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아름답지 않다는 거짓말 - 페미니즘이 발견한 그림 속 진실
조이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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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볼 때 나는 어떤 관점에서 그림을 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한 책이다. 나만의 관점이란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내 관점이라고 생각하던 것이 알고 보니 알게모르게 다른 사람들이 말하거나 또는 사회적으로 암묵적인 동의가 있는 것들을 내면화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세계 명작이라는 작품들을 보면서, 물론 실제로 보지 못하고 책을 통해서 보지만, 그것들을 보면서도 그림 속에서 다른 것을 보지 못하고 기존에 알려진 것만 보지 않았는지, 아니면 내가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본 것은 아닌지.

 

표지 그림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는가 얼핏 보면 여성의 누드에 뱀이 나온다. 누굴까? 모르고 있었는데, 이책을 읽다보면 이 여성이 릴리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초의 여성이라고 하는데, 주체적인 여성이라고 한다. 어떤 신화에서는 아담의 첫번째 부인인데, 아담이 주도하는 생활에 반기를 들고 자신의 삶을 살겠다고 떠난 사람이라고 한다. 그만큼 당당한 존재. 뱀은 무엇인가? 지금은 사탄의 상징이 되었지만, 태고에는 신성한 존재를 의미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서 우리들은 무엇을 생각하는가? 인간의 원죄를 생각하지 않나? 그만큼 뱀과 여성은 원죄와 연결짓는 일이 많았다. 성경의 영향인지도 모르겠지만, 동양에서도 뱀은 신성하기보다는 인간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존재로 많이 나오니.

 

이런 그림이 그려진다는 것이 여성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이런 그림을 그린 사람이 여성일까? 여성보다는 남성이 더 많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림에서조차도 여성을 남성을 위한 존재로 소비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이 책은 다양한 시각에서 그림을 보게 해주는데, 특히 여성의 관점에서 그림이나 조각들을 보게 만든다. 남성의 시각에서 아름답다 또는 아름답지 않다는 말이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를 책의 뒷부분에 가면 더 잘 알게 된다.

 

페미니스트들이 어떤 식으로 굴레를 벗어나려 했는지, 미술에서도 남성들의 시각에서 벗어나려 했는지를 특히 5장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미술을 보는데 한 가지 시각만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다양한 시각이 필요한데, 작가가 작품을 창조했을 때도 작가에게 영향을 준 사회-문화-정치-경제적 영향을 무시할 수 없는데, 다시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에게 영향을 준 제반 요소들도 무시할 수 없다.

 

책에 나온 것 가운데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남성으로서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던 점을 반성하게 했던 장면이 있다.

 

베르니니의 작품인 '아폴론과 다프네'

 

에로스 화살의 영향이라고 아폴론은 사랑에 빠지고 다프네는 아폴론에게서 벗어나려 하고, 결국 다프네는 나무로 변했는데, 그 나뭇잎으로 관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주었다는,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사람에게 수여한다는 월계관에 얽힌 신화.

 

아폴론 처지에서야 사랑하는 사람이 나무로 변했으니 그 사랑을 간직하고자 나뭇잎으로 관을 만들겠지만, 죽어도 아폴론에게서 벗어나려 했던 다프네 처지에서는, 죽어서도 아폴론의 손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 얼마나 폭력인가? 단순히 조각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여성에게 가해진 수많은 폭력을 생각하면서 이 조각을 볼 수도 있다는 것.

 

이렇게 서술하는 책은 남성의 폭력이 미술에서 얼마나 많이 나타났는지를, 그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명작이라는 이름을 걸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림을 보는 새로운 시각 하나를 더해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들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현대미술에서 전복적이라고 할 수 있는 행위예술들이 나오는 이유도 바로 이런 사회적 편견, 사회적 억압을 까발리고 뒤집기 위해서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책은 첫부분부터 심상치 않게 전개된다. 사람들에게 명작 중 명작으로 인정받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성모 마리아가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살펴보면서 여성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렇게 하면서 고대 조각들 중에서 남성들의 조각은 나체로, 그것도 성기를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는 상태로 만들면서도 여성들은 그렇지 못했음을 생각하라고, 그것이 우리가 지나온 역사라고 말하고 있다.

