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지키는 더러운 것들 - '정체성'이라는 질병에 대하여
김철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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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에 그리 편한 책은 아니다. 문학평론책도 아니고, 그렇다고 역사책도 아니고, 철학책도, 시류를 비판하는 책도 아니고... 어떤 쪽으로 분류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말이 솔직하다. 이렇게 책을 읽으면서도 이 책을 도서십진분류표에 따라 어디에 포함시켜야 할지 잘 모를 때가 많은데, 그 책 속에 여러 내용이 들어있을 때는 더 그렇다.

 

책을 쓸 때 저자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쓴다. 목적이 없더라도 글이 자신에게 왔다고 하는 저자들이 있더라도, 대개는 어느 한 분야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분야, 저 분야에 모두 속하는 책들이 나올 수 있다. 아니 나와야 한다.

 

세상 일이 그렇듯이 어느 한쪽으로 반듯하게 잘리는 일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참 다르게 이해되기도 해석되기도 한다. 그런 편향을 우리는 거부할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이 편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것도 한사코... 나는 불편부당한 사람이라고, 내 글은 불편부당하다고, 공정하다고 주장한다. 마치 자신에게 여러 편향이 있다고 하면 이상한 사람, 공정한 사람이 되지 못하는 양, 글도 마찬가지로 가치가 떨어지는 양 그렇게 여기게 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어느 한쪽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도 어느 한쪽에 고정시키려 한다. 이 때 동원되는 것이 바로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되는 존재들이다. 그런 존재들을 반대 편에 놓음으로써 자기 자리를 마련한다.

 

봐라, 난 이 쪽에 있다. 저들과 다르다. 이렇게 자신을 자리잡게 하기 위해 상대를 설정한다. 특히 이 상대는 자신과 동등한 존재가 아니다. 자신보다 못한, 아니 읽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역시 자기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존재들을 끌어들인다.

 

이들을 이 책에서는 비체 -非體-(앱젝트abject) 라고 한다. 온전한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 쓰레기가 되는 존재라고 한다. 이들을 자기 바깥에 규정함으로 자신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제목이 의미하는 바다.

 

'우리를 지키는 더러운 것들' 이라는 말은 그래서 더러운 것, 즉 내가 배제해야 할 것들이 존재하지 않으면 나를 규정하기가 힘들다는 말이다. 우리를 지킨다는 말을 '정체성'이라고 하면 이런 정체성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존재가 필요하다.

 

내 '정체성'은 긍정적이고 도덕적이고 올바름이고 정당성이 있다. 그런데 '정체성'이란 상대를 전제하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내가 긍정적이고 도덕적, 올바름, 정당성이 있으려면 상대는 이 반대에 있어야 한다.

 

상대는 나와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으면 안 된다. 이런 존재가 앱젝트(비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쉽게 이런 존재들을 찾아낸다면 바로 '빨갱이, 친일파'일 것이다.

 

제목이 되는 글은 바로 이런 논의에서 나왔다. (우리를 지키는 더러운 것들-오지 않은 '전후 戰後')

 

차분히 읽어보면 수긍이 가는 면이 많다. 우리를 하나로 묶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비체들을 동원했는지, 그것에 대한 깊은 생각 없이, 즉 나는 나라는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는, 나 역시 복잡한 여러 존재들이 섞여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나를 우리와 묶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길이 바로 내가 무시할 수 있는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정체성' 논의는 우리가 비판하는 파시즘과 맥락을 같이 할 수 있다. 국가주의가 문제라고 하지만 '정체성'을 추구하다 보면 자연스레 '국가주의' 논리에 함몰될 수 있다.

 

결국 '네 칼로 너를 치리라'라는 말은 같은 논리로 상대를 비판한다는 말이다. 굳이 니체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괴물과 싸우는 이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데, 네 칼로 치다보면 자연스레 자신도 같은 처지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상대를 전혀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상대를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상대에게 모든 것을 전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 내 안에 있는 또다른 나를 보는 것, 철저하게 나를 인식하고 상대에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

 

상대를 비판하기는 쉬운데 자신을 돌아보기는 힘들다. 내 밖에 있는 적을 상정하고 적을 공격하기는 쉽다. 그러나 적을 공격하는 자신이 적과 같아지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나 역시 '정체성이라는 질병'에 걸리게 된다.

