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이웃
양혜영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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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내용이 어둡다. 현실에서 약한 사람들은 이렇게 어두침침한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 잠깐 희망의 빛이 비추는 듯하다가도 다시 어둠이 짙게 깔리는 그런 삶이라니...

 

약한 존재끼리 서로 도우며 서로 기대며 살면 좋으련만, 약한 존재들을 착취하는 사람들이 있고, 같이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상대를 더 깊은 어둠으로 몰아가는 존재들이 있다.

 

이 소설집에는 다수의 약한 존재들이 등장한다. 소수자라고 해도 좋다. 소수자지만 이 세상에서는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소수자다. 이들은 힘이 없어서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로부터 억압당하거나 배척당하는 삶을 산다.

 

그들에게 희망이 있을까? 희망을 보여주는 소설을 원하지만 소설은 결코 희망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냥 우리 사회의 모습을,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약한 사람들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어둡다. 무언가 희망이 보여야 하는데, 자꾸 이래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 내용이 이리도 어두운데, 작가는 희망을 이야기하려고 한다고 한다. 그래, 현실을 보여주고 그 현실에서도 살아가려 하는 사람들, 몇몇 소설에서 약자들이 자신을 가해한 사람에게 돌려주는 폭력이 그것을 의미한다면, 결코 이들은 약하지만 그대로 당하고만 살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면 소설집 뒤에 실려 있는 작가의 말이 소설에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집에 실려 있는 소설 중에 '오버 더 레인보우, 구두, 고요한 이웃, 요나'가 그렇다. 소수자에 해당하는 삶을 살지만 이들은 그냥 당하기만 하는 피해자는 아니다. 물론 폭력이 해결책은 될 수 없지만 적어도 자신의 삶을 지탱하려는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몸부림도 없다면 그것은 더한 절망의 나락 속으로 떨어지는 일이다.

 

작가의 말이 그래서 마음에 다가온다.

 

내가 쓰는 소설은 오색찬란한 드레스를 걸치고 화려하게 치장한 예쁜 인형이 아니다. 지극히 평범해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인형이 겹겹이 들어 있는 '마트료시카'에 가깝다. 그 사람들은 조금도 요란하지 않다. 너무 작은 그들의 목소리는 몸을 굽히고 귀를 바짝 대야만 들을 수 있다. 힘센 사람들은 어디서든 할 말 다 하고 하지 않은 일을 부풀려 표현하기도 하지만 내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은 겪은 일마저 말 못 하고 소리 내 울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그 사람들은 자신보다 작은 사람을 품으려 애쓴다. 온몸으로 사람이 사람을 품고 안는 세상. 나는 그것이 '소설'이고, 우리가 나누는 '사랑'이라 생각한다.  (262-263쪽)

 

그래서 어둠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소수자를 그리고 있지만 소설에서는 그들이 그냥 죽어지내지는 않는다. 그들은 자신과 같은 소수자임에도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존재를 응징하거나(오버 더 레인보우, 구두), 자신을 괴롭히는 존재에게 반항하게 된다.(고요한 이웃, 요나)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그런 존재들에 대한 연민이 묻어나는 소설도 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 살려고 애쓰는 존재에 대한 안쓰러움이 묻어나는, 붉은 머리 리카온에 대한 그 감정은 결국 우리 사회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존재들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세상은 결코 녹록치 않다. 세상 살아가기에 보통사람들은 힘겹게 살아간다. 아무리 힘들게 돈을 벌어도 빚이 줄지 않는 상황이거나, 간신히 자신의 삶을 유지해나가는 상황이기 쉽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야 한다.

 

세상이 잔혹하지만, 환대가 멀어진 세상이라지만 그럼에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환대가 있어야 한다. 환대가 불가능한 세상은 서로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이렇게 환대가 사라진 세상이지만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반항, 그들이 폭력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도 자신에 대한 포기가 아님을 생각하게 된다. 이들이 폭력으로 나갈 수밖에 없을지라도, 그 폭력은 살기 위한 어쩔 수 없음이다.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이렇게 폭력으로 치닫도록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사회를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소설에서 보여주는 음울한 세계는 우리가 현실에서 맞이하는 세상이면 안 된다. 그런 세상, 어둠 속, 약한 존재, 소수자들에 대한 따스한 시선,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는 삶을 생각하도록 소설은 만들고 있다.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이다. 고맙게 잘 읽었다. 어두운 삶 속에서도 삶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소설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들을 환대하는 사회, 그런 사회가 우리가 꿈꾸는 사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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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이 시집 뒷편에 쓴 후기를 인용한다. 이 후기에 박영근 시인이 시를 대하는 태도가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민중, 혹은 문학은 여전히 하나의 가능성이며, 가야할 미래로서의 새로움이다.
  이 시집의 끝에 나의 스승 한분이 당신의 첫시집에 쓰신 말씀 한구절을 적어놓는다.
  나 자신이나 남을 속이지 말자
  분수를 알자.
  어둠과 절망을 제대로 살아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새삼스럽게 가슴이 뜨거워온다. 
 
