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질 듯, 좋아질 듯, 가까워질 듯, 가까워질 듯 하면서도 이상하게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서로 웃으면서 만나도 그 다음 만남에 대한 약속은 하지 않는다. 만나면 해결될 듯 하면서도 결코 해결을 하지 않는다.

 

  웃음 속에 수많은 계산이 들어있는지, 서로의 셈법이 다른 것인지, 평행선은 지속된다.

 

  핵을 폐기한다고 했다. 순차적이든, 전면적이든, 완전한, 돌이킬 수 없는 핵폐기를 약속한다고 했다. 그러마고, 믿는다고, 그래서 이제는 평화롭게 지내자고도 했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지금까지 계속해 왔던 통상적인 군사훈련이라고 계속 실시하고, 한쪽에서는 평화 분위기를 깨는 행위라고 정체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포탄을 쏘고 있다.

 

그리고 다시 대화 단절, 만남 단절. 그럼에도 만날 수 있다고, 이야기는 계속된다고 하고 있으니 어느 말을 믿어야 할지.

 

말과 행동이 이렇게 다른 경우, 어느 쪽에 판단 기준을 두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다시 지지부진한 상태에 돌입했다.

 

다른 할일도 많은데...

 

전기철의 시집 [로깡땡의 일기]를 읽었다. 로깡땡의 일기가 이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시이기도 하고, 시집 제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로깡땡이 낯설다. 시집에서 주를 달아놓기를 샤르트르의 소설 [구토]의 주인공이라고 한다.

 

그냥 그렇게 로깡땡에 대해서 넘어가고... 다음 시를 통해 지금 우리 현실을 읽어낼 수가 있다. 

                      

 

북한 핵에 관한 감상

 

  너와 나 사이에 위험한 물건이 있다. 너는 한사코 그 물건에 손을 대려 하지만 나는 너를 말리느라 정신이 없다. 너는 화가 치밀어 나를 밀어낸다. 나는 물러서지 않는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네 얼굴에서 무언의 땀방울이 더 위험하게 떨어지려는 찰라, 꽃은 어떻게 피는가를 생각했다.

 

  위도와 경도의 정확한 지점에 피는 꽃의 스캔들을 추적하고 거리와 진폭, 시간을 연산하지만, 답은 소수점 몇 자리로도 떨어지지 않아

  위험한 물건은 그대로 위험한 채로 너와 나 사이에 있다.

 

  이렇게 위험한 물건을 버려야 할 것인가, 모른 채 할 것인가. 너와 나 사이에 꽃은 필 것인가.

 

전기철, 로깡땡의 일기. 황금알. 2009년. 76쪽.

 

우리가 모른 체 할 수는 없을 것 같고, 너와 나 사이에 꽃이 피게 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으니...

 

위험한 물건은 당연히 버려야 하고, 그 위험한 물건을 마음 놓고 버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줄 때 너와 나 사이에 꽃은 당연히 필 것이다.

 

그 꽃을 우리 모두 함께 볼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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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자의 식탁 - 식물학자가 맛있게 볶아낸 식물 이야기
스쥔 지음, 류춘톈 그림, 박소정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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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술이 발전할수록 자연에 대한 향수도 깊어진다. 사람이 자연과 떨어져 살 수는 없지만 어느새 우리는 자연은 자연, 우리는 우리라는 식으로 살아가면서 아련한 그리움으로만 자연을 대하는지도 모른다.

 

이 책 제목을 보면서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수많은 식물들에 대한 이야기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무론 책장을 몇 장 넘기지 않아 그런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지만.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면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수많은 식물들이 나온다. 그것들이 자연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를, 온갖 효용을 들이대면서 식물들의 이로운 점을 말해준다.

 

자주 가는 음식점 벽에 이런 말이 쓰여 있다. 약식동원(藥食同源). 약과 밥은 근원이 같다는 말로 풀이되는 말. 그러니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라는 말로 받아들였는데...

 

이 먹을거리로 병도 치유한다고 하니, 얼마나 좋은가? 얼마나 좋은 약효를 지닌 식물들이 이 책에 나올 것인가 하는 기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읽으면서 곧 이건 아니구나 하는 후회를 하게 되었다.

