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장미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3
캐서린 패터슨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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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파업을 경원하는 시대가 있었다. 이렇게 과거형으로 이야기하고 싶다. 파업이 노동자들이 지닌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파업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불법, 과격, 폭력을 함께 연상한다. 그렇게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파업도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이게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겪어왔던 일이다. 그런데 이게 우리나라 노동자들만이 겪었던 일일까? 아니다. 전세계 노동자들이 산업혁명 초기에 겪었던 일이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이런 일을 겪고서 노동조합을 파트너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노동자는 파트너가 아니라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하는 그런 존재였을 뿐이다.

 

이 소설은 20세기 초에 미국에서 일어난 파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임금삭감에 반대해 파업을 하고, 그것을 지켜보는 어린이의 시각으로 소설이 전개된다. 그래서 일방적인 노동자들의 요구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가족이 혹시 다치지나 않을까 두려움에 싸여 있는 아이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노동자들에게 빵은 당연히 필요하다. 먹고 살기 위해서 노동을 하니까. 그런데 사람이 빵만으로 살 수가 있을까? 사람다움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장미도 필요하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파업 피켓에 이렇게 쓴다.

 

"우리는 빵을 원한다, 그리고 장미도!"

 

하지만 파업은 힘들다. 가진 것이 없는 노동자들이 가진 것이 많은 자본가와 싸우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한데, 그 중에 제일 필요한 빵이다. 먹을 것이다. 먹을 것이 없으면 오래 싸우기 힘들다.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가진 것이 없는 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때 고통받는 것은 아이들이다. 아이들에게 굶주림은 고통 그 자체이다. 부모들이 왜 파업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당하는 굶주림은.

 

빵만큼 필요한 것이 연대다. 노동자들의 연대. 소설에서는 다른 지역의 연대가 나온다. 아이들에게 휴가를 주라고, 자신들이 파업하는 기간 동안에 돌보겠다고.

 

그리고 이 아이들에게는 빵만이 아니라 사랑이, 그리고 장미에 해당하는 교육이 제공된다. 노동자들의 연대로.

 

파업을 반대하는 아이의 관점에서 소설이 전개되지만, 소설이 전개될수록 가족들을 걱정하는 마음과 다른 지역의 노동자들이 연대하는 모습, 파업을 잔인하게 진압하려 하는 자본가들의 모습이 드러나면서 서서히 파업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간다.

 

여기에 어린 시절부터 노동할 수밖에 없었던 남자 아이가 함께 등장해 당시의 모습을 드러내고, 노동자로 성장해가는 모습도 표현되어 있다.

 

아직도 노동자들이 빵과 장미를 함께 누린다고 할 수 없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구별이 생겼고, 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직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노동자들도 많다. 지금도 아직 빵을 얻지 못한 노동자들이 있는 상태.

 

빵만이 아니라 장미도 함께 노동자들의 삶에 들어와야 하는데... 오래 전 일을 다룬 소설을 통해서 지금을 생각하게 된다. 빵과 장미가 필요한 건 노동자들만이 아니다. 우리 인간들 모두의 삶에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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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말이 있다.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다. 대칭이다. 좌우가 있다. 어느 한쪽이 기울어지면 중심이 잡히지 않는다. 중심을 잡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사람 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세상일도 대칭이 된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쪽과 저쪽이 있으며, 할 일이 있으면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 그래서 세상은 쌍이다. 짝이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짝이 쌍이 없는 세상은 너무도 삭막하다.

 

(중심만 너무 비대해도 그렇다. 몸통만 살찐 새를 생각해 보라. 날 수가 없다. 그러니 몸통을 중심으로 좌우 날개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짝, 쌍이 있어야 한다.)

 

  동양철학에서 음양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21세기 인공지능의 세상에 디지털이란 것도 0과 1의 짝이 아니던가. 이런 짝을 잃으면 짝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중심이 잡힌다.

 

  짝을 잃었을 때 슬픔을 느낀다. 상실을 깨닫는 것, 슬픔이 일어나는 것, 그것은 슬픔을 이겨내려는 행동을 한다.

 

시인은 시집 처음을 '슬픔에게'란 시로 시작한다. 마치 정호승이 슬픔의 시인이라는 소리를 듣지만,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희망임을 연상시키는 그런 시로. 시 첫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무지 때문이 아니라 / 희망에서 비롯된다 모든 슬픔은 ('슬픔에게' 1연)

 

 그렇다면 희망은 무엇인가? 바라는 것이 없는 상태, 부재 상태를 인식하는 것, 따라서 지금 없는 존재를 있게 하려는 바람, 이것이 바로 희망이다. 그러니 희망은 슬픔을 동반한다. 다른 말로 하면 슬픔은 희망이다.

