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자들 환상문학전집 8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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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귄 작품이 지닌 매력에 빠져들고 있는 중이다. 사회를 다루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사회 속에 매몰되지 않고 개인이 지닌 중요성을 드러내고 있다. 정말로 '함께 또 따로, 따로 또 함께'라는 말이 이렇게 잘 들어맞는 모습을 그린 소설가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작품이 참 매력적이다.

 

이 소설 빼앗긴 자들을 읽는 시간은 행복한 시간이었다. 일종의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는 소설이지만, 유-토피아라는 말처럼 없는 곳이 아니라 있는 곳이다. 번역을 '빼앗긴 자들'이라고 했는데, 영어 제목이 The Dispossessed로 되어 있어서 일 것이다.

 

내용으로 보면 우라스에서 아나레스로 이주한 사람들이 주인공이니 쫓겨난 사람들이 맞겠지만 소설을 읽어보면 빼앗긴 자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소유하지 않는 자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우라스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 아나레스를 얻었고, 또 아나레스에서 오도주의를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나키즘이라고 할 수 있는 '오도주의자'들이 살고 있는 세상인 아나레스에는 원칙적으로 소유를 하지 않는다. 이때 소유라는 말은 돈을 주고 사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보면 된다. 이들은 필요한 물건을 가져오면 된다. 사회가 공급할 수 있을 한도 내에서. 돈이라는 개념이 없다. 필요하면 가지면 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냥 주면 된다. 선물의 개념이라고 할까.

 

그러니 이들의 삶은 소유라기보다는 점유다. 필요할 때 점유했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주는 그런 생활방식. 그러니 소유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제목을 이해하면 소설을 더 잘 즐길 수 있다.

 

쉐벡이라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아 우라스와 아나레스라는 행성을 배경을 교차로 선택해 소설을 이끌어 간다.

 

아나레스를 떠나는 쉐벡으로부터 우라스에 도착한 쉐벡. 그리고 아나레스의 장면들은 과거 장면들이다. 우라스는 쉐벡이 겪는 현재이고. 이렇게 아나레스와 우라스가 교차하면서 시간도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면서 소설이 전개되는데... 읽어가면서 점차 쉐벡의 행동, 그리고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알아내게 된다.

 

우라스에서 착취를 없애고 자유롭게 살기 위해 저항하던 사람들에게 제공된 아나레스라는 행성. 그들은 척박한 아나레스에 정착해 살아가는데, 그런 아나레스의 삶은 아나키즘적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유는 없고 점유가 있는 그런 생활들. 그러나 이들이 추구하는 세상은 완벽하지 않다. 이게 르 귄이 지닌 장점이다. 세상에 완벽이란 닫힌 공간이다. 르 귄은 닫힌 공간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나오는 벽이라는 말과 통하기도 하는데... 인물들은 끊임없이 벽을 통과하기를 추구한다.

 

쉐벡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벽을 그는 넘어서고자 한다. 벽 안에 갇히기를 거부한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뼛속까지 오도주의자인 것이다.

 

(이 오도주의에 대해서는 아나키즘이라고 이해해도 좋다. 오도란 사람이 쓴 책을 중심으로, 그 사상을 중심으로 건설해 낸 별이 바로 아나레스고 그들을 움직이는 사상이 바로 오도주의다. 오도에 대해서는 르 귄이 쓴 다른 소설 '혁명 전날'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럼에도 오도주의자들이 모두 오도주의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일체의 권력을 부정하는 그 주의에서도 이상하게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들은 교묘한 방식으로 권력의 벽을 쌓는다.

 

이 소설에서는 사불이라는 인물이 그런 권력의 벽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데, 사불만이 아니라 주인공 쉐벡의 어머니인 룰락 역시 벽을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다. 이상적인 사회라고 생각해도 그 사회가 마냥 행복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아나레스 행성을 통해서 작가는 잘 보여주고 있다.

 

나무들이 자랄 수 없는 먼지투성이 행성. 여기서는 물질적인 풍요는 기대할 수 없다. 물도 부족하고 가뭄이 들면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이게 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나아질 것이라 믿고 견뎌낸다. 서로 일하면서 서로 격려하면서. 하지만 이 아나레스에도 힘든 일에서 빠져나가는 사람도 있고, 식량 고갈이 문제가 될 때 식량을 탈취하려는 사람도 있다. 이들 역시 갈등을 겪고 있는 것. 다만 이 갈등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드러나는 것.