 

우선 이 책은 중국인이 쓴 책이다. 그러니 중국 식물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 중국 식물이라고 해서 무슨 국경이 있어 우리나라 식물과 완전히 다른 존재는 아니겠지만,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이 공연히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같은 식물이라도 어느 토양, 어떤 환경에서 자라느냐에 따라 성분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문제는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식물 이름들이 너무도 낯설다는 것이다.

 

중국말로 식물을 이름지어 부르고 있으니, 알 수가 있나. 가령 첫식물은 은행이다. 이 은행이야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보고 또 먹기도 하니, 별 문제가 없는데, 은행 바로 다음에 나오는 식물 이름이 용규(龍葵)다. 자, 용규가 무엇인가? 알 수 있겠는가? 모른다. 한자로 표기해 놓아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이름이다. 밑에 주를 달았는데... 아주 작은 글씨로 까마중이라고 되어 있다. 아하, 용규가 까마중이구나. 그냥 제목을 까마중이라고 하고, 괄호 안에 용규라고 하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런 이름들이 주욱 나오니 읽어도 눈에 확 들어오지 않는다. 이런 점이 많이 아쉬웠는데... 이런 책은 번역이 아니라 번안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그림도 있지만, 사진 자료를 더 첨부했으면 훨씬 이해하기 쉬웠으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그럼에도 새로운 사실을 아는 즐거움이 있는데... 자, 중국어로 미후도(獼猴桃)라는 식물을 아는가? 중국 태생인데 외국에 나가서 더 유명해졌다가 다시 요즘에는 중국에서도 인기를 얻고 있는 식물이라고 하는데...

 

중국에 흔하게 있었으나 원숭이나 먹는 과일이라고 해서 미후도라는 이름이 있다는 이 과일은 바로 키위다. 키위 하면 뉴질랜드를 생각하고, 그곳이 원산지라고 생각하는데, 이 책을 통해서 키위의 원산지는 중국이고, 뉴질랜드에서는 중국에서 종자를 가져다 성공적으로 재배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물론 중국 학자가 쓴 글이니 그 점을 참조하더라도.

 

 그해(1904년) 이사벨은 델리시오사의 종자 한 봉지를 뉴질랜드로 가져갔다. 그녀가 가져간 종자는 미후도 세 그루로 자라 순조롭게 개화하고 열매를 맺었다. 이 세 그루가 현대의 미후도 산업을 일으킬 줄이야! 현재 전 세계 키위 공급량의 80%를 차지하는 품종인 헤이워드가 바로 이 델리시오사 세 그루의 후손이다.  (206쪽)

 

  1960년대 이전까지 델리시오사는 서양인들에게 '이창 구스베리 - 이창은 중국 후베이성 남부에 위치한 도시-' 또는 '차이니즈 구스베리'로 불렸는데, 썩 맛있는 과일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미후도라는 속칭은 더 수준 미달이었다. 양도, 귀도, 후도라는 이름 중에서도 맛있고 고급지다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름은 없었다. 과일 상인들은 필히 새로운 이름을 지어야만 했다.

  그래서 맨 처음 작명을 위한 브레인스토밍 과정에서, 미후도의 상품명을 '꼬마 멜론(Mellonette)'으로 정하자고 제안한 사람이 있었다. 소리가 맑게 울리기도 하고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괜찮은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 이름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바로 과(瓜)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국회에서는 수입한 과류 과일에 중과세를 징수했는데, 과일 상인들은 이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별로도 진행된 힘겨운 작명 회의를 거쳐 결국 뉴질랜드 국조인 '키위Kiwi'의 이름을 따서 미후도를 '키위 Kiwi fruit'로 부르게 되었다. (212쪽)

 

이런 식으로 새로운 것을 알 수 있다는 장점 외에도 다양한 식물이 음식으로 쓰이고, 그것들이 어떤 효용이 있고, 또 독성이 있는 것은 어떻게 발현되는지도 이야기해 주고 있어서 식물에 대해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독성이 있는 식물을 우리가 먹는 경우가 있는데, 어떤 과정을 거쳐서 우리가 먹을 수 있는지도 잘 알려주고 있어서 많이 유용하다.