 

이 책에서 저자는 그 점에 대해서 고민해봐야 한다고 한다. 단순하고 명쾌하게 분류하는 적과 나를 가르면 편하기는 하겠지만 이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 한다. 당연하게 여기면서 더 고민을 하지 않았던 문제들에 대해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그 문제제기, 받고, 더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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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1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01 14: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알벨루치 2019-02-01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명절연휴 잘 보내시고요 맛난거 많이 드십시오^^ㅋ

kinye91 2019-02-01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카알벨루치님도 명절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일곱 가지 교육 미신
데이지 크리스토둘루 지음, 김승호 옮김 / 페이퍼로드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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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이 없다. 이 말이 먼저 나온다. 우리나라 교육을 생각하면, 도대체 어떤 답이 있다는 말인지... 최근에 'SKY 캐슬'이란 드라마가 이야기 중심에 서 있나 보다.

 

서울대,고대, 연대를 영어 앞 글자를 따서 이름도 찬란한 하늘, SKY라고 하는 것도 우스운데, 이 대학들 중에서도 의대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는 드라마라고 한다. (사실 이야기만 들었지 잘 보지 않았지만 내용은 대충 짐작이 가니... 드라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여기에 무슨 창의융합, 배려, 관계지향, 민주시민, 공동체 그런 역량이 필요하고, 또 포함되는지 모르겠다. 오로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좋은 대학에만 들어가면 되는 것 아닌지...

 

그렇게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공부는 마치 다 끝낸 것처럼 다음부터는 공부하고는 멀어지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어떤 교육을 해야 하는가? 어떤 교육이 좋은 교육인가? 이 시대에 필요한 교육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들은 공허한 울림으로 되돌아오기 쉽다.

 

정말 답이 없다. 학교는 거대한 입시 기관이 된 지 오래고, 학교만으로는 부족해서 학원이 입시 기관으로 학교 위에 덧칠되어 있고, 이런 학원으로도 모자란지 무슨무슨 컨설턴트(사람들 참, 무언가 일을 할 때 외국어 잘 쓴다... 마치 있어 보이는 양)라고 하여 그 위에 또 덧칠이 된다.

 

여기서 지식이든 역량이든 어떤 것이 교육되는지 따지지 않는다. 오로지 좋은 교육은 좋은 대학에 보내줄 수 있는 교육이다. 혁신학교에 대한 비판으로 가장 많이 대두되는 것이 - 통계가 잘못되었다든지, 잘못 인용되었다든지 하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 학력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학력이라는 말은 진학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며, 진학이라는 말은 곧 좋은 대학에 얼마나 학생을 많이 보냈느냐로 결정이 된다. 여기서 대다수의 학생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을 습득했느냐, 그 지식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철저한 결과 중심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그것으로 평가를 하고 있는데, 교육과정은 핵심역량 강화, 학생의 배움 중심 교육, 창의융합 교육, 공동체 정신 함양 등 좋은 말을 다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4차 산업혁명 시기에는 지식위주의 교육은 안 된다고, 프로젝트 위주의 수업을 해야 한다고 한다. 이 책은 이런 교육과정을 이루고 있는 기본 지침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는 책이다.

 

영국 교육과정을 비판한 책이고, 그것도 2013년도에 나온 책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지금 교육과정이 2015년에 개정된 것이고, 이때 영국을 비롯한 여러나라 교육과정을 참조했다고 하니, 우리나라 교육과정에 대해 생각하는 참조 자료로 삼아도 부족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론적 배경-> 적용 사례 -> 왜 미신인가?라는 세 과정을 통해서 일곱 가지 주장들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일곱 가지 미신을 먼저 살펴 보자. 아니 미신이라는 말보다는 신화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하다. 미신이라는 말에는 이미 좋지 않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반면에 신화라는 말에는 좋음이라는 의미가 함께 하고 있으니.  

