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개의 머리를 가진 여인 환상의 숲
막스 에른스트 지음, 이두희 옮김 / 이모션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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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에른스트의 콜라주 소설이다. 소설이라고 하면 글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림은 삽화라는 개념으로 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소설은 그림이 주를 이루고 그림 밑에 길어야 세 줄 정도의 글들이 있다. 또 그 글들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연결이 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이게 뭐야?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소설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림과 글이 함께 있지만, 그림들의 연작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글들이 이어진다고 하기도 그런 소설. 그야말로 콜라주다.

 

콜라주는 이렇게 사전에서 정의하고 있다.

 

근대 미술에서, 화면에 종이인쇄물사진 따위를 오려 붙이고, 일부에 가필하여 작품을 만드는 .

 

그렇다면 소설과 콜라주는 어울리지 않는다. 단편적인 것들이 어떤 논리적, 서사적 관계도 없이 자리를 차지하면서 배열되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소설과는 너무도 다르지만, 소설이 어느 한쪽으로 정의되지 않는 것이 소설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이 작품이 소설의 영역을 좀더 넓혔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에게 어떤 감동을 주느냐가 문제인데, 감동을 준다기보다는 새롭다, 특이하다는 생각만 들게 하는 것이다. 즉, 소설이라는 틀에, 또 그림이라는 틀에 얽매이고 보지 않게 해준다는 것, 문학이든, 미술이든 참으로 다양한 방식이 쓰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준다는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림들도 뭐라 이해하기 힘든 그림들이 많은데...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작품의 첫그림과 마지막 그림이 같다는 것, 그렇지만 글은 다르다. 이것은 우리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 돌아감은 처음과는 완전히 같지는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는데...

 

영원회귀, 어쩌면 우리 삶은 이렇게 돌고 도는 것은 아닌지. 아이 때의 모습과 어른이 된 모습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생각하면 결국 그 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내 삶도 이 소설처럼 이렇게 두서없이, 논리적이지도 않고 서사적이지도 않은 채 많은 사건들이 내 삶이라는 시간 선상에 놓여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참, 기괴한 소설. 그림. 그렇지만 우리들 삶도 이렇게 명확하게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작품. 그래서 초현실주의 작품이라고 불리는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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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의 표지 사진은 스웨덴 학생인 그레타 툰베리가 기후 변화에 미온적으로 대처하는 어른들에게 항의하는 시위 모습이다.

 

  이제 어린 학생들도 기후 변화가 자신들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가만히 있으면 자신들에게 미래는 없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스웨덴의 한 학생에게서 시작된 시위가 전세계 젊은이들에게로 확산되어, 우리나라에서도 학생들이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라고 시위를 하게 되었다. 그만큼 위기의식이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남북관계에서 위기에 처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 어느 정도 남북 긴장관계가 완화되고 북한만이 아니라 한반도의 비핵화가 논의되고 있는데, 이러한 비핵화와 더불어 미래세대가 살아갈 세상에 대한 논의도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번 호 제목이 '한반도의 비핵화와 녹색화'이다. 단순히 핵을 없게 한다는 의미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녹색화, 즉 우리가 살아갈 세상이 지속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을 해야 한다는 쪽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비무장지대를 평화지대로 바꾸는 것에서, 그것을 관광자원으로 개발하자는 주장이 있는데, 천혜의 자연자원이 된 그곳을 다시 자본주의가 침투하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주장인지...

 

한반도 비핵화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정치 분야, 군사 분야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비핵화는 녹색화로 나아가야 한다. 한반도가 녹색화 되지 않으면 미세먼지뿐만 아니라 기후변화에도 대처할 수 없게 된다.

 

정치, 군사적으로 안정을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 후세들이 살아가는 데는 더 힘든 세상을 만들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호에 실린 글들은 지금 우리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후세들에게도 꼭 필요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이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환경 운동만으로는 부족하다. 인간의 삶에 정치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고, 정책화되지 못하면 어느 순간 무력하게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정치개혁이 동반되어야 한다.

 

특히 민의를 대변하는 정치제도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래서 하승수가 쓴 '선거제도 개혁,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꼭 읽어두어야 할 글이다. 어영부영 지금처럼 식물 국회로 시간을 보내면 정치개혁은 물 건너 간다.

 

정치 개혁이 물 건너 가면 지금과 달라질 것이 하나도 없다. 그냥 말만 난무하다 끝나는 우리 사회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후세들에게는 아무리 남북 관계가 좋아진다고 해도 미래는 없다.

