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에네이스
아우구스테 레히너 지음, 김은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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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리스 로마 신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품이 바로 [아에네이스]이다. 아에네이스라는 뜻은 아에네아스의 이야기라고 한다. 트로이 영웅 아에네아스가 트로이가 멸망한 다음 이탈리아까지 모험을 하면서 겪었던 이야기.

 

아이네이아스라고도 하는데, 로마 표기를 따라 아에네아스라고 이 책에서는 번역을 했다. 그리스에서 수많은 영웅들이 나오고, 모험담이 나오듯이 지금은 이탈리아가 된 로마 역시 자신들의 이야기가 필요했나 보다.

 

아에네이스가 로마 시대, 그것도 베르길리우스에 의해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지어졌다고 하니 말이다.

 

결국 로마 역시 위대한 신화, 조상을 지닌 나라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아에네아스의 모험은 오딧세우스의 모험과 비슷하다. 신들의 분노로, 특히 아에네아스는 헤라(이 책에서는 유노로 나온다. 그리스에서는 헤라, 로마에서는 유노라고 부르니까) 여신에게 미움을 받아 로마에 정착하기까지 온갖 고난을 겪게 된다.

 

하지만 로마 사람들 역시 자신들의 기원을 그냥 인간으로 둘 수는 없었나 보다. 아에네아스를 여신의 아들, 특히 아프로디테(비너스, 베누스)가 인간과 관계하여 낳은 아들이라고 하니, 그들도 신성한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하기 위한 방책이었을 거다.

 

온갖 모험, 그러나 운명은 정해진 것. 이 작품이 특이한 것은 바닷길에서 겪는 모험은 오딧세우스의 모험과 비슷하지만, 후반부에 이탈리아에 도착해서 겪는 모험은 트로이 전쟁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로마가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계를 정복하고, 정복한 민족들을 나름(?) 평등하게 대했다는 것이 이 작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후반부에는 온갖 전투 장면들이 나오고, 그런 처참한 전쟁 위에 건설된 것이 로마라는 것.

 

로마는 하루 아침에 건설되지 않았다는 것이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1'에 나오는 유명한 말인데, 이 책을 읽다보면 여러 번의 예언이 나온다.

 

아에네아스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어떤 예언을 듣게 되는데, 그가 온갖 고난을 겪게 되겠지만 결국 위대한 나라의 시조가 될 것이라는 것... 그의 아들, 아들, 아들... 주욱 가서 로물루스에 의해 건설되는 로마... 로마의 시조가 되는 아에네아스의 뒤를 이어 무려 몇백 년 뒤에야 로마가 건설되는 것이니...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저승에 간 아에네아스가 죽은 아버지 안키세스의 입을 빌려 이렇게 위대한 로마가 건설될 것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253-255쪽) 

 

오스트리아 사람인 아우구스테 레히너가 베르길리우스의 작품을 현대에 맞게 편역했다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에서 우리가 아는 인물들이 안케세스의 입을 통해 말해지는 이 장면이 바로 로마 건국의 장대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온갖 모험을 겪은 아에네아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은 사랑과 모험, 그리고 전투, 평화를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전투 장면에서 군인들이 불평하는 소리, 왜 저들 때문에 우리들이 죽어나가야 하는가 하는 말은 전쟁에 대해서 더 생각하게 해준다.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백성을 위한? 아니다. 진정 백성을 위한다면 전쟁을 피해야 한다. 자신들의 권력,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피하지 않는 것일테니 말이다.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는 말로.

 

트로이 인들 중에 몇몇은 이탈리아까지 가기를 거부한다. 지금도 살 만한 곳이 있는데, 왜 이곳을 버리고 가야 하나? 이것은 정복을 거부하는 사람들 이야기로도 읽힌다.

 

이렇게 전쟁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와 또 꼭 그렇게 다른 곳으로 가서 전쟁을 벌이면서까지 정착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는 작품이 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나라들을 정복한 로마... 그 군사력 위에 자신들의 부를 쌓아올린 로마. 그러나 로마는 꼭 군사력만으로만 이룩된 것은 아니다. 군사력만으로는 나라를 유지할 수 없다. 어쩌면 아에네이스는 그 점을 생각하도록 하는 작품일 수도 있다.

