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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벅찬 마음, 도무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심장이 터질 듯하므로. 그럴 때는 온몸에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다. 평생을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자식을 그리워하며 살아온 레오 거스키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이름을 쓰는 아이를 만났을 때. 그 아이가 자신이 쓴 소설의 주인공 이름을 따랐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렇다. 그 아이는 더 이상 자신이 사랑하는 앨마가 아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앨마다. 사랑하는 사람. 평생을 사랑했던 사람. 오직 한 사람인 사랑. 그런 사랑을 죽음을 앞두고 만나다.


앨마는 앨마가 아니지만 앨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역사다. 사랑은 단절이 아니라, 그렇게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말로 할 수 없기 때문에 거스키가 쓴 소설에는 '침묵의 시대'가 있고, 언제는 깨어질 수 있어서 더욱 조심해야 하기에 '유리의 시대'가 있지만, 그렇지만 결국은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아무리 시간과 공간이 떨어져 있더라도 연결되어 있다는 '끈의 시대'가 있다.


이렇게 거스키의 소설은 여러 사람을 거쳐 앨마와 아들 아이작과 연결이 된다. 사랑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음을, 책 속이 소설 '사랑의 역사'를 통해서 알려주고 있다.


여기에 거스키가 쓴 또다른 소설이 있다. 아들에게 보낸 소설, 그 제목은 '세상 모든 것을 표현할 말들'이다. 세상 모든 것을 표현할 말, 그런 말이 있을까? 없다고 보는데, 그것을 우리가 생각하는 언어라는 생각을 벗어나면 세상 모든 것을 표현할 말들은 있다.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 말들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그래서 모든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 역사를 통과해서 살아남는 말, 역사를 통해서 계속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말, 사랑. 그런 점에서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감동적이다. 말이 필요없다. 아니 말을 할 수 없다. 세상 모든 것을 표현할 말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아이를 두 번 두드렸다. (372쪽) ... 아이가 나를 두 번 두드렸다. (373쪽)


앨마가 아닌 앨마, 앨마이자 앨마가 아닌 아이. 그런 아이와 만나 모든 것을 깨달았을 때, 그렇게 사랑은 지속되고 있었음을, 결국 하나로 모이게 되었음을, 거스키와 소녀 앨마의 만남에서, 서로가 말이 아닌 몸으로 보여주는 이 장면은 하나의 사진처럼 마음에 각인된다.


그렇다고 마냥 사랑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격동의 역사 속에서 사랑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 사랑으로 인해 최고의 기쁨과 최고의 슬픔을 함께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가 여러 조각으로 펼쳐진다. 


우선 레오 거스키.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으로 나치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 사랑하는 앨마를 위해 소설을 쓰고, 그것을 앨마에게 보낸다. 하지만 앨마는 거스키가 소식이 없자 미국에서 아이를 낳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아이의 이름을 아이작이라고 짓고는.

거스키는 자신이 쓴 소설이 발간된 지도 모르고 지내다 나중에 자신의 작품이 출간되었음을 알게 된다. 아들을 찾아가지만 아들은 먼저 죽고, 나중에 아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았음을 알게 된다.


두번째 앨마 싱어. 사랑의 역사를 감동 깊게 읽은 엄마가 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 앨마.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고, 사랑의 역사를 번역하는 엄마와 동생과 함께 산다.

사랑의 역사 번역을 의뢰한 제이컵 마커스와 엄마를 연결시켜 주려 하지만 제이컵 마커스가 아이작이 쓴 소설의 주인공 이름임을 알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사랑의 역사를 쓴 사람인 레오 거스키를 만나게 된다.


세번째 인물은 즈비 리트비노프. 거스키의 친구지만 친구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가 쓴 소설을 번안해서 출간한다. 출간할 마음이 없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인 로사의 권유로 자신의 작품인 양 출간하고 죄의식에 시달린다. 다른 이름들은 다 바꾸지만 앨마만은 바꾸지 않는다. 이 바꾸지 않은 앨마라는 이름이 결국 소설에서 흩어져 있던 인물들을 연결지어 준다. 


결국 끈은 앨마인 것이다. 앨마. 이 이름으로 인물들은 모두 사랑의 역사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아름다운 사랑, 슬픈 사랑은 나치 학살이라는 역사적 재난이 배경이 된다.


만약 나치 학살이 없었다면 레오와 앨마는 기복이 없는 사랑, 생활을 했으리라. 그러나 그들은 역사의 격랑 속에서 각자 다른 삶을 살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지게 되며, 그것은 전쟁 이후 앨마라는 소녀와도 연결되게 된다.