 

다만, 중국어로 식물 이름이 나오고, 전문적인 용어들이 나와 머리 속으로 쏙쏙 들어오지 않는다는 단점은 있다. 그래도 식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또 자연에 들어가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읽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아무것이나 막 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약식동원이라고 또 몸에 좋은 식물이라고 해도 지나치면 좋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한번은 참조할 만하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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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세자의 진짜 공부 라임 틴틴 스쿨 9
설흔 지음, 유준재 그림 / 라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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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다. 책을 펴낸 목적으로 보면 청소년들을 위한 소설임에 분명한데, 읽으면서 과연 청소년들이 이 소설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소현세자의 진짜 공부라고 하면, 우선 소현세자부터 알아야 한다. 그 다음에는 진짜 공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두 가지를 알려고 하지 않으면 소설은 그냥 헛된 이야기에 불과하다. 나와는 상관없는 책 속에 갇힌 글들, 사건들, 인물들.

 

소현세자를 알기 위해서는 병자호란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그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은 소현세자가 귀국한 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간다.

 

(이 소설에서 과거와 현재가 중첩되어 있는데, 무더위가 극성인 현재에 나타난 소현세자를 소설의 서술자는 존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리고 소현세자가 말을 건, 알고 있는 존재의 이름은 끝내 나오지 않는다. 찾아야 한다. 이것도 작가가 제시한 공부다)은 조선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몸은 검게 변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 (211쪽)

 

아마도 독자들로 하여금 이 부분을 찾아 더 공부하라는 의미, 즉 소설로 끝내지 말고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비극적인 전쟁, 그리고 그 뒤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공부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그래서 이 소설의 말미에 있는 말은 너무도 아프게 다가온다. 이 아픔을 청소년들이 이해한다면 이 소설은 제 역할을 다한 것이리라.

 

  우리는 늘 그런 식으로 치욕의 역사를 깨끗이 잊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뭐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지요. 실패의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가 반복된 슬픔의 역사에서 배운 유일한 교훈이니까요. (214쪽)

 

소설은 이중의 구조로 되어 있다. 현재에 만난 두 사람이 있고, 이들 중에 존이 자신의 이야기를 나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 역시 가족을 잃은 슬픔을 지니고 있다. 이 슬픔은 어떤 슬픔인가?

 

소설에서는 강화도 앞 바다의 장면이 몇 번 나온다. 그 장면을 통해 서술자인 내게 일어난 비극을 유추할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기도 싫은, 그러나 꼭 기억해야만 하는 그날의 사건을.

 

  병자년 전쟁 때 강화 앞바다에는 형형색색의 머릿수건들이 둥둥 떠다녔다지요. 머릿수건의 주인들은 바다에 빠져 죽거나 창과 칼에 찔리거나 화살과 포탄에 맞아 죽었는데도 머릿수건들만큼은 가라앉지도 않고 강화 바다를 오랫동안 둥둥 떠다녔다지요.

  나는 존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가족을 생각했습니다. 종이배에도 의지하지 못했던 내 가족을 생각했습니다. (211쪽) 

 

바다와 가족, 죽음... 침몰... 하지만 작가는 내가 겪은 비극을 이야기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내 비극을 통해 소현세자를 등장시키고, 병자호란에서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을 드러내고자 할 뿐이다.

 

이름없는 민초들이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 불을 내기도 하고, 나라를 탈출하기도 하는 등 얼마나 그들이 고통을 받았는지, 그러나 국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어떻게 잘 살게 되었는지, 결국 전쟁으로 인한 고통은 백성들이 온몸으로 겪을 수밖에 없고,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진짜 공부를 하고 싶어했던 소현세자는 그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거라는 것.

 

청나라에 반대한 신하를 낙점해 청나라로 보내는데 인조가 결정한 신하는 겨우 홍문관 교리와 수찬에 불과한 윤집과 오달제였다고 한다. (소설 175쪽)

 

이들이 어떻게 주범이 될 수 있겠는가. 이들에게 과연 왕을 움직일 만큼 권력이 있었을까? 소설 속 소현세자는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예조판서 김상헌과 이조참판 정온을 지목했을 거라고 한다. 이들은 그 직위로 보아 충분히 책임을 져야 할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을 지목해 청나라로 보내면 국내에서 계속 왕 노릇을 해야 할 인조가 신하들에게 계속 충성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것도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가. 그러니 인조는 조정에서 중책을 맡지 않은, 아직은 권력의 핵심에 들지 못한 신하들을 지목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러니 전쟁의 참화는 위로 갈수록 적어지고 밑으로 내려올수록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소현세자가 깨달은 것은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 이런 전쟁을 피할 수 있는 방법, 그것에 대한 공부, 그것이 진짜 공부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 공부가 현실에 적용이 되어야 진짜 공부가 되는데, 소현세자는 그러지 못했다. 그의 비극적인 죽음.