 

전쟁으로 멸망한 나라의 영웅이 다른 나라에 가 다시 전쟁으로 나라를 세운다? 그 와중에서 겪게 되는 참화를 중심으로 우리는 이 작품을 읽어야 한다. 정복의 서사로 읽는 것이 아니라 전쟁 비극의 서사로, 그래서 평화를 노래하는 작품으로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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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아
아우구스테 레히너 지음, 김은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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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더 말할 것이 없다. 오디세우스 또는 오뒷세우스, 오디(뒤)세이라고 불리는 인물에 대해서는 너무도 잘알기 때문이다.

 

서울시교육청에서 운영하는 프로젝트 수업을 하는 학교 또한 이름이 오디세이 학교이니 말이다. 그만큼 모험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이 바로 오디세우스 이야기다.

 

지혜로운 사람, 그러나 다른 말로 하면 약삭빠른 사람, 그는 자기 이익을 위해 양보를 하지 않기도 한다.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게는 복수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가 이렇게 그리스에서 영웅으로 자리잡았을까?

 

누군가 그랬다. 오디세우스의 모험은 바로 그리스 민족의 해양 탐험의 역사라고. 그가 바다에서 무려 10년이나 표류하는 것은 그리스 민족이 바닷길을 탐구하고 알아가는 과정을 은유한 것이라고.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에서 영웅으로 추앙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그의 이야기, 줄거리야 너무도 잘 알려져 있으니 생략해도 되는데, 호메로스의 작품이 서사시라고 한다면, 이 책은 오스트리아 사람이 산문으로 바꾼 것이다. 아우구스테 레히너라는 사람이 서양 고전을 현대에 맞게 고쳐 쓴 작품이라고 하는데...

 

영국이 자랑하는 세익스피어가 쓴 작품들이 희곡이라서 어린 시절에 잘 읽지 않는 것을 찰스 램이 시대에 맞게 다시 쓴 것을 읽는 어린이들이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레히너 역시 어린이, 청소년들을 위해서 고대 작품들을 다시 썼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읽기에 편하다. 줄거리도 잘 들어오고. 인물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작가의 개입이 두드러져 오히려 긴장감을 떨어뜨리기도 하지만, 결국은 승리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게 해서 더 편하게 읽을 수 있기도 하다.

 

아마 이 책을 읽으면 오디세우스 이야기가 잘 정리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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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안무치(厚顔無恥)

 

  낯짝이 너무도 두꺼워 도무지 부끄럼을 모르는 상태. 홍윤숙이 낸 열다섯 번째 시집이라고 한다. "지상의 그 집" 

 

  이 시집을 읽으며 이 단어를 모자처럼, 옷처럼, 화장처럼 제 몸에 달고 사는 몇몇 국회의원들이 생각났으니... 

 

  지상의 그 집은 우리가 살아가는 집이기도 하고, 지구이기도 하고, 그리고 우리 영혼이 깃들여 있는 몸이기도 하다. 그런 집이 낡아가고 서서히 무너져 가는 것을 지켜보는 나이.

 

시인은 1925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이 시집이 나온 해는 2004년이니 시인 나이 80세다. 80생을 살아오면서 시인이 느꼈던 것, 이 시집에 잘 나타나 있다.

 

나이듦.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게 되는 시기로 접어들었다는 것. 시인은 2015년 지상의 집을 떠나 하늘의 집으로 떠났다. 그렇게 시세계에서도 떠났는데...

 

시인은 이 시집의 서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대의 아픔에 가슴 저려도 / 세상과 싸울 기개와 의지 없으니 / 시는 나 혼자 살아가는 나만의 놀이였다 / 다만 시에 의해 어지러운 세상 / 바르게 살아가는 길을 보았으나 / 그 길은 번번이 멀고 험난하여 / 무시로 절벽에 부딪혀 무릎 꿇었다 (위난한 시대의 시인의 변 중 3연 중 일부. 12쪽)

 

이렇게 시인은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려 애썼다. 그것이 시의 힘이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 시를 읽으며 후안무치라는 말이 떠올랐으니...

 

요즘 국회에서 자유한국당 몇몇 의원이 한 짓을 생각하면... 표현의 자유? 그건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혐오표현... 지독한 언어 폭력이다. 그것도 국민을 대변한다는 국회에서, 그런 말도 안되는 짓을 하고도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다니...