1997년 10월, 인천에서 박 영 근
 
이 시집이 나온 것이 우리나라가 외환위기에 막 처했을 때일 것이다. 한창 성장을 구가하던 나라에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던 때.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비정규직 시대로, 불안정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박영근 시인은 노동현장의 치열함을 시로 쓰기도 했다. 본인이 노동현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노동현장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노동시라고 하는 것이 꼭 노동현장을 표현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왔다. 1958년생이면 전쟁 직후에 태어나 우리나라가 발전할 때, 경제적으로는 농촌이 파괴되면서 도시로 사람들이 몰리고, 저임금 저곡가 정책으로 일반 민중들은 살기 힘들어지던 때. 정치적으로는 독재가 판치던 시대.
 
이 시대에 노동운동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 수밖에 없는 일이었을 터. 시인은 이런 시대에 시를 통해 진실되게 살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나 자신이나 남을 속이지 않는 일, 분수를 아는 일. 우리 모두가 이렇게만 살면 어찌 차별이 있고, 억압이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특히 점점 더 위로 올라가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에게는 남이 아니라 자신마저도 속이는 그런 특기가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시인 약력을 찾아보니 2006년에 돌아가셨다. 채 50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뜬 것. 이 세상이 그리도 살기 힘들었던가. 아니면 시인처럼 자신도 남도 속이지 못하고 분수를 알며 살아가려 하는 사람들에겐 견디기 힘든 세상이었던가.
 
시인이 저 세상에서 내려다보는 지금 이 세상이 그때보다는 더 좋아졌어야 하는데... 
 
시집 제목이 된 시를 인용한다.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
 
낡은 흑백 필름 속 같은 곳에서
쓸쓸히 늙어가는 내가 보인다
 
한편의 시를 쓰려면
몇밤을 불면으로 때우는 나를
바겐세일도 하지 못해
백화점 문턱도 넘지 못하는 나의 상품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
베스띠 벨리 막 화장을 끝낸 마네킹의 얼굴도 보인다
 
TV 뉴스 속에선 한총련 아이들 최루탄처럼 구호를 터트리고
내 귀엔 환청처럼 들리고
대낮 뜨겁게 타오르던 해가
페퍼포그 연기 속에서 복면을 한다
 
꽃들이 일제히 모가지를 꺾고 파업을 했는가
 
부러진 뼈와 두개골 사이로 새파란
억새를 키우고 있는 공장 위로
기억이 모가지를 부러뜨린 채
하늘을 향해 굴뚝을 세우고
나를 부르는 소리도 들린다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
 
그래 가자
가자
저 유월의 싱싱한 은행나무들이
시뻘겋게 녹슨 고철덩어리로 보일 때까지
 
박영근,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 창작과비평사. 1997년. 92-93쪽. 
 
어둡다. 이상하게 과거 속에 자신을 가두어버린 듯한 느낌. 미래로 가려 하는데, 그 미래가 결코 밝지 않다. 세상에 은행나무들이 녹슨 고철덩어리로 보일 때까지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노동의 시대, 노동으로 세상을 바꾸려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는 뜻인가? 그럼에도 노동은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기 때문에,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말인가. 
 
'시뻘겋게 녹슨 고철덩어리'는 가동이 멈춘 공장이 아니던가. 그런데 '유월의 싱싱한 은행나무'는 또 무엇인가. 87년 유월 항쟁을 이야기하는가? 유월 항쟁으로 인해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는 이루었지만 노동자들의 현실, 민중의 현실은 나아지지 않았다는 뜻인가. 
 
그래서 한총련은 여전히 시위를 하고 있으며, 노동자이자 시인인 나는 백화점 문턱을 넘을 수 없고, 공장에선 여전히 나를 부르고 있는데...
 
