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8 - 위기와 극복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8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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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정은 확립되었다. 누구도 황제라는 지위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자리에 누가 앉느냐를 생각할 뿐이다.

 

원로원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황제 권력을 견제한다고 하지만, 그 견제는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다. 황제라는 지위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자신들의 권력이 유지되는 동안은.

 

그렇다면 황제는 어떤가? 동양처럼 세습 황제라는 개념이 명확하지 않던 시대에, 이들은 능력자들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을까?

 

핏줄에 집착했던 아우구스투스는 세습 황제들을 만들고 싶어했지만, 그것이 뜻대로 되지는 않았고, 그런 핏줄에서 폭군이라 할 수 있는 황제(칼리굴라, 네로)가 나왔으니 절대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네로를 자살로 이끈 다음에 과연 나라가 평온해졌을까? 그렇지 않다. 핏줄이 끝났다. 이제는 능력이다. 그런데 한 사람이 절대 권력을 쥘 수 있다. 욕망이 있는 사람에게는 목숨을 걸 만한 일이다. 권력욕이 없는 사람에게는 별 문제가 없는 일이겠지만.

 

이제 많은 권력 다툼이 일어난다. 권력 다툼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사람은 군사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자고로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로마 역시 마찬가지다. 군사들의 지지라고 하기보다는 군사령관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 황제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공석인 황제 자리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은 군사령관들이다. 원로원 의원들은 이런 일에 목숨을 걸려고 하지 않는다. 적어도 혼란기에는.

 

8권은 그래서 군단장, 군사령관 출신의 황제들이 난립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갈바로부터 시작하여, 오토, 비텔리우스까지 몇 년 안에 황제들이 죽고, 죽이고 하는 과정을 거치고, 드디어 안정기에 접어드는데,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로부터 시작된다.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되어 로마는 차츰 안정기에 접어들고, 그 아들 티투스가 대를 이어 로마를 중흥시킨다. 그러나 티투스가 일찍 죽고 동생인 도미티아누스가 황제가 되어 로마는 제정이 안정기에 접어든다.

 

다만, 도미티아누스는 폭군으로 기록이 되고, '기록말살형'이라는 중형을 받는데, 시오노 나나미의 주장에 따르면 도미티아누스는 폭군이라기보다는 원로원과의 권력싸움에서 밀려난 사람이라고 한다.

 

즉 로마 권력을 놓고 제정이라고 해도 원로원이 견제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하고 - 특이하게도 그는 원로원이나 군단들의 반란으로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 가정사로 인해 살해당했다고 할 수 있다고 하는데... 기록말살형에 처해지고, 암살자들이 모두 처형당해서 구체적인 살해 동기와 과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 - 네르바가 즉각 제위를 이어받음으로써 제정이 계속되게 된다.

 

네르바는 원로원 의원이었고, 나이도 많았으며 친도미티아누스도 반도미티아누스파도 아니었기 때문에 황제로 추인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후계자를 잘 임명함으로써 로마 오현제 시대를 열어간다고 한다.

 

이제 로마는 오현제 시대에 접어든다. 이들이 오현제라고 인정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세습이 아닌 능력있는 후계자를 지명했다는 데 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이렇게 한 사람에게 절대권력이 주어지면 언제든 폭군이 등장하거나 또는 살해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이런 정치구조가 지닌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로마인이야기를 사람에 대한 이야기에 더해 정치구조에 대한 이야기로 생각하면서 읽어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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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들이 어렵지 않다. 시대를 관통하는 이야기들이 시로 탄생했다. 우리가 거쳐온 시간... 결코 가볍지 않은 시간.

 

  광화문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함께 했던가. 단지 광화문에서만이겠는가. 우리나라 곳곳에서 모두들 시간을 함께 했다.

 

  시인이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를 수 있겠지만, 우리가 거쳐온 그 수많은 시간들은 참으로 무겁다.

 

  우리 시간들을 통해 세상을 바꾸었다고, 세상이 변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시간들의 무게가 그냥 사람들을 누르고 있었나 보다.

 

  한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을 하거나 또는 뒷걸음질 치지 않았나 싶은 요즘이다.

