고 있는 나라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이슬람을 바로 보고 싶어도 별다른 자료를 만나지 못했다. 그냥 언론에 나오는 것만으로 이슬람에 대한 정보를 얻고 있었는데...

 

이희수 교수나 몇몇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슬람을 바로 볼 수 있는 계기가 생기기도 했는데, 이 책은 이슬람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오해가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런 오해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반박하고 있다.

 

이슬람은 테러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 여성에 대한 차별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인정이 주요 교리인 종교라는 것. 개종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 자신의 이익보다는 남에게 베풂을 더 강조하는 종교라는 것.

 

이들이 테러로 나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니 테러로 인해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바로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것.

 

서양인의 비뚤어진 시각이 이슬람을 왜곡하고, 또 그들을 차별하기 때문에 그들이 저항할 수밖에 없다는 것. 지금은 그렇게밖에는 저항할 수 없지만, 그런 저항방법에 대해서 이슬람 신자들이 모두 찬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오히려 극단적인 테러를 반대하는 이슬람 신자들이 많다는 것. 그런 것들에 대해서 알게 되면 이슬람을 이상한 종교로 보는 시각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말해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슬람 역시 종교라는 것, 종교는 본래 인간에게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생긴 것이라는 것. 기독교도 불교도, 그리고 이슬람도 마찬가지라는 것.

 

이 책에서 이 글귀를 읽고 이래야 한다고, 이렇게만 한다면 세상에 전쟁은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성서를 믿는 사람(유대인과 기독교도)과 논쟁하지 말되, 논쟁해야 한다면 매우 공손하게 말하라.

만일 알라가 뜻하셨다면, 인류를 한 나라로 만드셨을 것이니라. 하지만 인류는 각자 다른 길을 걷고 있느니라. (178쪽)

 

다양성,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임을 인식하고 함께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이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이슬람은 차별을 받고 있다. 그만큼 이슬람에 대한 시각이 많이 왜곡되어 있다. 그런 왜곡된 시각에서 벗어나 이슬람을 이슬람 자체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세상에 평화가 오지 않을까 한다.

 

이슬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이 책은 다양한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읽으면서 다른 종교에 대한 편견을 떨쳐 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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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7 08: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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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7 09: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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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연.파이돈 니코마코스 윤리학 - 세계의사상 2
플라톤 외 / 을유문화사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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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에 관한 논란이 많고, 그에 대한 반대가 극심한 집단이 주로 기독교 단체던데, 가끔 다른 글에서 플라톤이 [향연]에서 했다는 말이 인용되곤 한다.

 

본래 인간은 남성-남성(태양), 여성-여성(지구), 남성-여성(달)의 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말. 이 책을 읽어보니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처음에는 성이 세 가지 있었지요. 지금은 남성과 여성의 두 가지 성이 있지만, 이 둘을 다 가지고 있는 제 3의 성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런 것이 없습니다마는, 그 명칭만큼은 아직 남아 있지요. 즉 옛날에는 남여성, 즉 남성과 여성을 둘 다 가지고 있는 것이 실물로도 있었고, 명칭으로도 있었습니다. ... 성에 세 가지가 있고 사람의 모양이 이러했던 까닭은, 남성이란 것이 맨 처음에 태양에서 태어났고, 여성은 지구에서, 남성과 여성을 다 가지고 있던 남여성은 달에서 태어난 때문이지요. ... 저들은 무서운 힘과 기운을 가지고 있었고, 또 그들의 야심은 대단했습니다. 저들은 신들을 공격했습니다. (56쪽)

 

그래서 이 구절을 가지고 남성-남성이었던 존재는 남성을 원하고, 여성-여성이었던 존재는 여성을 원하고, 남여성이었던 존재는 서로 다른 성을 원한다고, 동성애는 자연스런 인간의 본성이라고. 플라톤도 그렇게 주장했다고.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한데, 이 말이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다. 아리스토파네스가 한 말이다. 아리스토파네스가 한 말이란 의미는 플라톤의 주장은 여기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플라톤은 사랑에 대해서 자기 주장을 하기 위한 한 발판으로 이 주장을 끌어들인 것이다.

 

물론 당시에 동성애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 논거가 동성애 찬성의 논거가 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뒤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더 사랑의 본질에 가깝다.

 

문제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육체적 사랑을 넘어선다는데 있다. 뒤에 등장하는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를 유혹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 육체적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는 데 핵심이 있다. 그는 이미 육체적 사랑을 넘어선 것이다.