공장을 멈춰 세상을 바꿀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히려 노동자들의 삶만 피폐해졌지 않은가. 그런 시대를 겪어 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런지 이상하게 시의 마지막 구절이 맘에 걸린다. 탁 걸려서 넘어가지 않는다. 시인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시뻘겋게 녹슨 고철덩어리로 보일 때까지'라는 말은 결국 그 녹슨 고철덩어리들을 노동의 힘으로 다시 가공해 내야 한다는 것 아닐까?
 
노동자들의 삶이 유월 항쟁으로 이룬 것처럼 이렇게 녹슨 고철들을 새로운 결과물로 만들어내는 것,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노동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노동자들이 계속 해야할 일이라는 말 아닌가 하는 생각.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그런 말을 시인은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내 멋대로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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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4 12: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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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4 15: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풍화와 기억 - 일제 말 친일 협력 문학의 재해석
김재용 지음 / 소명출판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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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 그렇게 우리나라는 일제에 대항하여 비폭력 만세 운동을 벌였다. 무장투쟁이든 비무장투쟁이든 일제에 반대한다는 데에서 공통점을 지닐 수 있는데, 3.1운동은 전국민적, 전국적인 운동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3.1운동으로 인해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그 적통을 이어받아 지금 우리 대한민국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으니... 우리나라 헌법에는 3.1운동과 임시정부가 전문(前文)에 언급되어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친일문학 또는 반민족친일행위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논란이 많아진다. 도대체 친일이 무엇이냐? 당시에 친일을 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일제시대에 살았다는 것, 총을 들고 무장투쟁을 하거나 또는 눈에 띠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은 대다수의 사람들 모두 친일을 한 것 아니냐는 반론이 늘 뒤따른다.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서 친일을 한 것까지 응징해야 하느냐는 반론도 있고... 그렇게 많은 논란이 벌어지는 이유는 해방이 되고 나서 바로 친일청산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위 친일파들을 안고 간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 사회를 주도하게 하지 않았던가 반성하게 된다.
 
친일파들을 안고 가기 위해서는 먼저 친일파들의 통렬한 자기 반성이 있어야 한다. 자기 반성을 한 뒤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 때 그 다음에야 그들을 안고 가는데, 이런 과정 없이 반민특위는 해체되고 친일파들은 별다른 처벌 없이 우리 사회에서 주도적인 자리를 잡고 만다.
 
그 다음부터 친일에 관한 논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각 학교 도서관에 친일인명사전을 비치하도록 하는 것도 좌파들의 책동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으니, 도대체 이 나라에서 친일을 했다는 것은 그것도 주도적으로 친일을 했다는 것은 힘있는 자리에 계속 머무르면서 자손들에게 그 지위를 물려주었다는 얘기와 통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친일문학에 대해서 정리한 책이다.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다고? 아니다. 이 책을 보면 이들은 자연스레 친일로 흘러들어간다. 자기 신념을 가지고. 이들에게 친일은 신념이다. 살기 위해서 한 어쩔 수 없는 행위가 아니다. 그냥 그 시대에 자기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간 결과가 친일이다. 친일이라는 말로 부족하다. 이 책에서는 그 단어를 '내선일체'로 본다. 
 
일본과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신념. 그 신념을 도처에 표시한 인물들. 네 사람을 든다. 이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이광수다. 그러나 이광수 못지 않게 중요한 사람은 유진오이고. 나머지 두 사람은 해방 후 우리 사회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니... 장혁주와 최재서.
 
이광수야 조선 3대 천재로 인정받으면서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선생님으로 통했던 사람이니... 근대문학을 확립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2.8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사람이기도 하고, 상해임시정부에서 독립신문 발간에도 참여한 사람. 안창호를 따르던 그런 사람. 그러나 나중에 창씨개명을 하고,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전쟁에 참여하라고 독려한 사람. 해방이 되고 나서도 본인은 조선을 위해서, 조선인을 위해서 친일을 했다고 강변했다는 사람.
 
벌을 받기 위해 강변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신념이 그러했다는 것을 이 책에서 알 수 있다. 그는 곳곳에서 이런 자신의 신념을 내비친다. 
 
저자는 친일 행위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고, 다시 두 가지로 세분한다. 즉 친일의 양상이 네 가지가 있는 셈이다.
 
동화형 친일과 혼재형 친일... 동화형은 다시 문화와 혈통으로, 혼재형은 종족이냐 지역이냐로 나뉘는데... 문화적 동화형은 이광수, 혈통형 동화형은 장혁주, 종족형 혼재형은 유진오, 지역형 혼재형은 최재서로 대표된다고 한다. 
 