 

이러니 그놈이 그놈이라는 말이 나올밖에. 에고...고...

 

다른 사람들 상처를 보듬어주기는 커녕, 오히려 그 상처들을 후벼파는 말들, 행동들이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들을 배반하고 있다.

 

무거운 시간, 그 무겁디 무거운 시간을 몇몇은 아주 가볍게 흘려 보내고 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남들이 넘겨준 그 시간을 제 이익을 위해서, 제 안위를 위해서 그냥 써버리고 마는 현실.

 

이럴 때 고광헌의 시집, [시간은 무겁다]에서 첫시, 시인이란 바로 상처를 받아내는 사람이라는 구절이 가슴에 와닿는다.

 

시인이 상처를 받아내는 사람이라면, 정치인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간을 대신해서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그 상처를 치유해주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정치인은 시인의 마음을 지녀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상처를 상으로 받아야 시인이지

 

  김경미 시인 문학상 받는 날, 예쁜 축하 화분이 왔는데요, 리본에 쓰인 글이 가슴을 때립니다

 

  祝 受傷!

  상처를 상으로 받으니 축하한다는 건데요, 세상 어떤 시보다 더 시적이더라고요, 가슴속에 죽비가 떨어지데요, 시인은 세상의 모든 상처를 한 상 받아내는 운명이잖아요

 

  시인에게 상은 그저 아름다운 모욕이겠지요

 

고광헌, 시간은 무겁다. 창비. 2011년. 10쪽.

 

정치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당리당략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처럼 이렇게 상처를 한 상 받아내 그것을 치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들은 자기만의 시간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간이 그들 시간에 겹쳐 있는 것이다. 제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무거운지, 4년이든, 5년이든, 그 이상이든 물리적인 시간만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

 

그들에게 정해져 있는 시간은 다른 사람들의 시간이 중첩되어 있는, 무겁디 무거운 시간이라는 것. 함부로 보내서는 안 되는 시간이라는 것.

 

상처를 받아내는, 그런 시간들을 보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시간의 무게를 감당하는 사람들의 자세라는 생각. 고광헌의 시집을 읽으며 든 생각이다. 

 

상처를 받아내는 사람이 시인만으로 그쳐서야 되겠는가. 우리들 모두는 누군가의 상처를 받아내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부터라도, 그렇게 살아야지, 그것이 내 시간의 무게에 값하는 삶이지 하는 생각을 한 시읽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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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인간. 이 시간을 거스를 수가 없다.

 

  시간을 거스르면서 살아남은 존재는 신이다. 성인이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존재들. 그들에게는 시간조차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노자가, 장자가, 예수가, 부처가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존재가 되기에는 너무도 시간에 얽매여 산다. 시간은 우리 삶에 알게 모르게 들어와 우리의 일부가 된다.

 

  시간을 깨닫는 어느 순간, 그 순간은 우리 삶의 전환점이 된다.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시간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최승자 시집을 읽다가 시간이 시인에게 너무도 강하게 다가왔다는 생각을 한다. 시간이 다가오면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데...

 

죽음을 생각해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노력을 하지만 결국 죽음과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

 

  쓸쓸해서 머나먼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박삭이 살던 세계

먼 데 갔다 이리 오는 세계

짬이 나면 다시 가보는 세계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박삭이 살던 세계

그 세계 속에서 노자가 살았고

장자가 살았고 예수가 살았고

오늘도 비 내리고 눈 내리고

먼 세계 이 세계

 

(저기 기독교가 지나가고

불교가 지나가고

도가(道家)가 지나간다)

 

쓸쓸해서 머나먼 이야기올시다

 

최승자, 쓸쓸해서 머나먼, 문학과지성사. 2013년 초판 10쇄. 7쪽.

 

이 세계가 먼 세계다. '오늘도 비 내리고 눈 내리고'하는 일상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에는 분명하지만, 이런 존재에게 이 세계는 너무도 멀고 먼 세계다.

 

노자, 장자, 예수가 살았던 세계라고 하지만 우리 역시 그들과 함께 살고 있는 세계이기도 한데, 이들이 도달한 세계는 아득해서, 너무도 멀어서 도달할 수가 없다. 이 세계에 가더라도 곧 돌아올 수밖에 없다. 