 

'페미니즘' 하면 경기나 광기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 마치 '페미니스트'들이 자신을 잡아먹기라고 하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남성을 적대시 하기만 하는 주장이 아니다. 오히려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이 또 다른 성이 함께 서로를 인정하고 살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특정 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사회, 다름이 그냥 다름인 사회, 그 다름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꿈꾸는 것, 그래서 탈코르셋이든 코르셋이든 별다른 갈등없이 선택할 수 있는, 남성도, 여성도 또다른 성도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다.

 

참고로 이 책에서 새로운 사실, 그렇게 표면에 보이는 것에 갇혀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 글이 있었는데, 그 글은 마릴린 먼로(나는 마릴린 먼로라는 이름이 친숙한데, 이 책에서는 메릴린 먼로라고 표기한다)에 대한 것.

 

남성의 시선에 자신을 맞춘 사람으로만 기억하고 있는 나에게, 백치미의 원조로만 알고 있던 나에게 먼로가 얼마나 주체적으로 살려고 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남성 시선에 갇힌 것이 아니라 '대본을 먼저 보고 그 역할을 할지 말지를 결정하겠다'는 요구를 관철시킨 담대한 배우였다(245-246쪽)고 한다.

 

최근에 살았던 배우에게서도 남성들이 알려고 한 것들만 많이 알려져 있었던 것이 현실이라면 이보다 더 먼 과거의 일들은 더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 어떤 작품을 볼 때 다양한 관점을 동원할 필요가 있다는 것, 또 우리 삶에도 하나가 아니라 다양성이 있음을,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이 진실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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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자화상 - 화가의 가슴에서 꺼내온 가장 내밀한 고백
박홍순 지음 / 서해문집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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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감정을 차분히 들여다 볼 시간이 별로 없다. 바쁘게 산다는 핑계로, 또는 온갖 스마트 기기들의 도움(?)으로 심심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심심할 시간이 없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차분하게 관조할 시간을 마련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바꿀 수 있다.

 

그냥 엄청난 속도로 시간을 보내고, 자신의 감정도 그렇게 흘려보내고 만다. 감정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중요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이성보다는 더 소홀하게 여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이성이 하던 역할을 인공지능이 많이 하게 되었다. 인공지능이 인간 지능을 넘어선 지는 오래 되었지만, 아직까지 인간이 지닌 감정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감정은 아직 인간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감정을 더 소중히 다뤄야 하지 않겠는가. 이 책은 화가들이 그린 자화상을 통해 감정을 들여다보게 해주고 있다. 자화상을 통해 화가들의 감정만이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에 대해 생각하게 헤주고 있다.

 

책을 시작하기 전에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감정을 깊이 있게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회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감정의 속살과 대면하고 정당한 자리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감정과의 은밀한 만남을 위한 가장 적절한 안내자는 자화상과 소설이다. 자화상은 감정을 표현하는 풍부한 표정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 화가가 직접 겪은 삶의 내력까지 스며들어 있기에 친밀한 만남을 주선한다. 소설은 다양한 인간 군상이 등장하고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생겨나는 다양한 고뇌와 갈등이 펼쳐져 넓고 깊은 감정의 수원지 역할을 한다. 자화상과 소설에는 살아 움직이는 숨결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으로 생생한 간접경험을 제공한다. (6쪽)

 

그래서 이 책에서는 자화상과 그와 관련된 소설이 또는 시가 등장한다. 우리들의 감정을 이해하는 작품들인 것이다. 자기 감정을 언어로 표현 못할 때가 많다.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감정을 차분히 들여다보지 못했다는 말이다.

 

자기 감정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대략 이렇다고만 표현하고 만 것. 또는 표현도 못하고 지나쳤던 것. 어떤 감정들이 있을까? 저자는 이 책에서 많은 감정들을 제시하고 있다.

