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가 혼자에게 (Iceland Edition) - 10만 부 기념 특별 한정판
이병률 지음 / 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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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산문집이다. 두번째로 읽은.

특별하다기보다는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들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혼자인 자신을 느끼는 것, 참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혼자를 느끼기 위해서 여행을 가고, 여행을 가서 다시 혼자인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함께 해도 좋지만 혼자여도 좋다.

사람은 홀로 와서 함께 살다 홀로 가는 것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마치 혼자가 아닌 것처럼 늘 누구와 함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간다면 자신 깊숙히 숨어 있는 내면을 제대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함께 있는 것, 자신의 외면을 확장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내면을 감추는 일일지도 모르고.

남이 원하는 내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 그것이 혼자가 아닌 함께일 때 우리가 쉽게 빠지는 모습이기도 할테고.

이 산문집을 읽으며 조금은 차분해졌다는 느낌을 갖는다.

책을 읽을 때도 혼자니까. 예전 책읽기는 낭송이었고, 함께 읽기였다면, 지금은 주로 혼자 읽기가 아닌가. 속으로 읽는 묵독이 대세인 시대.

그럼에도 다시 함께 읽기가 나타나고 있지만, 함께 읽어도 결국 받아들이는 것은 혼자일 수밖에 없다.

혼자가 혼자에게 하는 말, 그것이 읽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읽기는 그래서 홀로 떠나는 여행, 그런 여행 중에 누군가를 만나기도 하지만 결국은 혼자일 수밖에 없는 그런 여행.

책읽기, 삶읽기 결국 마찬가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이 산문집 읽기다.

제목들이 하나하나 무슨 아포리즘(경구)같다.

제목만으로도 혼자, 무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오히려 글이, 사진이 제목의 무한성을 제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제목만으로 먼저 혼자 속으로 들어가보자.

이때 들어가는 혼자는 유한이 아니라 무한이다.

그냥 눈에 들어오는 제목만 몇 개 나열해 본다.

 

나는 능선을 오르는 것이 한 사람을 넘는 것만 같다

우리에겐 필요한 순간에 길을 바꿀 능력이 있다

의자에서 만났다가 의자에서 헤어진다

암호명은 , 시인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말할 때도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이병률이 어떻게 이 제목으로 글을 썼는지 읽기 전에 이 제목으로 자신의 생각을 묻는 것.

혼자, 속으로 이 제목에 대해서 곰곰 생각해 보는 것.

그 다음, 혼자에서 함께로, 이병률의 글을 읽는 것.

다시, 제목으로 돌아와 혼자 또 생각해 볼 것.

그런 읽기.

글자들 속에 들어 있는 너무도 많은 의미들을 다시 만들어내는 일.

이병률 산문집 읽기다.

물론 그의 산문집에는 사진도 많다.

사진을 보면서 여러 생각을 하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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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한 사진의 쓸모 - 카메라 뒤에 숨어 살핀 거리와 사람
정기훈 지음 / 북콤마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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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얽힌 이야기가 실린 책이다. 그런데 사진이 화려하지 않다.  눈에 확 들어오는 사진도 아니다. 그런데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무언가 찡하는 마음이 된다.

 

쉽게 눈에 띄지 않지만 우리 주변에 많이 있는 일들, 그러한 일들을 사진으로, 글로 상기시켜 주고 있다.

 

소심하다는 표현을 제목에 썼는데, 그것은 바로 인위적이라기보다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다가 포착한 사진이라서 그렇다. 가령 시위를 하면 시위를 하는 중심적인 장면을 찍은 것이 아니라 그 시위 장면에서도 우리가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부분을 찍었다.

 

사진을 찍은 정기훈은 그래서 사진을 찍히는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어떤 자세를 취할지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마냥 기다린다. 자신이 생각하는 장면이 나올 때까지. 나오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힘들게 지내는 그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고 그들의 있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진가. 그들에게 애정을 지니고 사진을 찍는 사람.

 

그래서 표지에 '카메라 뒤에 숨어 살핀 거리와 사람'이라는 표현이 있다. 사진을 찍은 사람이 돋보이지 않고 또 쉽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살펴야 알 수 있는 것들을 사진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 글도 그렇다.

