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삼아 이야기한다. 선지자는 자기 가족에게, 자기 마을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어렸을 적부터 보아왔던 사람에게서 어떤 신비감이 있겠는가. 그러니 그는 자기 마을에서는 그냥 보통 존재일 뿐이다.

 

  이런 보통 존재를 더 좋아하려면 그에게서 어떤 단점을 찾아내지 않아야 하고, 또 내 약점을 그가 보지 말아야 한다.

 

  함께 지내는 존재와 갈등 없이 지내기가 얼마나 힘든가. 내 삶에 끊임없이 들어오는 그 존재에게 나는 내 삶의 일부를 얼마나 떼어내주어야 하는가.

 

'자기만의 방'(버지니아 울프의 책 제목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자기만의 방을 갖기를 원한다. 이는 누구나 적당한 거리를 원한다는 말이기도 하다)을 가져야 하는데, 그런 방을 갖기 위해서는 거리가 있어야 한다.

 

진은영 시를 읽으며 그런 거리를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중첩되어 나타나는 시어들을 통해 너무 가깝지 않은, 적당한 거리에 대해 생각한다. 그렇다고 시 제목처럼 '그 머나먼'이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멀면 내 삶과 아무 상관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무관심, 그리고 나아가는 길은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다.

 

   그 머나먼

 

홍대 앞보다 마레지구가 좋았다

내 동생 희영이보다 엘리스가 좋았다

철수보다 폴이 좋았다

국어사전보다 세계대백과가 좋다

아가씨들의 향수보다 당나라 벼루에 갈린 먹 냄새가 좋다

과학자의 천왕성보다 시인들의 달이 좋다

 

멀리 있으니까 여기에서

 

김 뿌린 센베이 과자보다 노란 마카롱이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가족에게서, 어린 날 저녁 매질에서

 

엘뤼아르보다 박노해가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상처들에서

 

연필보다 망치가 좋다, 지우개보다 십자나사못

성경보다 불경이 좋다

소녀들이 노인보다 좋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책상에서

분노에게서

나에게서

 

너의 노래가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기쁨에서, 침묵에서, 노래에게서

 

혁명이, 철학이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집에서, 깃털구름에게서, 심장 속 검은 돌에게서

 

2011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현대문학. 2010년. 진은영, '그 머나먼' 15-16쪽.

 

'그 머나먼'에서 멀어서 좋았던 것들이 이상하게 다시 가까이 다가와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혁명이, 철학이 멀이 있어서 좋았다는 말은 결국 이런 혁명을, 철학을 원한다는 말이다.

 

삶이 비루할수록 꿈은 더 간절해기기 때문이다. 단지 멀리 있어서 좋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꿈이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내 삶의 힘듦을 이겨내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머나먼' 것들이 좋았다. 좋다.

 

다시, 그것들이 내게 다가오면 나는 더 '머나 먼' 것들을 좋아하기 시작한다. 이미 도달한 것에서 머무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더 머나먼 것으로 나를 보내게 된다.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는 그래서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좋아하고, 그리워해야 한다.

 

단지 과거형이 아니라 이 시를 현재형으로 읽는다. 수많은 좋았다들을 지나 이제는 좋다를 지나, 계속 꿈을 꾼다. 그렇게 머나먼 것들을 지나 더 머나먼 것들로 떠나는 삶을, 그런 희망을 지니면서... 이 시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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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패배자 - 한 권으로 읽는 인간 패배의 역사
볼프 슈나이더 지음, 박종대 옮김 / 을유문화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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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아무도 2등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1등만 기억하는 세상이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1등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패배자가 되는 사회, 행복한 사회인가? 그런 역사가 있는가? 아니다.

 

비록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승자가 있기 위해서는 패자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패자로 인하여 세상은 한층 발전하기도 한다. 우리가 기억하든 기억하지 않든 패자들은 세상에서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이고, 우리 인류를 발전시켜 온 사람들이다.

 

그런 패자들을 역사에서 깨끗이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역사에 기록으로 남기는 일,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런 패자의 기록들을 통해 역사는 좋은 쪽으로 한걸음 내디딜 테니 말이다.

 

승자가 지닌 특성은 집요함일 것이다. 그들은 집요함으로 승리를 이끌어낸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이에 반해 패자는 인간적인 품성에서 승자보다 뛰어난 경우도 있다.

