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서 만난 전쟁사 - 승자와 패자의 운명을 가른 역사의 한 장면
이현우 지음 / 어바웃어북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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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도 싸움을 한다. 목숨을 건 싸움을 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동물들은 우열을 가리기 위한 싸움을 한다. 승자가 결정되면 패자는 승자에게 굴종하거나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싸움을 하더라도 더 큰 싸움을 한다. 종족 자체를 몰살시키는, 소위 홀로코스트라고 하는 학살을 하기도 한다.

 

종 전체를 적으로 돌리고, 종을 없애기 위한 활동도 한다. 그렇게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자처하는 인간은, 자신과 같은 종인 인간을 공존할 수 없는 존재로 여기고 제거하려는 비이성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전쟁으로 인해 승자도 패자도 피해를 보게 되지만,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전쟁이 없는 시기는 너무도 짧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온갖 무기들이 개발되고, 그것이 지구를 멸망으로 이끌 정도로까지 위력이 강해진 현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전쟁과 가장 무관할 것 같은 예술, 그 중에 미술에서 전쟁을 만날 수 있다. 전쟁과 관련된 그림도 많아서 미술관에서 전쟁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이렇게 그림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전쟁의 여러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무기들의 발달사에서부터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옷 (코르셋, 카디건), 먹을거리 (초콜릿) 들도 전쟁과 관련이 있음을 그림(미술)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전쟁이 꼭 역사책으로만 기록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림 속에서도 전쟁이 기록으로 남는다. 그런 그림을 보면서 우리는 전쟁에 대한 여러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전쟁이 인류에게서 사라지는 것을 꿈꾸지만,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미술을 통해서 생각하게 된다.

 

미술의 역사만큼이나 미술 속에 전쟁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런 미술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미래를, 전쟁이 없는 미래를 만들어 나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미술 속에 나타나는 전쟁 영웅들의 모습에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발견, 너무도 생생하게 다가오는 전쟁의 참상, 또는 전쟁의 역사를 미술을 통해서 발견하고,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할 일, 그것이 바로 우리 몫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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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생물들의 반란

              --- 대명 비발디 파크로 가는 길에


어느 날 몸 속에 살던 미생물들이

아 따분해

무슨 재밌는 일 없을까

그래, 몸에 길을 내는 거야

없던 길들이 생기고

나들이 하고

그냥 나들이는 따분해

털들을 밀어내고

미끄럼틀을 만들어 씽씽


아 이런 길이 막히네

안 되겠다

더 넓히자!

어, 앞이 막혔네

뚫자!

털들이 무성했던 곳은

반질반질 뺀질뺀질만이 남고

온 몸에는 없던 길들에

넘치는 미생물들만 넘실댄다


어느 날

지구는 소리쳤다

이 미개한 인간들아

미생물들보다 더 못한 인간들아

숨 쉬기가 곤란하다

바로 너희들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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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촌 고양이 우리 시대 우리 삶 2
황인숙 지음, 이정학 그림 / 이숲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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캣맘이라는 말이 있다. 길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들. 그들은 길고양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역시 사랑한다고 말을 한다. 그만큼 생명에 대한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뜻이리라.

 

시인 황인숙은 남산 해방촌에서 산다. 해방촌에 살면서 고양이 세 마리를 키우고, 동네 고양이들을 위해 먹이를 주기도 한다.

 

물론 동네 사람들 가운데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럼에도 황인숙은 길고양이들을 보살피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

 

생명에 대한 사랑, 그것은 곧 시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다. 이 책 1부는 이러한 해방촌 길고양이와 얽힌 이야기들을 싣고 있다.

 

많은 동네에서 길고양이들을 흔치 않게 볼 수 있게 된 지금, 이 책은 조금 시일이 지난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길고양이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이 책에서 언급한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길고양이들 처지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고...

 

시인은 길고양이와 얽힌 이야기를 하면서 비와 주차 차량 이야기를 한다. 비를 무척이나 좋아했다는 시인. 발이나 옷이 젖는 것도 좋아 비가 오면 한정없이 걸었다는 시인이, 길고양이를 돌보면서부터는 비가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길고양이에게 준 먹이가 비로 인해 불어터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장마가 되면 길고양이들이 너무도 안 좋은 환경에서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길가에 주차되어 있던 차량은 부정적인 생각에서 고마운 존재로 바뀌게 된다. 적어도 그렇게 주차되어 있는 차량 밑에서 길고양이들이 비를 피하거나, 더위를 피하거나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에게 어떤 존재도 상황에 따라서 변할 수 있다는 것, 시인은 이렇게 길고양이를 통해서 존재들의 다양한 의미를 생각하게도 해주고 있다.

 

읽다가 황인숙 시인이 낸 시집이 있는 것이 기억나서 시집 차례를 죽 훑어보았더니, 고양이에 관한 시가 두 편이 있다. 대충 훑어본 것이라 아마도 더 많은 시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 시들은 다음과 같다.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이 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사뿐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 같고

공처럼 둥굴릴 줄도 아는

작은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사기그릇의 우유도 핥지 않으리라.

