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페미니스트 - 식민지 일상에 맞선 여성들의 이야기
이임하 지음 / 철수와영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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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아서는 조선시대 여성들 이야기인 줄 알겠다. 조선의 페미니스트라는 제목을 붙였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조선이라는 이름이 언제까지 불렸나? 일제강점기가 되고 사라진 이름인가 하면 아니다. 일본인은 조선인을 조센징이라고 불렀으니까. 

 

남북이 분단되고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조선이었을 것이다. 조선공산당. 그러다가 조선공산당이 남조선노동당과 북조선노동당으로 갈라서니까, 해방 정국까지도 우리는 조선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조선은 바로 여기까지다. 해방 정국까지. 그 이후의 일은 없다. 없는 것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았다. 또 이들 중에 역사에서 지워진 인물들도 많다. 그들이 빛을 발한 것은 해방 정국까지다. 

 

그렇다면 해방 정국에서 빛을 발했던 사람들은 누구일까? 어떤 인물이기에 여성으로서 해방이 된 뒤 이름을 내세울 수 있게 된 것일까 이런 생각을 지닐 수 있다. 당연한 질문이다. 식민지에서 해방이 된 나라에서 나름대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일 수밖에 없다.

 

독립운동가들... 여기에 여성 독립운동가들... 여성이라는 말을 앞에 붙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지만 여성이라는 말을 꼭 붙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활동에 비해서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시적으로 여성이라는 말을 앞에 붙이기로 하자. 그렇게 붙일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세상이 아직은 오지 않았다는 씁쓸한 마음을 되새길 수 있게.

 

솔직하게 말하면 여성 독립운동가를 대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유관순밖에 없다. 최근에 영화로도 알려졌고 또 여러 책에서 언급한 사람들도 있지만, 퍼뜩 머리에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만큼 그들은 해방이 된 이후 많이 가려져 있었다고 해야 한다.

 

이 책에서는 일곱 명의 여성을 들고 있다. 일곱 명의 이름을 적어본다. 몇 사람이나 알고 있는지?

 

유영준, 정종명, 정칠성, 고명자, 허균, 박진홍, 이순금

 

각자 자신이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던 사람들... 이들은 모두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 해방 이후에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여성들이 독립된 존재로 인정받고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사회 구조다. 즉 남성과 여성이 또는 다른 성이 서로 대립하는 사회, 또는 어느 성이 다른 성에게 종속되어 사는 사회가 아니다. 

 

그만큼 일상에서의 평등을 이루기 위해 이들은 사회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조선이라는 사회, 일제강점기라는 시대는 여성들에게 억압과 착취, 불평등한 사회였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구조를 그냥 놓아두고 여성들도 남성들과 동등한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은 힘을 지니지 못한 헛된 구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 지금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월북을 했기 때문이다. 또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말년이 어떻게 되었는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이유가 바로 분단에 있다는 것, 분단으로 인한 갈등이 같은 이념을 지닌다는 북쪽에서도 사상투쟁을 거쳐 숙청이라는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렇게 지금은 많이 잊혀졌지만 이들이 한 노력이 물거품이 된 것은 아니다. 어디 역사가 한방에 변했던가. 이런 활동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어느 순간에 폭발적으로 변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을 기억해야 한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나름대로 씨를 뿌렸던 이들의 활동을.

 

이 책이 소중한 이유가 그것이다. 페미니즘에 대해서 논란이 많지만, 그런 논란 자체도 바로 페미니즘의 일부라는 사실을 이 책을 읽으면 느낄 수가 있다. 같이 활동을 해서 검거가 되어도 언론은 남성들에게는 절대로 쓰지 않았을 기사를 여성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게가 아니라 악의적으로 오도하는 기사를 쓴다.

 

독자들의 흥미를 끌려는 목적도 있지만 여성들의 활동을 폄훼하려는 의도도 다분히 있는 것이다. 지금도 이런 기사들이 종종 나는데... 일부 언론은 일제시대 언론의 관행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않았다는 생각을 한다. 언론의 그런 태도는 이 책 '박진홍, 이순금' 편에 너무도 잘 나와 있다.