 

그런 인간적인 품성때문에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패자들에 대한 기록, 그것이 바로 이 책이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다루고 있는데, 이미 역사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사람도 있다. 이 중에 처음 듣는 사람도 있는데... 이들로 인해서 이익을 본 사람이 있다는 것, 그들에 의해서 어쩌면 이들이 의도적으로 가려졌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역사에서 사라진 사람들을 다시 살려내는 것, 그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 노벨상을 놓친 사람, 리제 마이트너 같은 경우,물리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지만 노벨상을 오토 한에게 빼앗겼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같이 과학분야에 문외한인 사람에게는 처음 듣는 이름이기도 하고.

 

그런 사람과 더불어 하인리히 만 같은 경우는 동생 토마스 만에 가려진 경우이고, 요한 슈트라우스는 이름이 같은 아들에게 이름이 가려진 사람. 그래도 이들은 가족에게 뒤쳐졌다고 할 수 있으니 덜 억울하다고 하겠지만, 자신의 성정체성 때문에 추락한 오스카 와일드나 앨런 튜링 같은 경우는 문제가 있다.

 

성정체성이 범죄가 되던 시대. 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 그런 시대에 살았던 사람. 그럼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던 사람, 이들이 바로 위대한 패배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한 책.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과연 이들을 패배자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사람도 있다. 윈스턴 처질과 등소평. 어떻게 이들이 패배자인가. 물론 잠시 패배해서 물러날 때가 있긴 했지만, 이들은 결국 승리를 하지 않았나.

 

역사에서도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이런 사람들 말고 역사에서 지금 다루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많은 사람들, 역사에서 최선을 다해서 자기 몫을 하려고 했던 사람들, 그들이 비록 당대에는 패배했을지라도 역사의 흐름에서는 살아남아야 할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발굴하는 것이 바로 우리 몫이라는 생각을 하게 해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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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4 0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04 0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식의 미술관 - 그림이 즐거워지는 이주헌의 미술 키워드 30 이주헌 미술관 시리즈
이주헌 지음 / 아트북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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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어떻게 보아야 잘 볼 수 있을까?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자꾸 보는 것. 자꾸 보다보면 나름대로 감식안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그림을 자주 볼 시간이 많지 않다. 우선 세계 명화라고 하는 그림들은 외국에 있고, 국내에 전시가 되더라도 그림보다는 사람들 뒤통수를 보다가 끝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그림 역시 일부러 화랑을 찾아가거나 전시회를 찾아가지 않는 한 보기가 힘들다.

 

학교 다닐 때 미술 시간을 제외하고 자기 삶에서 그림을 자주 접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그림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싶은 욕구가 있으면 어떻게 하는가.

 

바로 이런 책을 읽는 것이다. 이주헌은 미술에 대해서는 이야기꾼이라고 할 수 있다. 전문적인 사람들만이 아닌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준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미술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핵심 개념 30가지를 들어서 설명해 주고 있다. 그래서 읽어가면서 미술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다. 다른책에서도 많이 접했던 부분도 있지만 이 책을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있다.

 

어쩌면 그림을 볼 때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관점을 이 책이 제시해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른 개념들을 제외하고 이 책에서 내게 새롭게 다가온 부분은 현대미술, 그것도 추상미술에 관한 부분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이 있었구나, 미국에서 추상미술이 유행하게 된 배경에 미국중앙정보국(CIA)가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술 분야에 '블랙리스트'니 '화이트리스트'니 하는 말이 나돌았지만, 이 책에 의하면 잭슨 폴록이 그런 화이트리스트의 황태자라니... 그냥 대단한 사람이구나 했지만, 그가 그렇게 유명해진 것이 그의 작품이 대단한 것도 한 이유겠지만 냉전시대에 소련을 앞지르겠다는 중앙정보국의 관여가 있었다니... (CIA와 추상표현주의 :CIA와 MoMA-뉴욕 현대미술관-가 낳은 냉전시대의 황태자, 책슨 폴록 참조)

 