동화형이야 일본에 동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니 말할 것도 없고, 혼재형은 조선의 특성은 지키되 일본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니, 조금 다르다고 해도 일본에 종속된다는 점에서는 친일에 해당할 수밖에 없다.
 
동화형 중에서도 문화적 동화를 주장하는 이광수는 일본문화에 조선문화를 동화시킬 것을 주장한다. 일본이 동양정신의 정수를 계승 발전시켜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일본문화로 동화됨으로써 우리나라는 동양정신을 구현하고 서양에 맞설 수 있다는 주장이다. 혈통형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으련다.
 
혼재형 친일 중에서 유진오는 종족을 앞세운다. 내선일체를 주장하더라도 완전히 같아질 수는 없다는 것. 그래서 각자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융합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 이 논리는 어쩌면 유럽통합의 논리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독립국들이 연합하는 것과 식민지가 식민본국과 융합한다는 논리는 완전히 다르다.
 
식민지는 어쩔 수 없이 식민본국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탄압을 받으니. 이런 상태에서 자신들의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하면서 식민본국과 하나가 되는 길은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장기적으로 보면 식민본국 문화에 동화될 수밖에 없고, 식민정책은 강압이든 비강압이든 그런 쪽으로 정책이 흘러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어떤 말을 해도 친일을 한 것은 변명이 될 수 없다.
 
그것도 자신들의 내재적인 논리에 의해서 친일로 나아갔으니... 앞에서 왜 유진오가 중요하다고 언급했냐면 유진오는 우리나라 제헌헌법을 기초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가 문학에서 손을 떼고 법에 전념했다고 하지만, 친일을 그렇게 주장했던 사람이 해방이 되고 나서 우리나라 헌법을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 친일청산이 멀어진 큰 이유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네 가지 유형의 친일이 나오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내선일체' 그리고 '황국신민화'에 이은 '대동아공영'이라는 말로 압축이 된다고 한다.
 
다 일본의 논리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조선의 독자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일본에 동화되는 것이다. 일본적인 것, 천황으로 귀일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들 주장이 닿는 끝지점이다. 그러니 친일이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 친일은 서서히 풍화되어 우리들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사라져서는 안 된다. 친일은 기억해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 책은 일제시대 문인들의 친일행위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행위가 아니라 자신들의 논리를 따라서 적극적으로 행한 행위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친일행위를, 친일행위자를 기억해야만 한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역사이기 때문이다.
 
덧글
 
읽다가 소소한 오타가 눈에 들어왔는데... 그거야 문장에서 그냥 넘어갈 수 있다고 해도, 이 문장에 나오는 인물 이름은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둘 다 실제 인물이고 우리 문학사에서 언급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235쪽. 혼재형 친일 협력의 대표적인 문인인 유진오와 최서해는... 이라고 되어 있는데... 최서해가 아니라 최재서다. 이건 꼭 고쳐야 한다. 
 
최서해 : 본명 최학송. '탈출기, 홍염,기아와 살육' 등으로 유명한 소설가. 1932년 사망. 이 책은 1938년 이후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최서해가 나오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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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2 1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4 16: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19-01-12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실, 학자이자 교수가 쓴 최근 인문서에서 그 저자가 인용한 학자 성명이 잘못된 걸 보고 눈을 의심했어요. 그럼 인용할 수도 없죠....꽤 많은 페이지를 할애했는데 정작 이름을 잘못알고 언급하다니

2019-01-14 16: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생명조작 시대에 농사를 생각한다'

 

  이번 호가 내세운 작은 제목이다. '생명조작'과 '농사'가 한 자리에 있다. 같이 있을 것 같지 않은 낱말이 한 문장에서 보이는 것이 낯설다.

 

  '생명조작'을 '유전자조작식물(품)'로 바꿔 말하면 농사와 '생명조작'은 한 자리에 있을 수 있다. 우리가 흔히 'GMO'라 부르는 유전자조작식물 또는 유전자변형식물들이 이미 우리 식탁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용어에 대해서 한 마디 하면 GMO하면 웬지 중립적인, 그냥 과학적인 성과로 나온 식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을 우리말로 유전자 조작, 또는 유전자 변형이라고 하면 식탁에 올라서는 안 될 식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러니 언론에서도 용어를 쓸 때 GMO라는 말보다는 유전자 조작, 또는 유전자 변형이라는 말을 썼으면 좋겠다. 원자력 발전이 아니라 핵 발전이라고 써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위험성에 대해서는 누구나 인식하고 있지만 그 해로움이 아직은 밝혀지지 않은 그런 식품들. 하지만 단지 유전자조작식물들만 이야기하겠는가.

