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코메티가 만든 조각상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힘들게 위태위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닐까.

 

  중력의 법칙으로 땅에 굳건히 발을 디디고 있어, 걷는 모습이 안정적인 조각들과 달리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 조각들은 땅보다는 하늘을 추구하는 듯, 길다란 다리에 작은 발이 땅에 서 있는 것이 불안하다는 인상을 준다.

 

  삶도 이처럼 위태위태하겠지. 하루하루를 이렇듯 불안하게, 간신히 살아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조각들이었다.

 

  이런 자코메티의 작품과 연관되는 시들을 모아 시집을 냈다. 최승호 시인의 시집이다.

 

최승호 시인의 시가 좀 괴기스러운 데가 있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고 있어서 종종 읽곤 했었는데...

 

자코메티와 늙은 마네킹이라는 제목이 주는 불안정함이 이 시집을 읽게 만들었다. 시집을 읽다가 그전에 읽은 많은 시들을 발견하기도 했는데... 시집 곳곳에 있는 자코메티의 작품과 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그 중에 우리 일상을 노래하고 있는 시 '새장 같은 얼굴을 향하여'  

 

 새장 같은 얼굴을 향하여

 

어느 날의 하루는 별 기쁨도 보람도 없이

다만 밥 먹기 위한 하루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저녁엔

여물통에 머리를 떨군 소가 보이고

달이 떠도 시큰둥한 달이 뜬다

 

지난 한 해는 바쁘기만 했지

얼마나 가난하게 지나갔던가

정말 볼품없는 돼지해였다

시시한 하루에

똑같은 하루가 덧보태져

초라한 달이 되고

어두운 해가 되고

참 시큰둥하고 따분하게 살았다

 

놀라울 것 없는 이 평범한 삶이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빈 새장 같은 죽음의 얼굴은

이빨에 앵무새 깃털을 문 채

웃고 있는데

 

최승호, 자코메티와 늙은 마네킹. 뿔. 2008년. 76쪽.

 

우리가 의식하지 않더라도 우리 삶은 평범하다. 이 평범한 하루하루가 모여 평범하지 않은 우리 인생을 만들어간다. 그러다 어느날 문득, 죽음을 발견한다. 죽음이 마치 그때 처음 찾아온 것처럼.

 

새장 안에서 살아가는 새처럼 우리는 죽음 안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인데... 그러니 평범하지 않은 하루, 따분한 하루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마냥 따분하기만 한 삶이라면 자코메티의 조각처럼 위태로운 걸음을 걷지도 않았으리라. 따분한 삶을 깨닫는 순간, 삶은 휘청거리게 된다.

 

이 휘청거림이 따분한 삶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그렇게 우리는 휘청거려야 한다. 늘상 똑같은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하루일지라도 다른 하루가 될 수 있도록 삶을 살펴야 한다.

 

삶을 살피는 일이 바로 삶을 둘러싸고 있는 죽음을 생각하는 일이기도 하고, 죽음을 생각하는 삶은 결코 따분할 수가 없다.

 

언젠가는 비어야 할 새장에 무엇을 남겨야 할지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시집 말미에 있는 정끝별의 '춘천, 물의 자서전을 읽다'라는 글에서 왜 시인의 시에 죽음이 이렇듯 많이 등장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친했던 친구들의 죽음을 너무도 일찍 만나지 않았던가. 그렇게 살아온 삶 자체가 자코메티가 만든 조각상이 걸어가는 모습과 겹쳐지면서, 시가 더 절절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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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9 - 현제賢帝의 세기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9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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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을 시오노 나나미는 '모든 길은 로마에서 시작한다'로 바꾸고 싶다고 한다. 그만큼 로마 시대에는 많은 길들을 만들었다. 사람도 물자도 교류가 잘 되도록 직선으로, 평평하게 길을 냈다고 한다.

 

간선도로만 해도 8만 킬로미터에 달한다고 하니, 엄청나게 긴 도로다. 이 도로에 사람들이 왕래할 수 있는 인도도 설치했다고 한다. 도로 4미터, 좌우로 인도 3미터씩, 그리고 도로와 인도 사이에 배수로를 설치했다고 하고, 도로를 만들기 위해 땅을 파고 자갈과 같은 돌을 넣고, 그 위에 다시 평평하게 반석들을 깔았다고 한다.