역사적인 재난과 사랑을 연결짓고, 서로 다른 인물들을 등장시키면서 그 인물들이 서로 연결되어 가는 과정을 짜임새 있게 서술하고 있다. 여기에 사랑은 슬픔을 동반하고 있음도 생각하게 하고 있고, 이 슬픔이 더한 사랑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음도 앨마의 동생 버드를 통해서 알게 해주고 있다.


무척 흥미진진하면서도 마음을 울리는 소설이다. 다른 소설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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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5-29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갖고 있는데 못읽었어요
감동적이네요.
조만간 읽어야겠어요 ㅎㅎ

kinye91 2025-05-29 22:00   좋아요 1 | URL
네, 전 이 소설 좋았어요.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 한글개정신판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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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도만 읽는 책이 아니다. 종교와 상관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특정 종교의 틀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금강경은 그런 책이다. 박중빈의 생애를 쓴 책을 읽다가 박중빈 역시 자신의 종교만을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 전도보다는 자신의 생활에 힘쓸 것을 강조했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금강경에서도 '전도'와 비슷한 내용은 있다. 보시를 행하는 것보다 금강경을 남에게 알려주는 일을 하는 사람의 공덕이 더 크다는 내용이 나오니. 내용을 알려준다를 전도라고 해도 좋겠지만, 거기서 그친다. 깨달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아니 자신이 전도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야 한다.


'나'를 잊는 것. 아니 나와 다른 존재들을 모두 잊는 것, 어쩌면 그것은 자신의 행위조차도 인식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선행을 하는데 그것이 선행인지도 생각하지 않는 것. 그러니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거나 자신의 희생을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금강경의 내용이 그런 것 아닐까? 결국 금강경 또한 우리가 인생을 잘 살아가도록 하는 하나의 방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방편을 끝까지 쥐고 있으면 안 되는 것.


금강경에 유명한 비유가 있지 않은가? 진리를 깨우쳤을 때 거기까지 오게 한 뗏목은 버려야 한다는 것. 자신을 고집하면 그것 자체가 이미 진리의 길에서 벗어났음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김용옥은 다양한 지식을 금강경을 설명하는 데 원용하고 있다. 역시 방편이다. 금강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성서의 내용과 노자, 장자의 사상도 인용하고 있다. 진리란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고, 그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하기 때문이다.


또한 특정 종교만을 강요하는 행위를, 물질을 우선하는, 점차 대형화되어 가는 종교를 비판하고 있다. 그것은 형식에 집착해서 진리를 잃어버리는 꼴이라고 한다.


또한 많은 금강경 판본 중에 우리가 반드시 참조해야 할 판본은 해인사본이라고 한다. 고려 때 판각한 소위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 것에 속해 있는. 그 좋은 해인사본을 놔두고 다른 판본을 열심히 번역하는 것의 문제점에 대해 이 책에서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또한 한자어로 된 많은 번역본 중에서도 구마라집이 번역한 것을 기본으로 삼는다고 했다. 한자의 맛과 중국인의 사상을 잘 살린 번역이라고. 그래서 우리도 우리말의 울림을 잘 살린 번역을 해야 한다고.


하여 이 책은 금강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물론 쉽다고 깨달음에 이른다는 말은 아니다. 깨달음은 남이 주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스스로가 받는 것이다. 이 받음에는 들을 귀가 필요하다.


귀가 없는 인간들이 많은 시대는 진리가 받아들여질 수 없는 시대다. 하여 금강경은 부처와 수보리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수보리는 바로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이고, 이런 들을 귀를 가진 사람으로 인하여 부처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전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금강경을 읽으며 다른 것은 몰라도 '듣는 귀'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무척 힘든 일이긴 하지만, 듣는 귀를 가지게 되면 나만을 고집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두고두고 곱씹으면서 다시 살펴볼 책이 바로 '금강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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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 여섯 개의 세계
김초엽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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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전세계가 팬데믹에 빠졌던 상황을 기억할까? 대부분의 사람이 다른 사람과 직접 만나지 못하고 화상으로나 만났던 그 시대를. 


3명 이상이 모이지 못하고, 어디를 가던 자신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겨야 하며, 마스크는 필수였던 시대. 학교조차도 대면 교육을 하지 못하고 원격 교육을 하던 그 때를 지금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겨우 3년이 지났을 뿐인데... 참 빨리도 잊는다. 거리에 나가보면 사람들로 북적인다. 여전히 마스크를 쓰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 또 거리낌 없이 서로 만나고 얼싸안는다. 