그렇지. 미술이라고 정치에서 완전히 독립할 수는 없지. 사회 변화가 그림에 담기기도 하니, 정치 논리가 미술에서 완전히 배제된 순수한 미술이란 개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어떻게 그 사회가 미술에 반영되어 있느냐를 살펴보는 것도 미술을 잘 이해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다양한 개념을 통해 미술에 대해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단지 그림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림이 유통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으니, 이 책을 읽으면 그림도 보고 그림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듣게 되니, 미술 분야에 대해서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미술관, 화랑, 전시회에 자주 가지 못하지만 이런 책을 통해서 미술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만들 수 있으니, 그런 점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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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3 0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03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높은 계단


전세버스를 타는데

왜 이리 발판이 높은지

도저히 힘 없는 내 다리로는

오르지 못해

양 팔에 힘을 주고

끙 오를 수밖에 없다

짧은 다리를 원망하랴

편하게 가기 위한 길이

쉽지 않음을 생각하랴


절에 갔더니

계단들이 왜 이리 높은지

스님들은 모두 다리가 길었는지

스님들 다리는 모두 이렇게 튼튼했는지

편하게 오르내릴 수가 없다

부처를 만나는 길이

해탈에 이르는 길이

이리도 높을 줄이야



 

편한 세상살이든

해탈이든

어려움 없인 안 된다는 듯이

그렇게 

버스 발판, 절 계단들이

높게 높게

버티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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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적, 정의를 훔치다 - 박홍규의 세계 의적 이야기
박홍규 지음 / 돌베개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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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들이 창궐하는 시대는 어지러운 시대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대다.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이 없다'고 맹자가 말했다던가. 적어도 먹고 살 수 있어야 다른 맘을 품지 않는다.

 

도적들도 마찬가지다. 박지원이 쓴 '허생전'애서 도둑의 무리들이 왜 허생을 따라 무인도로 갔겠는가. 그들에겐 최소한 먹고 살 것들이 있으면 되었는데, 그나마도 없어서 도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살게 해주겠다는 데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도적이 단지 경제적인 면에서만 나올까? 그렇지 않다. 먹을 것이 해결되어도 자유롭지 못하면 불만이 쌓이게 된다. 차별을 받다보면 당연히 반항하는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래서 반항하는 사람을 도적이라 부르기가 그렇다면 이들을 반항아, 혁명가로 부를 수도 있다.

 

도적에서 혁명가까지의 거리가 그리 길지 않다. 그들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양민과 도적이 동전의 앞뒤 면처럼 붙어 있다고 봐야 한다. 양민에서 도적이 되고, 도적에서 혁명가가 될 수 있다.

 

이 책은 그 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도대체 의적이 무엇인가 부터 시작하여 세계 곳곳에서 활동했던 의적들을 소개하고 있다.

 

어떤 이는 이들이 의적의 요건에 부족해서 의적이라 부르면 안 된다고 주장하지만, 저자는 의적이란 민중들의 마음에 그렇게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야기한다.

 

사실 관계를 떠나 민중들이 의적이라고 생각하면 그는 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민중들이 자신들이 억압받고 있는 현실에서 자신들의 바람을 대신 실현해주는 존재로 의적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의적에 관해서 역사적 사실 어쩌구 저쩌구 하기보다는 민중들이 어떻게 그들을 의적으로 인정했으며, 그들을 어떻게 기억하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우린 의적하면 홍길동을 떠올리는데, 홍길동은 나중에 자신이 왕이 되지 않았는가. 그리고 홍길동이 실존인물인지 아닌지, 진정 의로운 활동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역사에 달랑 한 문장으로 나온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민중들은 그를 의적으로 기억한다. 그에게 자신들의 마음을 담았기 때문이다. 이런 존재가 의적이다.

 

영국의 로빈 후드처럼 알고 있던 존재도 있지만, 시칠리아 의적이라고 하는 '살바토레 줄리아노', 멕시코의 '판초 비야', 헝가리의 '로자 산도르'는 처음 듣는 이름이다. 물론 이 책에 나온 더 많은 인물들을 처음 만나기는 했지만 말이다.

 

왜 이들이 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지를 당시 사회 현실과 관련지어 이야기해주고 있기 때문에 읽으면서 많은 사실을 알아가게 된다.

 

그리고 의적이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여전히 힘든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의적이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생활 환경을 바꾸어야 한다. 경제와 정치 또 다른 분야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그런 세상이 오기 전까지 사람들은 의적을 꿈꾸게 될 것이라는 것, 이 책이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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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30 0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30 1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