 

그 자체로 자족적인 생활을 해 나가는, 그래서 기껏해야 우라스에서 오는 화물선으로만 교류를 하는 (그것도 화물선이나 우라스인들은 벽 바깥으로는 나올 수도 없다) 그런 아나레스에서 쉐벡은 우라스로 간다. 배신자라고 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것.

 

이유는 자신의 우주(물리)이론을 공유하고 싶은 것. 더 발전시켜 확정짓고 싶은 것. 그리고 우라스를 보고 싶은 것. 그가 도착한 곳은 아나레스와는 달리 식물들도 잘 자라고 각종 동물들도 있으며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는 우라스의 중심부다.

 

그는 우라스의 지배층 사이에 갇혀 지낸다. 그러다 우라스에서도 오도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만나고 그들이 무력으로 진압당할 때 함께 있으면서 테라 대사관으로 피신해 다시 아나레스로 돌아오면서 소설은 끝난다.

 

풍족함을 희생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우라스. 그들에게 아나레스는 이상향이겠지만 쉐벡은 명확히 한다. 아나레스에도 고통이 있음을... 그것을 함께 해 나가고 있음을. 그것이 진정한 오도주의임을.

 

하여 소설은 닫힌 세계가 아니라 열린 세계를 보여준다. 완결된 세계가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세계를. 그런 과정으로서의 세계를 아나레스인인 쉐벡을 통해서 소설은 잘 보여주고 있단 생각이 든다.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이 그림처럼 완결된 것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그곳에는 여전히 자유에 따른 책임이 있고, 그 책임에 대한 고통도 있음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누구나 다 똑같지 않음을.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쉐벡이 헤인 인이지만 아나레스에 내려 함께 살고자 하는 케토에게 하는 말... 그 말에 이런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지녀야 할 자세가 들어 있단 생각이 든다.

 

"아나레스에 가면, 일단 나와 함께 벽을 뚫고 걸어가면, 그러면 내 생각에 당신은 우리의 일원이 됩니다. 우리는 당신에게 책임이 있고 당신도 우리에게 첵임이 있지요. 당신은 다른 모든 사람과 같은 선택권을 지닌 아나레스 인이 되는 거예요. 하지만 그 선택권이란 안전한 것은 아니에요. 자유는 결코 그렇게 안전하지 않아요." (437쪽)

 

아나키즘을 그냥 무질서한 사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소설을 꼭 읽어볼 필요가 있다. 아나키즘 사회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이 소설만큼 잘 표현한 작품은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성과 사랑, 남녀의 역할, 일자리 배분 문제, 주거, 교육 문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타난 권력 문제,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어려움 속에 처했을 때 대응하는 여러 사람들의 모습 등등을 소설 속 아나레스를 통해 아나키즘 사회를 간접 경험할 수 있다. 무슨 주의로가 아니라 문학 속에서 생생한 삶의 모습으로 경험할 수 있으니...보통의 유토피아 소설과는 다른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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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외로움을 견디는 나이 아름다운 청소년 9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재경 옮김 / 별숲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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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귄의 소설을 읽다. 청소년 소설이다. 배경이 환상적인 세계가 아닌 바로 현실이다. 미국 중산층이라고 할 수 있는 가정에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주인공.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남들과 똑같이 살지 못하는 자신을 질책하면서 고민하는 청춘이다. 그냥 미국 고등학생처럼 차에 미치거나 여자에 미치거나 남들처럼 지내면 될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

 

평범에서 벗어났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는, 생각이 많은 주인공은 일상의 평범함을 견디지 못한다. 남들에게 이해받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그렇다고 혼자 지낼 수도 없으니 적당한 선에서 남들과 지내기도 한다.

 

소설은 첫부분에서 이런 나이 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아이들은 생각나는 대로 말한다. 아이들은 아직 배운 게 없어서 자기 생각과 다른 말을 할 줄 모른다. 그런 능력은 나중에 생긴다. 아이가 인간으로 변하기 시작할 때, 그래서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사람들은 대개 공황 상태에 빠진다. 극단에서 극단으로 치닫고 무리를 찾아 허둥지둥 돌진한다. 클럽, 팀, 동호회 등등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갑자기 남들과 똑같이 입기 시작한다. 혼자 튀지 않으려는 방편이다. (10쪽)

 

우리가 흔히 사춘기라고 말하는 질풍노도의 시기다. 자아의식이 생기는 때다. 그런데 자아의식이 생기면 오히려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려 할 텐데,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두려움 때문이다.

