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빠리의 이방인 - 사회심리학에서 찾은 철학적 사색의 즐거움
고자카이 도시아키 지음, 박은영 옮김 / 레몬컬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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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전에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끌었던 책이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였다. 우리나라에서 서울대를 나오고도 프랑스로 망명을 해야 했던 사람, 홍세화. 그곳에서 그가 살기 위해 택한 직업이 택시운전사였다.

 

우리나라에서 택시운전사는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데도 이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다. 그리고 우리나라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우리나라 안에 갇혀 있던 사람들에게 다른 곳을 통해 우리를 볼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오는 프랑스라는 나라, 똘레랑스(관용)의 나라라고, 융통성, 포용성이 있는 나라라고, 그렇게 우리 역시 우리의 생각을 돌아봐야 한다는 충격을 준 책이었다.

 

왜 이 책이 인기를 끌었을까? 우리 자신을 낯설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 푹 빠져서 우리 바깥에서 우리를 보지 못하고 있을 때, 다른 눈으로 우릴 보게 해준 책이기에 의미가 있었다.

 

지금 읽은 일본인 학자가 쓴 "나는 빠리의 이방인" 역시 예전에 읽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떠올리게 해줬다. 그런데 이게 문제다. 이 책을 읽고 예전 책을 떠올렸다는 것은 그동안 변화없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 아닌가.

 

홍세화가 그 당시 의미가 있었던 것은 그가 소수자였기 때문이다. 이방인이었기 때문이고, 경계인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이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보통 소수의 사람들이 안티테제를 제시한다. 하지만 소수가 다수의 상식을 능가하더라도 소수의 생각이 답습되기만 해서는 소용이 없다. 다수의 상식과 대립하는 것을 넘어 대립의 전제마저도 뛰어넘어야 한다. 이질적인 생각들이 충돌해 생겨나는 파괴와 재구성의 끊임없는 운동. 소수는 바로 그런 운동의 기폭장치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변혁을 통해 세계를 바꿔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수의 존재 의의다. (48쪽)

 

당시 홍세화는 소수자였고, 안티테제를 제시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변혁되어야 함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이런 소수자는 꼭 외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을 바꾸는데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던, 현실 너머를 볼 수 있던 사람들은 늘 존재했다. 우리가 그들에게 주목하든, 주목하지 않든.

 

그러나 몇십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세상은 그리 변하지 않았다. 소수자가 세상을 변혁시킨다고 했지만, 우리는 대립의 전제를 뛰어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비교는 했지만, 비교에서 그치고 다른 쪽을 부러움의 시선으로 보고 거기서 멈추었기 때문일 수 있다.

 

다시 이 책을 인용한다.

 

(사실 이런 인용은 이 책을 쓴 저자가 가장 싫어하는 방식이다. 자기 나름대로 제 생각을 정리해야 하는데... 책에 대한 느낌을 쓰는 글이니까 라고 넘어가기로 하자)

 

해당 시스템의 논리만으로는 옳고 그름을 결정할 수 없는 이탈자의 의견·가치관·행동이 시스템 내부에 반드시 존재한다. 사회는 열린 시스템을 취하고 교란 요인이 발생한다. 이 교란 요인은 사회의 기존 규범에 흡수되지 않고 사회의 구조를 변혁시켜 간다. 이것이 모스코비치의 발생 모델이다. (79쪽)

 

깊은 변화를 가져오고 오랫동안 지속되는 진정한 영향은 소수파만이 일으킨다. 세계를 변혁하는 것은 이탈자다. (91쪽) - 모스코비치의 말이라고 이 책에 나온다. 

 

자신의 지도교수였던 모스코비치의 소수자 이론이라고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이 말을 통해 어쩌면 우리 사회는 교란 요인이 사회의 구조를 변혁시켜 간 것이 아니라, 사회의 기존 규범에 흡수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즉, 소수파가 해외에는 있었는데, 해외에서 다른 시각으로 우리 사회를 보는 것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쪽 사정일 뿐이라고, 우리는 다르다고 지레 포기하고 만 것은 아닌지, 아니면, 해외에 존재하는 이방인, 경계인과 더불어 사회 내부에도 소수파가 존재해야 하는데, 그런 이탈자가 내부에서 살아남기 힘든 구조였는지...