 

분열, 기만, 연민, 절망, 욕구, 상상, 열망, 투영, 허무, 수용, 우월, 울분, 상실, 고독, 공포, 인내, 결벽, 일탈

 

이런 감정들을 표현한 자화상과 작품을 들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그런 감정들을 만나고, 그것들을 통해서 자신을 더 넓고 깊이 있게 알아가는 기회를 마련하면 된다. 책을 읽기 전에 어떤 화가와 또 어떤 작품(소설이든 시든)을 연결시킬 수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처음에 나오는 감정이 '분열'인데, 이 감정에 대해서 에곤 실레의 자화상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에곤 실레의 자화상에는 하나의 인물만 나오지 않는다. 둘 또는 셋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자화상인데 한 화면에 둘이나 셋이 나온다. 그 인물들이 모두 화가인 것이다. 그러니 분열일 수밖에.

 

그러나 우리를 하나로 규정할 수 있을까? 사람이 하나의 감정만 지니고 사는가? 그 사람을 단 하나의 언어로만 표현할 수 있는가. 적어도 사람에게는 둘 이상의 모습이 함께 있지 않은가. 어떨 때 저 사람이 내가 아는 사람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을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이 만나지 않나.

 

자신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지 않나. 그러므로 이런 감정의 자화상을 통해서 다양한 감정들을 만나면서, 나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감정들에 대해 생각해야 하지 않나. 에곤 실레의 자화상을 들면서 이렇게 시작한다. 그렇다면 문학작품은?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들고 있다. 내가 어릴 적에는 '지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읽은 작품. 다양한 나를 성찰하게 하는 작품.

 

이렇게 감정과 자화상과 문학을 연결짓고 있는데, 꼭 저자의 의견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 이런 감정에 해당하는 자화상과 문학을 찾아보는 것도 좋다. 그런 찾기를 통해서 자기 감정을 더 잘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게 될 테니까 말이다. 

 

이 책에서 계속 남아 있는 자화상은 아르테미시아의 자화상이다. 여성이다. 그렇다면 어떤 감정과 연결이 될까? '울분'이다. 여성으로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고난, 사회의 비난, 그럼에도 당당하게 살아간 사람. 유딧(또는 유디트)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을 그린 화가. 그가 겪었던 일이 아직도 진행 중이라면? 이 화가의 자화상과 어울리는 문학 작품은? 토마스 하디가 쓴 '테스'다.

 

21세기에 들어서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 자화상을 통해서 사람의 내면으로만 침잠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 확산시킬 수도 있음을 이 장을 통해서 알게 된다. 자화상은 사람의 내면만이 아니라 사회 문제까지 성찰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 책은 그 점을 잘 드러내 주고 있고, 그래서 감정과 사회 문제를 함께 생각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많은 자화상들을 감상할 수 있고, 여기에 따른 문학작품까지 소개 받고 있으니 일석이조인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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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자꾸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속담이 생각날까? 윗물이 맑은 적이 있었나? 오히려 아랫물이 맑아야 윗물도 맑아지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윗물은 먼저 더러워진다. 그만큼 더러움에 더 많이 노출된다. 그럼에도 그 더러움들이 아랫물에까지 이르면 아랫물은 견딜 수 없다. 물이 견디지 못한다. 썩어들어가는 물이 된다. 악취를 풍기는 물.

 

  악취를 풍긴다고 다시 아랫물에 책임을 묻는다. 윗물이 가져온 더러움들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아랫물이 견디지 못해 그렇게 썩어들어갔음에도, 윗물은 자신들이 아래로 내려보낸 더러움에 대해서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오히려 큰소리를 친다. 왜 너희들은 그렇게 더러운 거야? 왜 악취를 내뿜고 난리야. 빨리 깨끗해져야 해. 우리가 너희들을 깨끗하게 해줄게. 이런 참.

 

조금 있다 싶은 사람들, 재판을 받으면 거의 다 집행유예다. 반성을 잘하고 있단다. 초범에다가 반성까지 하고 집안이 좋으니 이런 사람은 사회에 내놓아도 그닥 문제가 되지 않는단다. 그런데 집안이 좋지 않은 사람, 또 노동자들이 법에 걸리면 추상같은 법리 해석이 이루어진다.