 

이 두려움 때문에 남들 속에 묻히려 한다. 또래 사이에서 튄 행동은 금물이다. 그냥 함께 휩쓸려 지낸다. 친구라는 이유 하나로. 아니,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소설의 주인공은 이와 반대다. 그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어울리는 흉내는 내지만 진정으로 어울리지는 못한다. 남들과 똑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미 거부하고 있다. 그렇지만 어디 세상이 그런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으로 고민하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이 오언은 분신과 같은 존재가 된다.

 

주인공인 오언의 부모님은 자식이 평범하게 살기를 바란다. 튀지 않고. 그냥 그렇게 무난하게 살기를. 오언 역시 가정에서 부모님과 대화를 거의 하지 않는다. 자신의 고민에 대해서. 이렇게 무기력하게 고민 속에서 허우적 대는 오언에게 한 사람이 다가온다.

 

나탈리다. 이미 자신의 길에 대해서 확고한 신념이 있는 아이. 이 나탈리와 어울리면서 오언은 많은 고민을 떨쳐내기도 하지만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사랑과 우정. 청소년기에 맞닥뜨리는 요소다.

 

남녀간에 육체적인 접촉이 없는 사랑이 있을 수 있을까? 미국 고등학교 남학생들은 몸을 중시한다. 대부분 여학생들과 육체적인 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오언 역시 나탈리를 사랑한다고 느낀다.

 

하지만 나탈리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고 있다. 단순한 육체적 접촉으로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접촉은 사랑의 부산물일 뿐이라는 것. 나탈리에게는 명확한 선이 있다. 이 선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오언은 방황을 하고.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들과 같은 평범함 속에 넣으려고 한다. 그러다 다시 만난 나탈리. 그 전에 나탈리와 처음 바닷가로 놀러 갔을 때 장면, 이 장면에서 깨달은 것이 나중에 오언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데 작동을 한다.

 

우리는 인생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물어봐야 소용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인생은 답이 아니니까. 인생은 문제다. 그리고 각자가 답이다. 우리 앞에 바다가 있었다. (62쪽)

 

이런 깨달음을 얻었지만 완전하진 않다. 그렇기 때문에 나탈리와 두번째로 바닷가에 간 다음에 오언은 방황을 한다. 서로가 원하는 것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오언이 스스로 결정을 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둘에 관련된 일은 함께 결정해야 하는데... 나탈리는 그 점을 명확히 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야 할 길에 대해서도 차분히, 꾸준히 준비를 하고 그 길을 가고 있다.

 

그 점을 나탈리가 출연하는, 또 나탈리가 작곡한 곡이 발표되는 발표회장에서 오언 역시 깨닫는다. 그가 흘리는 눈물. 그리고 다시 나탈리와의 만남. 여기서 오언은 결정한다. 자신이 가야 할 길에 대해서.

 

그렇다. 인생은 문제일 뿐이고 답은 자신에게 있다. 부모가 대신 답을 해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때 자신은 고립된 자신이 아니다. 함께 해야 할 사람들, 여기에는 부모 역시 포함이 된다. 아직 부모와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부모들을 재단했지만, 문제를 꺼내놓자 해결책이 마련된다.

 

시도도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모한 행위인지를 오언의 대학 입학에 관한 표현에서 알 수 있게 된다. 문제는 꺼내놓아야 해결될 수 있음도.

 

홀로가 아니라 함께. 그렇게 오언은 자신의 길을 간다. 열일곱. 외로움을 알게 되는 나이. 다른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찾아가야 할 나이. 이 외로움을 견뎌냈을 때 이제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

 

주인공이 창조해 낸 소언이라는 곳. 나탈리는 이미 오언이 그곳에 살고 있다고 한다. 혼자... 그러기에 그곳에 방문객을 받으라고 한다. 그것이 오언에게 맞는 삶이라는 것. 굳이 그들과 똑같이 살려고 하지 말라고 나탈리는 충고한다.