그래서 팬데믹은 머언 과거가 되어버렸다. 또다시 그런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 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팬데믹은 우리들의 삶을 많이 바꾸어 놓았다.


과거의 호된 경험이 사람들로 하여금 기존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코로나 19는 어떤 점에서는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대면의 중요성, 즉 서로가 서로를 직접 만나는 관계의 중요성을 깨우치게 했다는 점이다.


그냥 화상으로만 만나도 될 것 같았고, 재택근무를 하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고, 원격으로 하는 공부도 언제든 접속이 가능하고, 질문과 대답이 가능하기에 더욱더 학습 효과가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아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우치게 한 것이 코로나 19로 인한 팬데믹이다. 그렇다면 팬데믹 이후의 세상은 어떤가? 원격이 전부일 수는 없으니 서로 만나는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그렇다고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제는 원격과 대면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런 코로나 19를 맞아 전세계가 팬데믹에 빠져 있을 때 작가들이 팬데믹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작품을 썼다. 여섯 명의 작가가 창조한 팬데믹과 팬데믹 이후의 세계다.


먼저 끝과 시작(apocalypse)라는 제목을 단 소설이 두 편이다. 계시나 종말을 뜻하는 '아포칼립스'. 그렇다면 팬데믹은 종말을 뜻하기도 하지만 계시이기도 하다. 이대로 가다간 멸망한다는. 그런 세계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이미 멸망한 세계 이후를 살아가는 존재들이 나오지만.


김초엽, 최후의 라이오니

듀나, 죽은 고래에서 온 사람들


다음은 전염의 충격(contagion)이라는 제목으로 작품이 두 편 실려 있다. 감염이 확산된 시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한 편은 차라리 과거로 돌리면 좋겠다는 소망이 담겨 있고(미정의 상자), 또 다른 한 편은 감염이 된 세상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그 상자)이 담겨 있다.


정소연, 미정의 상자

김이환, 그 상자


마지막으로는 다시 만난 세계 (new normal)라는 제목으로 두 편이 나온다. 다시 만난 세계는 팬데믹으로 인해 완전히 변한 세상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과거와 그리 달라져서는 안 될 것이라는 점을.


배명훈,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이종산, 벌레 폭풍


아무리 격리되어도 사람들은 서로 연결지으려 한다. 연결이 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은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격리되어도 어떻게든 화상으로나마 연결되려고 하지 않나. 그렇지만 팬데믹이 더 길어지고, 그러한 세상이 일상이 된다면 대면과 원격의 비율이 반대로 바뀌겠지. 바뀌기는 하겠지만 대면이 완전히 없어질 수는 없다는 것. 


이렇게 여섯 편의 소설은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을 겪은 우리들이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 또는 우리들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도록 해주고 있다.


팬데믹이 끝났다고 다시 과거와 같이 살 수는 없다. 무엇이 팬데믹을 초래했는지 찾고, 더이상의 팬데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런 과제를 코로나19가 남겼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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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삶이다.


어려웠던 시기를 거쳐 새로운 시기에 접어들었다.


같은 일을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탄핵. 그 다음이 더 중요하다. 왜 탄핵이 되었는지, 탄핵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얻으려고 했는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람 하나를 바꾸는 일이 아니다. 그동안 지체되었던 개혁을 해나가는 일이다. 과거에 머무르고 있는 법 조항들은 개정해야 하고, 여전히 과거에 얽매여 있는 것들은 미래를 향해서 고쳐나가야 한다.


그리고 개혁의 대상이 개혁의 주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마치 자신들은 아닌 양 하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속아서는 안 된다.


국민을 대변하라고 있는 정당, 정당의 목적이 집권하여 자신들의 정책을 실현하는 데 있다고 하지만, 자신들의 정책은 바로 국민의 바람이다. 국민의 바람을 실현하지 못하는 정당은 정당 역할을 하지 못한다. 정당은 공당이어야 한다. 누군가가 좌지우지하는 정당이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듣게 해야 한다. 큰 소리로, 더 강하게.


[삶이보이는창]은 그러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이들의 목소리가 정치권에까지 가 닿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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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SF #1
정소연 외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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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작품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한때 문단에서 정통 문학으로 취급받지 못해서, 외국에서는 많은 작품이 나왔음에도 우리나라에서는 도외시 되었던 문학이었는데... 최근에 봇물 터지듯 SF작품들이 나오고 있다.