 

법조문에 있는 그대로 실형이 선고된다. 그리고 그들은 격리된다. 윗물과 아랫물 일과 같다. 윗물은 아무리 더러워도 아랫물로 그 더러움을 내려보낼 수 있다. 제가 더러워져도 그 피해를 입지 않는다. 오로지 아랫물만이 고스란히 더러움을 뒤집어 쓴다. 그리고 책임도 져야 한다.

 

국회선진화법을 위반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누구 하나 처벌 받지 않았다. 입법부 의원들은 자신들이 윗물이다. 그들이 많은 법은 아래로만 내려간다. 아래로, 아래로, 그래도 힘없는 사람들에게 뒤집어 씌운다. 그냥 쓸 수밖에 없다. 아랫물들은. 더이상 내려보낼 곳이 없으므로.

 

시집을 읽으면서 아랫물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들 삶이 이토록 순수하지만 또 그만큼 힘듦을 느끼게 된다.

 

가령 이 시집에 실린 '어떤 일대기'라는 시를 보라. 눈물이 안 날 수가 없다. 여성으로서, 농민-노동자로서의 삶이 이토록 힘든 줄을 이 시를 읽으면 알게 된다. 아랫물들이 얼마나 힘겹게 살아가면서 이 땅을 지탱하는지도 알게 된다. 그런데 윗물들은 이런 아랫물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고려한다고, 생각한다고, 그들을 위해서 일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말뿐이다. 선거 때 표를 얻기 위한 사탕발림에 불과하다. 꼭 이 시에 나오는 이런 사람들 같다. 더 말해 무엇하리... 손만 아프고, 글을 보는 눈만 아프고, 그리고 마음이 아프다.

 

이런 윗물들... 걷어낼 새로운 방법이 분명 있을텐데... 윗물들이 한사코 가로막고 있으니...

 

     흙

           - 신자유주의 농촌 학교

 

흙을 덥썩 안아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흙이 길러낸 아들딸들을 가르치고 있다

 

흙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라고

흙에서 멀리 떠나는 길만이 희망이라고

 

흙의 종아리에 매질하고 있다

흙의 가슴에 꽝꽝 못질하고 있다

 

배창환, 겨울 가야산, 실천문학사. 2007년 초판 3쇄.  72쪽.

 

이런 사람이 어찌 농촌에 있는 교사만이랴... 서울에는 더 많이 있다. 그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더러움을 아래로만 보내는 윗물들이 너무도 많다. 아랫물만 탓하는 윗물들이 너무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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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들 - 역사 테마 소설집 바다로 간 달팽이 9
강기희 외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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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들"

 

역사 테마 소설이라고 하는데, 제목이 참, 허균이 주장한 호민(豪民)도 아니고, 벌레라니. 제목과 역사가 잘 연결이 안 되었는데, 이 소설집 마지막에 실린 소설이 '벌레들'이란 제목을 갖고 있다. 뒤 설명에 의하면 '벌레들'은 '카프카의 여인'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약간 고친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벌레들은 카프카 소설 '변신'에 나오는 벌레를 의미한다. 그냥 벌레라는 단수가 아니라, 즉 그레고리 잠자가 아니라 그레고리 잠자인 것이다.

 

벌레 하면 떠올리는 것은 징그럽다, 우리와 다르다, 그래서 격리하거나 처치해야 한다 등등 부정적인 생각을 더 많이 하는데, 카프카 소설에서도 그렇다. 벌레가 된 잠자는 가족에게도 배척을 받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

 

밀려나는 존재, 밀려나게끔 인식되는, 남들에게 함께 있어서는 안 될 존재로 여겨지는 그런 존재가 바로 벌레다. 벌레들이라고 하면 우리 역사에서 그만큼 밀려난 존재들을 의미하지 않을까? 그런데 누가 밀려났지?

 

그레고리 잠자가 누구인가? 평생 가족을 위해서 일만 한 존재 아닌가. 노동자 아닌가. 사회에서 위를 구성하지 못하고 밑을 구성하는 하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세상을 돌아가게 만드는 존재이지만 그만큼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 아닌가.