 

이렇게 나탈리와 오언은 자신들의 삶을 향해 나아간다. 짧은 소설이고, 외적갈등보다는 내적갈등이 더 잘 드러나 있는 소설이지만, 진지하게 자신의 앞날을 고민하는 청춘이라면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일 것 같다. 오언에게는 공감을, 나탈리에게는 부러움을 느끼고 감탄을 하면서.

 

르 귄의 대표작을 '어스시(Earthsea)' 시리즈로 꼽기도 하는데, 땅과 바다... 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오언은 바다에 가서 인생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힘을 주는 존재인 나탈리의 성이 필드다. 땅을 딛고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것. 청춘들에게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이런 낱말을 통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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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열두 방향 어슐러 K. 르 귄 걸작선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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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SF라는 말로 더 친숙한 환상소설을 쓴 작가가 어슐러 K. 르 귄이다. 해리포터 시리즈나 반지의 제왕, 오즈의 마법사, 나니아 연대기보다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서양에서는 유명한 작가다.

 

작가 검색을 하다 보니 르 귄의 '어스시' 시리즈가 꽤 유명하다고 하고, 이를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게드전기:어스시의 전설'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또 로버트 리버만 감독이 '게드전설:어스시의 마법사'라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두 영화를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이 소설이 꽤나 유명하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어스시'라고 한글로만 써놓으면 참 무슨 말인지 알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 '어스시'를 영어와 함께 표기를 하면 한눈에 들어온다. 'Eerthsea'. 한 마디로 '땅바다'다. 땅과 바다라? 우리들이 살고 있는 곳 아닌가. 결국 환상소설이라고 하지만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제목이 된 배경에서 알 수 있다.

 

대표작인 '어스시' 시리즈를 아직 읽지 못했지만, 이번에 읽은 이 작품집으로도 르 귄의 작품세계를 아는데는 충분하지 않나 하는 근거없는 자만심을 가져본다. 이 작품집이 환상소설임에 분명한데, 현실을 자꾸 되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열일곱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는데, 르 귄이 초기에 쓴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그러니 르 귄의 작품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지를 알 수 있는 작품들이고, 또 한편 한편을 빠르게 읽을 수 있어서 좋다. 이 중에 이 책을 산 결정적인 이유는 단 한 편의 소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때문이다.

 

다른 책을 읽다가 발견한 소설. 우리는 유토피아를 지향하지만, 유토피아란 말 그대로 이곳에는 없는, 또는 어디에도 없는 곳 아닌가. 오멜라스는 그런 유토피아에 대해서 아주 짧게 서술한 소설이다.

 

사람들이 행복하게 지낸다. 너무도 행복하게. 그런데 이들의 행복은 한 사람의 희생으로 이루어진다. 이 한 사람의 희생으로 다른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 자, 그런 사회가 과연 유토피아인가. 우리가 바라는 이상향인가?

 

오멜라스 사람들은 모두 한 사람의 희생에 대해서, 그것도 어린나이의 사람이 - 르 귄의 작품에는 남녀의 구별을 굳이 할 필요가 없다. 이 작품집에 실려 있는 '겨울의 왕'이라는 작품을 보면 양성인이 나온다.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 중에 가장 늦게 발표된 작품이 1974년 작품임에도 이미 다양한 성에 대해서, 어느 특정한 한 성이 지배적인 사회에 대해서 르 귄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 희생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어린사람의 희생을 막을 수가 없다. 그것이 계약이다. 자신들의 행복을 유지하는. 소설을 보자.

 

  그러나 그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물론 아이를 그 지독한 곳에서 밝은 햇살이 비치는 바깥으로 데리고 나온다면, 아이를 깨끗하게 씻기고 잘 먹이고 편안하게 해준다면 그것은 정말로 좋은 일이리라.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한다면, 당장 그날 그 순간부터 지금껏 오멜라스 사람들이 누려왔던 모든 행복과 아름다움과 즐거움은 사라지고 말게 된다. 그것이 바로 계약인 것이다. 단 한 가지 사소한 개선을 위해 오멜라스에 사는 모든 이들이 누리는 멋지고 고상한 삶을 맞바꾸어야만 한다는 것, 한 사람이 행복해질 기회를 얻기 위해 수천 명의 행복을 내던져야 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하실 골방 안에서 벌어지는 죄악을 방기하게 만드는 이유다.