 

하지만 세상 변혁을 이끈 사람들은 소수파일 수밖에 없다. 혁명가들은 늘 소수다. 그러나 그들로 인해 세상은 확 바뀌게 된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 또한 만만치 않다. 계속 이 책을 보자.

 

기득권은 족쇄를 만들어 오히려 가능성을 가로막는다. 그만큼 인간은 약하다. 항상 변명을 하고 자신을 정당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편한 길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퇴로를 미리 차단하고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것도 때로는 필요하다. (216쪽)

 

강하게 비판하는 소수자였다가 어느 순간 다수파로 변하는 순간, 그만 소수파들은 스스로의 족쇄에 갇히게 된다. 사회 변혁을 주장했던 소수파들이 어느 순간 다수파가 되고, 기득권에 흡수되어 기득권 세력이 되는 경우를 보게 된다. 그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바로 '퇴로' 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피할 곳이 있었으므로,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하게 된다. 이 책에서 비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방인, 경계인에게는 '퇴로'가 없어야 한다. 스스로 없애야 한다. 바로 백척간두에 서서 한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사람들만이 소수파가 된다.

 

그리고 그들로 인해 세상은 바뀐다. 말이 아니라 행동이 필요한 것. 스스로를 계속 바깥에 위치시키는 것, 경계에 서서 실천하는 것, 그런 경계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사회변혁을 이끄는 소수파다.

 

틀 속에 살면서도 꼭 틀 바깥에서만 보아야 경계인, 이방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님을, 틀 내부에서도 경계인, 이방인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로 인해 세상은 변해왔음을 생각하게 해준 책이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와 마찬가지로 저자 자신이 프랑스에 정착하게 되는 자전적인 과정도 서술되어 있어서, 자서전을 읽는 느낌도 주고, 또 일본인이 어떻게 서양을 모방하고, 서양에 대해서 어떤 컴플렉스를 지니고 있는지 - 이 책에서는 그것을 명예백인이라고 한다 - 도 알 수 있게 된다.

 

더불어 자신의 삶도 이방인의 눈으로 볼 필요가 있음을 생각하게 해준 책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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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rlca 2019-02-27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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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된 독서 - 질병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
최영화 지음 / 글항아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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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기막히게 잘 붙였다는 생각... '질병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라는 작은 제목에 '감염된 독서'라니...

 

제목만 보았을 때는 읽기가 전염되는 물질처럼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마음까지도 감염시킨다는 내용이지 않을까 추측을 했다.

 

얼마나 멋진가? 읽기의 감염. 그 감염은 마음을 서로 따뜻하게 해주고, 서로를 이해하게 해주며 공통된 경험, 문화를 지니게 할 테니... 이렇게 생각하고 읽었는데, 첫장부터 예측이 빗나갔음을 알게 되었다.

 

읽기가 감염된다는 얘기가 아니구나. 문학 작품에 나온 질병에 대한 이야기구나. 그렇다면 그 질병으로 한 작품이 만들어지는 이야기인가 했더니 그것도 아니다.

 

감염내과 전문의로 일하는 저자가 병과 관련된 글을 쓴 것을 모아놓은 책이다. 그러니까 의사가 질병에 대해서 글을 쓰는데,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질병과 관련지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의학서적도 아니고 그렇다고 문학작품을 분석한 책도 아닌, 수필집에 해당한다고 보면 된다. 수필이니까 저자의 느낌, 생각이 솔직하게 드러나 있다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제목에서 받았던 신선한 느낌을 글에서 받기는 좀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의사들의 내면을 조금은 들여다볼 수 있고, 문학작품 속에 질병이 이만큼이나 많이 등장하는 것은 질병이 인간의 삶에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는 모두 질병을 안고 살고 있는 환자다. 병원에 가든 가지 않든 우리는 모두 환자임에는 확실한데, 그것을 전문의에게 맡길지 아니면 자신에게 맡길지, 약으로 고칠지 생활습관, 환경을 바꿈으로써 고칠지는 각자의 판단에 달려 있다.