 

소현세자는 이렇게 한탄하고 있다.

 

  나는 그런 아이가 되지 못했습니다. (중략)

  아, 나는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럽습니다.

  나는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역사의 죄인일 뿐입니다. (208쪽)

 

소설에서 하고자 하는 얘기가 바로 이것이다. 권력의 핵심에 있는 자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지... 소설에서 서술자를 죽임을 당한 나로 설정한 것이 그 한 이유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진실을 고발했지만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사람. 소설을 시작하기 전에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책을 준비하면서 《심양장계》,《소현동궁일기》,《소현심양일기》등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것은 아니고 어떤 이의 죽음이 등장하는 순간까지만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궁금하겠지만 제 입으로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가 되어 스스로 찾아낸다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없겠습니다. (작가의 말에서 5쪽)

 

소설을 읽으며 소현세자가 하는 진짜 공부가 무엇인지 찾고, 또 소현세자와 짝이 되어 소설을 이끌어 가는 사람을 찾아보라고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나'가 어떻게 죽게 되는지가 나와 있는데, 이것이 힌트다.

 

아마도 요즘 청소년들의 검색 능력으로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단지 찾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 '나'를 서술자로 택했는지도 고민해야 한다. 소설 속 현재에서도 진실은 가려져 있으니...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어느 세상이나 필요하다.

 

이 소설을 읽으며 역사에 흥미를 느껴 관련 자료를 찾아본다면 작가의 목적이 성공한 것이리라. 단지 관련 자료를 찾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현실을 보고, 실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진짜 공부가 된다는 것을 명심한다면 더더욱.

 

그렇다면 소설에서 말하는 그 사람의 죽음,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찾아보자... 검색했더니 이런 글이 눈에 띄었다. 

 

정명수가 임금을 모독하고 조선 관료들을 업신여기며 횡포를 부리자 1639년 세자시강원 필선 鄭雷卿이 조선에서 바친 은자와 배, 감 등 세폐 물품을 정명수와 김돌시가 몰래 횡령했다는 혐의로 청으로 하여금 처단하도록 꾀한 일이 있었다. 이 일은 결국 근거 없는 모함으로 몰려 정뇌경은 처형당하고 이후로는 청역들이 일마다 말썽을 일으켰다고 전한다. (병자호란 직후(1637~1644) 朝淸 관계에서 ‘淸譯’의 존재  김 남 윤  25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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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하는 신체 -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그 위태로움에 대하여
우치다 타츠루 지음, 오오쿠사 미노루.현병호 옮김 / 민들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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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몸을 경시하는 시대는 없다는 생각을 한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의 몸을 학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은 표현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수준까지 이르지 않았나 한다.

 

내부에서 외부에서 신체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상황이 지금 우리 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우치다 타츠루의 책 제목이 흥미를 끈 것은 바로 '소통하는 신체'라고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다.

 

말로가 아니라 신체로 소통을 한다는 것, 말로는 가까이 오라고 하지만 몸으로는 밀어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또 자신의 몸이 위험하다고 신호를 보내는데 그 신호를 읽지 못하고 위험한 곳으로 계속 나아가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

 

그만큼 신체에 관심을 갖는다고 하지만 오히려 신체를 무시하고 학대하는 수준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소통하는 신체에서 가장 멀어진 곳이 바로 학교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학생과 교사가 서로를 밀어내고 있는 형국, 이것이 지금 우리나라 교육이 처한 상황 아니던가. 말로는 교사와 학생이 서로 소통하고 함께 어우러지는 교육현장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말로는 번드르하게 그렇게 표출하지만 몸은 서로를 밀어내고 있기에, 학교에서 학생과 교사는 소통이 되지 않는 관계에 머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타츠루는 교사의 역할에 대해서 선수를 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선수를 친다는 것은 따라올 마음을 품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는데...