  계약은  엄격하며 절대적이다. 그 아이에게는 친절한 말 한 마디조차 건네면 안 된다. (464-465쪽)

 

자, 이게 유토피아의 이면이다. 감춰진 진실이다. 모두가 행복한 사회 같지만 모두를 위한 한 사람의 희생이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멜라스 사람들이 고민하는 지점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사회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사람의 행복을 위해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면 한 사람의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가? 무슨 윤리 딜레마 문제같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이것이 바로 모든 사회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 아닌가 한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을까? '모두'라는 말에 방점을 찍으면 전체주의로 가기 쉽다. '모두'를 '다수'로 대체하고 '다수'를 위해서 '소수'는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로 치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수'가 행복한 사회니 행복한 사회라고 생각하게 된다.

 

과연 그럴까?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행복이 과연 행복일 수 있을까? 오멜라스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많은 사람들은 그냥 받아들인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몇몇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은 오멜라스를 떠난다.

 

소설은 이렇게 그들이 알지 못하는 세계로 떠나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단편소설이기 때문에 이런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으리라. 장편으로 이런 소설을 쓴다면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이 겪는 갈등들이 나오겠지만, 간략한 서술로 소설은 시작되고 끝난다.

 

나머지는 읽는 사람들 몫이다.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떠나는 오멜라스 사람들을 비겁하다고 할 것이다. 사회를 바꿔야지 도피했다고. 그것이 과연 도피일까? 한 사람을 구했다? 다른 사람들이 불행해진다. 한 사람을 구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진다? 행복을 수량으로 판단할 수가 없으니, 한 사람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그들이 지녀야 할 행복은 동등하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지금 우리 사회로 바꾸어 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삶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쉬운 길이든 어려운 길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스스로 선택을 했기에. 어떤 길이어도 그들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즉, 모두가 행복한 사회라는 말이 과연 통할 수 있는지, 거기에 대한 생각을 이 작품집 마지막에 실려 있는 '혁명 전날'이라는 소설에서 더 생각할 수 있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혁명에 가담한 '라이아'라는 인물을 통해 만족과 행복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을 수 없음을, 내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잣대로 남들의 행복을 재단해서는 안 됨을, 행복은 자신이 선택한 자유에서 나오는 것임을 표현하고 있다.

 

다시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로 와서 우리 사회를 바라보게 된다. 자, 거대한 과학기술의 시대에 그것을 거스를 수는 없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지고 할 수는 없다. 이미 세계는 너무도 멀리 와 있다. 물론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이 때 자신이 선택해야 한다. 나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여기에 더해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 혹 누군가의 희생 위에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지 살펴야 한다. 지금 내 삶을 지탱해주는 것이 오로지 내 힘만으로 될까? 누군가의 노동, 누군가의 희생 속에서 나는 지금 내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단 한 명일지라도 견딜 수 없는 오멜라스 사람들이 있는데, 단 한 명이 아니고 여러 명,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 다수의 희생 위에 우리 사회가 지탱이 되고 있다면?

 

오멜라스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복이 무엇으로 인해 지속이 되는지를 안다. 그들은 현실을 명확히 인식한다. 그 다음에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할지를 스스로 결정한다. 그렇담 우리가 할 일도 명확하다. 먼저 우리 사회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우리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체계에 대해서. 그 다음에 나는 어떻게 살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 작품집에 많은 작품이 나와 있지만,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이 인용이 되는 이유는 바로 사회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의 몫을 남겨놓고, 그 몫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기 때문에 이 소설은 좋은 소설이다.

 

그밖에도 읽으면서 좋은 소설들이 많다. 복제인간과 관련해서는 '아홉 생명'이라는 소설을, 현대인의 바쁜 일상을 나무 관점에서 쓴 '길의 방향'도 생각할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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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지니고 있던 생각을 뒤집는 말들을 만나면, 아 그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내가 얼마나 많은 고정관념 속에 살아왔는지를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다. 나란 내가 생각하는 것들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

 

  외로움, 이건 홀로 있음과 비슷한 말이라고 생각하고, 혼자 있음으로해서 외로움이 생긴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김태형의 시집 [코끼리 주파수]를 읽다가 반대로도 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디아스포라'(11쪽)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가 외로운 것은 혼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혼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외롭다? 혼자가 되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일까? 군중 속의 고독일까? 혼자가 될 수 없는 현대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외로움조차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말일까?