 

물론 너무 심한 병은 당연히 병원에 가야 하고, 이 책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질병은 저자가 감염내과 전문의이니 만큼 감염병들이다.

 

홍역, 성홍열, 결핵, 장티푸스, 콜레라, 천연두, 인플루엔자 등등

 

감염병이 아니더라도 다른 질병도 다루고 있긴 하지만, 저자의 전공과 관련된 질병, 그리고 문학 작품에 나오는 그 질병에 관해서, 자신의 경험과 관련해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딱딱한 의학서적이 아니라 편하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문학의 감염역을 생각했던 사람에게는 실망을 안겨줄 수 있기도 하다.

 

또 질병이 나오는데, 딱딱하게 쓰지 않으려 해서 그런지 몰라도 그 질병에 대해서 보충설명이 있었으면 하는데, 그런 것이 없다. 각 질병을 한 쪽 정도 할애해서 설명해주었으면 좀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물론 그러면 분량이 많이 늘어나겠지만, 동일한 질병들이 반복되는 경우도 있으니 이를 하나로 묶으면 분량 문제도 해결이 되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가령 성홍열에 관한 글이 있는데 (성홍열과 홍역 사이 -형제, 나를 살찌운 것들-만화책과 성홍열)을 보면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수긍하기 힘든, 그런 구절이 있다.

 

성홍열인데 이 병에 걸리면 죽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항생제가 없던 시절의 성홍열 사망률이 25퍼센트였다고 하니 걱정할 만했지요. ('성홍열과 홍역 사이- 형제'에서 102-103쪽)

 

성홍열은 A군 사슬알균에 의한 세균성 인후염으로 피부 발진이 동반되는 게 특징이고 근접 접촉이나 비말(飛沫 - 날아 흩어지거나 튀어오르는 물방울)로 전파되는데 고열, 두통, 인후통, 발진이 있고 혀가 딸기처럼 빨개집니다. 심하지 않으면 일주일쯤 앓다가 열이 떨어지고 낫는데 피부가 살짝 벗겨지는 게 특징이지요. ... 루이자 올콧이 활동하던 시기엔 항생제가 없었으니 진통제로 벨라도나를 먹은 뒤 실컷 앓으면 면역을 얻었을 것입니다. ('나를 살찌운 것들-만화책과 성홍열' 171-172쪽)

 

두 글을 읽으면 한쪽 글에서는 성홍열에 걸리면 목숨을 잃을 걱정을 해야 하는 그런 긴박감을 다른 글에서는 마치 독감을 앓고 마는 듯한 가벼운 느낌을 준다는 느낌을 받는다. 같은 병인데, 게다가 루이자 올콧 -작은 아씨들의 저자-이 살았던 시대는 루쉰이 살았던 시대보다 앞선 시대인데...

 

이런 부분을 하나로 엮어서 더 이야기를 풀어갔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그러나 이런저런 얘기들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의사들을 경원하지 않게 해준다고나 할까...

 

이 책에서 지금도 마음을 울리는 구절은 이런 질병과 관계가 없는, 그러나 내 마음을 감염시킨...'닥터 노먼 베쑨'에 나오는 그 구절...

 

"닥터 봉, 당신은 도대체 어느 대학을 나왔소?" (이 책 167쪽. 테드 알렌 외, 닥터 노먼 베쑨, 실천문학사. 1999년 초판 43쇄. 322쪽.)

 

환자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중국인 의사에게 베쑨이 하는 말... 마지막 말,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의사는 대학을 나왔다는 생각.

 

세칭 386이라는 사람들이 (이 말 역시 써서는 안 될 말이지만) 처음 사람을 만나는 자리에서 "몇 학번이에요?"라고 습관적으로 묻는 말.

 

우리나라 사람이 모두 대학을 나왔다고 가정하는 건지, 원... 이제는 이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알고 잘 쓰지 않지만, 그만큼 폭력적인 말이 "너 어느 대학 나왔니?"라는 말.

