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 - 노르웨이에서 만난 절규의 화가 클래식 클라우드 8
유성혜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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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오래 살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다. 내겐 뭉크가 그런 사람이다. 뭉크라는 이름은 '절규'라는 그림과 떼려야 뗄 수 없고, 절규에서 느껴지는 그 절망감, 우울함이 화가인 뭉크에게 감정이입하게 하고, 뭉크 역시 그런 절망 속에서 오래 살지 못했을 거란 생각을 하게 한다.

 

뭉크 가계를 보아도 그런 생각이 들고. 어머니, 아버지, 누이, 동생들이 일찍 죽고 뭉크보다 오래 산 가족은 막내 동생인 잉게르밖에 없으니, 이 집안이 단명하는 집안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예상과는 달리 뭉크는 80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1863년에 태어나 1944년에 죽었으니 우리 나이로 치면 82, 서양 나이로 치면 80인 셈이다. 장수했다고도 할 수 있는 나이인데... 그를 자꾸만 일찍 죽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이 그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절규'

 

뭉크 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이 그림, 이 그림을 보면서 어떻게 밝은 생각, 오래 살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뭉크는 이 그림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확실히 알게 됐다.

 

노르웨이에 살고 있는 사람이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화가랄 수 있는 뭉크에 대해서 글을 쓴 것이다. 작품만이 아니라 그가 살고 있던 곳, 그와 교류한 사람들, 그의 사후에 어떻게 미술관이 건립이 됐는지 등을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그동안 간과했던 뭉크의 모습을 알 수 있게 된다. 내가 알지 못하고 있던 뭉크는 바로 밝은 그림을 그리기도 했던,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점묘법의 특징을 살린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는 것과 벽화를 그렸다는 것.

 

<뭉크의 칼 요한 거리의 봄날, 인상파 점묘법을 적용한 그림. 이 책 47쪽에서>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 뭉크의 벽화가 아직도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가 젊은 시절에 그렸던 그림만으로 우리는 뭉크를 판단하고 있었음을...

 

또한 뭉크가 고야와 마찬가지로 판화에도 관심을 가지고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절규'란 그림이 단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뭉크는 비슷한 그림을 버전을 달리해서 여러 편 그렸다는 것, 그래서 '절규'란 그림도 여러 장인데, 그 여러 장들이 모두 조금씩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 이런 그림들이 많다는 것. 가령 '다리 위의 소녀들'이라는 그림도 여러 편이 있다.

 

또한 자신의 작품을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보는 것도 좋지만 연작으로 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전시도 하고 또 그렇게 그리기도 했다는 것. 그것을 '프리즈' 연작이라고 하면 되겠는데, 이 역시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나치에 의해서 탄압을 받고, 자신의 작품이 모두 사라질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오슬로시에 유언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남긴 사람... 이것을 토대로 노르웨이에 뭉크 미술관이 건립되었고... 우리가 지금 만날 수 있는 뭉크가 되었다는 것.

 

풍부한 그림과 뭉크의 생애와 그가 머물렀던 장소들이 잘 어우러져 설명이 되어 있기에, 편하게 읽으면서도 뭉크에 대해서 잘 접근할 수 있었다.

 

마지막에 뭉크의 그림에 나타난 특징들을 정리해주고 있는데, 이 또한 뭉크란 작가가 특정한 주제의 그림만을 그린 화가가 아님을 알려주고 있다.

 

참고로 저자가 정리한 뭉크 예술의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01 죽음 : 아픈 아이, 죽음과 아이 등

02 사랑 : 키스, 이별 등

03 불안 : 절규, 칼 요한 거리의 저녁, 절망 등

04 절규 : 절규

05 여자 : 마돈나, 뱀파이어 등

06 외로움 : 생 클루의 밤, 별이 빛나는 밤 등

07 오스고쉬트란드 : 생의 프리즈, 다리 위의 소녀들 등

08 초상화와 자화상 : 담배를 든 자화상 등

09 생의 프리즈

10 오슬로 대학 강당 벽화

 

다양한 주제, 다양한 분야의 그림을 그린 화가다. 이 책에 나와 있는 뭉크의 그림에 대한 말로 글을 맺는다.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본 것을 그린다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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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음악이 이야기한다 - 동갑내기 두 거장의 예술론.교육론
오에 겐자부로.오자와 세이지 지음, 정회성 옮김 / 포노(PHONO)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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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작가 하면 몇 사람 밖에 모르는데... 그래도 요즘 애정을 가지고 만나는 작가가 오에 겐자부로다. 그가 쓴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일본 작가들 작품 중에는 가장 많이 읽었나 보다.