 

그래, 외로움을 이해받지 못함일 수도 있다. 많은 존재들이 내 주변이 있지만, 그 존재들이 그냥 주변에만 있는 것, 그것은 아무리 많은 존재들 속에 둘러싸여 있더라도 내 마음을 줄 수 있는 존재가 없기 때문에 외로울 수 있다.

 

외로움은 결국 이해받지 못함으로,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함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런 점에서 '외로운 식당'이란 시도 마찬가지다. 식당이 외로울 수가 있다. 사람들로 북적이고, 그 사람들은 모두 음식을 받아들고 있는데... 그런데도 시인은 '외로운 식당'이라고 했다. 왜? 홀로 있지 못하기 때문에, 홀로 있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존재도 자신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로운 식당

 

초행이라 길 찾기 바쁜데도

길가 음식점 간판에 눈길이 머뭅니다

뭐 좀 새로운 게 없을까 싶어 찾아든 식당

빈자리 하나 잡기도 쉽지 않군요

그 틈새에 겨우 끼어

돌솥밥 한상 기다리며 앉아 있는데

큰소리로 떠들어대는 손님들 뒤쪽으로

기러기탕 백숙 육회

이 집 특별식 메뉴가 큼지막하게 걸려 있습니다

식용으로 사육하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그렇지 기러기라니

멀건 하늘처럼 끓고 있는 탕 속에서

보글보글 날고 있는 기러기들

먼 길 떠나는 날갯짓 소리는

사람들 시종 떠들어대는

온갖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습니다

저 늙어가는 사람들이 차라리

어디 가서 조용히 불륜이라도 저질렀으면 하고

측은해집니다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기러기 한 마리씩 뜯어먹는 대신

뭔가 그리워하는 얼굴로

안타까워하는 모습들로 앉아 있으면 안되나

아까 올려다본 흐린 하늘의 기러기떼가 아니었으면

내가 외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잊을 뻔했습니다

 

김태형, 코끼리 주파수, 창비. 2011년. 98-99쪽

 

시끌벅적한 식당을 외롭다고 표현하고 있다. 차라리 조용한 상태로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기대하고 있다. 그렇게 홀로 바라본 하늘의 기러기로 인해 사람들 속에 있지만 자신은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우리 모두는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과학기술이 더욱 발전해 갈수록 우리는 더더 외로운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을 스마트폰 시대에 더 잘 알 수 있지 않은가.

 

육체는 비록 혼자만의 공간에 있을지 몰라도 전자세계를 통해 끊임없이 밖으로 나가고 있는 상태. 전혀 홀로일 수가 없는 상태. 따라서 외롭다고 하지만 그것은 외로움이 아닌 상태.

 

초연결상태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째 우리는 외로움마저 잃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시를 읽으며 생각하는데... 이 시를 통해 뭔가를 그리워하는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생활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아주 오래 전에 학교 다닐 때 들었던 책이름 '군중 속의 고독'. 이것을 이처럼 잘 표현한 시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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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
임헌영 지음 / 소명출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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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거대 담론보다는 미시 담론이, 그래서 미시사라고도 하고 생활사라고도 하는 책들이 많이 나왔다. 연구 방향도 거대한 흐름을 추적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생활을 중심으로 하는 연구로도 많이 흘렀고.

 

그렇다고 미시사로만 역사가 구성되지 않는다. 이런 미시사들이 모여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역사 연구는 학자들이라는 전문가 속에만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결국 과거를 통해 현재를 알고 미래를 잘 살아가기 위해서니까 미시와 거시가 함께 잘 어우러져야만 한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일상의 소소한 세계만 표현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거창한 흐름만 표현할 수도 없다. 거창한 흐름 속에서 소소한 일상들이 제대로 표현한 작품이 좋은 작품이다.