 

지식보다 역량이 더 중하다

학생 주도의 수업이 효과적이다

21세기는 새로운 교육을 요구한다

인터넷에서 모든 것을 찾을 수 있다

전이 가능한 역량을 가르쳐야 한다

프로젝트와 체험 활동이 최고의 학습법이다

지식을 가르치는 것은 의식화 교육이다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런 생각이 교육 현장에서 적용되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들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한다. 역량이 어떻게 발휘되지? 기본적인 지식도 없이 역량이 발휘될 수 있나? 또 학생 주도의 수업이 가능해지려면 어느 정도 지식이 있어야 하지 않나? 아무런 지식도 없는 학생들에게 체험 해 봐라 토론 해 봐라 하면 무엇이 나오지, 제자리에서 겉돌거나 너무도 얕은 수준에서 학습이 끝나지 않나. 뭐가 있어야  전이가 되고, 아는 게 조금이라도 있어야 검색을 하지... 새로운 교육이란 과거를 몽땅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지식 위에서 시작하는 것 아닌가.

 

위대한 과학자 뉴턴이 왜 위대한가? 모든 과거를 부정하고 새로 시작했기 때문인가? 그는 과거를 바탕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위대한 과학자가 된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자신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 서 있었기 때문에 과학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77쪽)

 

스마트폰만 있으면 더 많은 지식이 검색되는 시대, 손 안에 컴퓨터를 들고 다니는 시대에 지식 운운은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로 들린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자. 검색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지? 많이 알고 있는 상태에서 검색하는 것과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검색하는 것이 같은가? 아마도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조목조목 자신의 근거를 들어서 교육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주장하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이 일곱 가지 교육 미신을 그대로 적용할 경우 사회 경제적 차이가 교육에서도 그대로 차이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이미 가정에서 많은 지식을 쌓고 학교에서 이런 학습을 하는 아이들과 가정에서 지식을 쌓을 기회가 없는 상태에서 학교에서 이런 학습을 하는 아이들은 출발점부터 다를 뿐더러 결과도 분명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민주교육, 평등교육을 주장하는 사람들, 그리고 공동체를 중시하는 교육을 하는 사람들, 이 점에 대해서 고민해 봐야 한다. 무엇이 불평등을 없앨 수 있는 교육인지...

 

하여 저자는 학교에서 반드시 가르쳐야 할 핵심 지식을 정리해야 한다고 한다. 어느 수준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지식을 체계화 해서 교육해야 한다고, 그것이 먼저 시행되어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학습자 중심, 프로젝트, 체험 활동, 역량 강화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한다.

 

또한 지식과 역량은 따로따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것임을 명심하라고 한다. 교육현장에서 결코 지식을 홀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깊은 토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교육에 답이 없다는 말이 나오지 않게, 사회적으로 방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SKY 캐슬이라는 드라마가 가상 현실이 되게끔 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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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31 09: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31 1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집 뒤에 실려 있는 해설을 인용한다. 이것이다. 무언가 중심 의미를 파악하려 하지 말자. 제목이 '사춘기'다. 질풍노도의 시기. 이성보다는 감성이 앞서는 시기. 논리보다는 좌충우돌, 자신이 무슨 말을, 무슨 행위를 했는지도 잘 생각하지 않는 시기.

 

  시집 제목이 '사춘기'인데, 시집을 읽으면서 무슨 의미를 발견하려고 애쓴다. 시인은 시인이고 나는 나다. 시인이 무슨 이야기를 분명 전달하려 했을 것이다.

 

  언어는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다. 이 생각에 매여 있다. 그렇게 시집을 읽어간다. 그러다 문득 길을 잃었음을, 도무지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런 사춘기 시기에 있는 사람에게 자기를 명확하게 설명하라고 하는 꼴이라니... 이건 아니다. 그렇게 시집을 덮는다. 마침 해설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 하지 말라는, 아니 의미가 아니라 일목요연한, 한마디로 이 시의 주제는? 과 같은 그런 의미는 찾지 말라는 말을 읽고, 안도한다. 그래, 뭐 있겠어. 그냥 시집을 읽으면 되는 거야. 무의미 시도 있는데 뭐... 이렇게 스스로 위로를 한다.

