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예술가의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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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스 읽기 두 번째.

 

이번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썼다고 알려져 있는 소설이다. 소설이라고 하지만 자전적 성격이 강하다고 해야겠다. 성장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도 좋고.

 

성장소설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젊은 시절까지만 이야기하고 있다. 더블린을 떠나려고 하는 장면에서 끝나고 있는데... 시간 순서대로 사건이 전개되면 좋겠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시간의 흐름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중간중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자신의 의식을 가감없이 서술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의식의 흐름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조이스 소설이 읽기 어려운지도 모르겠다. 순간순간 생각나는 장면으로 넘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읽기에 그다지 어렵지 않다. 먼저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는 순간, 읽기에 지장을 받는지도 모른다.

 

아일랜드라는 상황에서 아일랜드라는 민족주의를 벗어난 사람으로 조이스를 평가한다면, 이 소설에서도 아일랜드 민족주의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거기에 완전히 동조하지 못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스티브 디덜러스. 디덜러스라는 성이 특이하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이달로스를 영어식으로 변형한 성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다이달로스가 누구인가? 세상에 만들지 못할 것이 없는 장인 아닌가. 즉, 창조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인공의 성을 디덜러스로 한 것은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설에서는 민족주의와 더불어 종교와 교육이 성장의 주요인으로 등장한다. 당연히 성장소설이기 때문에 배움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자각하는 상태, 그래서 자신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 과정, 이것이 바로 성장소설이고, 이 성장소설에서는 도움을 주는 조력자나 또는 환경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이 소설도 예외는 아니다. 아일랜드 민족주의가 뿌리 깊에 박혀 있는 가족과 주변 분위기에서 그것을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스티븐과 여기에 그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는 예수회가 등장한다. 스티븐이 예수회 소속 학교에 다니기 때문이고, 그런 교육 속에서 한때 성직자가 되고자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학교 교육의 폐쇄성, 폭력성을 이 소설에서도 만날 수 있는데, 어린 시절 다녔던 학교에서 받게 되는 체벌, 그 다음에 만나게 되는 지옥에 대한 장광설... 꼭, 체벌 다음에 벌점제로 학생들을 통제하는 우리나라 교육현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절대적 권위를 휘두르는 교사들, 하지만 그에 순종하지 않는 학생들... 에고, 참)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은 성직자가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자유, 그가 추구하는 것은 그러한 인간의 자유이기 때문에 성직으로의 길을 포기한다. 그는 대학 생활 때 이미 작가로 친구들에게 인정을 받는다. 그렇게 자기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 이 소설에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을 읽다보면 제임스 조이스라는 사람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된다. 그가 가톨릭 교육을 많이 받았으며, 아일랜드 민족주의에 둘러싸여 있었다는 것, 그럼에도 그러한 환경에 빠지지 않고 자기 길을 찾아가게 되는 과정을 만나게 된다.

 

제임스 조이스라는 작가가 작가로 서기까지, 어린시절부터 청년시절까지를 배경으로 쓴 소설. 조이스를 알기 위해 비록 소설이지만 이 작품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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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가운 책이다.

 

  올해는 발간이 안 되나 했는데, 2019년 여름호까지 나오고 잠시 숨 고르기를 한 다음에 겨울호가 나왔다.

 

  열매를 맺는 가을에 삶창 역시 열매를 맺기 위해 시간을 필요로 했나 보다.

 

  비싼 열매가 아니더라도 열매들은 모두가 소중하다. 그 열매를 맺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얼마나 많은 기다림을 거쳐 왔겠는가.

 

  그야말로 온 힘을 다해 밀어올려 열매에 맺히게 한 것, 그 결과가 바로 열매다.

 

  삶창도 마찬가지다. 주도층이라고 할 수 없는, 주류가 되어야 하나 결코 주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 열매를 맺는 책이다.

 

그들의 이야기가 결실을 맺어 책으로 나오는 것. 그것이 바로 삶창이다. 그래서 삶창은 숨 고르기를 마치고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반가운 일일 수밖에 없다.