 

학생에게 선수를 치는 것, 한 발 앞서 있는 것, 학생들로 하여금 "이 사람은 대체 뭘 말하고 있는 거지" 뭘 하려는 거야?"하고 의문을 품게 해서 뒤를 좇아오도록 만드는 것, 교사의 역할은 단지 그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교사가 하는 일의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56쪽)

 

그런데 과연 지금 우리나라 학교에서 이런 관계가 유지될 수 있을까? 교사는 한 발 앞서 있기만 해서는 안 된다. 아주 친절하게 모든 것을 명확하게 알려주어야 한다. 정답을 알려주어야 하는 존재가 바로 지금 우리나라 교사인 것이다.

 

나는 여기에 있다.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라 하는 교사는 학교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답을 알려주지 않는 교사이기에 온갖 비난에 시달릴 것이다. 학생은 고사하고 학부모부터 가만히 있지 않는다.

 

이러니 교사는 아주 친절하게 모든 정답을 알려주어야 하는 역할에 머무른다. 학교의 학원화. 아니 학교든 학원이든 정답 알려주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지는 한참 되었다. 이렇게 정답을 알려주어야 하니, 학생들은 몸을 움직여서는 안된다. 몸을 구속하게 된다.

 

다른 활동을 모두 차단당한 상태에서 주어진 정답을 찾는 활동만을 하는 학생들. 그들은 결국 자신의 몸을 괴롭힐 수밖에 없다. 학교 현장에서 나타나는 타투 열풍(이미 우리 사회에는 온몸에 문신을 한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여기에 학교에까지 문신을 한 학생들이 존재하고 있는 현실이다)이나 또는 자해 활동들이 늘어난 것이 바로 그 이유다.

 

타츠루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자신의 신체를 지배하여 그것에 고통을 주는 사람은 다르게 말하면 그 외에는 지배하고 고통을 가할 수 있는 것을 소유하지 못한, 그야말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소녀들을 거기까지(성매매를 의미한다) 몰아붙인 것에 대해서는 학교나 가정, 사회 전체의 책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은 자기 신체를 마음대로 손상시킬 권리가 있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 '나의 신체'는 성매매 따위는 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71쪽)

 

  제가 문신이나 피어싱에 위화감을 느끼는 것은 고통을 참는 경험을 자기 몸에 강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누구에게도 존경을 받을 수 없고,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하는 무방비 상태의 가난한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남겨진, '아무리 난폭하게 취급해도 괜찮은 자원'이 자기 신체인 것입니다. 감각만 차단해버리면 자신의 신체는 아무리 상처를 입거나 혹사당해도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79-80쪽) 

 

우리나라 학생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 이 상황에서 얼마나 멀리 있는지. 바로 우리나라 학생들 이야기 아닌가 싶을 정도다. 자신의 신체를 학대해서 감각을 차단하는 상황으로 몰리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에게 무엇을 알려줘야 하는가.

 

최근에 놀이에 대해서, 학교에서 아이들이 놀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바로 아이들의 신체를 살리는 길이고, 그것이 아이들을 살리는 길이라는, 교육이 제대로 방향을 잡는 길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신체에 관심을 갖고 관점을 확장하면 죽음으로까지 나아간다. 죽음에서 자신을 바라보게 되고 현재를 살아가게 되는 것, 죽은자들과도 대화를 할 수 있게 되는 경지... 책은 이렇게 자신의 몸에서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죽은 자들까지 나아간다.

 

소통하는 신체가 눈 앞에 존재하는 물질적 존재인 신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신체를 죽음으로까지 확장하고, 그것을 통해서 소통하는 신체를 말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나아가는 교육, 그것이 필요할 텐데... 거기까지 가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신체 감각을 유지하는, 신체와 말이 따로 놀지 않는 그런 교육을 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을 고치지 않으면 죽은 신체 속에 온갖 잡다한 지식만을 집어넣어, 결국 몸과 마음이, 신체와 뇌가 따로 노는, 자신의 몸을 위험에 쉽게 빠뜨리는 사람들로 우글거리는 사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두고두고 생각해보고 고민해 봐야 할 주제라는 생각이 든다. '소통하는 신체'라는 주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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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적 인간 - 시와 예술의 힘에 대하여
고영직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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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예술을 몸에 새긴, 그것을 인문이라고 한다면, 인문적 인간은 다른 말로 하면 예술적 인간이다. 인간으로서의 무늬를 지닌 인간이 바로 인문적 인간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인문은 사람의 무늬다. 사람의 무늬가 무엇일까?