 

괄호 안에 있는 종교들이 지나가는 것, 이것이 우리 삶에 왔다가 가는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결국 성인들, 신적인 존재들에게 시간은 의미가 없겠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시간은 너무도 중요하다.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 시간 속에서 허우적대서는 안 된다. 시간은 잠시 우리가 다녀와야 할 곳, 그 다음에는 삶을 살면 된다. 시간을 의식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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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딘스키와 클레 - 추상미술의 선구자들 아티스트 커플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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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딘스키, 잘 이해를 하지 못하는 화가다. 그가 쓴 글을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파악하기 힘들다. 그만큼 그는 예술에서 정신을 드러내려고 했다고 하는데, 무엇을 표현했는지를 작품을 보면서 알아내기는 힘들다.

 

클레도 마찬가지다. 클레의 그림은 완전한 추상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림에서 어떤 의미를 찾기는 힘들다. 그래서 그도 추상미술가에 속한다.

 

이들의 그림을 이해하려고 하면 혼란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데...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다. 어쩌면 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책이 될 수도 있다.

 

추상미술. 여전히 어렵다. 그렇지만 미술에서 어떤 다른 의미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냥 미술을 미술로만 받아들이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은 그림 자체로 예술을 표현한 것이고, 그림 자체로 정신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림과 다른 존재를 연결하여 그림이 다른 존재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나 하는 재현의 문제로 가지 말고, 그림 자체가 존재라는 것으로 추상미술을 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칸딘스키나 클레가 그린 그림들은 바로 이것이고.

 

이 책은 이런 추상미술에 대해서, 그들의 생애와 관련지어 알려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 그림이 많이 수록되어 있어서 그림을 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클레가 음악의 수준으로 그림을 끌어올리려고 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오히려 칸딘스키 그림에서 음악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음악이 순차적인 시간의 연속성 속에서 어떤 관계를 만들어내고, 그것으로 아름다움이 생겨난다면, 그림은 한 공간에 한꺼번에 드러내는 동시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악보를 순차적으로 따라가는 것이 음악이라면 그림은 한 화면을 동시에 보면서 무언가를 느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칸딘스키의 그림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만큼 그들은 덜어낼 것을 덜어내고 그림을 이루는 기본 요소만으로 표현해 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추상미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덜어냄... 본질만 남기는 것. 그래서 그림에 나타는 본질에 우리는 더하기를 해서 그림을 감상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두 추상미술의 거장에 대해서 자세하게, 그림들을 포함하여 잘 설명하고 있기에 읽으면서 조금은, 아주 조금은 추상미술에 다가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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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7 - 악명높은 황제들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7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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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를 지나면서 로마는 이제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확실히 넘어간다.

 

제정에서 공화정,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로마의 정체는 그렇게 바뀌었다. 로마가 점점 커져가면서 통치체제가 바뀔 필요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현대는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보다는 여러 사람에게 권력이 분산되는 정치체제를 택하고 있는 나라가 많다.

 

절대권력은 부패할 수밖에 없는가라는 질문. 또 그런 절대권력을 쥐게 되는 사람을 어떻게 고를 것인가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선거를 통해서 뽑는다고 해도, 그 사람에게 절대권력을 주면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가 없다. 오로지 그 사람의 행동에 맡길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절대권력을 한 사람에게 주었을 때 생기는 문제다.

 

로마 역시 제정이 되면서 뛰어난 정치감각이 있던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뒤 이런 문제를 겪는다.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었을 때 그 사람이 능력이 뛰어나다면 나름대로 정치체제가 유지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세습이든, 선출이든 한 사람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것은 문제가 생길 소지가 있다.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며 어떤 정치체제가 바람직한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7권에서는 제정이 확립되고 무너지지 않는 정치체제가 되는 때를 다루고 있다.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뒤 뒤를 이은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를 다루고 있다. 이들을 묶어 놓은 제목이 '악명 높은 황제들'인데, 둘은 몰라도 나머지 둘은 확실히 악명 높은 황제들로 알려져 있다.

 

칼리굴라와 네로.