 

이렇게 도로를 내면 여러모로 편리하기는 하지만, 적이 침입할 때도 쉽게 해주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적에게도 유리하지만 로마에는 더 유리하기 때문에 그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한다.

 

결국 로마는 연결해서 방어하는 전략을 택했다고 할 수 있으니, 중국이 장벽을 쌓아 방어하는 전략을 쌓은 것과 다른 방법을 택했다고 할 수 있다.

 

나라를 방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국민들이 평화롭게 잘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다. 자기 나라에 대해 자부심을 지니고, 그 나라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면 외침에 대해서 강하게 대응하게 된다.

 

또한 연결해서 방어하는 방법은 다른 민족들을 내치지 않는다. 너와 나라는 구분을 엄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가 우리가 되는 방법인 것이다.

 

다른 민족들까지도 동화시키는 그런 정책이 결국 로마의 도로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도로는 로마가 세계 최강대국이 되게 하는 한 방책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도로와 마찬가지도 수도에 대해서도 시오노 나나미는 감탄하고 있다. 그들은 도로만큼이나 수도 건설에도 열을 올렸다. 깨끗한 물을 부족하지 않게 로마에 공급하는 수도는, 로마 각지로 퍼져 그들에게 물걱정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런 수도 건설과 연결하여 로마에 유행했던 목욕탕, 대중목욕탕은 로마인들의 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하는데, 수도 건설과 도로 건설 또 목욕탕으로 인해 로마에는 전염병이 창궐하는 일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외적인 사회 기반 시설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의료와 교육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있다. 한 사회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구조로 건설에 관련된 것도 있지만, 사람들의 건강을 유지하게 하는 의료도, 또 미래를 이끌어갈 사람들을 양성하는 교육도 중요하게 관련된다.

 

로마인들은 전성기에 이들에 대해서 하나도 소홀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로마를 강대국이 되게 한 이유이기도 하다.

 

오현제가 등장해 로마가 안정기에 접어들 때까지, 로마의 사회 기반 시설에 대해 살핀 것이 9권이다.

 

사람이야기와 더불어, 그 사람들이 어떤 사회를 만들려고 했는지, 또 그들이 자신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필요로 했는지, 정책을 실시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고로, 어떻게 정책을 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9권이다.

 

이제 로마는 정점에서 내려오기 시작한다... 다양성이 살아 있는 사회에서 다양성이 사라지는 사회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들 이야기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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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마다 하루에 재활용품 분리수거를 한다. 분리수거를 하면서 환경 파괴에 대한 죄책감이 조금 덜어진다고 느끼고 있는데...

 

  플라스틱이 얼마나 위험한지, 특히 플라스틱이 분해되면서 나오는 미세 플라스틱이 우리 생명을 비롯해서, 지구에 살아가고 있는 다른 존재들의 생명도 위협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플라스틱에 비닐까지도 포함된다고 하니, 우리 생활을 생각해 보면 이들이 얼마나 우리 주변에서 많이 쓰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도처에 플라스틱이다. 플라스틱 행성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잘 분해되지도 않고, 또 환경에도 좋지 않은 플라스틱이 이렇게 많이 쓰이는 것은 편리성 때문이다.

 

편리, 이것이 우리 생활을 이끌어가는 주요 요소인 것이다. 그러나 편리가 우리 생활을 좋은 쪽으로 이끌어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편리에 눈 멀어 우리 스스로를 위험이라는 낭떠러지로 자꾸 밀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플라스틱에 대해서 정리해 놓은 책을 찾다가, 짧게 설명하고 있는 책을 골랐다. 바로 삶의 기술이라는 책.

 

삶의 기술, 나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잘 사는 세상을 만드는 노력을 하자는, 그렇게 삶을 바꿔가자는 이야기를 하는 책이다.

 

플라스틱 없이 살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실천을 하는 사례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우선 플라스틱을 쓰지 않는 노력을 해야겠지만, 어쩔 수 없이 쓸 경우에는 재활용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재활용과 더불어 이것들을 다른 용도로 다시 만드는 일도 해야 한다.