왜 그럴까? 그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는 문장을 이 책에서 발견했다. SF에 대한 여러가지 글을 실어 놓은 바로 이 책에서.


'SF 영화에 투영된 과학과 기술은 현시점에서 상상한 미래가 아닌, 그 시대가 과학이라는 미명 아래 무엇을 욕망하고 두려워했는지를 반영한다.' (279쪽)


이 문장에서 SF 영화를 SF문학으로 바꿔도 된다. 우리나라에서 SF문학이 많이 나오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욕망하고 두려워하는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소외되고 차별하는 것들이 결국 우리를 좀먹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SF문학을 읽게 하는지도 모른다.


SF문학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이 기정사실로 드러나 있고, 소외와 차별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를 상상의 세계, 상상의 인물(존재)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문학을 통한 간접 경험을 충분히 하게 된다.


이러한 때 SF문학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책이 나왔다. 이 책은 그에 걸맞게 다양한 글을 싣고 있는데, SF 공간과 작가에 대한 소개와 비평이 있고, 영화감독 연상호와 SF작가 배명훈의 인터뷰가 있으며, SF작품이 7편이 실려 있고, SF에 대한 칼럼과 신작 소개가 수록되어 있다. 


그야말로 SF작품에 대하여 다양한 방면에 대한 글들이 실려 있어, SF작품에 대한 초심자라도 쉽게 읽을 수 있고, 여러 편의 SF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자신이 읽은 것을 떠올리면서 읽을 수 있다. 여기에 새로운 작가들을 소개하고 있어서, 더 많은 작품을 찾아 읽을 수 있기도 하고.


소설적 상상을 현실이 뛰어넘었다고 하는 말들도 들리지만, 현실은 소설의 상상을 넘어설 수 없다. 인간은 지금을 살고 있지만 눈은 늘 저 멀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런 바라봄을 우리에게 현실처럼 안겨주는 것이 바로 소설이다. 문학이다.


하여 SF작품에는 현실과 다른 장소, 인물, 사건들이 나오지만, 그러한 것들은 결국 현실로 수렴된다. SF작품을 통해 발산된 다양성들이 현실에서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들의 삶을, 생각을 통해 수렴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의 불안감을 이겨내기 위해서도 SF작품을 읽게 된다. 지금이 불안할수록 더 많은 SF작품을 찾게 되는데, 우리 사회에서 SF작품이 많이 나오는 것도 우리의 불안이 더욱 심해졌음을 의미한다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뭐, 딱딱한 글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에 실린 소설 일곱 편을 읽어봐도 좋다. 짧은 소설들이기 때문에 큰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이 책을 읽다가 다른 책에서 읽은 김초엽의 '인지 공간'을 읽다가 이 구절에서 잠시 멈췄다. 역시 문학은 여러 번 읽을수록 다른 점을 느끼게 한다. 씹을수록 맛나는 음식과 같다.


'진리는 논쟁 속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말했다. 불변하는 진리는 모두의 인지 속에서 동일해야 한다고 사람들은 여전히 믿는다.' (150쪽)


과연 그럴까? 인지 공간이라는 모두가 공통으로 믿는 지식의 공간, 그 외의 지식은 사라져야 하는 공간만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인간일까? 인지 공간에는 어떤 지식만이 남을까? 그것은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는 사람들이 남겨야 한다고 믿는 지식들 뿐이지 않을까? 소수에 해당하는 의견, 지식들은 인지 공간에 남지 못한다. 그리고 남아 있는 지식만이 진리라고, 다른 것들을 배제하게 된다.


전체 속에 개인은 사라지게 된다. 그것은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은 아니다. 진리는 논쟁 속에서 성립한다.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고, 논쟁이 되고, 다양한 발산들이 수렴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진리는 찾아질 수 있다. 


단지 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권력을 쥐고 있다는 이유로 진리까지도 자신들만이 알고 있다고 하는 식의 사회는 발전할 수 없는 사회다. 그런 사회를 우리는 두려워한다. 하여 다시 읽은 김초엽의 '인지 공간'은 권력에 의해 왜곡된 진리가 우리를 얼마나 왜소하게 만드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한 권력을 깨뜨리는 것은 또다른 거대한 권력이 아니라 작품 속 '이브'처럼 작은 존재, 그러나 자신을 잃지 않고 용기있게 나아가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SF문학에 대한 여러 글들이 실린 이 책을 읽으면 아마도 SF문학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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