 

녹색평론은 유전자조작을 식물만이 아닌 동물, 아니 우리 인간에게도 적용하려는 과학계의 움직임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이들은 생명조작에 대해서 거침없이 나아간다. 과학기술이 인간의 통제 아래 영원히 있을 거라는 생각은 너무도 비현실적이다.

 

한번 세상에 나온 과학기술은 자기가 무슨 생명체인양 스스로 존재 방식을 찾아나간다.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극한까지 과학기술은 폭주한다.

 

그리고 인간이 그것을 깨닫고 통제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파국에 이르렀을 때다. 수많은 사람들이 경고를 하지만 쇠 귀에 경 읽기다. 들은 체도 하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자본의 논리가 철저히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윤과 편리...

 

이익을 남길 수 있는 과학기술이 있는데, 굳이 어렵고 이익도 별로 남지 않는 기술을 쓰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생명조작'은 식물을 넘어 동물, 그리고 인간으로까지 확대된다.

 

이번 호에서 언급하는 '생명조작'은 바로 우리 인간에 대한 생명조작이다. 유전자편집기술이라고 하는 특이한 기술로 유전자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게 된 지금 많은 과학자들이 윤리와 과학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가끔 윤리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과학자들이 나타나면, 그 과학자들에 의해 한번 과학기술이 실현되면 이상하게도 불가역적 현상이 되어 버린다. 이미 나타난 기술을 없앨 수는 없다. 사용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렇게 인류는 제 손으로 제 무덤을 파게 된다.

 

'현대의료와 윤리(야마구치 겐이치로), 신경과학과 생명정치(전방욱), 유전자편집기술,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김병수), 생명을 유린하는 생명조작기술(정형철), 생명과학의 딜레마(에르빈 샤르가프)'

 

이 글들이 바로 우리에게 '생명조작'의 위험성을 알려준다. 그런데, 이런 생명조작이 너무도 쉽게 이루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쩌면 우리가 '농사'를 소홀히 해왔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이 인간에게 행하는 '생명조작'을 인간이 지구에게 행하는 온갖 '조작'에 비유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지구의 생명을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듯이 이리 고치고, 저리 고치고 해왔다.

 

그러면서 지구의 '흙'에 대한 파괴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아무 생각없이. 농사는 이런 흙을 지키는 일이고, 또 지구를 지키는 일임에도 '조작'에 밀려 등한시되어 왔으니...

 

'생명조작'이 판치는 사회에서 '농사'는 점점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녹색평론이 '농사'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삶이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달의 뒷면을 탐사한다고 호들갑을 떨기 전에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지구가, 이 지구의 흙이 얼마나 사라지고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안 먹고는 살 수 없기 때문에 농사는 중요하다. 그것도 조작된 농사가 아니라 땅을 살리는, 지구를 살리는 농사가. 그래서 이번 호에 실린 김종철의 글은 시사하는 점이 크다. (뿌리를 잃은 삶, 농사를 망각한 정치)

 

농사를 망각한 정치는 뿌리를 잃은 삶이 되기 쉽다. 그리고 온갖 '조작'에 휘말리기 쉽다. 근본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길이 멀고 험하더라도 기본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 녹색평론 이번 호를 읽으며 다시금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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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8 0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09 15: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붕붕툐툐 2019-01-12 0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꾸준히 녹색평론을 읽으시는 kinye91님을 보니 저도 구독을 하고 싶단 마음이 생기네요^^

kinye91 2019-01-12 08:18   좋아요 1 | URL
처음에 녹색평론 읽고 충격을 받았어요. 내 생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구요. 구독하지 않아도 가끔 읽으며 어떤 생활을 해야할까 고민하고 실천하면 좋겠단 생각을 해요.

붕붕툐툐 2019-01-12 08:56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환경과 자연에 관심 많은데, 한동안 녹색평론을 잊고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박인하의 아니메 미학 에세이
박인하 지음 / 바다출판사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지금은 좀 멀어졌는데 한때 애니메이션, 아니 아니메라고 하는 일본 만화영화에 흠뻑 빠진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무슨 매니아처럼 일부러 찾아 보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본이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상당히 앞서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에서 웹툰이 인기를 끌자 이를 영화로 만든 경우가 많은데, 강풀 만화라든지 최근에 '신과 함께'와 같은 경우와 같이 웹툰으로 먼저 연재가 되고 인기가 많아지자 영화로 만드는 경우가 꽤 있다.