 

실리는 글들의 내용이 약간은 달라졌지만, 그것은 당연한 일. 어떻게 똑같은 내용들만 실을 수 있겠는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또 사람들에 따라 내용은 달라져야 한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살아가는 이야기, 우리들에게 삶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이번 표지만 해도 그렇다. 하늘을 향해 지붕 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 그 사람 손에 있는 빛과 하늘에 있는 빛.

 

지상과 천상이 조화를 이루는, 우리는 그런 삶을 추구한다. 그렇게 이번호에서도 삶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 글들이 실려 있다.

 

특이하게도 차례가 잡지의 속에 있지 않고 맨 뒷표지에 있다. 앞과 뒤가 하나가 되고 있는, 어쩌면 앞이 뒤가 되고, 뒤가 앞이 되는 삶창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동, 삶이 보이는 창이 만난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 시, 소설로 구성되어 있는데, 쉬다가 나와서 그런지 대담에서 편집인이 말하고 방행인 듣다란 꼭지가 있다.

 

이렇게 삶창은 다시 우리 곁에서 열매를 맺었다. 이 열매에서 많은 씨앗들이 나오고, 그 씨앗들이 또 자라서 열매를 맺는 그런 과정을 거치리라 믿는다.

 

앞으로도 삶창에서 '살아가는 이야기'와 같은 꼭지, 정말 우리 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으면 한다. 삶창이 계속 우리 곁에서 열매 맺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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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사람들 창비교양문고 32
제임스 조이스 지음, 김정환 외 옮김 / 창비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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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주 오래 전에 범우사에서 나온 소설 '율리시즈'를 사놓고,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책꽂이 어디엔가 꽂혀 있다가 자꾸 밀려밀려 이제는 어디에 있는지 관심도 가지지 않은 소설이 되고 말았다.

 

이야기는 엄청 들었는데, 읽어야 한다는 소리를 계속 들었는데, 막상 읽으려니 너무 어렵다는 생각. 지레 포기하게 만든 소설. 대충 이야기만 듣고, 다른 책에 실려 있는 해설만, 그것도 아주 짤막하게 쓴 글만 읽고 만 소설인데...

 

제임스 조이스는 언젠가 읽어야지 하고 미뤄둔 작가. 그러다 어떤 책을 읽다 조이스 소설을 읽으려면 먼저 '더블린 사람들'부터 읽으라고. 그 소설은 다른 소설에 비해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써 놓은 글을 발견했다. 그래 이거야. '더블린 사람들'부터 읽어야지. 그런데 이 책을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데...

 

기억을 되살려 보니 도서관에서 지나쳐 가면서 본 적이 있다. 오래 전에 번역된, 창비에서 나온 소설. 문고본 크기로 나온 소설을 본 적이 있어, 마침 시간도 나고, 모처럼 여유 있는 시간이 있을 때 제임스 소설을 읽자 하고 도서관에서 가서 빌려온 책 두 권.

 

'더블린 사람들(창비)'과 '젊은 예술가의 초상(민음사)'

 

'더블린 사람들'부터 읽기 시작. 그래, 어렵지 않다. 뭐, 어차피 번역으로 읽는 건데,조이스가 쓰는 영어의 오묘한 맛을 알 수는 없지만, 번역본으로 전체적인 사건과 인물, 배경을 파악하는데는 지장이 없다.

 

총 15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고, 이 소설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겹치지 않는다. 아마도 더블린이라는 한 장소에 살고 있지만, 다양한 사람들을 소설을 통해서 등장시키고 있다. 이들이 겪는 일, 그리고 이들이 생각 등을 조이스가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형식의 소설을 우리나라에서 찾으면 어떤 소설이 있을까 생각해 보니, 이문구가 쓴 "우리 동네"나 양귀자가 쓴 "원미동 사람들"이 떠올랐다. 한 장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겪는 일들을 통해 우리들 삶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

 

조이스가 쓴 '더블린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다. 아일랜드라는 나라,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라, 그래서 더블린 사람들은 양가적인 감정을 지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한때는 번성했는지 어땠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영국의 변방 도시다.