 

역사를 구성하고,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살아남았던 민중들이 벌레들이란 말인가? 아니면 민중들을 벌레 취급하는 소위 지배층, 기득권층이 벌레들이란 말인가. 아니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벌레들인데, 서로를 벌레라고 경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제목이다.

 

소설은 총 7편이 실려 있다. 우리 역사와 관련하여 우리들에게 비극으로 다가왔던 사건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단지 과거의 일을 반추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관련지어 소설은 전개된다. 역사는 과거에 끝난 사건이 아니라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삶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소설의 제목만 보고는 우리나라 역사의 어느 지점과 연결 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소설을 읽어 보아야 아, 그 사건이구나 할 수 있다. 그런 사건에 대해 알지 못했다면 소설을 마음으로 느끼는데 더한 수고를 해야 한다. (한편 한편 소설이 끝나면 그 역사적 사건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다. 간략하게.. 더 알고 싶으면 수고를 더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앎에 대한 자세다)

 

이해를 통해 감상으로, 머리를 거쳐 가슴으로, 그리고 다시 발로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너무도 길다고 고 신영복 선생은 말했다. 그러나 소설을 읽는데 머리에조차도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 많다. 역사 지식에 대해서 깜깜이인 사람이 천지다. 아무리 역사 교육을 강조해도 그것은 시험용일 뿐이다.

 

역사가 우리 삶에 중요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시험지 속에, 책 속에 갇혀 있다. 그래서 이모양 이꼴이다. 세상 돌아가는 꼴이. 역사는 역사, 현재는 현재, 그리고 도덕과 윤리는 책 속에만 있는 것. 역사에서 도대체 무엇을 배웠는지, 머리에도 닿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머리에 닿아야 그 다음에 가슴으로 가든지 말든지 할텐데...

 

이 소설을 읽으며 그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소설 속에 서술된 사건들이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이미 청산되어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는 이 현실이 답답하기만 하다.

 

제목을 보자. 그리고 어떤 역사적 사건인지 생각해 보자.

 

'동몽군, 빼앗긴 죽음, 손님,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돼지 아빠, 붉고 푸른 못, 벌레들'

 

알 수 있는 사건이 있는가? 없어도 좋다. 소설이 역사를 직설적으로 드러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을 읽기 위해서도 역사 공부는 필요하다. 작품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도 그렇다.

 

동몽군... 동몽과 군이라는 말이 합쳐진 말. 동몽은 '동몽선습'이라는 책을 떠올리면 아이들이라는 (어린아이라기보다는 결혼을 하지 않은이라는 의미) 말을 의미한다고 유추할 수 있고, 군은 군대니까, 아이들로 이루어진 군대?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던 천민, 여인, 아이들도 동등한 인간임을 표방한 종교... 동학. 그렇다. 소설 '동몽군'은 동학혁명을 역사적 사건으로 삼고 있다. 이렇게 역사의 흐름 순으로 따라가면...

 

'빼앗긴 죽음'은 의열단원으로 일본 황궁 다리에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한 김지섭 열사의 이야기다. 죽음조차도 재판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독립운동가의 비애. 영화 [동주]를 보면 진술서에 서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절차... 자신들을 합리화 하기 위한 그 절차에 옭아매인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 빼앗긴 죽음은 그래서 더 슬프다. 여전히 의열단 단장이었던 김원봉은 당당한 독립운동가로 훈장을 받지도 못하고 있다. 이 무슨 일이란 말인지...

 

'손님'? 혹 황석영의 '손님'을 읽은 사람은 6.25전쟁을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비슷하다. 역사적 배경이. 4.3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4.3에 대한 이야기는 직접적으로 서술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으려면 4.3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현기영의 '순이 삼촌'이나 영화 [지슬]을 보면 이 소설에서 엄마가 왜 제주도에 가려고 하지 않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소설 속 인물, 새끼 무당이라고 불리는 명희 언니의 해원 장면에서 코 끝이 찡해질 것이다.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어찌 글로 서술할 수 있겠는가. 그 비참함을. 그 말도 안 됨을. 그런데도 그런 일이 일어났음을. 하여 소설가는 물푸레나무를 화자로 등장시킨다. 인간들이 하는 말도 안 되는 짓을 자연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너무도 비참하고 비극적인 그 장면을 차마 사람의 말로 전하지 못하기에... 그렇게...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는 소설.