 

이 책은 당신의 편집증을 피해 가고 싶어한다. 모든 언어가 하나의 완고한 의미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이미 중심을 붙들고 놓지 않으려는 자이다. (141쪽)

 

사춘기를 대하듯 이 시집을 대한다. 하나의 완고한 의미, 그것 포기한다. 그냥 읽는다. 그렇게 여럿이 한 시에 중첩되어 있다고 느끼고 만다. 그래 명료하지 않은 그 무엇들이 이렇게 겹겹 쌓여 시를 이룰 수도 있지 뭐... 그렇게...

 

그럼에도 한 시... '문은 안에서 잠근다'는 시. 문은 안과 밖을 이어주는 존재다. 문을 밖에서 잠글 때는 주로 사춘기 이전이다. 사춘기 이전에 문은 밖에서 부모들이 잠근다. 이는 자신보다 다른 사람에게 더 의존하는 시기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춘기가 되면 문은 안에서 잠근다. 밖에서는 열려고 하지만 안에서 기를 쓰고 잠든다. 나만의 것에 대한 인식이 싹트고, 나만의 세계에 있고 싶어하기도 한다. 하지만 완전히 잠그지는 않는다. 밖과 연결고리를 남겨 놓는다. 언제든지 밖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어느 하나에 매여 있지 않는다.  

 

문은 안에서 잠근다

 

  후려갈기듯이 그가 문을 닫았다고 생각했을 때, 문은 제대로 닫히지 않았다. 문은 반발하여 조금 열린 채 떨리고 있었다. 그가 부르르 떨고 있는가? 오래 참으셨군, 나는 빈정거렸지만

 

  나는 바닥을 드러낸 채 그의 침대에서 너무 오래 기생했다 두께 없는 얄팍한 사랑을 원고지 구기듯이 했네 나는 썼지만

  구겨진 그를 펴서 다시 읽고 싶지 않았네 나는

  썼지만 그는 때때로 아, 벌어져 있었네 그의 침대에서

  나를 핥고 지나가는 문장들을 나는 너무 쉽게 받아들였네 그가 없는 그의 침대에서

  나는 뜨거워지지, 그러니 그가 없는 그의 침대에서 참을 수 없었네 오래 참으셨군,

  나는 빈정거렸지만 내가 나쁘지 않은가?

  문을 닫았다고 그는 믿지만 문의 반동은 그의 행위에서 비롯하니, 이것이 내가 받은 교훈의 전부다

 

  이제 내 낙서는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다시 바람이 나침반인가? 문이 자꾸 펄럭이니 문 밖의 풍경은 빠르게 늘어났다가 줄어들고 늘어……나는 중얼거린다.

  문은 안에서 잠근다.

 

김행숙, 사춘기. 문학과지성사. 2016년 초판 9쇄. 57-58쪽.

 

안과 밖, 나와 그, 글과 그, 글과 나... 여럿이 하나로 섞여 있다. 하나라고만 생각했을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그것들이 분리되기 시작한다. 하나에서 분화되기 시작한다. 나는 나, 그는 그, 글은 글. 이렇게 내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나를 인식하기 시작할 때 문을 잠그는 주체, 문을 여는 주체는 바로 나다. 나는 그렇게 세상의 중심이 된다. '사춘기'는 이렇게 내가 안에서 문을 잠그기 시작할 때 시작한다.

 

이것도 중심 의미를 파악하려는 언어는 표현의 전달이라는, 소통이라는 생각을 깔고 있는 행위다. 에고... 여전히 말은 소통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쩌랴. 무의미에서도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바로 인간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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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 - 개정증보판 정재승의 시네마 사이언스
정재승 지음 / 동아시아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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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영화를 보면서 실제로 가능한 일일까 하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와 미래로 가는 여행이 가능할지? 빛보다 빠른 물체를 만들 수 있다면 타임머신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지금 이 시공간에 얼마나 많은 시공간이 겹쳐져 있다는 것인지, 우주 여행이 과연 가능할까 등등 많은 의문이 일어나곤 했었다.