 

사진에 얽힌 글들이 우리 사회 어두운 면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동안 관심없이 지내왔던 시간들을 반성하는 읽기이기도 했다.

 

사진가는 주로 우리 사회에서 약자에 속하는 사람들을 찍었다.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속한 장소를 함께 찍었다. 그 장소에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크게 부각되는 것이 아니라 작게, 마치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드러내는 것만큼 그렇게 표현되고 있다.

 

이들이 크게 표현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이 사진책 속에 나온 것처럼 힘들게 지내는 그런 모습들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소심한 사진이 이런 사회적 약자들이 밝고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많이 나오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이 책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드러나지 않은 모습들,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우리가 지나치고 있던 그런 일들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이것이 아마도 '소심한 사진의 쓸모'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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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선정 도서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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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작은 제목이 책 표지에 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환자에게 과연 의학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성찰을 담고 있는 책이다.

 

의학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기술이다. 그런데 살릴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나이가 들어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사람들, 불치병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현대의학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 있다.

 

연명치료라는 말이 먼저 생각나는데, 죽지도 못하게 하는 현대의학기술. 과연 그런 기술로 중환자실에 들어가 있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의사인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그런 삶의 연장이 별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히려 죽음을 받아들이게 도와주는 의료행위를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주장을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환자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불확실한 미래가 아니라 현재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고 어떤 상태에 놓이고 싶지 않은지를 대화를 통해서 서로 확인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온갖 기기들로 연명하는 치료가 아니라 환자의 삶이 최후까지 인간다울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의학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요양원이 왜 문제인지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데, 지금 우리나라도 요양원에 들어가면 곧 죽을 거라는 인식이 있는데, 그 이유는 요양원에서는 개인의 자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요양원의 규칙대로 요양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말에 따라서만 행동해야 한다. 인간은 자율적 존재인데, 그 자율성을 치료라는 목적으로 박탈당한 사람들이 지니는 상실감은 심리적인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문제에까지 영향을 준다고 한다.

 

요양원에 들어가면 급속도로 상태가 더 악화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다시는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요양원은 그동안 살아온 장소에서 그 사람을 떼어내 전혀 다른 자유가, 개인의 사생활이 전혀 보장이 되지 않은 공간으로 옮겨놓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요양원보다는 나은 곳이 미국에서는 어시스티드 리빙 시설이라는 곳이다. 사람들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곳. 그러나 지금은 많이 상업화되어 요양원과 비슷해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곳은 사람들이 살던 방식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장소들이 많이 생겨나고 호스티스 케어라는 이름으로 집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의료행위도 늘어나고 있다고 하는데...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호스티스 케어라고 하면 치료를 중단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시키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호스피스 케어는 그 사람이 원하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돕는 의료활동을 하면서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니 의료 행위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해오던 생활, 또는 자신이 꼭 해야만 한다고 하는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수술한 다음에 병실에 누워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끝을 알고 그것을 인간답게 마무리할 수 있게 해주는 의료행위라는 것. 이점을 새로 알게 되었고...

 

하지만... 만약 가난한 사람이라면? 이 책의 저자는 의사이고, 부모도 의사였기에 또 이 책의 저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환자들도 그런 의료비를 부담할 수 있었기에 호스피스 케어가 가능했다면,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란 의문이 들었다. 가난한 사람도 자신이 이런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아직 우리나라 의료제도는 그렇지 못함에 씁씁한 마음이 생기고.

 

죽음이라는 끝을 향해 어떻게 죽을 것인가? 그야말로 웰빙(well-being)이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듯이, 이 책 제목은 웰 모탈(well mortal)인데, 이를 웰다잉(well-dying)이라고 해도 좋겠다. 잘 죽는 것은 잘 사는 것만큼 중요하다.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죽는 사람의 역할'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는가에 따라 남은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자신이 치료한 환자들의 사례와 자기 아버지, 특히 의사였던 아버지가 종양이 생기고 그것을 치료하고 죽어가는 과정 속에서 잘 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인간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책이다.

