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시인 서정홍이 쓴 동시집이다. 아이들 처지가 되어 아이들의 심정을 시로 표현한 것.

 

  제목이 재미있다. 잔소리라고 하면 지겨운 것, 듣기 싫은 것, 그러니 맛으로 따지면 '맛없는'이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릴 것 같은데 '맛있는 잔소리'다.

 

  어떤 잔소리가 맛있을까? 그건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하라고 하는 말들일 것이다. 아이들은 어떤 것을 하고 싶을까?

 

  우선 노는 것. 아이들이 놀지 못하면 힘들어 한다. 스트레스를 받는다. 아이 때 충분히 놀아야 한다. 잠도 잘 자야 하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하고.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오죽하면 초등학생이 자신들이 어른들보다 더 오래 공부한다고 하겠는가. 공부란 아이들에게 어떤 인간이 되라고 어른들이 시키는 것인데, 여기서 시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시킴은 강제와 같기 때문에 자발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공부가 자발적이 되기 위해서는 충분히 놀아야 한다. 무언가를 그리워할 수 있어야 한다. 결핍을 겪어야 한다. 그래야 결핍을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하게 된다.

 

공자야 도덕적으로 선을 행한 다음에 그래도 힘이 남으면 공부를 하라고 했지만, 지금은 반대로 공부를 하고 또 공부를 하고 그 다음에 힘이 남으면 다른 것을 하라고 하는데... 이래서는 안 된다.

 

서정홍 시를 읽으며 다시 요즘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이런 시가 쓰인다는 것, 그렇지 못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맛있는 잔소리

 

아들아, 놀 시간도 없는데

공부할 시간이 어디 있냐?

아이들은 놀려고 세상에 태어났어.

공부하려고 태어난 게 아니란 말이야.

빨랑빨랑 책 덮고 나와.

엄마랑 아빠랑 썰매도 타고

언덕에 올라 연도 날리고

숲속에 가만히 앉아 눈을 감고

바람소리 새소리 들어보고

바닷가에서 게도 잡고

싱싱한 가재도 먹고

별이 쏟아지는 해수욕장을 걸어 보고

아들아, 그만 자고 얼른 일어나!

일어나 보니 한밤중이다.

꿈속이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다.

맛있는 잔소리다.

 

서정홍, 맛있는 잔소리. 보리. 2017년. 58-59쪽

 

이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은 공부 잘했다고 칭찬을 받아도 기쁘기보다는 두려움을 지닌다.

 

 불안한 칭찬

 

오늘, 처음으로

수학 점수를 백 점 받았는데

반응은 여러 가지다.

 

"우리 아들, 천재다 천재!"

"그래, 뿌린 만큼 거두는 것이라니까."

"야, 부럽다 부러워."

 

이런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질 줄 알았는데

괜스레 불안하다.

 

다음 시험 때, 점수가 떨어지면

무슨 말을 듣게 될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두근.

 

서정홍, 맛있는 잔소리. 보리. 2017년. 49쪽

 

두려움과 배움은 함께 할 수 없다고 했는데, 성적이 좋아도 기쁘기보다는 다음 성적을 생각해야 하는 아이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교육을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행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은 부정적이다. 서정홍이 쓴 이들 시처럼, 이렇게 우리 아이들은 공부란 이름으로 찌들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성적 중심의 교육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세상 모든 것에 경이로움을 느끼고, 우주 만물과 함께 함을, 이웃들과 함께 하는 삶을 누릴 수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을 서정홍의 동시로 대신하는데...