 

런던이라는 곳에 비하면 더블린은 퇴락해 가는 옛도시에 불과하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자부심을 지니고 있더라도 이들은 런던에 피해의식을, 열등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퇴락해 가는 도시답게 사람들의 삶도 미래지향적이라기보다는 과거지향적(특히 '죽은 사람들'이라는 소설에 잘 나타나 있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에게는 밝은 미래가 아니라 힘든 현실이 더 바싹 다가와 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소설이 어두침침하지 않다. 우울하지 않다. 무언가 밝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이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없는데도 그들이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단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라도 사람들은 살아간다. 그것도 웃으면서 살아간다. 왜 너는 힘든데 힘든 모습을 보이지 않냐고 하는 것은 폭력이다. 자신의 환경에서 그것에 맞게 살아가면서 거기서 행복을 찾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이런 인간의 모습이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에 잘 나와 있다. 이문구나 양귀자의 소설을 보라. 이들 역시 몰락해 가는 농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위성도시라고 하는 소도시에서 아웅다웅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 역시 환경이 좋지 않다고 늘 찡그리고 살지 않는다. 그들의 삶에도 행복이, 웃음이, 즐거움이 있다.

 

'더블린 사람들'이란 소설도 마찬가지다. 퇴락해 가는 도시 더불린에서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나오지만, 이들은 그 환경에서도 나름 잘 살아간다. 바로 이것이다. 이게 삶이다. 소설은 이렇게 우리들 삶을 보여준다.

 

조이스가 아일랜드를 떠나 세계인으로 살고자 했다고, 편협하게 아일랜드 민족주의를 고수하지 않았다고, 오히려 그것을 비판했다고, 더블린 사람들은 그런 그의 사상이 잘 드러나고 있다고 하는 해설도 있다는데... 물론 그런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아일랜드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비록 그것이 퇴락해가고, 사라져가야 할 것이지만, 여전히 더블린 사람들에게 남아 있음을, 그럼에도 새로운 세대들이 성장해 가고 있음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에 실린, 아마도 이 소설집에서 가장 긴 소설인 '죽은 사람들'에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게이브리얼의 연설 가운데 한 토막이 이를 말해준다.

 

'새로운 세대가 우리들 한가운데서 자라나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세대들입니다. 그들은 이 새로운 사상에 대해 진지하며 열광적이고, 그들의 열정은 잘못된 방향일 때조차도 대체로는 진지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회의적이고, 또 이렇게 표현해도 된다면, 사유로 고통받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262쪽)

 

그러면서 그는 '저는 과거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겠습니다.'(263쪽)고 말한다. 그렇게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야 함을, 더블린 사람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조이스 소설의 첫걸음, '더블린 사람들' 그래,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조이스가 난해하다면, 우리나라에서도 이상이라는 난해하기로 유명한 소설가가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우리는 이상 소설을 배우고 읽는다. 조이스도 마찬가지다. 영국에서 중요 작가로 그의 작품을 배우고 읽는다고 하는데...

 

선입견을 버리고 그냥 소설로 읽으면 된다. 그렇게 읽을 시도를 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어쩌면 제임스 조이스라는 작가에 대해서 두려움을 조금은 떨쳐내게 한 소설집이 이 '더블린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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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둘리 2020-01-10 0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려울 것 같아, 요즘엔 읽고 고민할 여유가 없으니 나중에 읽어야지..이런 식으로 사놓고 읽지 않은 책이 도대체 몇 권인지....kinye91님의 글을 보고 새삼 생각하게 되네요..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kinye91 2020-01-10 09: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참 많아요. 그래도 언젠간 읽겠지 하는 희망을 지니고 있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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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야말로 충격이다. 이런 시를 읽으며 충격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2005년. 소위 민주 정부가 두번째로 들어서 있을 때. 그동안 민주주의를 쟁취해야 한다는 목표 아래 감춰져 있던 일들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다.