 

그래서 시인은 시의 마지막 연에서 '부디 오래오래 머물러다오, 슬픔 너는 / 희망의 다른 이름 아니더냐'('슬픔에게' 4연)라고 하고 있다.

 

슬픔과 희망의 짝. 얼핏 희망은 기쁨과 연결시키는 경우가 많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슬픔에서 희망이 나온다. 희망에서 슬픔이 나온다. 아직 오지 않은 것, 아직 내게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슬픔은 현재에서 미래를 생각하고, 희망은 미래에서 현재를 움직이게 한다.

 

짝이다. 쌍이다. 희망과 슬픔의 짝. 우리들 삶을 구성하는 짝. 이 시집에서 이런 짝을 만난다. 없는 것을 만들어 중심을 잡는 행위. 그것이 바로 희망이다. '어떤 중심'이란 시다.

 

     어떤 중심

 

읍내 주점에서 술을 마시다 잠시 밖으로 나와

길가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는데

자꾸 앞으로 넘어진다

술 탓인가 몇 번이고 자세를 고쳐 앉지만

여전히 몸 전체가 왼쪽으로 쏟아진다

몽롱히 살펴보니 왼쪽 다리 하나가 없는 의자,

왼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니 비로소

다리 네 개의 의자가 된다

 

왼 다리가 내 몸의 중심이었다니

 

권혁소, 우리가 너무 가엾다. 삶창. 2019년. 107쪽.

 

한쪽을 없애버리려 아둥바둥 대면, 자신도 중심을 잃고 쓰러진다. 왼쪽의 부재는 오른쪽의 부재를 불어온다. 결국 넘어질 수밖에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중심을 잡으려면 짝이 있어야 한다.

 

왼쪽에는 오른쪽이, 오른쪽에는 왼쪽이. 한쪽이 없으면 슬픔이 인다. 자꾸 넘어질 수밖에 없으니 슬플 수밖에. 그래서 희망한다. 한쪽이 있게 되기를, 중심을 잡게 되기를.

 

왼쪽이 없으면 왼쪽을 만들어야 한다. 오른쪽이 온전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어째, 자꾸 우리는 너무 왼쪽을 없애려고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시인은 왼쪽이 얼마나 무시당했는지 '왼쪽에 대한 편견(98-99쪽)'이라는 시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많이 쓰지 않았는데도 먼저 망가져버린 왼쪽에 대해서. 단지 왼쪽만이 아니라 몸이 망가져 버린다는 사실을 시를 통해 알려주고 있다.

 

슬픔과 희망, 짝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세상은 짝, 쌍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생각하게 하는 시집이다.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시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시집이다. 읽으며 마음이 훈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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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 고미숙의 글쓰기 특강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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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가 직업이 아니라 삶임을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글쓰기는 특정 사람들만, 소위 작가들이거나 학자들이거나 전문가랍시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당연히 해야할 삶임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마치 연애나 결혼을 모두가 다 할 수 있는 삶인 것처럼 말이다.

 

이 책은 크게 2부로 나뉘어 있다. 하나는 왜 글을 읽고 써야 하는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고, 하나는 글쓰기의 실제 편이라고 하면 된다.

 

이렇게 글쓰기에 관해서 우리들에게 알려주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글쓰기가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또 읽기와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읽기만 하고 쓰지 않는다? 이 말은 안 읽었다는 말과 통함을 생각하게 된다.

 

그냥 읽기만 하는 것은 짝사랑과 다름 없다. 자기 마음을 상대방에게 전달하지 않은, 그래서 자기 마음 속에서만 끙끙거리다 끝난, 더 이상 진척이 없는 사랑. 하지만 사랑은 양방향이다. 일방이 아니다. 서로 주고 받아야 한다.

 

읽기에서 끝나면 양방향이 되지 않는다. 일방적이 된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냥 자기 속에만 갇혀 있게 된다. 그래서 써야 한다. 읽으면 써야 한다. 쓰기 위해서 읽어야 한다. 결국 읽기와 쓰기는 샴쌍동이처럼, 또는 연애를 하는 사람들처럼 한 쌍이 된다.