 

이 동시에 표현된 세상이, 그런 삶들이 현실에서도 이루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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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꽃
보들레에르 지음 / 자유교양사 / 199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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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우울'을 읽은 다음 '악의 꽃'을 읽다. 아주 오래 전 그것도 프랑스 시인의 작품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으로 읽으니 시를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이해라기 보다는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다른 시대, 다른 나라, 다른 상황에 처해 있는 것과 또 다른 언어를 쓴다는 것에서 차이가 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시는 보편적인 인간 감성을 노래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극복해 내기도 하지만.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어렴풋이 인식할 수 있는 것에 만족하고, 보들레르가 시인을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시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시집의 첫 부분 제목이 '우울과 이상'인데, 우울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 거리를 느낄 때 찾아오는 것, 현실에 완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이상을 추구하지만 이상 세계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그 간격이 자신에게 다가왔을 때 그 틈을 파고드는 것이 우울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우울은 민감한 감성의 소유자가 느끼는 감정이다. 자신에게서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 사람, 어느 한 쪽에도 완전히 빠져들 수가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우울을 느낄 수밖에 없다.

 

세상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며, 또한 자기 뜻대로 되는 세상이 좋은 세상도 아닐 테니, 우울은 시인들에게는 천형과도 같은 감정이지 않을까 싶다. 시인들 대다수가 이러한 우울을 기본 감성으로 지니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런 그가 시인을 사로잡힌 알바트로스에 비유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알바트로스를 신천옹(信天翁)이라고 번역하기도 했는데... 이 시집에서도 알바트로스를 신천옹이라고 번역했다. 그리고 알바트로스는 바로 시인이기도 하다.

 

  신천옹(信天翁)

 

흔히 재미삼아 뱃사람들은

커다른 바닷새, 신천옹을 잡는다.

태평스런 여행의 이 동반자는

깊은 바다 위로 미끄러지는 배를 따른다.

 

일단 갑판 위에 내려놓으면

이 창공의 왕들은 어색하고 수줍어

가련하게도 크고 흰 그 날개를

노처럼 그들 옆구리에 끌리게 둔다.

 

이 날개 달린 나그네

얼마나 어설퍼 기가 죽었는가!

전엔 그처럼 아름답던 그가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추한가!

어떤 친구는 파이프로 부리를 건드려 약을 올리고

다른 친구들은, 창공을 날던 이 병신을 절름대며 흉내낸다.

 

시인도 구름의 왕자와 같아서

폭풍우를 다스리고 사수(射手)를 비웃지만

야유 소리 들끓는 지상으로 추방되니

거대한 그 날개는

오히려 걷기에 거추장스러울 뿐.

 

보들레르, 악의 꽃, 김인환 역,자유교양사. 1993년 중판. 24쪽.

 

현실에서 시인이 처한 위치, 다른 사람들이 시인을 대하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뱃사람에게 잡혀 날지 못하고 있는 새.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날기를 꿈꾼다. 비록 몸은 지상에 묶여 있지만 언젠가는 창공을 훨훨 날아 이 지상을 내려다 보기를 바란다.

 

그러니 우울할 수밖에. 지상의 추함에, 그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음에... 하여 그는 거리의 여인들, 거리의 사람들을 시로 표현한다. 그들을 두고서는 홀로 날아갈 수가 없기에. 그러니 우울은 그의 시를 관통할 수밖에 없다.

 

'악의 꽃'

 

프랑스에서 필화 사건을 겪은 유명한 시집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표현의 강도가 그리 심하다고 할 수 없겠지만, 그 시대에는 문제가 될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다. 시대에 굴복하지 않고, 시대를 넘어서려고 하는 존재, 시인.

 

지금도 수많은 시인들이 있고, 그들 역시 이렇게 현실과 이상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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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우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8
샤를 보들레르 지음, 윤영애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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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산문시'라고 한다. 우리가 시라고 하면 대체로 운문이라고 하고 짧은 시를 떠올리는데, 산문시는 행과 연이 구분이 없는 좀 긴 시를 떠올린다. 여기에 서사기라고 하면 사건이 있는 소설과 비슷한 시라고 생각하고. 그런데 여기에 '소'자가 붙으면 작은 산문시, 또는 짧은 산문시라는 뜻이 될텐데... 그런 시 장르가 무엇인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이야기시' 또는 '담시' 아니면 '단편서사시'라는 개념이 있었다. 시에 이야기가 들어 있는 것이고, 그런 시를 통해서 소설에서 느꼈던 삶들을 시에서도 찾고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시들과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읽어보면 짧은 산문시도 있지만, 4쪽 정도에 걸치는 산문시도 있는데, 그것도 짧다고 해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시인이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을 형식으로 선택한 것이니, '소산문시'란 개념도 통할 수 있다고 인정하고 읽는다.

