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드러커 자서전
피터 드러커 지음, 이동현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05년 10월
평점 :
절판


경영학자로 잘 알려진 피터 드러커가 쓴 자서전이다. 자서전이라고 하기보다는 드러커가 만난 사람들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겠다.

 

드러커가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 사람들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세상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는 것이다.

 

남은 바로 나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자서전인데, 자신의 할머나로부터 자서전이 시작된다. 할머니의 독특한 말하기 방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그 다음에는 자신의 마을에 살았던 사람, 헤메와 게니아에 대해서, 자신이 영향을 받았던 선생인 엘자와 소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이렇듯 자서전이지만 다른 사람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또한 그들을 통해서 드러커가 어떤 점을 배웠고, 그 사람들에게서 취한 것과 극복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던지도 알게 된다.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 드러커의 자서전을 나로 하여금 읽게 만든 사람은 바로 폴라니다. 아니 폴라니 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에 대해서 고민하고 실천하려 했던 사람들. 그러나 이들이 과연 사회 개혁을 했느냐 하면 긍정적인 답을 할 수가 없다. 세상은 한 개인에 의해 또는 한 집안에 의해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이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인간에 대해 탐구하면서 결국은 인간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폴라니를 보면서, 사회 변화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인간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생각하게 된다.

 

사회는 한 순간에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의 노력들이 쌓이고 쌓인 상태에서 어느 순간 바뀌는 것이라는 사실. 특정한 인물이 사회를 바꾸려다 또는 자신이 권력을 행사하려다 희생되는 경우를 '헨슈와 세퍼' 편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오스트리아 태생인 드러커가 히틀러에 대해 지니고 있는 감정이 곳곳에 잘 드러나 있는데, 그가 전체주의를 얼마나 혐오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있다. 젊은 시절, 오스트리아와 독일, 영국에서 만났던 인물들에 이어 1930년대 후반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로 자서전을 끝맺는다.

 

미국은 다양한 사람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강대국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즉 동일성 강요보다는 다양성 인정으로 사회를 이끌어갔기 때문에 유럽보다 더 발전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드러커는 자신이 만난 사람들을 타산지석으로 삼았다. 그것이 드러커를 있게 한 힘일지도 모른다.

 

이런 형식의 자서전을 읽으며 나를 살피기 전에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생각해 봐야겠단 마음을 먹는다. 내 주변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는가? 나는 이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결국 나를 만들어주는 것은 남들이다. 다른 존재들이 나를 구성해준다. 나를 살아가게 하는 것도 역시 다른 존재들이다. 바로 남이다. 드러커가 자서선에서 남들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런 남들에게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내가 만나는 남들을 보아야 한다. 그들이 곧 나이므로. 이렇듯 이 책은 흥미진진한 사람들 이야기가 펼쳐지는 자서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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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리데기라고 하는 바리. 버림을 받은 바리. 그러나 자신을 버린 부모를 살린 바리. 저승으로 가는 사람들을 인도하겠다는 바리. 바리는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는 길에 있다. 아니, 바리는 바로 죽어가는 세상에 있다.

 

  자식을 버리는 부모, 죽어가는 세상이다. 여자라는 이유로 버리는 부모, 죽어가는 세상이다. 부모가 죽어가는 데도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길을 떠나지 않겠다는 자식들, 죽어가는 세상이다.

 

  자기들의 생활이 지구를 점점 죽어가게 하고 있는 데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보통사람들, 자기들의 정치가 국민들을 죽이고 있는 데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정치인들, 자기 배만 불리고 노동자들의 배는 곯게 하는 자본가들, 재벌들, 그리고 온갖 현학적인 말로 그들을 정당화하는 학자들... 죽어가는 세상이다.

 

바리가 필요한 세상이다. 그러나 바리는 아직도 무장승 곁에서 일을 하고 있나 보다. 바리가 돌아오기까지, 바리가 숨살이, 뼈살이, 살살이 꽃을 가지고 오기까지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았나 보다.

 

바리가 올 때까지 그렇게 우리는 계속 죽어가고 있어야 하나 보다. 세상이 점점 죽어가고 있는데, 바리는 여전히 먼 곳에 있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우리가 바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바리를 버렸으니, 이제는 우리가 바리가 되어야만 하는 때가 되었다.

 

바리는 오지 않는다. 바로 우리가 바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먼 곳에 있는 바리, 우리가 스스로 버린 바리를 찾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바리가 되어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우리 생활을 가만히 톺아보면 살아가면 갈수록 우리는 바리를 버리고 있단 생각, 우리가 스스로를 죽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우리 스스로를 죽이고 있는데, 멀리 있는 바리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바리는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결코 오지 않는 '고도'와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기다리기만 해서는 오지 않는 존재. 오히려 바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 스스로 바리가 되어 와야 한다. 그래야만 죽어가는 세상을 살릴 수 있다. 