 

특히 그가 의식있는,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확고한 신념이 있는 그런 작가라는 생각에 더 애착이 간다.

 

그와 함께 대담한 오자와 세이지는 음악 분야에 문외한인 나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아마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꽤 잘 알려진 이름일 테다. 그들이 공교롭게도 동갑이라고 하니, 1935년생인 그들은 군국주의 천황제 국가에서 어린시절을 보냈고, 민주주의가 막 정착하려고 할 때 청년기를 보내고 2000년대 들어 수구적인 모습을 보이는 일본 사회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다.

 

둘 다 가정적으로는 변방에 속한다고 할 정도로 부유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힘으로 자기 세계를 개척한 사람들이다. 이런 두 거장이 2000년을 맞이하여 21세기를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 하는 대담을 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쇄국에 가깝게 일본 사회가 변하고 있는데...

 

사실, 21세기를 어떻게 맞이하는가 보다는 둘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했다고 보면 된다.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 음악과 문학에 대해 지니고 있는 생각, 과연 일본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 등이 이 책에 실려 있다.

 

둘의 공통점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일본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즉, 보편적인 것과 일본적인 것이 다르다는 이중 기준, 이중 규범을 부정한다. 그런 것에 매몰되면 쇄국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민주주의에서 멀어진다는 것이다.

 

일본적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보편적인 것이 일본적일 수 있다는 것, 그래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대담에서 이들은 국가주의를 비판하며 개인의 자유를 우선하고 있다. 개인이 존중되는 사회가 그들이 원하는 사회고, 이런 개인을 국가나 조직이라는 이름으로 억압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렇기에 일본적이라고 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세계에서 통용되는 언어를 사용하거나, 그들을 따라가야만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에 겐자부로는 일본어로 소설을 쓰지만 그의 작품이 번역되는 것은 인간이 지닌 보편적인 삶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오자와 세이지의 음악도 마찬가지다.

 

이런저런 이야기들 속에서 그 점을 발견할 수 있고, 점점 극우화되어 가고 있는 일본 사회에서 이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지고 있는 것 같아서, 어쩌면 이들 대화에서 우려하고 있던 쇄국으로 일본이 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 책이 더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19년 전 대담이지만, 지금 일본 사회에 필요한 이야기를 이들이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고, 이것이 꼭 일본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나 음악가가 지녀야 할 자세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떤 자세를 지니고 지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파울로 프레이리와 마일스 호튼의 대담집 '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와 같은 느낌... 거장들의 대화를 읽으며 우리 삶을 생각하게 되는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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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에게서 나를 본다. 나는 너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바로 수많은 너들 덕분이다.

 

  그런데 가끔 그런 너를 잊을 때가 있다. 가끔이 아니라 자주 잊는다. 그냥 나만이, 나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듯이 말하고 행동할 때가 있다.

 

  그러다 너란 존재가 없으면 과연 나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 그때서야 너란 존재는 바로 나임을 깨닫게 된다. 너와 내가 함께 해야 함을 인정하게 된다.

 

  너는 나를 이루는 존재다. 모든 존재다. 내 곁에 있는 보이든, 보이지 않든 모든 존재가 바로 너가 된다.

 

시인은 이런 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주로 나무나 새들과 같은 자연에서 너를 발견하기도 하지만, 사람에게서도 너를 발견한다. 너를 발견하는 일은 바로 나를 찾는 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바로 나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너를 보는 일이다.

 

제목이 된 시 '상처 있는 나무는 다 아름답다'에서 시인은 나무가 피는 꽃을 상처에서 발견한다.

 

'(중략) 나무는 자신의 몸에서 / 그 꽃이 아름답게 필 수 있도록 / 상처를 내 / 꽃길을 반든다 / 그 처연한 아픔 속에서 / 꽃의 한 생을 위해/ 기꺼이 상처마저 / 넉넉히 받아들이는 걸 보면은 / 상처 있는 나무는 다 아름답다 (생략)' (이 시집 12쪽)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 시에서 시인은 결국 나무만이 아닌 사람을 발견한다.