 

사람이라는 말에서, 삶을 안다는 말을 유추해내는 사람도 있고, 사람 인(人)에서 서로 기대는 존재임을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사람을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는 말로 정의하든, 사회적 동물이라고 정의하든, 홀로 살아가는 존재는 사람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라는 말에는 이렇게 함께 함이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인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의 무늬는 바로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이 서로 만들어가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 관계를 인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고영직은 이 책에서 시와 예술을 통해서 인문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원하는 세상은 비빌리힐스(비빌里Hills)다.  얼핏 읽으면 미국 부자 마을인 비벌리 힐스(= 베벌리 힐스라고 읽는다고 한다. 나는 비벌리 힐스가 더 친숙하다. 영어로 Beverly Hills 이렇게 쓴다고 하니...) 를 떠올리는 말인데...

 

두 가지 효과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는 미국 부자 마을처럼 사람들이 잘 사는 마을을 연상시키는 것-그렇다고 돈이 많은 부자들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의미에서겠지만 풍요와 행복을 떠올려야 한다는 것-과 도대체 무슨 뜻이지 하고 생각을 하게 하는. 이 말의 뜻을 이 책 뒤에 있는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비빌 언덕'이라는 우리말에 마을(里)과 언덕(Hills)을 뜻하는 한자와 영어를 조합해 재미있게게 표현하고자 한 말이다. "마을(里)에는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 내지는 "마을(里) 자체가 비빌 언덕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자 한 조합어이다.

  우리 사는 삶터가 '비빌리힐스'가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네 삶터는 서로가 서로에게 '있어줌'의 존재론을 구현하고, 내면의 야생성을 회복하는 장소의 혼으로서 제 기능을 회복하게 된다. (323-324쪽)

 

이 비빌리힐스야 말로 인문학이 살아 있는 마을 아니겠는가. 비빌리힐스를 만든 사람들 몸에는 인문이 새겨져 있지 않겠는가. 고정된, 이미 새겨져서 어찌할 수 없는 무늬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면서 더 만들고 칠하고 고쳐가는 그런 무늬들.

 

이 무늬를 만들어 가는데 사람만큼 큰 역할을 하는 존재가 어디 있겠는가. 사람이 만들어가는 무늬. 그런 사람들과 사람들을 이어주는 존재가 바로 시를 비롯한 예술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예술은 자신의 내면으로만 침잠해 들어가서는 안 된다. 자신의 내면을 넘어서 밖으로 향해야 한다.

 

예술은 결코 자위 행위가 아니다. 자위를 넘어 서로를 위로해주고 즐겁게 해주는 행위여야 한다. 그런 시와 예술이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이고, 이런 예술을 통하여 우리는 인문적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예술비평만 하지 않는다. 예술과 사회, 사회와 사람이, 사람과 예술이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로 맞물려 있다. 이 맞물림을 통해 무늬가 만들어진다.

 

이런 무늬를 인식하고 함께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인문적 삶이다. 그런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바로 인문적 인간이다. 저자 고영직은 바로 그런 세상을 꿈꾼다. 아니 거창하게 세상이라고 할 것도 없다.

 

바로 자신이 살아가는 곳에서부터 시작하고, 자신이 만나는 사람부터 시작하는 것이니, 그가 꿈꾸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마을이다. 마을, 사람 무늬, 즉 인문적 인간들이 살아가는 장소인 것이다. 인문적 인간들이 살아가는 마을, 그 마을이 바로 '비빌리힐스'다.

 

고영직이 꿈꾸는 '비빌리힐스' 아직은 멀리 있다. 그러나 멀리 있다고만 해서는 안 된다. '비빌리힐스'는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여기에 있는 우리들이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 지금-여기에서 만들어가야 함을 깨달은 인간, 그 인간이 바로 인문적 인간이고, 그런 깨우침을 시와 예술을 통해서 할 수 있다는 것, 해야만 한다는 것이 고영직의 주장이다.

 

다양한 글이 실려 있지만, 그 글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곳을 '비빌리힐스'로 만들자. 다른 누구가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 그래서 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지금-여기에 있는 '나우토피아'를 만들자는 것. 그런 일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고, 그런 사람이 인문적 인간이라고.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이다. 가끔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을 받으면 기분이 좋고, 고마운 마음이 든다.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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