 

어떤 형식을 택하든 시인이 자신의 감정을 언어에 실어 표현하고 있는 것이 '시'고, 다른 글에 비하면 짧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보들레르의 시도 마찬가지다. 파리의 우울. 근대화된 도시 파리에서 시인이 느끼는 감정을 표현한 시다. 총 50편의 시가 모자이크 식으로 나열되어 있는데, 아르센 우세에게라는 프롤로그 격인 글이 있고, 마지막에는 에필로그가 있다.

 

시작과 끝 속에서 시들이 50편, 각자 제목을 달고 배치되어 있는데, 시인의 생각과 시인이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밝은 분위기와 어두운 분위기, 칭찬과 비난, 화려함과 비속함이 교묘하게 대비를 이루고 있는 시들이 많은데... 이 책은 시 한 편 한 편마다 주석을 달아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보들레르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고, 자연스레 보들레르의 다른 작품들도 만나게 된다.

 

군중 속에서도 개인을 발견하는 존재.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는 존재. 자연스러움에 맞서 싸울 줄 아는 존재. 그래서 시인은 발전하는 도시 파리에서 우아하고 화려한 사람들을 보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소외된 사람들을 보게 되고, 자신과 소통할 수 없는 사람들에 절망하기도 한다.

 

이런 시인의 모습을 드러내는 구절들이 몇 있는데...

 

당신도 깨지는 듯한 유리 장수의 소리를 샹송으로 번역해 보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 않았소? 이 소리가 거리의 가장 높은 안개를 가로질러 다락방까지 보내는 모든 서글픈 암시들을 서정적 산문으로 표현해 보고 싶은 유혹을 말이오. (18쪽)

 

무자비한 마술사. 늘 이기는 자신만만한 라이벌, 자연이여, 나를 놓아주오! 나의 갈망과 나의 자부심을 시험하는 일을 그쳐주오! 아름다움의 탐구는 일종의 결투, 예술가는 두려움으로 비명을 지르며 패하고 마는. (31쪽)

 

시인은 거의 초자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영혼의 예외적 순간, 자연의 모든 사물로부터 '사물의 말 없는 언어'를 들을 수 있다. (주석에서. 42쪽)

 

시인은 제멋대로 자기 자신일 수도 있고, 동시에 타인이 될 수도 있는 비길 데 없이 훌륭한 특권을 누린다. 육체를 찾아 방황하는 넋처럼 그는 자신이 원할 때 다른 사람 속에 들어간다. 그에게만은 모든 것이 비어 있는 것과 같다. (75쪽)

 

인간이 악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약간의 가치가 있다. 가장 돌이킬 수 없는 악덕이란 어리석음에서 악을 저지르는 것이다. (174쪽)

 

열린 창문을 통해 밖에서 들여다보는 사람은 결코 닫힌 창문을 바라보는 사람이 발견하는 것만큼 많은 것을 보지 못한다. 촛불로 밝혀진 창문보다 더 깊고, 더 신비하고, 더 풍요하며, 더 어둡고, 동시에 더 눈부신 것은 없다. (214쪽)

 

이렇게 '파리의 우울'을 읽으며 보들레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됐다. 사실 보들레르의 작품은 읽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의 이름은 많이 들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를 퇴폐, 세기말과 연결지어 생각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작품을 직접 읽어보니 그를 퇴폐와 세기말과 연결시키기보다는 세상을 좀더 깊이 있게 보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눈을 지닌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열린 창문을 통해서 세상을 본 것이 아니라 닫힌 창문을 통해서 본 것이리라. 또한 한낮의 뜨겁고 밝고 강한 태양 아래서 세상을 본 것이 아니라 어둡고 은은한 달빛을 통해 세상을 본 것이리라. 그렇게 느껴졌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서는 세상의 밝은 면을 이야기하더라도 꼭 어두운 면이 함께 나온다. 그런 존재들에 대한 애정이 시에서 묻어난다. 이렇게 세상은 어느 하나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밝음 속에 가려진 어둠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듯이.