 

그리고 플라스틱을 덜 쓰게 하는 사회 제도도 마련해야 하고, 비용이 조금 더 들더라도 플라스틱을 대체한 제품을 쓰는 노력, 그리고 플라스틱을 만들어낸 곳에서 재활용을 하도록 하는 법규 등도 만들어야 한다.

 

개인의 노력과 사회적 제도가 함께 가야만 플라스틱을 줄이는 운동이 성공할 수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플라스틱을 줄이는 생활을 하는 사례들을 제시해 주고 있어서, 이런 활동이 더 광범위하게 번지면 지구가 조금은 더 잘 숨을 쉴 수 있게 될 것이다.

 

'플라스틱 대장간'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한 번 사용한 플라스틱을 이용하여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내는 모습도 참조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플라스틱 없애기, 또는 줄이기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아뿔싸, 점심에 푸딩이 나왔다. 플라스틱 용기 속에 들어 있는...

 

단체 급식을 하는 상황에서 이렇듯 많은 플라스틱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올라오고 있으니... 야, 이거 플라스틱에서 해방되는 것이 정말로 힘든 일이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고나 할까.

 

먹고 재활용이 잘 될 수 있게 분리하는 일을 하기만 했는데... 내가 원하지 않아도 내게 다가오는 플라스틱들이 이렇게 많음을, 우선은 그래도 재활용이 되게 분리수거를 잘하고, 이거에 더해서 어떻게든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려는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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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2 0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02 09: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송도둘리 2019-05-02 18: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공감합니다. 매주 분리배출하는 비닐이랑 플라스틱이 한아름이네요...죄책감이 듭니다.

kinye91 2019-05-02 19:09   좋아요 0 | URL
정말 분리배출되는 플라스틱 양도 엄청나요... 그런데, 분리배출이 안 되고 있는 플라스틱은 이보다 더 많을테니... 우리 생활을 돌아봐야 한단 생각이 들어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6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지음, 곽광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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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 이어 2권을 시작한다. 이제는 황제의 죽음까지다. 그런 생애를 요약할 필요는 없다. 이상하게 이 작품은 소설인데, 읽으면 읽을수록 소설이 아니라 진짜 회고록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아마 어떤 작가는 우연히 서점에서 이런 책을 발견했다고 하면서 이 책을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유르스나르는 '친애하는 마르쿠스'로 시작한다. 양자로 맺어진 친족 관계로 따지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하드리아누스에게 손자뻘이 된다. 우리나라 말로 하면 세손이 되는 셈이다.

 

이렇게 시작하니, 이 작품을 소설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읽으면 역사적 사료로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유르스나르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 작품이 소설임을 강조한다.

 

'역사소설을 별도의 범주에 넣는 사람들은, 소설가가 하는 일이란 역사와 같은 자료로 짜여진 상당수의 과거사들과 추억들 - 의식적인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을 자기 시대의 방식의 도움으로 해석하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254-2555쪽)

 

그러니 이 작품은 소설이다. 사실이 아니다. 그런데 아니 사실이다. 작가가 얼마나 많은 역사적 자료들을 참조했겠는가.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 9권'을 먼저 읽었으면 이 소설을 읽으면서 시오노 나나미가 이 책을 얼마나 참조했는지 잘 알게 된다. 아니, 그들은 어쩌면 같은 사료들을 가지고 작업을 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시오노 나나미는 이 책을 참조할 수도 있었느니, 유르스나르보다 더 많은 자료를 이용할 수 있는 행운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시오노 나나미는 역사책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썼고, 유르스나르는 소설이라는, 자신은 문학 활동을 한다는 생각으로 이 작품을 썼으니, 이 작품이 시오노 나나미의 작품보다 표현이 더 풍부하다고 할 수 있다.