 

오죽하면 영화에서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저자는 이 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하는데... 베쑨은 나중에 사정을 알고 닥터 봉을 진심으로 대한다. 그는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은, 어깨 너머로 의사들이 치료하는 것을 보고 외우고 익혀서 사람들을 치료하던 중이었던 것이다.

 

사람을 구하겠다는 마음으로...여기에 무슨 학력이 필요하단 말인가?  베쑨은 닥터 봉을 보면서 자신의 생각을 고쳤던 것이다. 감염된 독서의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심한 법정 전염병 제1호는 '학벌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누구에게나 감염되고 치유하기도 힘든 그런 질병.

 

그래, 의사가 환자들의 마음까지 보기 위해서는 겉모습을 거쳐서 더 깊은 곳까지 나아가야 하는데, 그만큼 정성과 여유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의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다.

 

사람을 대할 때 겉에서 시작하겠지만 반드시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 우리는 그것을 감염시켜야 한다. 그런 자세를... 이 책에서 '감염된 독서'를 했다면 그렇게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태도에 감염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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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 자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자기가 말할 때가 아니라 녹음해서 들리는 자기 목소리를.

 

  참 낯설다. 저것이 내 목소리라니... 아닌데... 내가 말하면서 듣는 목소리와 다른 매체에 녹음되었다가 들려오는 소리는 다르다. 내가 모르던 소리다.

 

  그렇다면 내가 막말을 하고, 그 소리를 녹음해서 듣는다면, 내가 막말을 할 때 듣는 소리가 아니라 시간을 두고 녹음 한 소리를 듣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막막할 때와 같은 마음을 지닐 수 있을까? 이것이 내 목소리라는 것을 모르고 들을 때 나는 그 막말을 하는 사람에게 어떤 감정을 느낄까?

 

궁금하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온갖 막말들을 내뱉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자기 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김경주의 시집, '고래와 수증기'를 읽다가 '비어들'이란 시를 발견하고, 지옥으로 초대하는 말을 떠올리게 됐다.

 

    비어들

 

거울 앞에서 입을 벌린다

입안은 저승이다

 

저승은 거울 속에 있다

 

입을 벌리고

우두커니 거울 앞에 서 있는 그는

잠시 저승을 엿본다

 

오직 그의 한 눈만이

입안의 저승으로 들어가는 중이다,

한 눈은 아직 이쪽에 있으므로

저승의 언어는 입안에 있다

 

입을 닫으면

저승은 닫힌다

 

지금 저승은 저곳의 세계가 아니라

이곳의 언어다

 

거울은 우리에게 저승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물성이다

우리의 눈은

거울 속 입으로 걸어가는

이승의 언어다

 

언어가 피해갈 수 없는 저승은

그 사람의 입안에 있다

침묵처럼

 

김경주, 고래와 수증기, 문학과지성사. 2014년. 72-73쪽.

 

'들'이란 말이 붙었으니 어떤 대상을 나타내는 말일 테고,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니, '비어'에 해당할 수 있는 말이 이 정도일 거라고 추측했다. 날치를 뜻하는 말인 비어(飛魚)는 아닐 것이고, 시의 내용으로 말과 관련된 낱말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시인이 한자어를 같이 쓰지 않았기 때문에 추측을 하는데, 표준국어대사전에 있는 세 낱말이 모두 해당될 듯하다.

 

비어 01(卑語/鄙語):「1」점잖지 못하고 천한 말. ≒비언02(鄙言).

                          「2」대상을 낮추거나 낮잡는 뜻으로 이르는 말.

비어03 (飛語/蜚語):  근거 없이 떠도는 말

비어04 (祕語): 비밀스러운 말. 범죄자들이나 비밀 단체 요원이 남몰래 자신들만 알 수 있도록 만들어 쓴다.

 

이 풀이를 참조해서 시를 읽어보면 입안이 지옥이라는 말은 우리가 뱉은 말들이 지옥이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입안에 있는 컴컴해서 보이지 않는 심연, 그곳이 지옥일 수 있다는 것은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 입을 열어 말을 하는 순간, 그것도 좋지 않은 말을 하는 순간, 지옥의 문이 열린다는 것.