가시덤풀 속을 누벼누벼

너른 벌판으로 나가리라.

거기서 들쥐와 뛰어놀리라.

배가 고프면 살금살금

참새떼를 덮치리라.

그들은 놀라 후닥닥 달아나겠지.

아하하하

폴짝폴짝 뒤따르리라.

꼬마 참새는 잡지 않으리라.

할딱거리는 고놈을 앞발로 툭 건드려

놀래주기만 하리라.

그리고 곧장 내달아

제일 큰 참새를 잡으리라.

 

이윽고 해는 기울어

바람은 스산해지겠지.

들쥐도 참새도 가버리고

어두운 벌판에 홀로 남겠지.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어둠을 핥으며 낟가리를 찾으리라.

그 속은 아늑하고 짚단 냄새 훈훈하겠지.

훌쩍 뛰어올라 깊이 웅크리리라.

내 잠자리는 달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겠지.

혹은 거센 바람과 함께 찬 비가

빈 벌판을 쏘다닐지도 모르지.

그래도 난 털끝 하나 적시지 않을걸.

나는 꿈을 꾸리라.

놓친 참새를 쫓아

밝은 들판을 내닫는 꿈을.

 

황인숙,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문학과지성사. 1992년 4쇄. 14-15쪽.

 

  고양이

 

당신의 손끝이 내 등을 스치면

별들이 벌떼처럼 날아오르죠

당신의 손은 게을러요

당신의 손을 핥을 때

당신의 무릎에 턱을 비빌 때

떨어지는 몇 개의 별처럼

야아옹 서글피 당신을 부르는 걸

자, 그만. 하고는 마시지요

별은 내 마음에도 제멋대로 나타나

내 기분을 변덕스럽게 해요

나뭇가지 중에서도 하늘거리는

윗가지에 앉아

어지럽도록 흔들리는 게

나는 좋아요

별들이 반짝이는 건

몹시 흔들리기 때문이죠

내가 새조롱에 달려든다면

당신은 눈살을 찌푸리겠지만

나는 당신의 새를

해치려는 게 아니어요

그저 그들과 함께 가벼이

당신 앞에서

반짝거리고 싶을 뿐

 

당신의 손은 게으르죠.

 

황인숙, 슬픔이 나를 깨운다. 문학과지성사. 1997년 재판 2쇄. 74-75쪽.

 

고양이에 대한 시인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유롭게 살고 싶은 고양이로 태어나고 싶다는 화자의 소망은, 그렇지 못한 고양이들의 현실과 겹쳐져 사람만이 아니라 갇혀 있는 존재, 자유롭지 못한 존재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럼에도 두 번째 시는 집에 있는 고양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고양이가 화자가 되어 이야기하고 있다.

 

사람과 함께 어울리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이 어찌 고양이뿐이겠는가. 우리들의 손은 어쩌면 그렇게 게으른지도 모른다.

 

우리 앞에서 반짝거리고 싶어 행동하는 존재들을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한 시. 내가 주변 사람들, 주변 존재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시.

 

고양이를 통해 나를 바라보게 만드는 그런 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들과 황인숙이 경험하고 생각한 이야기들이 함께 실려 있으니 여러가지를 느끼게 해주는 책이기도 하다.

 

주변에서 쉽게 만나는 길고양이들을 먹이까지는 주지 못하더라도 좀더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는 책이기도 하고.

 

덧글

 

수필을 읽는 재미가 인생에 대한 성찰을 하게 해준다는 데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시가 젊음에 해당한다면, 소설은 중년에 해당하고, 수필은 노년에 해당한다는 말이 있는데, 수필은 자신이 살아온 세상을 돌아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이 글에서 이런 말을 읽고 이 말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나이를 먹는 기술이란 뒤를 잇는 세대의 눈에 장애가 아니라 도움을 주는 존재로 비치게 하는 기술, 경쟁상대가 아니라 상담상대라고 생각하게 하는 기술이다." - 앙드레 모루아의 글이라고 한다.

 

"영광의 공허함을 알고 무명의 한 존재로 편안함을 얻으려는 기분" - 누군가의 말인지 모른다고 한다.  이 말 역시 앙드레 모루아의 글이라고 하는 글도 있다. (239쪽)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문장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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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토록 산업화된 시대에. 시인은 유물이 되어 박물관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세상이 각박해져 갈수록 시인이 내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세상이 시멘트로 덮일 때마다 시인이 노래하는 자연은 점점 사라지는데...

 

 인공이 판치는 시대. 자연이 사라져가는 시대.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래도 꽃 피면 꽃을 보기 위해 우 몰려가고, 꽃 대신 서로의 뒤통수만 보다, 서로의 발길에 치여 오기도 하고...