 

후세들에게 주어질 세상은 남북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지구적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고, 그것은 바로 지구적 기후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기후 문제에 대해서 지금 정치권은 아무 생각이 없다. 아무 생각이 없기에 정치 개혁이 되지 않으면, 미래는 더더욱 암담해질 수밖에 없다.

 

'다품종 소량 생산'이 좋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우리 지금 현실을 보라. 우리는 '소품종 다량 생산'에 머물고 있지 않은가.

 

주택문제를 보라. 매양 똑같다. 신도시 건설, 임대주택 건설, 광역 교통망 확장 등이다. 늘 같은, 소품종 대책들이다. 그리고 비슷비슷한 아파트들이 들어선다. 다품종이 아니라 소품종, 아니 독점이다.

 

처음에 5층도 높다 하던 아파트가 10층, 20층, 30층이 되더니 이제는 40층은 기본이다. 빽빽하게 단일 품종이 들어선다. 다양성이 사라진 지는 오래다. 그래서 이런 아파트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것을 보면 마치 마약 중독에 걸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점점 더 강도가 높아지게 마약을 투여한다는 중독자들. 그들에게 적당한 선은 없다. 자꾸만 더 강해져야 한다. 자신의 몸이, 정신이 견딜 수 없게 될 때까지. 그리고 그 다음은...

 

마약을 끊기 위해서는 웬만한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금단 증상이 심하기 때문이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면 마약을 끊을 수 없다. '말콤 X'를 읽다가 그가 마약을 끊을 때 얼마나 괴로워했는지를 알게 됐는데... 그러나 그는 끊었고, 흑인 민권 운동에 앞장 서게 되었다. 그 고통을 감내하지 못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말콤 X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어쩌면 이런 마약중독자와 같지 않을까. 우리는 중독되고,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원하고, 여기서 멈추지 못한다. 멈추려면 한동안은 극한의 어려움을 이겨내야 한다. 그렇게 이겨내면 그 다음부터는 수월하다. 이제는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우리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금단 증상을 견뎌낼 수 있는 용기, 참을성, 그리고 서로 돕는 자세가 필요하다.

 

경제성장이라는 마약에 우리는 중독되어 있으므로, 이 마약을 끊기 위해서는 경제성장이라는 것이 우리 몸에 필수적인 영양소가 아니라 우리 몸과 마음을 좀 먹는 마약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어려움을 감수해야 한다는 각오도 해야 한다. 아주 짧은 기간에 해결이 되지 않을 거라는... 그럼에도 꼭 해야 한다는.

 

그 첫발걸음이 정치개혁, 또 기후변화에 대한 인식, 경제 성장에 대한 다른 관점 등등이 아닐까 한다. 세상 모든 일은 하나로만 존재하지 않으니... 그 연결고리를 생각하면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를 둘러보아야 한다.

 

적어도 '소품종 다량 생산'이 아닌 '다품종 소량 생산'이 기후변화를 막을 수 있고, 우리들 삶을 다양하게 해서 우리 후손들에게 더 많은 선택지를 제공해 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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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시를 읽는가
프레드 사사키.돈 셰어 엮음, 신해경 옮김 / 봄날의책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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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시를 읽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저요."다. 그런데 "저요."하는 사람이 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여야 한다. 즉, "누가 시를 읽는가?"라고 질문을 하면 "우리가요."라고 답해야 한다. 시는 우리 모두에게 다가오고, 우리 모두는 시를 읽으며 살기 때문이다.

 

살면서 시를 단 한 번도 만나보지 않은 사람,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학교를 다닌다면 시험 때문에라도 읽었을 거고, 학교에 한번도 가보지 못한 사람은 부모들에게서, 또는 이웃들에게서 시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눈으로 읽든 귀로 듣든 시는 우리와 오랫동안 함께 해왔다.

 

이렇게 시는 우리들의 삶과 떨어져 있지 않다. 다만 우리가 의식하느냐 하지 않느냐 차이일 뿐이다. 이 책은 누가 시를 읽는가라는 제목으로 시를 읽은 사람, 또는 시에게서 삶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시와 자신의 관계를 쓴 글을 모았다.

 

5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각 분야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시와 자신에 대해서 쓴 글인데, 이 책을 읽다보면 시는 우리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다못해 시하고 가장 먼 미국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서도 시를 필수로 가르친다고 하니까 말이다.

 

읽어가면서 마음에 드는 구절이 수없이 많지만, 그 중에 하나를 고르면 아이 웨이웨이가 쓴 글에 나오는 이 말이다.