 

이런 일이 나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던지, 과학자들도 영화를 보면서 과학에 대해서 생각을 하나 보다. 정재승이라고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과학자가 젊은 시절에 쓴 글을 모아놓은 책이다. 초판은 1999년에 나왔다고 하니, 지금으로부터 20년전. 이 책에 나오는 무어의 법칙에 따르면 '마이크로칩에 저장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이 18개월마다 두 배씩 증가한다'(347쪽)고 했는데... 지금 과학기술에 비하면 좀 오래된 이야기들이 많이 실려 있다고 할 수는 있지만.

 

단지 저장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만이 무어의 법칙을 따를까? 그렇지 않다는 생각. 컴퓨터와 관련된 기술 또 과학기술이 20년 전에 비하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하지 않았나 싶다.

 

이 책에서는 스마트폰이 전세계인의 손에서 사용될 줄 몰랐을 거고, 당시 플로피 디스켓(아마 이게 무엇인지 지금 청소년들은 알지도 못할 것이다)이 쓰이던 당시에 그것보다 크기는 작지만 엄청난 양을 저장할 수 있는 이동식저장장치(USB)가 쓰이고 있는 지금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으니...

 

심지어는 화성에서 생활하는 영화(마션)까지 나왔으니 지금 읽으면 조금 시대에 뒤떨어진 감을 주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에 나오는 과학에 대한 탐구를 막지는 못한다.

 

오히려 지금과 비교하면서 읽을 수 있어서 더 좋을 수도 있다. 중국은 달의 뒷면을 촬영하여 보내주고 있기도 하니, 과학기술의 발달 역시 무어의 법칙을 따른다고 할 수 있다.

 

조금 오래 되었더라도 이 책은 영화에 나오는 과학적 사실들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 점이 영화를 좀더 잘 볼 수 있도록 해준다. 마찬가지로 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따분한 사람, 오로지 실험실에 박혀서 연구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도 덤으로 알려주고 있고.

 

세상이 발달하게 만든 것은 상상과 과학이 아닐까 한다.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질문과 같이 상상이 과학을 이끄는가, 과학이 상상을 이끄는가 하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고 본다. 둘은 함께 할 때 최적의 효과를 낼 수 있다.

 

단지 상상이라고 했던 것들이 과학의 힘으로 현실이 되고, 과학은 상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더 발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상상과 과학은 우리 세상을 발전으로 이끄는 두 힘이고, 이 둘이 잘 드러나 있는 매체가 바로 '영화'다.

 

영화는 상상과 과학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영화란 예술 자체가 과학기술의 발전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고, 영화가 우리에게 이렇듯 가깝게 다가오게 된 것에도 과학기술에 힘입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영화의 내용을 이루는 것들 중에 과학과 관련이 안 된 것이 거의 없으니,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영화는 과학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여 지금은 말이 안 되는 내용이 영화에 나오더라도 이것이 영원히 말이 안 된다는 말은 될 수 없다. 과학자는 지금 영화를 지금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비과학적이라고 상상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몇몇 과학자들은 영화에 나온 상상을 기반으로 자신의 과학을 발전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과학은 상상을 현실로 만들고, 다시 상상은 과학을 추동하여 상상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영화는 이 둘의 모습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을 때 훌륭한 영화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기도 하고.

 

참으로 많은 영화들, 그리고 많은 과학적 지식들이 이 책에 나온다. 딱딱하게만 여겨온 과학을 일상으로 데라고 왔다는 표현을 할 정도로 과학에 대해서 가깝게 여기게 해주는 책이다. 과학을 실험실 또는 책상 위의 지식으로만 머물지 않게 해주는 책이기도 하고.