 

이념이 사람이 사람을 얼마나 잔인하게 죽이게 됐는지, 그렇게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죽이라고 명령한 사람 만세를 부르는 그 비극적인 상황. 도대체 이 무슨 비극이란 말인가. 우리 역사에서 이런 비극을 겪었으면서 왜 우리는 아직도 이념의 잣대를 들이댄단 말인가.

 

사람이 먼저다라는 말은 천연덕스럽게 하면서도 자신들의 이익에 맞춰 이념의 칼을 들이대고 있는 것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우리 현실 아니던가.

 

'돼지 아빠' 부마항쟁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광주민주화운동에 비해 덜 알려졌지만,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 부마항쟁이다. 그러나 이런 부마항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고 있는지, 그 고통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음을, 이어서 '붉고 푸른 못'에서 박정희 아류인 전두환이 실시한 삼청교육대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이렇게 사람들 가슴에 붉고 푸른 못을 박았던 사람이 반성은커녕 오히려 더 큰소리를 치는 현실이 암담하다. 그걸 지켜보는 심정이 참 처연하다. 그런 존재를 처벌도 못하고 있는 이 현실이 더 슬프다.

 

마지막 '벌레들' 미선, 효순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아니 미선, 효순이 사건이라기보다는 촛불 시위를 다루고 있다. 촛불 시위에 나온 사람들이 벌레들일지, 그것을 비꼬고 탄압하는 사람들이 벌레들일지... 아니면 그렇게 벌레들이라는 인식을 통해 서로가 다른 존재가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인지...

 

하지만 카프카 소설에서 벌레는 애초에 사람이었다. 가정에서 사랑받고, 인정받는 존재. 우리가 벌레 취급하는 존재들도 처음부터 그런 존재는 아니다. 그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하여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된 존재들은 대부분 약한 존재들이다. 사회에서 주류에 서지 못하고 비주류에 머물러 있는, 큰소리를 치기보다는 주로 당하는 그런 존재들. 하지만 그들도 그냥 '항민(恒民)'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들도 자기 목소리를 낸다. 이들은 '원민(怨民)'이 된다.

 

원민... 이 상태에 머무르면 자기들 억울함은 벗어날 수 있어도 다른 사람들의 억울함은 지속된다. 그러면 역사는 계속 반복된다. 약한 사람들은 계속 당할 수밖에 없다. 원민에 머무르지 않고 '호민(豪民)'으로 가야 한다. 그때서야 사회는 변하고,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아주 오래 전에 허균이 이미 '호민론'에서 전개한 논리다. 그 점을 이 테마 역사 소설집을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머리를 깨우치자. 그리고 가슴으로 보내자. 가슴에서 다시 다리로 가게 하자. 순차적으로, 또 동시적으로. 머리와 가슴을 동시에 자극하는 역사 알기, 그것이 바로 이런 역사 테마 소설을 읽는 일이다. 읽고 더 찾고 생각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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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읽기의 힘이라는 꼭지로 여러 글이 실려 있다. 읽기 자체에도 엄청난 힘이 있는데, 함께 읽기는 더 많은 상승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 혼자서 진리를 추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함께 진리를 추구한다면 진리에 다가가는 길이 단 하나가 아님을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교육 역시 마찬가지다. 교육은 홀로일 수 없다. 교육이라는 말에는 이미 '함께'라는 말이 들어 있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과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의 상호작용. 이것이 교육이다. 배움이라고 해도 좋다.

 

  디지털 배움이라고 해도 컨텐츠 속에 이미 상호작용이 들어 있다. 누군가는 가르칠 목적으로 내용을 제공하고, 누군가는 그것을 통해서 배운다. 결국 '함께'할 수밖에 없다.

 

이미 낡을 대로 낡은 학교에 왜 청소년들이 다니는가? 탈학교 청소년들도 꽤 많아졌지만, 대다수의 청소년들은 여전히 학교에 있다. 단지 부모들이 다녀야 한다고 해서? 갈 곳이 없어서?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함께'라는 말에 더 많은 이유가 담겨 있지 않을까 한다.