 

바리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우리 삶과 자연의 삶이 함께 하게 하면 된다.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내지 말고, 우리가 죽여가고 있는 자연을 기술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자연과 함께 하는 생활, 그런 생활을 할 때 우리는 바리가 될 수 있다.

 

강은교 시집 '바리연가집'을 읽으며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바리'가 되어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시집에 실린 시 중에 하나. '백무동 물소리'

 

  백무동 물소리

 

물소리에 기대앉아 바라보네

하염없이 하염없이 바라보네

구불구불 물소리 바위로 들어가고

구불구불 굽은 뼈 벼랑으로 들어가고

 

물소리에 기대앉아 바라보네

하염없이 하염없이 바라보네

나막신 한 켤레 들고

바라보네 바라보네

 

이 밤

살아 있는 것들 모두 거룩해질 때까지

 

강은교, 바리연가집, 실천문학사. 2014년.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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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
김경주 지음 / 열림원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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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극, 낯선 장르다. 요즘은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장르가 아닌가 싶다. 사실, 몇몇을 제외하고는 연극을 보러 가는 사람도 줄어들었는데, 시극이라니...

 

시와 극이 합쳐진 말이라고 하겠지만, 그런 말보다는 오히려 시적인 극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작품이다. 연극으로 공연이 되지 않고 읽히는 작품이기도 하고.

 

폐허가 된 해수욕장에 있는 파출소. 이미 낡아가고 무너져 가는, 잊혀가는 존재다. 여기에 근무하는 파출소 직원, 나이도 지긋하다. 그 역시 점점 소멸되어 가고 있다. 그가 업어온 김씨. 다리가 없는, 다리에 고무를 달고 땅을 기어다니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머무르는 사람이다. 그에게 땅은 자신의 온몸과 맞닿아 있는 곳, 하늘을 보며 별을 꿈꾸기도 하지만 그는 땅에 붙어 살 수밖에 없다.

 

또 정체불명의 사내. 소년이기도 하고 청년이기도 한 사내. 그 역시 사회에서는 멀어진 사람. 즉 이 시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쇠락한 존재들이다.

 

그들에게 가장 아름다울 때는 언제였을까? 그것을 찾을 필요가 없다. 그들에게 가장 아름다울 때는 서로가 서로를 받쳐줄 때다. 그럴 때 사랑하는 이는 없었다. 아니 사랑하는 이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에게 기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결핍된 존재들이 서로 기대며 서로를 인정할 때 가장 아름다울 때일 수 있다. 이렇게 시극은 빠르게 진행된다. 짤막한 대사들로 눈 내리는 날, 파출소에서 각자 떠밀린 삶을 산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 서로에게 기대게 된다.

 

결핍을 서로 보듬으며 이들이 가는 곳, 그곳이 어디인지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들에게는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그곳이 가장 낮은 곳일테니...

 

이런 대사가 나온다.

 

김씨 : 사람은 바닥에 닿으면 그때서야 자신의 가슴이 가장 따뜻하다는 걸 배우죠. (129쪽)

 

자신이 가장 낮은 곳, 가장 힘든 상황에 있을 때에도 자신의 가슴은 따뜻하다는 것, 그렇게 서로를 보듬을 수 있다는 것, 사람에게는 어쩌면 잘 나갈 때가 아니라, 그 시절을 지나 쇠락에 접어들었을 때 따스한 자신을 찾고, 느끼고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무거운 분위기임에 분명한데, 작품은 경쾌하게 읽힌다. 작품을 읽으면서 장면을 머리 속에 그리고, 그리고 낮은 곳에서 따스함을 발견하게 된다.

 

김씨의 얼굴에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 밑을 보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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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1%에 맞서 싸워야 한다" (반다나 시바/에이미 굿맨)의 글을 제목으로 삼았다.

 

  1%란 누구인가? 세상을 지배하려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으로? 바로 자본으로... 그들은 자본으로 세상을 움직이려 한다. 자본에게는 안 되는 것이 없다.

 

  사실 자본으로 안 되는 것이 많아야 정상이다. 자본보다 소중한 존재가 얼마나 많은가. 자본으로 포기하지 말아야 할 존재 역시 너무도 많고.

 

  그럼에도 자본은 세상 모든 분야에 스며들어 자신들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자신들에게 복종하게 만든다. 그게 자본이다. 그리고 이런 자본에 충실한 제도가 바로 신자유주의다.