 

'(중략) 상처 하나 없는 사람보다는 / 상처 속에 살아온 그대가 / 아름답습니다 (생략)' (13쪽)

 

이 시에서 상처에 주목할 수도 있지만, '살아온'이라는 말에 더 마음이 간다. 누구나 상처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상처 속에 주저앉는 사람도 많다. 상처를 애써 가리는 사람도 있다. 상처를 부인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상처 속에 살아온 그대'가 아름다운 것이다.

 

상처를 안고 살아온 사람, 그 상처로 인해 다른 사람의 상처를 감싸안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아름다운 것이다.

 

이렇게 시인은 너를 통해 나를 이야기한다. 상처 속에 살아온 그대가 아름답다는 얘기는 자신도 상처를 받아들이고 살아가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 '동거'에서는 나이들어가면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병을 받아들이며 살아가겠다는 시인의 다딤이 나온다. 그렇게 상처를 자신으로 받아들이는 모습, 상처까지도 또다른 너, 나의 일부라는 사실을 시인은 덤덤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나'에 갇혀 '너'를 보지 못하고, '너'를 생각하지 않고 살아온 적이 많다. 수많은 '너들'이 바로 '나'임을 잊으면 안 되는데... 그렇게 이 시집을 읽으며 다시 수많은 너들이 나임을 생각한다.

 

'공상'이란 시를 소개한다. 이것이 단지 공상일까? 아니. 너가 바로 나임을 이 시를 통해서 더 생각하게 된다. 이를 상동성이라고 해도 좋겠다.

 

  공상

 

밤나무에

밤꽃이 익어

밤꽃 냄새가 피는 것을 보면은

가끔은

내 은밀한 몸도 익어

밤꽃 냄새가 나는 것을 보면은

어쩌면

나와 밤나무의

조상은 같은 것이 아닐까

 

김산, 상처 있는 나무는 다 아름답다. 책만드는집. 2013년. 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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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그러면 그냥 산문이다. 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물의 속성을 좀 바꾸면 시가 될 수 있다.

 

  허만하 시인의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를 읽은 적이 있다. 제목이 주는 충격. 비가 수직으로 서서 죽다니... 그럴 수가 있나? 끝없는 하강. 땅으로 직행. 이것이 죽음인가?

 

  꿋꿋하게 자신을 잃지 않고 떨어지는 비... 수직으로 떨어지는 비. 그래서 시가 된다.

 

  이번엔 물이다. 물은 중력의 법칙을 너무도 잘 드러낸다. 낮은 곳으로 한없이 흘러가는 물. 비도 하늘에서 땅으로 수직으로 떨어지지 않던가.

 

그런데 이번엔 비는 아래로가 아니라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고 했다. 언뜻 보면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물은 중력의 법칙을 거슬러 위로 흐를 수도 있다.

 

물이 위로 흐를 때 생명이 유지된다. 그렇게 생명에의 목마름, 그곳으로 물은 흐른다. 제목 자체가 시가 된다. 이렇게 제목이 된 시는 '육십령재에서 눈을 만나다'이다.  3연에 이 구절이 나온다.

 

  물은 낮은 쪽으로 흐르는 비굴이 아니다. 물은 언제나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 거꾸로 서서 흐르는 물은 가혹한 의지意志만으로 한 그루 오리나무처럼 비탈에 서 있다.

 

허만하,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 솔. 2002년 초판 2쇄.육십령재에서 눈을 만나다. 3연. 16쪽  

 

삶에의 욕구. 그것으로 향하는 물. 물에서 생명의 운동을 보고 그것을 노래하는 것, 이것이 시다.

 

이 시집에 실린 첫시.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바벨탑 공화국'이라고 일컬어 지는 우리나라, 자꾸자꾸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만 가는 건물들, 그런 건물들에서 가장 높은 곳, 전망이 좋은 곳. 그러나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어떻게 달동네를 전망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달동네는 전망이 좋은 곳이라기보다는 전망이 어두운 곳이다. 생활에 치여 살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삶의 아름다움이 있다. 시인은 달동네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높이는 전망이 아니라고.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높은 곳은 어둡다. 맑은 별빛이 뜨는 군청색 밤하늘을 보면 알 수 있다.