 

읽기는 곧 연애다. 책은 사람이다. 사람의 몸이다. 몸은 우주다. 몸이라는 단일체가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우주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우리는 안다. 같은 몸은 없다. 사람마다 모두 다른 몸을 지니고 있다. 또 같은(?같은 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방금 전 나와 지금 내가 같을까? 지금 나와 조금 뒤 내가 같을까? 나는 다른 나들로 구성되어 있는 나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으니, 그래도 여기서는 '나'라는 추상적인 몸을 이야기 하자) 몸이라도 다를 수밖에 없다. 시시각각 다른 존재들로 구성된 몸, 그것이 바로 우리 몸 아닌가.

 

그렇다면 사람은 늘 다른 존재들로 구성된 우주다. 그렇기에 연애를 할 때는 우주와 우주의 만남이 된다. 자신을 닫아버리면 만남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 자족적인 존재는 없다. 그런 존재는 썩어들어가기 시작한다. 부패한다. 하여 부패하지 않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다른 존재와 소통해야 한다. 만나야 한다. 연애가 시작된다.

 

연애가 시작되면 자신을 열 수밖에 없다. 자신의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연다. 모험이다. 전존재를 건 비약. 그것이 연애다. 이렇게 연애를 시작하면 늘 만나던 상대에게서 같은 모습만 보지 않는다. 만날 때마다 다른 모습을 발견한다. 새로움의 발견. 그것의 지속. 이것이 연애다. 새로움이 발견되지 않는 연애, 파탄난다.

 

읽기는 그래서 연애다. 자신의 전존재를 걸되 늘 새로움을 찾아낸다. 이런 모험은 즐거울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이 하는 행위가 아니라 좋아서 자발적으로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읽기가 그렇다. 이런 읽기에는 반드시 쓰기가 따른다.

 

연애를 하다 보면 결혼을 생각하게 된다. 함께 살고 싶어진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싶어진다. 무언가 새로운 존재를 만나고 싶어지는 것이다.

 

읽기에서 쓰기, 연애에서 결혼, 그리고 출산. 이렇게 비유해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출산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다른 즐거움을 만들어낼 수 있다. 아이가 아니더라도 함께 생산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가 그렇다는 얘기다. 읽기와 쓰기가 이렇게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것)

 

그렇다. 이 책을 읽다보면 읽고 싶어진다. 그리고 쓰고 싶어진다. 그냥 쓰는 것이 아니라 잘 쓰고 싶어진다. 잘 쓰기 위해서 더 읽고 싶어지고, 더 공부하고 싶어진다. 그런 즐거움이 이 책에 너무도 잘 드러나 있다.

 

처음부터 읽기, 쓰기의 즐거움이 글에서 뚝뚝 떨어진다. 아, 이 사람은 이렇게 읽기와 쓰기를 좋아하는구나, 정말 즐기고 있구나, 그런 즐거움을 우리와 나누려고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연애를 하면 사람들 표정이 밝아진다. 너무 좋아 보인다. 잘 읽고 잘 쓰는 사람, 인생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우리는 잘 살기 위해서 읽어야 하고 써야 한다. 그냥 취미가 아니다. 삶이다.

 

그러니 읽고 쓴다는 것은 거룩한 일이자 통쾌한 일이다.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길이다. 읽기와 쓰기에 관한 책. 책 내용에 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냥 읽어보면 안다. 읽기와 쓰기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또 삶을 풍요롭게 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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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0-01-06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바로 쓰기 위해서 읽는 타입인데, 저랑 똑같은 생각을 가진 작가네요. 읽기를 연애와 결혼으로 비유하다니 신선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kinye91 2020-01-07 08:2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오래 된 시집을 읽다. 1989년에 나온 시집이니 벌써 30년 전이다. (처음은 1989년에 나왔지만 내가 읽은 시집은 1996년에 인쇄된 10쇄본이다. 많이 찍어낸 것을 보면 꾸준히 읽혔다는 얘기다)

 

  30년. 강산이 세 번 바뀐다는 그 긴 세월. 그러나 시는 30년 정도는 거뜬히 버텨야 한다. 30년도 못 버티는 시가 어떻게 우리 곁에 살아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황조가나 서동요 같은 아주 오래 된 시가 지금도 우리 곁에 있는데, 겨우 30년이라니... 윤동주 시나 김소월 시도, 또 육사의 시도, 백석의 시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데...

 

  그런데 30년 전 시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을까? 아주 오래 전 시는 기억하고 있는데, 또 60-70년대 시 중에 몇은 기억하고 있는데, 80년대 후반부터 나온 시들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그렇다.