 

시를 경험하는 것은 현실 너머를 보는 것이다. 물리적인 세계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찾는 것이며, 다른 삶과 다른 층위의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세상을 경이롭게 여기는 것이며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며 가장 중요하게는 젊고 늙고 배우고 못 배우고를 떠나 타인과 나누는 것이다. (244-245쪽)

 

시인은 다른 세계를 본다. 그리고 그 다른 세계를 우리의 세계로 끌고 들어온다. 다른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이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가령 나희덕 시를 보자. 꽝꽝 언 호숫가에서 얼음을 지치는 일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을 쳐내기만 하는 그대를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 호수는 잔잔하고 고요하고 맑고 깊고 그래서 포용적인데, 그 호수가 얼어버리면 내치기만 한다. 도무지 받아들일 줄 모른다.

 

최근에 정치판을 보면서 특히 공당이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정당들과 대화하지 않으려는, 또 국민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꽉 막힌 모 정당의 원내대표를 보면서 나희덕의 '천장호에서'를 떠올렸다. 그들은 그야말로 얼어붙은 호수에 불과하다. 봄이 오고 여름이 와서 사람들이 물가에서 더위를 식혀야 하는데, 그들은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자신을 더 굳게 얼리고 있을 뿐이다. 내치고 있을 뿐이다.

 

   천장호에서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 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 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나희덕, 그곳이 멀지 않다. 민음사. 1997년 1판 3쇄. 11쪽.

 

20년도 전에 쓰인 시가 지금 정치판을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시는 문득 내게 현실을 보게 해주기도 한다. 그러니 시를 읽을 수밖에. 마음이 힘들 때 위안을 주는 시를 떠올리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시는 인류에게 많은 영감을 주기도 했지만 위안을 주기도 했음을, 또한 성인들의 말씀에도 시들이 많음을.

 

기독교 성경에는 시편이 있어서, 시적인 노래들이 전해 내려오고, 불교에서도 숫타니파타 역시 시라고 할 수 있으며, 법구경만 해도 시임에 틀림없다. 여기에 힌두교 경전으로 알려진 바가바드 기타 역시 천상의 노래라고 불리지 않는가. 역시 시다.

 

시는 우리들의 삶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굳이 내가 의식적으로 시를 읽지 않아도 이렇게 시는 우리들 삶 속에 있다. 가끔 의식하지 못한 시들이 의식으로 떠올라 나에게 다른 세계를, 또는 이 세계를 좀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시를 읽는다. 왜 읽는가.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존재가 시니까 읽는 것이다.

 

최근에 문재인 대통령이 스웨덴 의회에서 연설을 했다. 그 연설을 시작할 때 대통령은 신동엽 시인의 '산문시1'을 낭독했다.

 

외국 의회에서 우리나라 시인이 쓴 시를 낭독했다. 그만큼 시는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정서를 드러낸다. 그 감동... 그렇게 시는 누구나 읽어야 한다고, "누가 시를 읽는가?"라는 질문에 "우리 모두요."라고 답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한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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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반역자들 - 역사에 도전한 여성 운동가 봄볕 청소년 4
조이 크리스데일 지음, 손성화 옮김 / 봄볕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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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여전하다. 이 말은 여성들이 아직도 남성에 비해 차별을 받는다는 얘기다. 운동은 막힘이 있을 때 드러나기 때문이다.

 

최근에 채제공이 쓴 만덕전을 읽었다. 아주 짧은 글인데, 이 글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당시 제주에는 여성들이 뭍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법이 있었다는.

 

그런데 흉년으로 백성들이 굶어죽을 때 백성들을 구휼해진 공을 세운 만덕에게 소원을 물으니, 서울과 금강산 구경이라고 했단다. 제주 여성이 할 수 없는 일. 만덕은 이 일을 해내고 만 것. 이렇게 제주여성에게 주어졌던 틀을 만덕은 깨고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

 

이는 만덕만이 아니라 다른 여성들도 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선구자 역할을 하는 사람. 비록 그는 힘들게 그 시대를 살아갔을지라도 그로 인해 세상은 좋은 쪽으로 한 발 더 움직이게 되었으리라.

 

그럼에도 우리는 여성들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기록이 적은 이유도 있지만, 알게모르게 차별을 해서 여성을 역사에서 제외시킨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일례로 만덕은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지금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만, 500년이 넘는 조선 역사에서 여성 인물들의 이름과 한 일을 이야기 하라고 하면 몇 명이나 들 수가 있을까?

 

조선시대 여성이라? 신사임당, 허난설헌, 황진이, 논개, 명성황후 그리고... 한참을 생각해야 한다. 이만큼 여성들은 잊혀진 존재였다. 분명 세상의 절반이라고 하는데도.