 

이 '파리의 우울'을 읽어 보니 '악의 꽃'을 읽고 싶어졌다. 두 작품이면 보들레르를 만났다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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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의 시 - 그때 꿈꾸던 어른이 되었나요
김승일 외 지음 / 돌베개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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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꿈꾸던 어른이 되었나요'라는 작은 제목을 달고 있다. 큰제목은 물론 '교실의 시'이고. 교실과 시. 교실이라기보다는 학교라고 하는 편이 범위가 더 넓겠다. 사실 학교라고 하면 교실과 다른 장소 또 사람들까지 다양한 범주의 존재들을 아우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꿈꾸던'이란 말을 통해 교실에서 미래를 꿈꾸던 시절을 회상하게 만든다. 회상 또는 추억이 대체로 아름다움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게 되는데, 이상하게도 아름다운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 바로 교실이다.

 

어쩌면 군대를 갔다온 남자들이 군대를 떠올리기 싫어하는 것과 같이 대다수의 사람들은 중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기 싫어한다. 떠올리더라도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고통, 짜증, 어쩔 수 없음을 함께 떠올린다. 교육의 이념과 학교의 현실이 이렇게 극명하게 반대를 이루고 있기도 힘들텐데 말이다.

 

그만큼 학교는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장소이면서도 탈출하고자 하는 장소였던 것이다. 그런 학교를 대상으로 시인들이 쓴 시와 그 시에 어울리는 글들을 엮어 놓았다. 산문을 읽다보면 그 시가 어떻게 쓰였는지, 어떤 의도로 썼는지를 시인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시인의 말을 그대로 따라갈 필요는 없다. 시인 역시 그것을 바라지도 않을 것이고. 그럼에도 시를 다양한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책 뒤 발문에도 나오지만 산문이 시를 더 다양하게 읽을 수 있게 해주지만 시에 속해 있는 것은 아니다.

 

시와 산문이 각자 존재하면서 또 함께 어울리고 있다. 그래서 시를 읽는 맛도, 산문을 읽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여기에 시인들이 겪었던 학교가 참 이렇게도 긍정적이지 않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민감한 사람들에게 학교란 공간은 얼마나 무미건조한 공간인지 시인들이 쓴 산문을 통해 다시 느낄 수 있다.

 

이 중에 오은이 쓴 '척 보면 척'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 글에서 오은의 시와 산문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학교가 정말로 '척'하는 자세를 몸에 배게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

 

남에게 자신을 보여주기를 강요하는 장소가 바로 학교 아니던가. 나를 찾아가는 과정보다는 남들이 내게 기대하는 나를 보여주는 과정이 더 많았던 학교 아닌가. 그 대표적인 공간이 교실이고. 그렇게 자신보다는 남 시선을 의식하게 만드는 공간에서 대다수의 사람이 12년을 보냈다는 사실.

 

'척'하다 보면 '다움'이 형성된다고 하는 말. 그렇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그렇게 끝까지 척만 하는 모습으로 굳어진 사람들도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그래, 학교는 적어도 '척'을 기대해서는 안 되지. '척'에 넘어가서도 안 되지. 정말로 '척'하다가 '다움'으로 굳어지면, 그렇게 성장하면 좋겠지만, 끝까지 '척'으로만 남으면, 정말로 그때 꿈꾸던 것들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냥 인생이라는 길에서 뱅글뱅글 돌고만 있는 것은 아닐까.  천천히 읽어보자. 청소년들이 읽기보다는 이미 그 과정을 거쳐서 그때를 돌아볼 수 있는 나이에 이른 사람들, 읽으면서 학창시절의 자신을 다시 불러낼 수 있다면 '그때의 자기'에서 '지금의 자기'를 더 잘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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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재(遍在)' 라는 말이 생각났다. 두러 퍼져 있음. 아니 도처에 있음. 없는 곳이 없음이라고 생각되는 말.