 

  형식적 민주주의 다음에는 실질적 민주주의. 세상은 그렇게 순차적으로 가지 않는다. 특히 정치는 직진하지 않는다. 정치는 오히려 후진을 더 좋아한다.

 

  과거가 더 좋은 정치인들이 많으므로. 마찬가지로 형식적 민주주의라도 쟁취하기 위해서 그동안 감싸놓았던 일들 역시 그대로 묻어버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들의 치부를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으므로. 또 자신이 윤리적으로도 우위에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하므로.

 

이때 그런 치부를 보여주는,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 바로 시인이다. '괴물'이란 시로 문단에 파란을 일으킨, 문단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린 최영미 시인이 쓴 "돼지들에게"란 시집을 알라딘 중고로 구했다. 우선 제목이 자극적이다. 우리 사회에서 '돼지'란 결코 좋은 의미로 쓰지 않기 때문이다.

 

욕심, 더러움, 추함 등을 대표하는 동물로 언급되는데, 사람에게 "야, 이 돼지야!"라고 하면 넌 더러운 욕심쟁이야 라는 의미로 쓰니, 돼지들에게란 제목은 우리 사회에서 이미 한 자리 잡고 있는 사람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들을 무시한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시와 시인을 분리해야 한다고, 시는 시일 뿐이라고 아무리 강변해도 시를 읽으며 시인이 살아온 삶을 무시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시에서 사실을 찾으려고 한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도 그렇다.

 

시에 표현된 낱말들을 통해 특정 사람을 연상하기도 한다. 시에서 특정 사람이 명확하게 떠오른다는 것은 표현을 잘한 것일까? 그것은 비유도, 상징도 아니다. 그냥 직설적으로 내뱉는 말이다. 그래서 충격이었다.

 

넌, 돼지야! 인정해!!! 라는 외침. 그런데 시에서 말하는 '너'를 그렇게 표현한 것에 반감을 지닐 수밖에 없다. 시인은 좀더 다른 표현을 쓸 수 없었을까? 이 점에서 불편해졌다. (돼지의 변신. 18-19쪽)

 

다른 자료들을 찾아보니, 시인은 시는 시일 뿐이라고. 결코 특정한 누군가를 지칭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래, 시에서 표현된 것은 그러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일반적인 것, 그러함 직한 것을 뽑아내 표현하는 것이겠지.

 

돼지들로 상징되는 부패한 사람, 위선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 하고, 또 보지 못하고 있으니 그들에게 당신들은 이런 모습을 지니고 있어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 다만 시를 읽다보면 아무런 거름망도 없이 특정 사람이 떠오르니, 그것은 좀 표현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적어도 시에서는 한번 거른 표현이었으면,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시라면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이 시로 인해 최영미 시인이 고소를 당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요즘 같으면 아마 명예훼손으로 소송에 휘말렸을지도 모르는데... 소송 천국, 대한민국) 

 

하지만 이 땅의 돼지들에게 너희들은 돼지야 라고 말해주는, 돼지들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는 시들은 의미가 있다.

 

돼지 사회에만 있으면 자신이 돼지인지 모르고, 여우 사회에만 있으면 자신이 여우인지 모른다. 그들에게 다른 존재도 있음을 알려주는 역할, 최영미 시인이 하고 있다.

 

형식적 민주주의 이후 실질적 민주주의로 가야 하는 때, 시인의 시들은 남들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비춰보게도 한다. 그런 역할을 하는 시들이다. 바로 이 시. 나는 얼마나 이 시에서 벗어나 있는가 생각해 본다.

 

 돼지의 본질

 

그는 자신이 돼지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스스로 훌륭한 양의 모범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신분이 높고 고상한 돼지일수록 이런 착각을 잘한다.

 

그는 진주를 한번 보고 싶었을 뿐,

두번 세번 보고 싶었을 뿐……

만질 생각은 없었다고

해칠 의도는 더군다나 없었다고

자신은 오히려 진주를 보호하려 왔다고……

 

그러나 그는 결국 돼지가 된다.

그들은 모두 돼지가 되었다.

 

최영미, 돼지들에게. 실천문학사. 2005년 초판.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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