 

이 책은 그런 작품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다. 평론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우리 소설에 나타난 정치 현실 또는 작가들이 소설을 통해서 우리나라 정치현실을 어떻게 비판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평론을 통하여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지금-여기'일 터이다.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어떠한가를 작품을 통해서 살펴보라고, 자신은 이런 작품들을 이렇게 읽었다고. 단지 읽은 것에서 끝나지 않고 삶으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많은 작품들이 나오는데, 그동안 읽지 않았던 작품들도 꽤 등장한다. 아주 오래 전 작가라고만 여기고 묻어두었던 작가들, 그냥 그런 작가라고만 생각했던 작가들의 작품도 나온다. 그리고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준다. 읽고 싶어지게 한다.

 

우리나라 정치현실을 선구적으로 비판했던 작품은 남정현이 쓴 '분지(糞地)'다. 미국을 이렇게 대놓고 풍자한 작품이 있을까 싶을 정도. 필화 사건에 휘말렸던 작품이기도 한데, 이 작품만 기억하던 나로서는 남정현이 '허허선생' 연작으로 우리 사회를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풍자라 함은 비꼼인데,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비꼬는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강한 사람을 비꼬아 그 사람의 허위의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한 존재로 군림했던 미국과 또 그에 추종하던 사람들을 풍자한 남정현의 소설은 당시 우리 사회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당시뿐만이 아니라 지금 현실을 이야기할 때도 직설적으로 이야기하기 힘들 때 문학적으로 어떤 장치를 이용해 표현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이런 작품뿐만 아니라 최인훈의 작품도 마찬가지고... '총독의 소리'나 '주석의 소리'를 보라. 얼마나 당대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지. 이렇게 많은 작가와 작품을 통해 우리나라 현대사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최근에 읽은 책들에서 다시 주목하는 작가가 이병주인데... '지리산'의 작가로만, 또 보수적인 작가로만 알고 있던 이병주의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가 박정희에 대해서 꽤 비판적인 작품을 썼다는 것. 그런데도 이병주를 1970년대 이전의 작품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는 반성을 하게 해준다. 물론 이병주는 박정희와도 잘 어울렸지만 5.16쿠테타 직후 감옥 생활을 하게 되어 반감을 가지게 되었을 수도 있다.

 

개인적인 반감이라고 해서 다 소설이 되지는 못한다. 그는 많은 자료를 모아 5.16이후 우리 사회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그런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을 제시함으로써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

 

소설은 역사가 아니지만, 소설을 통해서 역사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는 있다. 그렇다면 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소설을 통해서도 할 수 있는데, 그 작업을 이병주가 했다고 이 책의 저자는 말하고 있다. 역사가 아닌 소설, 그래야 좋은 소설이 되는 것이다.

 

(이병주가 쓴 작품인 ['그'를 버린 여인], [그해 5월]을 읽어보면 소설 속 인물로 표현된 박정희를 만날 수 있다고 한다. 그밖의 다른 인물들도.)

 

여기에 더불어 박화성과 한무숙이라는 작가에 대한 글을 통해 우리 소설에 대한 지식의 폭을 좀더 넓힐 수 있다. 다양한 경향의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우리나라 현실을 잘 반영한 소설들을 들고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바로 사회 속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생활인이자 정치인이다. 정치가 그들의 삶에서 사라질 수가 없다. 그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바로 정치기 때문이다. 이런 소설들을 통해서, 당시 우리나라 정치현실을 파악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지금 우리나라 정치현실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가게 된다.

 

관심이 있으면 찾게 되고, 생각하게 되고 자신의 삶과 관련짓게 된다. 우리가 정치를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을, 인간은 원초적으로 경제인이지만 정치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그런 삶의 모습들을 보여주는 소설들을 통해 지금-여기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해보라고 하는 듯하다.

 

평론집, 안 읽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그만큼 문학에서 멀어지고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다시 소설을 읽어 봐야겠다는, 소설이 우리 사회의 모습, 우리들의 모습을 모두 담고 있어, 소설을 통해서 나를, 우리 사회를 발견할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뱀발

 

이 책을 읽으면서 지식나부랭이에 해당하는 작가들의 가족관계를 알게 된 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인데... 박화성의 아들이 천승세인것, 그리고 한무숙과 한말숙이 친자매지간인 것. 여기에 한묘숙이라는 자매가 있는데, 이 분의 활동에 대해서도 찾아보게 되는 호기심을 갖게 되고... 임헌영 평론가가 남정현, 이호철, 최인훈과 어울리는 이야기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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