 

  없는 곳이 없다. 어디에나 있다. 부정하고 싶은데 부정할 수 없는 존재. 그것이 바로 독재자다.

 

  독재자!

  결코 좋은 감정으로 부르는 말이 아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담고, 어느 정도는 두려움도 담고, 빨리 사라지기를 바라면서 부르는 말이다.

 

  그런데, 독재자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편재하기 때문이다. 도처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독재자를 정치에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니다. 독재자는 우리 삶 모든 분야에 널려 있다.

 

2015 현대문학상 수상시집을 읽다가 문정희 시인의 독재자에 대하여를 읽고 내게도 독재자가 있음을 생각하게 됐다.

 

나는 부정하고 싶은데, 그럼에도 나는 독재자다. 그것을 인정해야 했다. 문정희 시인의 시 중에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는 시 구절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전쟁보다 더욱 정교하게 여성을 파괴시킨다는 / 결혼 외에는 어디에도 갈 데가 없었지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2015 현대문학 수상시집 146쪽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사하는 독재. 결혼에도 이런 독재자가 있는데, 문정희 시인의 '독재자에 대하여'를 읽다 보면 정치에서 가정으로, 가정에서 자신으로 점차 범위가 좁혀지지만, 어디에나 존재하는 그런 독재자를 깨달아가는 과정이 시에 나타나 있다.

 

  독재자에 대하여

 

말벌처럼 허리 부러진 페닌술라!

이 반도의 아래쪽이 나의 고향입니다

독재자들이 철따라 출몰한 땅! 초등학교 때는

수업을 전폐하고 대통령 할아버지라는 글을 쓰기도 했어요

탱크를 밀고 나온 군인들이 새로 길을 만들고

선거를 악용하며 버티는 사이

나의 젊음은 최루탄 속에 시들어갔어요

북쪽에는 더 미친 독재자가 있다고 겁주던

노회한 독재들이었어요

문학을 했지만 문자옥(文字獄)이 두려워

무사하게 사는 법부터 터득했습니다

인간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서둘러 결혼 속으로 도망쳤지만

결혼 속에도 독재자는 있었어요

그는 더욱 난해한 모습으로 삶을 애무하며

지배와 행복의 명분을 세워나갔어요

혼자 때리고 혼자 깨어지는 무정란 같은 언어를 들고

비겁하게 침묵을 지키다가 가끔 모호한 시를 썼어요

속도와 물신 앞에 무릎 꿇지 않으려고 버둥거렸지만

시간의 검푸른 이끼 속으로 빨려 들어갔어요

이윽고 내 안의 늙은 독재자가 나를 덮쳤어요

 

문자옥(文字獄) : 지식인의 글을 꼬투리 잡아 탄압하는 것.

 

2015 현대문학상 수상시집(굴 소년의 노래). 2014년. 문정희, 독재자에 대하여. 147-148쪽.

 

괴물과 싸우는 자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니체의 말을 인용할 것도 없이, 독재자의 나라에서 자란 사람들이 자연스레 가정에서도 독재를 체험하게 되고, 그것이 어느 순간 자신에게서도 독재자의 모습이 나타남을 인식하게 하는 시.

 

나이듦은 독재자에게서 멀어질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함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나이듦이 독재자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만의 성채에 갇혀, 나 아니면 안돼라는 생각을 지니게 되는 순간, 그는 독재자가 된다. 어느 분야에서든.

 

시인은 우리가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독재자를 제시하고, 그런 독재자가 실은 우리들 가정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을, 가정에서만이 아니라 개개인들 속에도 독재자가 있음을, 그래서 그런 독재자가 자신을 덮치지 않도록 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결국 독재자란 닫힌 존재 아닌가. 나라를, 가정을, 나를 가두어 두려고 하는 순간 독재자는 나타난다. 그러니 열린 존재가 되어야 한다. 열린 존재란 바로 자신과 다른 존재 사이에 연결할 수 있는 문을 지니고 있는 존재다.

 

담이 아닌 문을 지닌 존재. 나에게 그런 문(門)이 있는지 이 봄에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고 있는 이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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