 

그런데 우리는 자신에게 있는 지옥을 보지 못한다. 지옥을 보기 위해서는 거울이 필요하다. 다른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자기가 뱉은 말을 그 자리에서 듣는 것으로는 지옥을 볼 수 없다. 그 말을 뱉은 순간을 다른 존재들을 통하여 다시 보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지옥을 볼 수 있다. 눈 앞에 보이지 않던 지옥이 눈 앞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지옥은 부정하기 쉽다. 한 눈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한 눈으로만 본다는 것, 지옥을 부정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지옥을 닫을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그러니 지옥을 보아야 한다. 나 자신에게 지옥이 있음을, 그 지옥의 문을 열고 닫는 것은 나 자신임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지옥 문을 활짝 열고 온갖 비어들로 지옥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자기 몸 속에 난 엄청난 지옥을, 그 지옥으로 초대하는 온갖 말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정치가들... 자기 생각에 갇힌 사람들...

 

이들은 자신의 입안에서 나온 비어들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지옥으로 초대하는 말임을 알까? 그런 생각을 할까? 그래서 거울이 필요하다. 자신의 반대편에서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는...

 

실제 생활에서 거울을 볼 수 없다면, 굳이 그것이 거울이라는 물체여야 할까? 거울은 도처에 있지 않은가. 바로 자신 곁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거울이 될 수 있지 않은가. 그런 거울을 보지 않게 아예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이 눈을 뜨고 거울을 볼 수 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

 

수많은 막말들, 갑질들-여기엔 비어들이 한몫 한다-이 지옥으로 초대하는 말임을, 김경주 시 '비어들'을 읽으며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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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5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25 1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인은 이제 황혼에 접어들었다. 세상을 살 만큼 살았고, 할일도 어느 정도 이루었다.

 

  인생이 막바지로 접어들 무렵, 계절로 치면 겨울이리라. 시간으로 치면 자정에 가깝거나 자정을 막 지났거나. 예전엔 자정이 하루의 끝이자 시작이었지만 요즘은 막차가 연장된 관계로 자정이 넘어서야 하루가 끝나고 다시 시작한다.

 

  이 시집 제목, 겨울밤 0시 5분이다. 인생을 살 만큼 살아온 시인이 자신의 인생 막바지에 바치는 노래라고 해도 좋겠다.

 

  그만큼 이 시집에는 나이든 삶에 대한 시가 많다. 황동규 시인이 1938년생이고, 이 시집은 2009년에 초판이 나왔으니, 그의 나이 70이 넘어서 낸 시집이다.

 

고희라는 말, 예전부터 희귀했다는 나이 70이 이제는 별 것 아닌 나이가 되었지만 사회에서는 한발 물러나 이제는 삶보다는 죽음을 생각하는 나이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끝일까? 아니, 시작이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살아온 날보다는 분명 적을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는 나이니까 말이다.

 

시집에서 그런 감정이 담긴 시어를 발견했다. '다행이다' 그래 지금껏 잘 살아왔잖아, 그것이 비록 평탄한 삶은 아니었지만, 온갖 굴곡을 겪었지만 그래도 지금 이렇게 살아 있고, 또 살아갈 것이니 얼마나 다행이랴.

 

인생 70. 겨울이 아니다. 가을이라고 해야 한다. 열매를 맺고, 잎새를 떨굴 나이. 잎새를 떨군 맨몸으로 세상에 설 나이. 그렇게 가을이 깊어가고 겨울을 맞이하게 되지만, 이것은 어김없는 법칙이니...

 

지금껏 살아온 것, 다행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가을날, 다행이다

 

며칠내 가랑잎 연이어 땅에 떨어져 구르고

나무에 아직 붙어 있는 이파리들은 오그라들어

안 보이던 건너편 풍경이 눈앞에 뜨면

하늘에 햇기러기들 돋는다.

 

냇가 나무엔 지난여름 홍수에 실려 온

부러진 나뭇가지 몇 걸려 있고

찢겨진 천 조각 몇 점 되살아나 팔락이고 있다.

쥐어박듯 찢겨져도 사라지긴 어렵다.

찢겨져도 내처 숨쉰다.

 

검푸른 하늘에 기러기들 돌아온다.