 

사실, 병원 중환자실에 들어가 보라. 온갖 기기들을 온몸에 꽂고 누워 있는, 의식이 있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중환자실에 오기 전까지 어떤 일을 했고, 또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자신의 최후를 어떻게 맞고 싶은지 중환자실에서는 알 수가 없다. 오로지 생명 연장만을 추구할 뿐이다.

 

그러나 시각을 바꿔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발휘한다면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에 변화를 줄 수 있다. 그래 적어도 죽을 때 함께 해온 사람들에게 한 마디는 해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동안 함께 해서 너무 행복했다. 나머지 인생들을 잘살기 바란다 등등, 감사와 축복의 말을 해줄 수 있는 종말. 그것이 고종명 아니겠는가.

 

그런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미리미리 준비해야 함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많은 대화가 있어야 함을, 그리고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밝혀야 함을 이 책에서는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의료계도 점차 이 책에서 주장한 방향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지 않나 하고, 개인들도 그렇게 죽음을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일이라고 생각해야 할 때임을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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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 미국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허먼 멜빌 외 지음, 한기욱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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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많이도 들어본 제목이다. 여러 곳에서 필경사 바틀비가 하는 말이 인용되곤 했는데...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어떤 때는 노동자들의 주체 의식을 드러낸 말로 이 말을 인용하곤 했는데,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에서 자기 주장을 명확하게 하는 대사로 말이다. 그런데 읽어보니,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바틀비가 왜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지 소설 속에서는 별다른 개연성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바틀비는 자기가 하고 싶지 않아서 그 말을 하고 일을 거부할 뿐이다. 어떤 설명도 없다. 합리성도 없고.

 

그가 그렇게 버티자 변호사가 견디지 못하고 사무실을 옮기지만 바틀비는 그 자리를 고수하다가 끌려가고 만다. 왜 그랬을까? 어쩌면 바틀비는 현대 노동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부터 '필경사 바틀비'를 읽고 싶었는데, 읽고 난 뒤에는 이상하게도 그리 큰 울림이 남지 않았다.

 

바틀비를 이 단편집 속에 있는 헨리 제임스의 소설 '진품'의 주인공들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변하는 세상 속에서 과거에 머물러 있는 인간.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인간. 자신들을 귀족의 모습을 담은 진품이라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림에서는 그러한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사람들. '진품' 속 인물인 모나크 부부는 스스로를 '진품'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진품이 아니라 골동품에 불과하다. 그것도 현대에 보존할 가치가 없는 그러한.

 

여러 소설이 실려 있는데, 당시 미국의 상황을 짐작케 하는 소설들도 있고, 새로운 기법을 보여주는 소설들 도 있다. 총 11편의 소설이 시대 순으로 실려 있는데, 미국 단편 소설들을 읽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그 중에 샬롯 퍼킨스 길먼이 쓴 '누런 벽지'는 현대 페미니즘을 미리 보여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성이 자기의 의사를 인정받지 못하고 남들에 의해 갇혀 지내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른 사람을 자기 관점으로 옭매이는 것, 지금도 자주 일어나고 있는 일이긴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비극적이고 잘못된 일인지를 이 소설을 읽으면 깨달을 수 있다.

 

오래 된 소설이지만 소설을 통해서 내 관점이 아무리 좋고 올바르다고 하더라도 남에게 일률적으로 강요할 수 없음을, 그것도 주류에 속한 사람이 비주류에 속한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면 재앙적인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음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여기에 미국 흑인 노예들에 관한 백인들의 관점을 풍자적으로 표현한 창스 W. 체스넛이 쓴 '그랜디썬의 위장'도 재미있게 읽을 만하다. 백인들의 위선, 그런 위선을 반전으로 까발리는 그랜디썬이라는 흑인의 모습이 통쾌하다.

 

이렇듯 이 단편집에서는 미국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소설도,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과거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소설도 있다. 거기다 공포물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에드가 앨런 포우의 '검은 고양이'같은 작품도 있고, 처음 읽는 작품이지만 검은 고양이와 비슷하게 결말이 괴기스러운 윌리엄 포크너의 '에밀리에게 장미를'이란 소설도 만날 수 있다.