 

여러 군데서 나오기도 했지만 우리가 뀌는 방귀에 불을 붙일 수 있다는 사실... 방귀를 참으면 몸에 좋지는 않다는 것(236쪽)도 나오지만, 방귀로 연료를 개발할 생각으로 징용자들에게 억지로 고구마를 먹이고 ...방귀를 수거했다는...일제시대 일본군들의 만행도 나오니...(234쪽)

 

과학이 이처럼 어렵지 않다는 것, 우리 실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상상 속에서서 과학이 실현될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 이 책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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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기의 시네마법정
홍승기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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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이중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학생들이 공부에 흥미를 잃은 학년말에 시간 때우기로 소비되는 재료로 다가오기도 한다.

 

한때 학교에서 소설책을 읽으면 공부 안 하고 뭐하고 있냐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아마도 지금은 50-60대가 된 사람들 학창시절이 그러했으리라. 이와 비슷한 일이 영화에도 일어나고 있으니, 영화를 학교에서 보면 공부는 안 하고 엉뚱한 짓한다는 소리를 들으리라.

 

소설과 영화. 시간을 죽이는 그런 재료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소설을 많이 읽고 자란 세대가 제대로 성장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없듯이, 영화를 많이 보며 자란 세대가 제대로 자라지 않았단 증거 또한 없다.

 

하긴 요즘은 영화도 지겨워서 못 본단 소리가 나온다. 뭐, 영화보다 더 재미있는 것들이 많은데, 1시간 30분에서 길게는 3시간이나 걸리는 영화를 보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는 말도 나오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영화는 소설 못지 않게 재미도 있고 생각할거리도 제공하고, 다방면으로 유익할 수 있는 매체이다. 어떤 목적을 지니지 않고 영화를 봐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영화를 다른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다.

 

융합이든 통합이든 이런 말 대신에 그냥 영화를 보면 아무 생각없이 시간만 보내는 사람은 없다. 마음 속에서 어떤 울림을 받든, 아니면 도대체 왜 이딴 영화를 만든 거야 하고 비판을 하든, 또는 영화에 출연한 배우를 비평하든, 영화 내용에 대해서 생각을 하든, 감독의 표현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보태든 어떤 활동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화는 영화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영화를 매개로 하여 다른 것들과 연결이 된다. 자연스레 융합, 통합이 된다. 이 책은 그런 영화의 속성 중에서 '법'과 연관지어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가 사람이 사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니 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우리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일은 법정에 가지 않는 것이겠지만, 법정에 가지 않기 위해서도 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영화 속 많은 주인공들은 이렇듯 법과 마주치고 있다. 그런 마주침을 통해 우리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법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총 6부로 나뉘어져 있는 이 책은 '성'에 관한 것에서 거대 권력과 제도로, 그리고 인권, 표현의 자유로 나눠 영화를 통해 법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영화에 나온 법정이나 또는 법과 관련 있는 내용을 설명해주면서 법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기에 영화와 법에 대해서 어렵지 않게 다가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쟁점을 잡아 자기 생각을 정리한다면 더 좋을 것이다. 이 책이 나온 다음에 시간이 많이 흘러 더 많은 쟁점들이 나왔겠지만, 이 책에서 제시한 내용들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단지 판결이 바뀐 것이 있을 것이고 사람들 의식이 변해서 옛날 법체계에 불과해진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겪었던 일들을 지금도 우리 역시 겪고 있을 수 있다. 그런 점에 대해 간접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다만 많은 영화, 많은 사례들을 다뤄서 조금 소략하다는 느낌이 있는데, 이를 좀더 집중해서 자세히 풀어나갔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일반인들이 법에 접근하기 쉽게, 법을 무슨 딴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이런 글쓰기 방식을 택했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래도 영화 속에서 법조인 역할을 맡은 배우들이 하는 행동이나 대사 중에 실제 법원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것들을 알려주고 있고, 주를 통해서 자세한 사항을 안내해주고 있다. 아마도 그런 사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려면 더 많은 참고자료를 찾는 수고를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각 영화와 법에 대한 설명을 하는 글이 끝난 다음에 그와 관련된 자료들을 제시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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