 

이 책은 서양 역사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여성 10명을 소개하고 있다. 부끄럽게도 이들 열 명 중에 제대로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들어본 적은 있었다고 어렴풋이 떠오를 듯 말 듯한 사람은 있었지만 정말로 몰랐다.

 

이들로 인해 세상이 좋은 쪽으로 움직였음에도, 이들에 대해서 이렇게 모르고 지내온 것은 여성들이 차별을 받는 역사는 지금도 계속된다는 반증이리라. 이런 책이 계속 나와서 여성들도 역사 속에서 제 자리를 잡고 있는 중이기는 하지만. 한 번 살펴 보라. 몇 명이나 알고 있는지.

 

올랭프 드 구주, 소저너 트루스, 사로지니 나이두, 루스 퍼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 존 바에즈, 레일라니 뮤어, 템플 그랜딘, 미셸 더글러스, 섀넌 쿠스타친

 

페미니즘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글로리아 스타이넘 정도, 음악에 관심있는 사람이면 존 바에즈 정도. 

 

올랭프 드 구주,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여성의 권리를 주장한 사람. 이 사람 이름은 잘 기억하지 못해도 이 말은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이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는 것처럼 연단에 오를 권리도 가져야 한다' (24-25쪽)는 말.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을 썼다는 구주는 결국 단두대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그가 주장한 여성의 권리는 지금까지 계속 쟁취되어 왔으니...

 

흑인 여성으로서 노예 해방을 위해 일했던 소저너 트루스. 간디와 함께 영국에 저항하는 비폭력 운동을 펼쳤던 사로지니 나이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맞서 싸우다 경찰이 보낸 폭발물로 세상을 떠난 루스 퍼스트, 페미니즘 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 그리고 베트남 전쟁 반대 등 평화의 노래를 불렀던 존 바에즈.. 이들은 유명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레일라니 뮤어에 오면 우리나라 한센병 환자들에게 했던 일들이 떠오른다. 우생학이라는 학문이 사회에 침투해 열성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된 사람들에게 자식을 낳지 못하게 불임 수술을 했던 시대. 그런 폭력의 시대에 그것을 폭로해서 바로잡으려 했던 사람. 레일라니 뮤어.  

 

자폐증을 앓아 오히려 동물들을 읽을 수 있게 된, 동물들의 복지를 위해 일한 템플 그랜딘. 인도적인 환경에서 동물들이 사육되게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라고 한다. 여기에 자폐증 환자에 대한 인식도 바꾸었고.

 

최근에 우리나라도 군대 내 동성애에 대해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동성애에 관해서는 군대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아직도 부정적인 관점을 많이 지니고 있으니... 하다못해 청소년 인권 조례에 성적인 지향 자유 항목이 있어서 조례를 거부하는 지방의회들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우리나라인데.

 

앞서 간다는 캐나다에서도 얼마 전까지 군대에서의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고 범죄 취급했다고 하니, 이를 바로 잡기 위해서 노력한 미셸 더글러스의 일은 남의 일로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진행형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셸처럼 이미 앞서 간 사람, 틀을 깬 사람이 있으니, 우리나라도 틀을 충분히 깰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고.

 

마지막 인물은 너무도 어린 나이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섀넌 쿠스타친이다. 선진국이라고 하는 캐나다에서도 원주민에 대한 대우는 형편없다는 사실, 그들에게 제대로 된 학교도 지어주지 않아 원주민 학생들이 학교를 지어달라고 청원하고 시위하게 되었다는 것, 그 사실을 널리 알린 쿠스타친.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틀을 깬 사람들을 소개해주고 있다. 단순히 소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세상을 바꾸려고 했다. 신영복의 글에 있는 말처럼, 세상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려고 한 사람들이다. 어리석은 사람, 우직한 사람인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세상이 조금씩 변화한 것이기도 하고.

 

그러니 이들을 기억하자. 역사는 기억을 통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에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세상의 절반인 여성들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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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는 억울하다 · 1


사설시조를 쓴 이가

무명씨(無名氏)라고

판소리계 소설을 쓴 이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국란(國亂)에 분연히 일어섰던 백성들이

민초(民草)라고 불린다고

그들을 경멸하거나

작품을 무시할 수 있던가

김수영이 쓴 ‘풀’이

이름이 있는가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수많은 학자들 밥벌이가 되어 주는

그 ‘풀’이

이름 없다고

문학사(文學史)에서

뿌리 뽑히던가


하여,

다시

잡초는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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