 

시하고 멀어진 생활을 하기도 했고, 시를 읽으면서도 마음이 아니라 머리로 읽은 경우가 많아서, 기억력이 떨어지면서 시가 마음이 아니라 머리에서부터 먼저 사라진 이유도 있을 것이다.

 

또 시들이 너무 어려워졌다는, 도무지 시인들의 잠꼬대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내 삶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시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가 삶에서 멀어지게 된 것이 꼭 독자 때문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최승자의 세번째 시집을 읽으면서 다시 30년 전에 나온 이 시집을 읽으며 시인은(또는 시는) 어떠해야 하나를 생각한다.

 

시인은 '詩 혹은 길 닦기'라는 시에서 시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시로 이야기하는 시론(시인론)이라고 할 수 있다. 

 

  詩 혹은 길 닦기

 

그래, 나는 용감하게,

또 꺾일지도 모를 그런 생각에 도달한다.

詩는 그나마 길이다.

아직 열리지 않은,

내가 닦아나가야 할 길이다.

아니 길 닦기이다.

내가 닦아나가 다른 길들과

만나야 할 길 닦기이다.

 

길을 만들며,

길의 흔적을 남기며,

이 길이 다른 누구의 길과 만나길 바라며,

이 길이 너무나 멀리

혼자 나가는 길이 아니길 바라며,

누군가 섭섭지 않을 만큼만

가까이 따라와주길 바라며.

 

최승자, 기억의 집. 문학과지성사. 1996년 초판 10쇄. 13쪽.

 

이게 바로 시다. 또 시인이다. 결코 혼자 가서는 안 된다. 시는 만나야 한다. 누군가 따라오게 해야 한다. 그래야 시가 계속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런 시들, 계속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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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인권 에세이 - 구정화 교수가 들려주는 살아 있는 인권 이야기 해냄 청소년 에세이 시리즈
구정화 지음 / 해냄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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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인간이 지닌 권리라는 의미일텐데, 인권이란 말을 쓸 때는 이상하게도 인간이 지녀야 할 권리라는 아직은 실현되지 않은 권리라는 뜻이란 생각이 든다.

 

인권 보장이라든지, 인권 실현이라든지 여전히 인권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어떤 지점까지 가는 길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소년들에게 인권은 여전히 미지의 권리이다. 인권, 인권 하지만, 인권은 도처에서 유린되고 있다.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이런 상태에 처해 있는 청소년들에게 인권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는 책이 나왔다. 청소년들이 누려야 할 인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누려야 할 인권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고.

 

자, 인권이란 개념에는 청소년, 어른, 남자, 여자 또 그밖의 다른 사람들에게 다르게 쓰인다는 의미는 없다. 인권은 보편적이다. 누구에게나 통용된다. 그러니 학교에서 학생 인권과 교권이 충돌한다는 말은 옳지 않은 것이다.

 

학생 인권이 보장되고 실현된다면 교권과 충돌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인권은 내 권리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 권리만큼이나 다른 사람도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나와 다른 사람이 동등하다는 인식과 실천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교실 밖 인권 교과서를 표방하는 이 책은 단지 청소년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인권의 전반적인 면을 모두 다루고 있다.

 

교과서에서 다루기 힘들었던 것을 조목조목 정리하여 생각해 보게 하고 있다. 인권 감수성을 키운다고 하는데... 정말로 필요한 일이다.

 

인권은 알면 알수록 좋기 때문에, 자꾸 이야기 해야 한다. 하여 이 책은 인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1장과 청소년이 지녀야 할 권리를 이야기하는 2장, 사회 이슈로 살펴 보는 인권을 다루는 3장, 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권 전반에 대해서 쉽게 설명하고 있으며,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 청소년들이 토론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여기에 장이 끝날 때 부록으로 세계인권선언과 UN아동권리협약, 우리나라 헌법, 마르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 등을 실어 놓아 인권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도 살펴볼 수 있게 하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권은 완성형이 될 수 없다. 이미 완성형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바로 인권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것, 그래서 늘 살펴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인권이다.

 

이렇게 인권은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나라는 자아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 우리로 나아가는 통로를 마련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권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인권은 청소년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권은 우리 모두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인권에 대해서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 어쩌면 인권 감수성을 키우는 교과서는 이런 책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의 삶일지도 모른다. 우리들 삶을 통해서 인권 감수성을 키우고, 인권이 침해받지 않도록, 또 인권을 침해하지 않도록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

 

인권은 일회성이 아니다. 삶을 통해 내내 생각하고 고민하고 또 반성하고 실천해야 할 우리 삶의 지침이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과정 속에 있는 실천, 그것이 인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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