 

자기 당 의원이라고 감쌀 줄만 알지 질타할 줄 모르는 국회의원들이라니... 국민을 대변한다는 것 치고는 너무도 낯짝이 두껍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의 민낯이라고 할 수 있다.

 

도편추방제, 국민소환제

 

그리스 역사를 읽다가 이 제도가 머리 속에 계속 남았다. 악용된 경우도 있었지만, 권력자를 민중이 합법적으로 쫓아낼 수 있는 제도.

 

요즘말로 하면 국민소환쯤 되려나? 우리나라는 뽑을 권리(아마도 의무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듯)는 있어도 쫓아낼 권리는 없으니... 한번 뽑히면 법에 걸리는 위법행위를 해 재판을 통해 실형을 받지 않는 한, 4년동안 무슨 짓을 해도 쫓겨나지 않으니...

 

어찌할 수가 없다. 이런 제도를, 적어도 국민소환제 정도는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법률 제정을 어디서 하지? 국회!!!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도 있는데, 선거제도 개혁도 못 하는 것들이, 자기들 족쇄를 마련할 리가 없지. 그러니 답답할 수밖에.

 

 두 그루 은행나무

 

두 그루 은행나무가

그 집 앞에 서 있습니다

때가 오니 한 그루는

순순히 물들어 황홀하게

지는 날 기다리는데

또 한 그루는 물들 기색도 없이

퍼렇게 서슬 진 미련 고집하고 있습니다

 

점잖게 물들어 순하게 지는 나무는

마음 조신함이 그윽해 보이고

퍼렇게 질려 아니다 아니다 떼를 쓰는 나무는

그 미련하게 옹이 진 마음 알 수는 있지만

 

웬지 일찍 물든 나무는 일찍

물리를 깨달은 현자처럼 그윽해 보이는데

혼자 물들지 못하고 찬바람에 떨고 섰는 나무는

철이 덜 든 아이처럼 딱해 보입니다

아마도 그 집 주인을 닮았나 봅니다

 

날마다 두 그루 나무가 마주 서서

서로 다른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

그 집 앞 가을이 올해도 깊어 갑니다

 

홍윤숙, 지상의 그 집. 시와시학사. 2004년. 60-61쪽.

 

꼭 어느 정당을 떠올릴 필요는 없지만,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지만,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모 정당이 자꾸만 생각난다. 이 시를 읽으면.

 

'철이 덜 든 아이처럼 딱해보'였으면 그나마 동정이라고 하겠지만, '미련하게 옹이 진 마음'만 드러나고 있으니...

 

도편추방제, 국민소환제, 그런 것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느끼게 하는 몇몇 국회의원의 행태... 그들을 감싸는 정당들.

 

나이들어 가면서 세상을 좀더 그윽하게 바라보는 눈을 가진 시인의 시집을 읽으며, 에고, 이런 떨거질은 나이를 도대체 어디로 먹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드니.

 

그들이 헛소리 하기 전에 제발 좀 이런 시를 읽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지들이 선량(選良)이라고 하면... 선량(選良)이라니... 무슨 양식있고 훌륭한 사람으로 뽑혔다는 말을 쓰다니... 에고. 정신 못 차리는 은행나무 같은 그들을 어찌해야 할까.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선량(選良)'의 뜻풀이. 이런 뜻풀이나 국회의원들이 알고는 있을지...

 

선량 (選良)

「1」뛰어난 인물을 뽑음. 또는 그렇게 뽑힌 인물.

「2」법률‘국회 의원’을 달리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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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괴물을 말해요 - 대중문화로 읽는 지금 여기 괴물의 표정들
이유리.정예은 지음 / 제철소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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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이라고 불리는 존재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다. 잘 모르는 존재에 대해서 두려움을 지니고 그것을 우리와 분리하기 위해 '괴물'이라고 부른다.

 

'괴물'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그 존재는 배척해야 하는, 제거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이미 우리와 하나가 될 수 없는, 함께 할 수 없는 존재, 그 존재가 '괴물'이다. 그래서 '괴물'은 퇴치되어야 한다.

 

그러나 '괴물'은 언제라도 다시 나올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성과 합리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 인식이 도달하기 힘든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마다 '괴물'은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온다. 형태를 달리 해서.