 

[향연]은 육체와 영혼, 이분법을 부정한다고 보아야 한다. 사랑에는 육체적 사랑이 있고 정신적 사랑이 있다고 고등학교 때 윤리 시간에 배웠다. 에로스와 아가페라고 배웠는데, 이런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이 책은 하게 한다.

 

육체와 영혼의 사랑을 굳이 구분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육체를 사랑하는 것도 사랑이고, 영혼을 사랑하는 것도 사랑이다. 물론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를 추구하기 때문에 육체는 사라질 것, 그림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취급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사람이 사랑한다는 것은 영원함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영원함은 곧 생식으로 나타난다. 자신은 유한한 존재이기에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생식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식을 낳는 행위는 사랑에 해당된다. 영원함을 추구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체의 영원함만 추구하는 것이 사랑일까? 아니라고 한다. 플라톤은

 

심령 면에서 생식력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그건 온갖 예지와 온갖 덕이에요. 모든 창조적 시인들, 그리고 독창적이라는 평을 듣는 미술가와 공예가는 이 부류에 속합니다. 그러나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예지는, 나라와 가정의 질서를 바로잡는 일에 관계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절제와 정의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속에 신적인 성격이 있고 어렸을 적부터 그 영혼이 이런 덕을 임신하고 있는 사람도, 장성하면 자식을 낳고 생식하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속에 자기의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아름다운 것을 찾아 헤맵니다. (88-89쪽)

 

이런 덕에 대한 영원함으로 오면 그들의 사랑에는 육체의 차이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냥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끌리고 함께 하면서 덕을, 예지를 영원하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플라톤이 생각한. 여기에 남성은 여성만을, 여성은 남성만을 이라는 생각은 지금에서야 하는 생각이다. 이 사랑에 관한 설명을 소크라테스가 직접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디오티마'라는 여인을 통해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덕의 영원성에 육체적 차이를 생각하는 것은 현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영혼이 통하고 그 통함으로 영원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육체적인 생식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육체적 생식이 문제가 되지 않는데, 사랑에서 굳이 성별을 문제삼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의 동반자가 되지 못하는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에게 육체적 관계를 요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와 영적인 교감을 하는 사람에게는 육체적 관계를 맺든 맺지 않든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영혼의 교감이고, 영혼의 생식이기 때문이다.

 

철저한 일원론이라고 보아야 하는지, 하여간, 동성애를 육체에만 국한시켜서 논의하는 것이 문제이지 않을까, 또 플라톤을 인용하면서 본래 한 몸이었던 존재가 둘로 나뉘었기 때문에 서로를 원하는 방향으로 간다고 주장하는 것도 한 면만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인간을 몸과 정신, 둘로 나누어 판단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볼 수 없음을 [향연]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 세상의 개개의 아름다운 것들로 부터 출발하여 저 아름다움을 향하여 위로 올라가되, 마치 사다리를 올라가듯 하나의 아름다운 육체로부터 두 개의 아름다운 육체로, 또 둘에서 모든 아름다운 육체로 나아가고, 아름다운 육체들로부터 아름다운 활동과 법률에로 나아가고, 아름다운 활동에서 아름다운 것을을 배우는 것에로 나아가고, 그 배움의 끝에 이르러 진실한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되고, 결국에는 아름답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인생은 여기에 이르러, 그리고 여기에서만, ..., 그가 어디에서 그의 삶을 살아가든 저 아름다움 자체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89-90쪽)

 

사랑이란 무엇인가, 에로스란 무엇인가에서 에로스는 신이 아니라 신과 인간의 매개자인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 그렇다면 사랑은 인간을 유한한 존재에서 무한한 존재로 이끌어간다는 것. 그 단계에는 여러 단계가 있지만, 그것들을 거치며 아름다움 자체에 이르게 된다는 것. 이분법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또 아름다움은 성으로만 구분되지도 않는다. 이 [향연]이 동성애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반대 논거를 제기하는 글로 자주 인용되지만, [향연]은 그것을 넘어 과연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논하고 있는 책이다. 그 중간 단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종교는... 사랑이든, 자비든, 그것은 타인의 존재를 자신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신의 무한한 사랑을 알 수가 없다. 그 무한한 사랑을 알기 위해 나아가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 존재하는 사랑은 신의 사랑을 알아가기 위한 한 단계일 뿐이다. 그렇게만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한다.

 

이것이 [향연]을 읽으며 한 생각이다. 여기에 관해 무슨 논문을 쓰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내 멋대로 읽은 플라톤의 [향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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