 

  골목에서 연탄 냄새가 빠지지 않는 변두리가 있다. 이따금 어두운 얼굴들이 왕래하는 언제나 그늘이 먼저 고이는 마을이다. 평지에 자리하면서도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흙을 담은 스티로폼 폐품 상자에 꼬챙이를 꽂고 나팔꽃 꽃씨를 심는 아름다운 마음씨가 힘처럼 빛나는 곳이다.

 

  아침노을을 가장 먼저 느끼는 눈부신 정신의 높이를 어둡다고만 할 수 없다.

 

허만하,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 솔. 2002년. 초판 2쇄. 15쪽

 

바벨탑 공화국에서 이렇게 사람 냄새 나는 곳들을 하나하나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없애고 있다. 위로 위로만 가는 건물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비록 삶은 힘들지라도 그곳에서 '정신의 높이'를 잃지 않고 세워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곳, 그런 곳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그늘이 먼저 고이지' 않도록 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한다.

 

'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풍경에 대한 추억이다'라고 시집을 시작하기 전에 시인은 말하고 있다. 이렇게 시인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우리 눈 앞에 펼쳐보인다. 이래서 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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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의 검은 개 카프카의 쥐 - 우울증은 어떻게 빛나는 성취가 되었나
앤서니 스토 지음, 김영선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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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은 어떻게 빛나는 성취가 되었나'라는 번역된 작은 제목을 달고 있는 책. 영어를 보면 -짧은 영어실력이지만- 이런 작은 제목은 없는데... 오히려 그냥 '인간 정신의 다양한 현상들' 정도로 하면 될 것을...

 

우울증을 앓던 사람들이 그것을 극복해서 자신만의 성과를 거둔 사례들이 이 책에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갖게 하는 작은 제목이었지만 그것은 아니다.

 

처칠이나 카프카, 뉴턴에 관해서는 맞다. 제목에 처칠의 검은개, 카프카의 쥐라고 했으니, 이들을 앞장에서 소개한 것도 맞겠다. 그러나 다음부터는 우울증보다는 정신 현상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실려 있다고 보면 된다.

 

읽다보면 저자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가령 '진정한 천재는 광기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장에서는 광기와 천재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천재와 광기라... 광기와 영감을 구분하지 못해서 생기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 신경증적인 면과 정신 질환이 천재들에게 도움을 주는 경우도 있지만, 광기와 천재를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라는 것. 

 

'왜 인간은 폭력적이 되는가'라는 장에서는 인간 사회의 폭력에 대해서 고찰하고 있다. 공격성 자체가 비난받을 것은 아니지만, 이 공격성이 무차별적 폭력으로 발현되지 않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공격성이 폭력성으로 발현되는 경우를 들고 있는데, 알코올과 같은 화학물질, 어린 시절의 학대, 인간의 복종 성향, 가해자와 희생자 사이의 거리(심리적 거리가 아니라 물리적 거리), 두려움사회로부터 무시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인간이라고 여섯 가지의 요인을 들고 있다.

 

이렇게 폭력성이 발현되는 요인을 이야기하면 원인이 나왔기 때문에 대책을 세울 수 있다. 즉, 정신 현상을 연구함으로써 공동체가 좀더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신의학이 지닌 힘이다.

 

반대로 이것을 악용하면 정신의학은 사람들의 자유를 그럴 만하다는 의심으로도 구속할 수가 있다. 그렇게 악용된 경우도 있고. 이것에 관한 내용이 '열린 사회에서 정신의학의 책무'라는 장에 나와 있다.

 

딘순한 사례 중심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뱡으로 정신의학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 그 점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두 장에서 흥미를 유발해서 끝까지 읽도록 만들고 있다. 만약 처음에 처칠이나 카프카로 시작하지 않았다면 이 책을 계속 읽기는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정신의학이 그다지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분야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명인이 어떤 질환을 앓았고, 그 질환을 이겨내면서 어떤 업적을 이루었는지를 처칠, 카프카, 뉴턴을 통해서 알 수 있으니, 평범한 우리들 역시 나름대로 겪고 있는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얻을 수 있다.

 

누구나 사람들은 자기만의 어려움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 그 어려움을 피해가지 않고 이겨내려는 노력 속에서 사람다움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이런 정신의학 관련 책이 해주고 싶은 말이 아닐까 싶다.

 

더불어 단지 개인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도 역시 사람의 정신 현상을 연구하는 정신의학이 알려주고 있다고도 할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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