 

이 단편집에는 이밖에도 종교의 문제를 다룬 '젊은 굿맨 브라운', 표류하는 구명 보트에서 서로 돕고 지내는 네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소형 보트' 등 다양한 경향의 작품이 실려 있어서 근대 미국 단편 소설을 한번에 읽을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천천히 한 작품씩 읽어도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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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승희 시집을 읽다. 시집을 읽으며 부사(어)를 이리도 잘 쓰는 시인이 있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시 제목에도 부사들이 많이 나오는데 대표적인 시들을 골라보면 다음과 같다.

 

  '하필'이란 말

  '이미'라는 말

  '이미'와 '아직' 사이

  차라리(里)에 가서

  차라리

 

어떤 시인이 말했다는 '시는 부사어를 사랑한다'(박상천의 '통사론'이란 시에 나오는 구절)라는 말이 연상되는 그런 시들이 많은데... 시는 말을 직설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다른 말을 집어넣어 표현하는 문학이라는 생각을 이 시집을 읽으면 자연스레 하게 된다.

 

수많은 부사어들의 향연, 그것이 김승희 시의 특징이 아닌가 싶은데... 그런 점에서 부사어는 한정된 의미를 좀더 넓게 확장해 주는 역할을 하지 않을까 한다.

 

반대로 부사어는 무한한 감정을 유한하게 정리해서 보여주는 역할도 하고. 즉 부사어를 통해 유한과 무한의 세계를 반복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미'와 '아직' 사이라는 시를 통해 우리는 단어의 의미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들이 내표하고 있는 깊고 넓은 세계를 볼 수 있게 된다. 부분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은 표현들 속에 들어 있는 세계들...

 

누구에게나 시간은 그렇다오

이미와 아직 사이에 반딧불 같은 오늘이 있고

이미와 아직 사이에 캄캄한 밤의 절망이 있고

이미와 아직 사이에 내일의 불안이 있고

이미와 아직 사이에 파도치는 희망이 있고

이미와 아직 사이에 눈물 넘치는 오작교

 

김승희, '이미'와 '아직' 사이 3연. 134쪽에서) 

 

그렇다면 김승희의 시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유한한 세계에서 무한한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의 모습. 즉 땅에 발을 딛고 있지만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의 모습이다.

 

제목이 된 시를 보자.

 

  도미는 도마 위에서

 

도미가 도마 위에 올랐네

도미는 도마 위에서

에이, 인생, 다 그런 거지 뭐,

건들거리고 산 적도 있었지,

삭발한 달이 파아랗게 내려다보고 있는 도마 위

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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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는 도마 위에서 맵시를 꾸며보려고 하지만

종말에 참고문헌과 각주가 소용이 될까?

비늘을 벗기고 보면 다 피 배인 연분홍 살결

그래도

고종명에 참고문헌과 각주가 소용이 되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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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가 도미 위에서

도미가 도마 위에서

몸서리치는 눈부신 몸부림

부질없는 꼬리로

도마를 한번 탕 치고 맥없이 떨어져

보랏빛 향 그윽한 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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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 도미는 도마 위에서. 난다. 2017년. 124-125쪽

 

이 시에서 '그래도'라는 부사가 나온다. 아마 김승희 시 중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를 떠올리게 하는 시어이기도 한데, 유한한 곧 생명이 끊길 존재에게 참고문헌과 각주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참고문헌과 각주를 부사어라고 한다면, 우리 인생을 꾸며주던 다양한 삶들의 결이라면, '그래도' 유한한 존재인 우리에게 이런 참고문헌과 각주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삶이란 단순명료한 어떤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표현되고 실현되는 그 무엇이라는,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삶이 있고 그 삶은 곧 우주만큼이나 광활한 것이라는 것, 도마 위에 올라온 도미는 유한한 생을 마감하려 하지만, 그 마감 속에서도 안으로는 다양한 삶들을 쟁여 놓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 시를 통해 내 삶에 더 많은 참고문헌, 각주들을 집어넣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새해 그런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 시집 읽기. 그래 내 삶에도 다양한 '부사어'들이 덧붙여져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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