 

2권에서는 안티노오스라는 젊은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도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 자기 부인인 사비나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적게 나오고, 오히려 어머니 뻘인 플로티나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오니, 하드리아누스에게 영향을 준 여인은 트라야누스의 부인인 플로티나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그에게 부인인 사비나보다는 자신이 마음을 줄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하다. 그런 대상으로 곁에 다가온 젊은이가 안티노오스. 하드리아누스는 그를 만나고 곁에 두지만 그는 20세라는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죽음으로 안티노오스는 영원한 젊음으로 하드리아누스에게 남았다는 사실.

 

누군가에게 기억할 만한 인물이 있기 마련인데, 하드리아누스에게는 안티노오스라는 젊은이가 그런 인물이었다는 것. 그렇다고 그에게 푹 빠져 다른 일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일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티노오스 이야기와 유대 반란 이야기, 예루살렘에 살던 유대인들을 쫓아내는 황제,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는 황제가 바로 하드리아누스이고, 자신의 몸이 좋아지지 않자 후계자를 선정하는 작업을 하는 황제의 모습.

 

이 과정에서 그는 인간 사회가 어떻게 변해갈지 모른다는 생각을 내비친다. 아마도 작가인 유르스나르의 생각이겠지만... 이 문장들은 여러 생각할거리를 제공한다.

 

'인간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우리들의 연약한 노력은 우리들의 후계자들에 의해 산만하게 계승될 뿐일 것이다. 반대로 선(善) 자체 내부에 포함되어 있는 과오와 멸망의 씨앗은 제(諸) 세기를 거치면서 엄청나게 자라날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싫증난 세계는 다른 주인들을 찾게 될지도 모르고, 우리에게 현명하게 보였던 것이 신통치 않은 것으로, 아름답게 보였던 것이 추악한 것으로 보이게 될지도 모른다.' (154쪽)

 

신중하게 고른 후계자가 일찍 죽어버리고, 결국 다시 후계 작업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 여기에 후계의 후계까지 고려해 안토니누스를 양자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아우렐리우스를 양자로 받아들에게 하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자식을 낳지 못해서 양자를 들여 후계자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지만, 어쩌면 이것은 로마의 발전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핏줄에 의해 황제 지위를 계승하는 것이 그다지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식이 없는 것에 대해서 아쉬워 하지 않는다.

 

이런 과정을 거쳐 죽음에 이르기까지, 죽음에 대면해서 그가 견뎌내는 장면이 이 작품의 마지막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렇게 로마 시대 오현제라 불리는 황제들 중 세번째 황제인 하드리아누스의 이야기는 끝난다.

 

이처럼 회고록이라는 제목을 지닌 이 소설을 통해 로마 오현제 시대의 정점에 있던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다가갈 수 있다. 이 소설이 지닌 장점이 바로 이것이다. 작가는 이 책 후반부에 창작 노트를 실어두고 있다. 이 작품을 쓸 때 견지했다는 규칙.

 

'이 작품을 쓰는 데 있어서의 규칙: 관계되는 일체의 것을 연구하고 읽고 조사할 것. (256쪽)

 

이밖에 창작 노트에서 몇 가지를 인용한다.

 

만약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세계 평화를 유지하지 못하고 제국의 경제를 개혁하지 못했다면, 그의 개인적인, 행복하고 불행했던 일들은 나에게 덜 흥미로울 것이다. (260-261쪽)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보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일기'가 더 좋았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행동적인 사람이 일기를 쓰는 것은 드문 일이라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이다. 행동적인 사람은 거의 언제나 나중에, 행동을 잃어버리게 된 시기의 끝에 와서야 옛날 일들을 회상하고 적고 또 대개의 경우 놀라는 것이다. (267쪽)

 

나는 내가 한 위인의 생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재빨리 깨달았다. 그 때문에 나는 진실을 더욱 존중했고, 더욱 조심스러웠으며, 나 쪽에서의 개입을 더욱 삼갔다. (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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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5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지음, 곽광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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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 9권'을 읽다가 이 책 제목을 보았다.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등극할 때 벌어진 정적에 대한 살해 사건을 다루는 부분에서였다.

 

소설이라고 하는데,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사실적이라는 이 작품에 대해서, 작가가 조사를 많이 하고, 사실(史實)에 기반해서 소설을 썼다고 하는, 시오노 나나미가 극찬하는 작품이었다.