다행이다.

오다 말고 되돌아가는 놈은 아직 없다.

오다 말고 되돌아가는 하루도 아직은 없다.

오늘은 강이 휘돌며 모래 부리고 몸을 펴는 곳

나그네새들과 헤어진 일 감춰둔 곳을 찾아보리라.

 

황동규, 겨울밤 0시 5분. 현대문학. 2013 년 초판 8쇄.  115쪽.

 

무성한 잎을 떨구고 그동안 감추어두었던 것들이 드러날지라도 세상은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런 인생, 다시 내가 만나왔던 것들을 찾을 수 있는 것. 나이듦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시를 읽으며 내 늙음을 생각한다. 나는 무엇을 드러낼 것이며, 무엇을 반추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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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 통계와 역사에 문학과 과학이 버무려진 생의 마지막 풍경
하이더 와라이치 지음, 홍지수 옮김 / 부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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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목이 흥미로워 읽은 책. 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 우리들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 한다. 두번은 경험하지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두렵다. 우리는 모르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지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모르는 것, 아니 알 수가 없는 것에 대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바꿀 수가 없는 것,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 그리고 언젠가 한번은 반드시 경험해야 하는 것이 죽음인데... 이것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 지금 현실이 아닌가 한다.

 

너무도 두렵기에 회피하고 싶은 것, 그것에 관해서 의사인 저자가 이야기해주고 있다. 죽음을 늘 곁에서 지켜본 의사가 지금까지 죽어간 사람들에 대해, 죽어가는 모습에 대해, 죽음이 어떻게 변해왔는가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있다.

 

그렇다고 무슨 철학적인 사색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죽음을 이겨내기 위한, 아니 죽음을 연장하기 위한 의학기술의 발달과 그 속에서 죽음을 연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고 있다.

 

이는 우리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피할 수 없는,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죽음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인가?

 

의학기술이 무척 발달해서 연명치료가 가능해진 이 시대에... 과연 그렇게 목숨을 연장하는 것이 최선인가? 이 질문에 저자는 아니라고 답한다. 그건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다는 쪽에 손을 들어주는데... 그렇다고 안락사를 찬성하느냐 하면 당당하게 찬성한다고 하지는 않는다. 다만 환자가 더이상의 고통을 받지 않고 죽음의 세계에 이르게는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정도의 주장은 한다.

 

그렇게 해서 의사가 본 의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죽음의 모습이 이 책을 이루고 있다. 안락사 문제까지 다루고, 병원을 떠나 사이버공간에서 죽음이 논의되는 현실까지 다루고 있는데...

 

저자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늘 죽음의 정복을 이야기해왔고 어떻게든 죽음을 막아내기만 하면 된다고 여겨왔다. 그러나 죽음이 대화의 주제로 떠오를 때 모두가 침묵을 지키면 죽음은 더욱 막강해진다. 지금까지 우리가 잃어버린 수많은 죽음의 면면을 되살려야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죽음은 훨씬 우리 가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장애를 덜 겪고 외로움도 덜 느끼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러나 죽음에서 없애버려야 하는 측면이 하나 있다. 바로 소통의 부재이다. 우리가 겪는 죽음이 진정으로 이 시대에 걸맞은 죽음이 되려면 죽음이라는 주제를 두고 교실에서, 술집에서, 식당에서, 뒷마당에서, 그리고 두말할 나위 없이 병원에서도 진지하고 차분하게 서로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가 마련되어야 한다. (430-431쪽)

 

이 말이 제목 뒤에 붙는 말이 될 것이다. 두렵지만 이야기해야 할 것.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그래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잘 죽는 것, 그것은 바로 잘 사는 것이다.

 

여기에 기반을 두고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온갖 치료들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 그리고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지 생각해야 한다.

 

죽기 전 마지막 모습을 이야기하면서 과연 사람다움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사람은 사람으로 죽기를 원한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이 세상에 왔다가 가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래서 저자는 죽음에 대해서 시간-장소를 가리지 말고 이야기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죽음을 가까이 두고 살면, 삶을 더 충실하게 살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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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2 09: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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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2 13: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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