 

이 책을 읽으면 일본은 우리와 달리 만화로 인기가 있는 작품을 영화가 아닌 아니메(애니메이션)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사람이 연기하는 것보다는 애니메이션으로 했을 때 좀더 풍성한 표현을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는데...

 

만화에서 표현된 내용을 애니메이션이 좀더 잘 옮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영화로 만들었을 때 등장인물이 지닌 성격으로 인해 많이 제약되는 경우를 보아 왔기 때문이 아닌가 하기도 하고.

 

하여튼 일본과 우리는 좀 방향이 다르지 않나 싶은데... 아니메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이지 않을까 싶다. 지금까지도 계속 아니메가 만들어지고 있고 나름 인기도 끌고 있고.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애니메이션 하면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이 보는 장르로 치부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 드물다는 생각을 하고.

 

이 책은 15년쯤 전에 나온 책이다. 이때쯤만 해도 애니메이션이 꽤 인기가 있었을 때고, 이 책에는 구체적인 분석은 없고 그냥 이름만 언급되고 있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런 일본 아니메에 대해서 분석한 책이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미학을 8가지 코드로 정리해주고 있다.

 

종(끝), 영원, 하늘, 바다, 우주, 검과 피, 테크놀로지, 히로인과 섹슈얼리티

 

이렇게 여덟가지다. 이 중에 종(끝)이 처음에 나온 것은 일본 아니메가 패전과 관련이 있다는 것. 어쩌면 일본은 패전을 인정하지 않고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욕망을 아니메에 투사한 것은 아닐까 한다.

 

종말이 다가오는 지구, 인류, 그들을 구원하는 영웅. 그 영웅이 바로 일본이다. 일본은 결코 패망하지 않았다. 다시 시작할 것이다.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패배주의에 빠져들지 않게 만든 작품들이 바로 아니메가 아닐까.

 

이런 아니메는 그래서 영원을 추구하고, 광활한 하늘, 바다, 우주를 누비게 된다. 섬나라라는 특성을 지닌 일본이 섬을 벗어나는 환상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아니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에 섬을 벗어나게 해주는 기술이 바로 테크놀로지다. 일본은 이런 테크놀로지에 관심이 많다. 테크놀로지가 인류를 멸망으로 이끌지도 모르지만 인류를 구원해주는 것 역시 테크놀로지다. 다만 테크놀로지에 대한 관점이 일방적이지 않고 복합적이라는 것은 명심해야 한다. 사무라이 전통이 강한 일본에서 검과 피가 아니메의 한 코드를 장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남성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여성 캐릭터들을 섹시하게 포현하는 것 역시 상업성을 살리는 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고. 결국 아니메의 여성 캐릭터는 처음에는 남성들의 성적 환상을 자극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다가 점점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여성 주인공들이 등장했고.

 

이 책에서는 '쇼타콘'이라고 해서 여성 관객들의 관심을 끄는 어린 남성 캐릭터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일방적으로 한쪽만의 성적 환상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점들에 대해서 설명을 한 다음 1990년대 아니메의 새물결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사라지는 장르가 아니라 세월이 흘러도 지속되고 있음을, 아니메가 계속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단지 어린이물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선과 악에 대한 철학을 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렇게 아니메는 영화의 한 종류로써 계속 살아남고 변화해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미술에 많은 학생들이 관심을 가지고 진학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이런 애니메이션 분야는 아직도 가능성이 열려 있는 분야일지 모른다.

 

아직은 일본에 비해 많이 뒤떨어진 것이 사실이니까. 수많은 인기 만화들을 애니메이션으로 각색해 만들어낼 수 있는 여지가 많으니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단지 그림 실력만이 아니라 기술과학에 대한 지식 못지 않게 인문학적 지식이 있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일본 아니메에서 보여주는 선과 악에 대한 해석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이 책에서 잘 보여줬기 때문이다. 적어도 애니메이션이 영화의 한 분야로 자리를 잡으려면 아동-청소년용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왜 일본 아니메가 인기를 얻었는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이 책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어서 좋았다고나 할까. 또 책을 읽으며 과거를 여행하는 듯한, 예전에 봐왔던 애니메이션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고나 할까. 그런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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