 

어찌 읽어보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좋은 책이란 그 책을 읽음으로써 다른 책을 읽게 만들지 않는가. 책들의 연쇄. 이 책에서 저 책을 소개하고, 다시 다른 책으로 건너가게 하는 책들이 좋은 책이다.

 

로마인 이야기 다음 권으로 넘어가기 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대한 소설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 그렇게 해서 이 책을 읽기 시작.

 

로마인 이야기를 읽었기 때문에 대략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대한 지식은 있는 셈. 그렇다고 많이 알지는 못하니, 회상록이라는 형식으로 쓴 소설인데, 진짜 회상록을 읽는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손자뻘이라고 할 수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쓰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작품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생각과 일생을 표현하고 있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황제가 되어 평화를 유지할 때까지의 기간을 다루고 있는 것이 1권이다. 2권에서는 황제가 되어 로마를 다스리게 되는 중후반 이야기가 나오게 될 것인데, 1권에서는 황제가 되기까지 그가 겪었던 마음 고생, 그리고 황제가 되자마자 벌였던 살해가 정당화되고 있다.

 

그는 방어를 중심으로 로마를 다스리고자 했다. 정복으로 영토를 확장하기보다는, 이미 확보한 영토를 확고하게 지키는 방향으로 로마를 이끌어가고자 했던 황제.

 

그러니 방대한 영토를 지닌 로마를 수도에서만 머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재위 기간 중 많은 기간을 영토 순방에 나서는데, 순방에 나서서 그 지역에 맞는 해결책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들을 총독이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이렇게 그는 제도로써 로마를 안정시키려고 한다. 그가 지속적으로 지방 순방을 다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자신의 선대인 트라야누스 황제와는 반대의 길을 가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트라야누스는 장군으로서의 황제라면, 하드리아누스는 황제로서의 장군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로마가 안정이 되지 않았을 때 군사력으로 로마의 힘을 과시한 것이 트라야누스라면, 그런 정복 전쟁 다음에 로마를 안정시키는 황제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하드리아누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그의 모습, 황제로 등극하기 전까지 트라야누스와 반대되는 사고를 했던 하드리아누스의 모습이 전반부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전임자를 딛고, 전임자를 넘어서야만 자신의 존재 위치를 각인시킬 수 있는 하드리아누스.

 

다른 길을 가되, 로마를 안정시키는데는 목표가 같았던 두 황제. 그리고 황제가 된 이후에 자신이 어떤 일을 해왔는지를 계속 설명하고 있는 소설.

 

사실에 기반해서 썼기 때문에, 어쩌면 이 소설을 통해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대해서 더 잘 알아갈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명심해야 할 것은 이 작품은 회상록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것.

 

회상록도 철저하게 자신의 처지에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수도 있으니, 이 소설을 통해서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대해서 다 알았다고 하면 그건 잘못된 읽기일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다만, 회상록이라는 형식을 통해 제정이 안정기에 접어드는 로마, 그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의 고민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는 점은 좋다.

 

머리 속을 떠나지 않고 있는 문구... 이 작품 1권에서 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고백하거니와 나는 법을 거의 신뢰하지 않는다. 법이 너무 엄격하면 인간은 법을 거기에 되고, 또 그것은 당연하다. 법이 너무 복잡하면, 인간의 간지(奸智)는 그 약하고 축 늘어진 그물 틈으로 빠져나갈 방도를 쉽사리 발견한다. ... 너무 자주 위반되는 법은 어떤 것이나 나쁜 법이며, 그러한 사리에 어긋나는 법령이 당하는 무시가 더 타당한 다른 법들에 확산되지 않도록, 입법자는 그것을 폐기하거나 개정해야 한다. 나는, 불필요한 법은 신중하게 검토하여 없애버리고 확고하게 공포할 적은 일군의 현명한 법규들은 제정할 것을 목적으로 하기로 작정했다. 모든 오래된 법들을 인류의 이익을 위해 재평가할 때가 온 것처럼 보였다.' (197-198쪽)

 

이랬던 하드리아누스 황제다. 그러니 그가 오현제 중의 한 사람으로 기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가 이런 자세를 끝까지 견지했을까?

 

이제 2권으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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