 

또한 1%들에게 힘을 부여해주는 것이 바로 과학-기술의 탈을 쓴 기술관료들이다. 이들은 모든 사람에게 돌아가야 할 혜택을 소수가 차지하게 만들어 준다. 특히, 특허라는 이름으로.

 

자연에 존재하던 것들까지 특허 신청을 해서 자본이 아니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만드는 존재들 아니던가. 그래서 1%밖에 되지 않는 존재가 99%들을 옥죄고 있다. 자본이 춤출수록 대다수 사람들은 빈곤에 허덕이게 된다.

 

그러니 이런 1%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런 싸움을 하는 사람이 바로 이번 호 표지 인물인 반다나 시바다.

 

그는 다국적기업, 특히 유전자조작을 하는 식품회사에 맞서 씨앗지키기를 실천하고 있다. 씨앗조차도 돈을 내고 사야 하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1%들에 맞서야 한다고... 씨앗은 특허로 제한될 수 있는, 자본으로 치환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이것과 맞물려 '농본주의를 말한다(1)-농민이 보는 현대사회의 이상함'(우네 유타카)을 참조할 수 있다.

 

그는 농사는 결코 자본주의가 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농사를 농업이라고 부르지 말자고... 농업에는 자본이 스며들 여지가 많다고. 그렇게 다시 농본주의를 말하고 있다. 이미 한물간 주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농사는 우리 삶의 토대이므로, 우리는 농사에 관해서는 근본적인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한다.

 

이런 근본 원칙 중 하나가 대농이 아니라, 소농 중심의 농사일테다. 중국에 널리 퍼져 있던 소농들이 어쩌면 농사의 미래일지도 모르는데, 중국이 근대화 되면서 또 자본주의에 편입되면서 중국도 대농으로, 기계농으로 가려고 한다는 소식이 들리는데, 그러면 세상은 더 큰 재앙에 직면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한다. ('중국은 지구를 살리는 모델이 될 수 있을까' - 에바겔로스 발리아나토스)

 

하지만 1%들은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또 큰힘을 발휘하는 관계망을 지니고 있다. 그런 것들을 통해 지구 곳곳에서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고 있다. 지구로 나아가지 않더라도 우리나라만 해도 그렇다.

 

제주도에 신공항을 만들겠다고 하는 사람들, 그들은 대다수의 제주 도민이 아니다. 그들은 공항을 건설함으로써 막대한 이득을 얻는 1%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제주 제2공항 건설을 우려한다' - 고권일)

 

신공항으로 관광객이 더 많아지면 제주도는 하수나 쓰레기가 포화상태를 넘어 넘쳐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고 한다. 지금도 생활쓰레기들을 제대로 처리하기에는 이미 처리 용량을 넘어섰다고 하는데,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또 천혜의 자연이 파괴되는 것, 마을 공동체가 파괴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제주공항을 하나 더 만든다고 하니, 누구를 위한 공항건설인가 묻게 된다.

 

어디 제주만이겠는가? 농촌이나 산촌에서 벌어지는 토지 강제 수용을 보라. 소수를 배불리기 위해 오랫동안 살아오던 터전을 강제로 빼앗아 가버리는 현실. 그것도 법으로 인정하고 있는 현실이 씁쓸하기만 하다. ('토지 강제수용이라는 폭력' -박성윤)

 

그것도 골프장을 만들기 위해 토지를 강제로 수용하기도 했으니... 지금도 마찬가지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토지를 수용하고 있는지... 이익을 보는 사람 따로, 쫓겨가는 사람 따로인 세상, 이런 세상을 바꾸자고 주장하는 것이 녹색평론의 주장이다.

 

이런 것들이 1%들의 횡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1%들을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된다. 그러면 대다수 사람들의 삶은 점점 더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1%의 독점을 막기 위해 정치개혁도 하고, 또다른 수많은 개혁을 해야 하는데, 그 1%에 속하는 집단이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 지금 현실이기도 하다.

 

1%에 속할 수도 없고, 그들이 이익을 얻는 동안 오히려 더 곤란한 지경으로 내몰릴 것이 뻔한데도 1%에 동조해서 그들이 더 기승을 부릴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이 현실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

 

1%들은 이들이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 그래서 [녹색평론]과 같은 책이 여전히 나오고 있는 것이다.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을 치워버리라고... 감은 눈을 뜨리고. 우리는 눈을 뜨고 세상을 바로 보아야 후세들에게 죄를 짓지 않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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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끝에서 사라지다
윤동수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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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사 진상 규명 위원회'라는 정부 기구가 있었다. 2000년에서 2004년까지 존재했던 위원회인데, 줄여서 '의문사위'라고 부른다.