 

둘의 공통점은 젊은 나이에 황제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죽임을 당하거나 쫓겨날 위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

 

그럼에도 이들을 없애기만 했지 제정이라는 정치체제를 바꿀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것. 이때쯤 되면 이제는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이 책임을 지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정치하게 하는, 간접 정치가 더 어울리는 나라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한 사람에게 집중된 권력을 그 사람이 잘못 행사하면 그 사람만 바꾸면 된다는 생각을 지니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이것은 자신의 권력을 나누어 주되, 너를 단죄할 권리는 지니겠지만 내가 책임지는 정치는 하지 않겠다는 마음, 직접 민주주의를 이루기 힘든 인구수와 영토를 가진 나라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대리 정치를 황제라는 이름을 지닌 사람에게 위임한 꼴이고, 그 사람이 잘못했을 때는 힘으로 다른 사람을 내세우는 그런 일을 반복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동양의 제정과 다른 점이 바로 로마의 이런 제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람직한 정치 체제인가는 계속 생각하게 된다. (동양의 제정에서도 환관정치, 또 황제나 왕들의 암살, 반란 등이 지속되었으니.. 별로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너무도 광대하기 때문에 일관성을 지니기 위해서 한 사람에게 권력을 주고 그를 보좌하는 역할로 만족하는 그런 정치체제.

 

티베리우스는 나름 능력도 인정받고 로마를 안정시키는데 공헌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가 겪께 되는 가족간의 불화. 다른 사람에 대한 불신 등은 그를 나중에 악명 높은 황제로 여기게 하는 요인이 되게도 하고...

 

칼리굴라는 능력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단지 핏줄이라는 이유로 황제가 되지만 정치 감각은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의 측근에게 살해당하고, 이런 일은 로마 황제들에게 숱하게 일어나게 되는 단초를 만든 황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꼭 칼리굴라에게서 그 단초를 찾을 필요는 없다. 초기 로마가 제정이었을 때도 황제들이 암살 당했다. 절대권력이 한 사람에게 있을 때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공화정을 거쳐 다시 제정으로 돌아온 로마에서, 그것도 초기에 칼리굴라 황제에게서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굳이 악명 높은 황제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그 역시 가족사는 불행하다고 할 수 있다. 제 아내에게 살해를 당하게 되니, 정치에 무능력한 황제의 최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황제가 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 네로가 등장한다. 아마 네로는 예술가가 되었으면 이름을 남기지는 못했을지라도 불행하게 최후를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는 더 심하게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이 시오노 나나미의 판단이다.

 

나는 한때 네로가 로마를 불태우고, 불을 보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냥 사람을 죽이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는 폭군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로마는 우연한 화재가 대화재로 번진 것이었으며, 반란 기도를 신고받고 사형에 처한 것. 그가 기괴한 짓을 하기는 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무지막지한 폭군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조금 망설여지는 면이 있다.

 

그럼에도 그는 죽어야 했다. 로마인들을, 특히 권력욕이 있는 사람들을 만족시켜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절대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이 주변 사람이나 또는 군사력을 지니고, 또 나름 귀족적 자부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제대로 대우해 주지 않았을 때, 그는 또다른 절대권력으로 대체될 수 있다.

 

이렇듯 현재 쥐고 있는 권력이 영구한 것이 아님을 제정 로마에서 인식하게 된다. 오히려 권력이 한 사람에게 독점될수록 제거될 가능성도 높아짐을, 그것도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서 그 가능성은 더 놓아짐을 제정 초기 황제들이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고 그것을 실행하는 황제들이 오래갈 수밖에 없음을, 그렇지 못한 황제들은 쫓겨날 수밖에 없음을 로마 황제들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실력 우선주의로 황제를 선출하는 방식은 이렇게 쫓겨날 위험이 있다. 이 문제를 세습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나기도 하는데..그것이 해결책은 되지 않음을 동서양 역사 모두에서 볼 수 있다)

 

그때는 목숨으로, 지금은 표로 그것을 실현하고 있는 차이가 있지만, 정치를 하는 사람들,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 모두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면 어떤 정치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가 붙은 '로마인 이야기'라는 제목을 사람이야기만으로 읽지 않고 우리 삶을 규정하는 정치체제에 대한 생각으로 확장할 수 있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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