 

  단풍이 들면, 또 단풍을 보러 우 몰려가 서로의 몸을 부딪치고, 부딪히며 그렇게 자연 속에 사람들만 채워놓다 돌아오고는 하는데.

 

시인은 사라져 가는 자연을 안타까워 하며, 인공의 시대를 거부하기 위해 다시 자연을 불러오지만, 시인에게 불려온 자연은 점점 줄어들기만 하고.

 

그래도 시인은 자꾸 자꾸 자연을 불러오고. 우리들에게 아직은 자연이 있음을 이야기하지만, 시인이 불러온 자연이 인공을 몰아내지는 못하고, 다시 인공 속에 파묻혀 버리는 현실.

 

나희덕 시집을 읽다가 '또 나뭇잎 하나가'라는 시를 보고는 시인의 처절한 몸부림을 표현한 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또 나뭇잎 하나가

 

그간 괴로움을 덮어보려고

너무 많은 나뭇잎을 가져다 썼습니다

나무의 헐벗음은 그래서입니다

새소리가 드물어진 것도 그래서입니다

허나 시멘트 바닥의 이 비천함을

어찌 마른 나뭇잎으로 다 가릴 수 있겠습니까

새소리 몇 줌으로

저 소음의 거리를 잠재울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내 입술은 자꾸만 달싹여

나뭇잎들을, 새소리들을 데려오려 합니다

 

또 나뭇잎 하나가 내 발등에 떨어집니다

목소리 잃은 새가 저만치 날아갑니다

 

나희덕, 사라진 손바닥. 문학과지성사.  2004년 2쇄. 94쪽.

 

시인이 발버둥치는데, 계란으로 바위 치기밖에 되지 않는 현실. 그러나 결코 포기하지 않는 시인. 이런 시인들이 있어 그나마 '시멘트 바닥의 비천함'이 잠깐이라도 가려지고 있는데...

 

자꾸만 줄어드는 자연에 대한 안타까움, 인공의 세계에서 자연과 멀어지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에 대한 안타까움.

 

나뭇잎들을, 새소리들을 우리에게 데려오려는 시인의 몸부림. 그런 시인의 몸부림이, 바로 시인이 시로 표현하는 언어, 말들이 아닌가 한다.

 

그 말들이 비루한 세상을 온전히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잠시 비루함을 가려주면서 우리에게 다른 세상을 생각하게도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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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보 칼맨, 디자인으로 세상을 발가벗기다 - 대화 11
이원제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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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에 관심을 지니고 있지만, 어떤 디자인이 좋은지는 알지 못하고 있다. 디자인이 우리 일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살아가면서 디자인을 딱히 의식하지는 않고 있다.

 

어쩌면 숨쉬는 것과 같이 디자인도 그냥 삶에 묻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디자이너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려 한다. 그리고 드러난 디자이너들이 있다.

 

우연히 헌책방에서 티보 칼맨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 책을 보았다. 그동안 전혀 듣지 못했던 이름이다. 책을 펼치니 그가 디자인한 작품들이 나오는데... 내가 모르고 있었던, 아니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던 '컬러스COLORS'라는 잡지의 편집자이자 디자이너로 활동했단다.

 

물론 그가 차린 회사도 있고, 다른 많은 작품도 있지만, 디자인을 감상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실생활에 접목시틴 뉴욕 42번가 개발 사업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에게서 배울 점은 디자인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인문학적 소양을 쌓으라고 하는 것, 디자인이 그림을 잘 그리거나 상상력이 뛰어나거나에서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삶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에 바탕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든다.

 

특정한 재주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시야를 가지라는 것, 그렇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한다는 것. 티보 칼맨이 주장하는 디자이너의 자세다.

 

여기에 그는 '버내큘러'라는 말을 강조한다.

 

'버내큘러'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특정 문화나 지역에서 사용하는 일상 언어'라고 적혀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버내큘러'는 많은 시간, 열악한 수단, 가난의 결과입니다. 뉴욕에서 볼 수 있는 버내큘러로는 할렘가의 스페인 식료품점 간파이라든가 얼음 배달 트럭을 치장한 그림 등이 있죠. 그런 것들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진정한 고민들이 담겨 있습니다. (83쪽)

 

이것은 바로 사람들, 특히 서민들의 삶과 동떨어진 디자인을 해서는 안된다는 얘기로 들린다. 그래서 그를 사회주의적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라고도 한다는데, 사회주의적이라기보다는 공공성을 살리는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편도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디자인이 생활과 떨어질 수 없다면 생활에서 사람들에게 좀더 잘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디자이너가 할 일이 아닌가 한다.

 

그가 한 말을 마지막으로 인용한다. 그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는 말이다.

 

많은 디자이너들은 디자인이 최종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게 디자인은 하나의 언어이며 최종 산물을 위한 수단이자 커뮤니케이션의 한 방법일 뿐입니다. 문제는 무엇을 커뮤니케이션하느냐입니다. 버거킹이냐, 아니면 의미 있는 다른 어떤 것이냐? (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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