 

이 책은 대중문화에서 만날 수 있는 '괴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처음에는 우리 눈에 보이는 '괴물'을 이야기한다. 뱀파이어, 좀비로 시작한다. 우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존재. 그러나 이들은 우리와 다른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 한다. 어쩌면 우리 안에 있는 죽음이나 영생의 문제를 '괴물'의 모습을 통해 투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가다가 색다른 괴물이 나온다. 이를 괴물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우습지만,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이 자신들의 권력에 위협이 될 때 이렇게 표현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팜므 파탈'이다. 치명적인 아름다움으로 남성을 유혹해 파멸에 이르게 하는 존재.

 

이것들은 남성중심 사회가 불러일으킨 공포라고 할 수 있다. 자신들이 여성들을 이끌어야 하는데, 반대로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자신들 욕망이 결국 파멸에 이르게 하는 길이라는 두려움. 그런 것들이 이렇게 팜므 파탈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 '팜므 파탈'은 우리가 말하는 '괴물'과는 좀 다른 의미에서 접근해야 한다. 페미니즘 운동이 이런 '팜므 파탈'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많이 고쳐놓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다음에는 눈에 보이지만 이질적인 존재..  외계의 존재를 등장시킨다. 우리는 모르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외계 존재는 늘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이를 '괴물'로 표현하든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로 여기든 처음에는 '괴물'로 다가오게 도니다. 우주시대를 열어가면서 더이상 두려움을 느낄 존재를 지구상에서 찾기 힘들 때 사람들은 눈을 외계로 돌린다. 광활한 우주에 우리가 아직도 모르는 존재들이 있을 것이고, 이런 존재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위협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이렇게 보이는 존재들을 이야기한 다음에 보이는 존재 뒤에 있는 더 큰, 그러나 잘 파악이 안 되는 '괴물'을 이야기한다. 바로 환경오염.

 

영화 괴물이나 '심슨'에서는 환경 파괴로 우리가 얼마나 고통을 받을 수 있는지, 그러나 환경 파괴를 일으키는 주범을 제거하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평범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권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한 발 나아가면 자기 이익을 위해 부정을 저지르는 자들의 심리,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 사이코 패스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 역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에 '괴물'에 포함된다.

 

이런 '괴물'들은 어쩌면 국민을 위해서, 노동자들을 위해서, 또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일한다는 명분으로 오히려 그들을 힘들게 하는 권력자, 자본가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생각을 일반 사람들은 도저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둘을 합치면 보통 사람들을 오히려 '괴물'로 치환함으로써 자신들의 잘못을 은폐하려는 권력의 모습이 바로 '괴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사람들은 이렇게 구조 속에 숨어 있는 '괴물'을 보지 못한다. 이는 다음 장에 나오는 드라큘라도 마찬가지다. 사람 피를 빠는 존재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드라큘라를 더 큰 구조가 된 '괴물'로 이야기한다. 바로 자본주의다. 그것도 독점자본주의. 

 

소상공인들, 중소기업 등등을 집어 삼키는 거대 기업, 재벌. 그들을 드라큘라로 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뒤에 숨어 있는 '괴물'을 찾아내고 그들과 싸우려고 하는 것, 마지막 장에 나온다.

 

사회 권력이라는 거대한 '괴물'과 맞서 싸우지만 결국 파멸해 가는 사람들 이야기. 그 사람들은 '괴물'의 배 속에서 싸우지만 결국 '괴물'의 배를 뚫고 나오지 못한다. 그렇지만 '괴물'이 움찔대게는 할 수 있다. '괴물'의 움찔거림,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한둘 나오게 하는 것. 비록 대다수의 사람들은 '괴물'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괴물' 속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 '괴물'에 틈을 내는 사람들은 늘 존재함을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 대중문화에서 괴물이 나오는 이유는, 분명 이 사회에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극복해야 할 그 무엇이 '괴물'로 은유되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괴물'을 인지하지 못했을 때 전혀 '괴물'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을 때 두려움,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잘 모르는 존재에 대해서는 그런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책은 '괴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우리는 '괴물'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대처를 하기 위해서.

 

영화나 소설, 만화, 드라마에 나오는 온갖 '괴물들' 단지 상상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다. 그런 '괴물'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들 삶을 찬찬히, 깊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괴물'은 우리를 비춰주는 거울일 수가 있다. 아니 거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 점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준 책이다. 재미도 있고 다른 관점에서 괴물을 보게 하기도 하고 여러모로 읽을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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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이라는 유령 - 우리는 왜 4차 산업혁명에 열광하는가
김소영 외 지음, 홍성욱 기획 / 휴머니스트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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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어떤 것에도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을 붙였다. 이제는 그렇게 시대가 바뀌었다고, 뒤쳐지면 안 된다고...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해야 한다고, 교육도, 경제도, 사람도...