 

학교가 사교의 장, 수면이 장, 식사의 장으로 변했다고 하지만, 친구 만나 함께 먹고, 함께 놀고, 가끔은 졸거나 자기도 하는 장소가 바로 학교 아닌가. 그런 곳에서 '함께' 할 수밖에 없고, 그 함께 함 속에서 무언가를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다.

 

이렇듯 함께 지내는 시간 속에서도 배우는 것이 있는데, 함께 읽기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독서를 무척이나 강조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홀로 읽기가 아닌 함께 읽기를 강조하는 것이 당연한 흐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민들레처럼 스스로 서는 것을 강조해도, 서로를 살리는 교육이라는 말에서 이미 '함께'가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함께 읽기, 그래서 다양함을 살리는 삶을 살아가기는 무척 중요하다.

 

그 점을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과연 우리나라 학생들이 책을 읽을 시간이 있을까? 그들에겐 여가 시간이 없다. 오로지 짜여진 시간표대로 움직일 뿐이다. 움직여야만 한다.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경쟁을 해서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공부.

 

그러니 책을 읽어도 함께 읽지 못한다. 그냥 점수를 따기 위해서 읽을 뿐이다. 좀더 좋다고 하는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수단, 자신의 생활기록부에 기록을 남기기 위한 수단으로 읽을 뿐이다. 여기에는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다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자 하는 욕구도 작동하지 않는다. 그냥 읽을 뿐이다.

 

함께 읽기라는 말이 얼마나 매혹적인가? 학창시절, 몇몇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함께 읽기는 해본 적이 없다. 아니, 학교 교육에 다양성이라는 말은 교과서에만 있는 말이다. 다양성을 추구하면 곧 제재가 들어온다. 다양함을 다양하게 살리는 일이 함께 읽기라면 학교가 추구하는 것과 이미 함께 읽기는 맞지 않는다.

 

마치 70-80년대 학교에서 책을 읽으면 공부 안 한다고 교사들에게 맞았던 것과 비슷하게... 읽어도 답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답을 찾기 위해 읽어야 한다. 답을 만들기 위해 읽지 않는다. 함께 읽으며 답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있음을, 아니 꼭 답을 찾기 위해 읽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을 만들어낸 것은 바로 기성세대다. 이들은 불안해 한다. 학생들이 청소년들이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 좀더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지금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또 너무도 혼란스러워 보여도, 결국 그들이 자신들의 길을 갈 거라는 믿음이 부재한 세대가 바로 기성세대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기성세대는 끊임없이 답을 미래세대에게 강요한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등등...

 

이번 호에 나온 이 말이 그래서 더 마음에 다가온다.

 

청소년들은 미래를 미리 살 필요가 없다. 어른이 걱정을 그들에게 짐 지우지 말아야 한다. 어른들의 역할은 언젠가 어른이 될 그들의 현재를 온전히 지켜주기, 하나의 잣대로 그들을 평가하지 말고 함부로 개입하지 말기, 그리고 옆에 나란히 서서 그들이 걷는 스텝 한 발 한 발을 바라봐주기가 아닐까. 그래야 그들은 팔딱팔딱 살아 숨쉴 수 있다. (171쪽)

 

이 구절을 읽고 함께 읽기, 함께 살기, 함께 고민하기는 바로 어른들에게 필요한 일이 아닐까. 그래서 이번 호에서 어른들의 함께 읽기 모임에 대한 글들이 많은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른이 되어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 함께 읽기, 함께 하기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이렇게 함께 읽는 어른들이 많아지면 청소년들을 좀 놓아줄 수 있지 않을까, 그냥 지켜보아주는 어른이 많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호 김달님이 쓴 '사랑으로 도착한 곳'은 깊은 울림을 준다. 어른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할 수 있게 하기도 하고.

 

격월간 민들레는 그래서 함께 읽기가 더욱 필요한 책, 함께 읽고 함께 생각하고, 함께 말하고 함께 행동하는, 그렇다고 똑같이 살아가지는 않는, 다양한 삶을 추구하게 하는 책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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