 

밝혀지지 않은 여러 죽음에 대해서 진상을 규명하려고 설치한 기구였고, 많은 조사를 하려 했지만 여러 한계가 있었다고 한다. 한시적인 기구였기에 그 다음에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로 2005년부터 2010년까지 활동을 했다고 하고, 지금은 행정안전부 과거사 관련 업무지원단으로 이관한 상태라고 한다.

 

이런 기구가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우리 역사에서 알려지지 않은 죽음, 석연치 않은 죽음이 많았다는 반증이 된다. 그만큼 독재정치가 펼쳐졌다는 얘기도 되고.

 

민주화가 되었다고 자부하는, 대통령도 이제는 탄핵을 할 수 있는 지금 이 나라에서 여전히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들이 해명이 되지 않고 있는 경우가 많다.

 

광주민주화운동만 해도, 여전히 발포명령자가 밝혀지지 않았으니, 그동안 실종된 수많은 목숨들에 대한 진실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에서도 함께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조성우란 인물이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위원회에서 하진무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려 한다. 그러나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의 청구는 기각되고 마는데... 과연 진실을 규명하는데 꼭 가족의 요청이 있어야만 하는가? 가족의 요청이 없더라도 국가가 나서서 밝혀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것이 이런 위원회를 만든 이유이지 않나.

 

아마도 작가는 그만큼 진상 규명이 밝혀지기 힘들다는 것을 소설 속 인물 조성우를 통해, 또 오인희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설은 여기서 출발한다. 죽음조차도 밝혀지지 않은 실종자.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사라져 버린 사람에 대한 이야기.

 

독재정권, 그 중에서도 유신시대에 최소한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활동을 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사람, 하진무를 주인공으로 삼아 소설은 전개된다.

 

살아남은 하진무의 애인이었던 오인희가 하진무에 대해서 알아가려 추적하는 과정이 삽입되면서 소설은 대부분 하진무의 말로 전개된다. 즉 실종된 하진무가 자신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여기에 오인희가 그 당시 관련 있던 사람들을 찾아가 그 사람들의 당시 이야기를 듣는 내용이 중간중간에 들어가 있고.

 

그래서 이야기가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기보다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현재로 자꾸만 돌아오고 있다. 즉, 현재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아니, 이야기는 현재에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소설은 하진무의 형, 하승무를 등장시켜 과거 운동권들의 모습을 비춰주기도 한다. 한일협정 반대로 감옥 생활을 하고, 독재 정권에 탄압을 받았던 하승무가 현재에는 독재자의 정치를 계승한 정당에 몸담고 있는 현실.

 

작가는 어쩌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그와 관련된 사람을 상기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더라도 당시에 자신이 지녔던 신념이 세월이 흐르면서 어떻게 변질되어 가는지를 하승무를 통해서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이런 하승무와 같은 사람들의 변절이 있었기에 여전히 의문사는 진상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권력에 아부하고 기생하는 집단이 있음도, 그들이 막강한 힘을 아직도 지니고 있음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사라져 간 사람을 소설 속에서 살려내고 있다.

 

제목이 '길 끝에서 사라지다'이다. '길 끝' 더이상 갈곳이 없는 곳. 이것은 독재 정치가 직면해야 할 상황일텐데, 이상하게도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맞닥뜨린 현실이 된다. 그리고 길을 더이상 만들지 못하고 사라져 간다.

 

다음에도 나오지 못하게... 사라져 갔지만, 과연 그것으로 끝났을까? 소설은 그렇지 않음을, 그 사라짐이 영원히 계속될 수 없음을, 한참 세월이 흐른 뒤에도 하진무를 잊지 못하고, 그에 대해서 계속 알아가려 하는 오인희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스러져간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이정도나마 민주화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길 끝에서 사라져 간 그 많은 사람들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설은 이렇게 우리에게 과거 길 끝에서 사라져 간 사람을 다시 살려내 보여주고 있다.

 

이들이 결코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작가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소설을 읽다보면 길 끝에서 사라져야 할 사람들이 누군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라져야 할 것은 사라지고, 나타나야 할 것은 나타나는 것, 이것이 민주주의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소설이다. 과거 유신시대 또 전두환 정권 시대에 관한 소설을 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많았다. 너무도 마음 아픈 사연들이 많으니... 이제는 그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해결이 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는 이런 현실이 더 마음 아프기에...

 

그럼에도 읽어야지, 과거를 묻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불러내야지. 보복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에 다시는 그런 과거가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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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인트 2019-05-13 1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제목을...차라리...[길 중간에서 사라지다]로 바꿨으면...
그들은 결코 그들의 길을 끝까지 가보지도 못하고...사라졌기에...

kinye91 2019-05-13 13:53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그들의 길을 끝까지 가지도 못하게 한 현실, 그 역사를 잊지 말아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