 

그런데 그렇게 호들갑을 떤 지 몇 년 -아마도 2016년부터 이 말이 유행이 되기 시작했다고 알고 있는데- 이 지났는데, 뭐가 달라졌는지 잘 모르겠다. 여전히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을 뿐이다.

 

하루만 지나도 확확 바뀌는 이 시대에,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나온 지가 2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그냥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해야 한다든지, 그런 시대에 맞는 일자리, 또는 사람을 양성해야 한다는 말만 나오고 있다.

 

그만큼 실체가 없다. 무엇이 4차 산업혁명이지? 우리 삶을 어떻게 바꾸지? 어떻게 대비해야 하나?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추상적이다.

 

그냥 그 시대에는 일자리가 많이 없어질 것이고, 기계가 또는 인공지능이 일을 대부분 할 것이기 때문에 엄청난 실업자가 생길 것이며, 과학기술이 뒤떨어진 나라는 도태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더 살기 힘들어지는 것을 '혁명'이라고 하나? '혁명'이라는 말 속에는 사람들의 삶이 더 좋아진다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 아닌가?

 

일자리가 줄어든다? 그렇다면 여가 시간이 더 생겨서 다른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어야 하는데, 실업자가 생기고 비정규직이 더 늘어난다면 그것이 어떻게 '혁명'이 될 수 있나?

 

성장, 성장만을 외치며 앞으로 달려오기만 했던 전세계에 어쩌면 사람들이 이제는 성장이 아니라 분배에, 일보다는 여가를 더 누릴 수 있는 세상, 그것이 바로 '혁명' 아닐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발전, 그것을 4차 산업혁명이라고 하면 그 혁명에 대해서 우리가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닌가 보다. 뒤쳐지면 안 된다고 언론, 정부에서 계속 강조를 하는 것을 보니... 결국 이것 역시 부가가치를 창출하여 다른 사람들의 삶을 마이너스(-힘들게)로 몰아가면서 자신들이 플러스(+풍요롭게)가 되도록 하는 방향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지구촌이라는 지구에서도 마찬가지. 뒤쳐지는 나라는 더 살기 힘들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가 오기 때문에 4차 산업혁명 운운하는 것 아닌가 싶은데,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유독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인다고 한다.

 

다른 나라들도 변화를 추구해야 함을 인정하지만 우리나라처럼 그렇게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면 뭔가 이상하다? 왜 우리나라만? 이 책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런 요란한 구호들이 과거에도 있어왔음을...

 

박근혜의 창조경제나 문재인 정부에서 말하는 4차 산업혁명이나 그렇게 다르지 않음을, 또한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박정희 정권 때나 지금이나 그렇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위로부터 추진되는 일들이 내실을 다지기보다는 결과 중심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고, 이것은 과학기술의 발전보다는 이윤을 중심으로 정책을 펼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본적인 과학이 발전하지 않고 오로지 기술만 발전하는 형태가 된다는 것. 4차 산업혁명이라 이름하든 다른 이름을 쓰든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토대를 튼튼하게 해야 한다는 것. 과학에 대한 장기적인 투자 없이는 자체 발전은 힘들다는 것.

 

이제 우리나라는 서양을 추격하는 모습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어야 하는데, 4차 산업혁명 논리는 결국 서양 추격논리에 불과하다는 것. 이런저런 점을 고려하건대, 4차 산업혁명을 주장하는 논리가 사회 전체의 발전, 이익으로는 가지 못한다는 것을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니 '유령'이라고 하는 거다. 아직은 제대로 실체를 파악하지 못했는데, 그냥 언론에서 떠들어대고, 정부는 이것을 받아 이렇게 하겠다는 구체적이지 않은 정책을 남발하고 있는 모습이 아닌가 하는 지적.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에 현혹되지 말고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우리 사회가 행복해질 수 있는 그런 정책을 펼쳐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에서부터 시작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조금 시일이 지난 책이지만 읽어보면서 생각해 볼 것이 많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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