 

'식민지 일상에 맞선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작은 제목을 달고 있는데, 식민지 일상은 바로 여성들에게는 이중 억압이다. 식민지로서의 억압과 가부장제가 일상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에서의 억압. 이런 이중의 억압을 끊는 길은 눈에 띠는 사회적인 억압에 대항하면서 얼핏 가려진 것처럼 보이는 일상에서의 억압을 함께 끊으려고 해야 한다. 이중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니 식민지 시대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더 힘든 활동을 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대중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을 테니 더더욱 힘들었을 거고.

 

그것을 이겨내려 했던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의 활동을 각 편 제목에서 간결하고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유영준(1890-?) : 여남평등 이룩하여 평등조선 건설하자!

정종명(1896-?) " 여성들이여! 분노하라 그리고 경제적 독립을 쟁취하라!

정칠성(1897-1958?) : 사람이 있고 운동이 있다

고명자(1904-1950?) : 우리 자신의 해방은 우리 힘으로

허균(1904-?) : 부인 노동자에게 해방의 혜택이 무엇인가

박진홍(1914-?) : 십 년 감옥살이를 빼면 이제 겨우 스물세 살이라니까요

이순금(1912-?) 여성 대중은 민족해방운동을 위해 열심히 싸웠다

 

이들의 이름 뒤에 출생년도와 사망년도를 쓴 이유는 바로 물음표(?)에 있다. 일곱 명 모두 물음표(?)가 있다. 이 중에 사망한 년도가 그나마 추측 가능한 사람이 두 명. 나머지 다섯 명은 잘 모른다. 왜? 바로 이 글 제목에 그 이유가 있다.

 

조선부녀총동맹...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조선의 페미니스트](1권)은 조선부녀총동맹에서 활동했던 여성들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 해방공간의 식민지 일상을 바꾸고자 했던 여성들의 삶을 알고 싶었다.'(13쪽)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을 지닌 사람들. 남과 북 어디에서도 제대로 자기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 그럼에도 우리 사회가 발전하도록 한 발 앞서 나선 사람들. 그들이 이렇게 영원히 물음표(?)로 남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우리 역사에 있는 수많은 물음표(?)들을 이제는 사라지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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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썰록
김성희 외 지음 / 시공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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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는 문학보다는 영화에서 더 유행했다. 세상이 각박해질수록 좀비가 예술에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월드 워 Z'가 있고, '부산행'이 있고 또 기타 등등 많은 좀비 영화들이 있었는데, 물론 좀비 영화도 문학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좀비는 인간이었던 존재, 지금은 인간이 아닌 존재다. 우리나라 귀신과 좀비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다른 점은 귀신은 주로 밤에 나타난다면 좀비는 시도때도 없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 귀신은 자신에게 해를 입힌 존재를 응징하는 역할을 주로 한다면 좀비는 불특정 다수를 공격한다.

 

이런 점에서 차이가 많이 나는데, 지금은 귀신의 시대가 저물고 좀비의 시대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세상이 명확한 인과관계로 맺어지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너무도 얽히고설켜 무엇이 원인이고 결과인지 정확하게 가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니 좀비가 등장해 아무나 눈 앞에 보이는 존재를 물어뜯고 마는 것. 어쩌면 세상에 좀비와 같은 존재들이 득시글거리고 있는 현실을 예술로 승화시켜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술 작품에서 좀비가 많이 등장하고 유행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에 좀비와 비슷한 존재들이 있음을 우리들이 무의식 중에 자각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책은 우리나라 소설을 좀비를 등장시켜 재탄생시킨 작품들을 모아 놓았다. 고전소설이라고 하는데, 근대소설에 들어가는 작품도 있으니, 우리 소설과 좀비의 만남 정도 되겠다.

 

대상이 된 우리나라 소설은 (아니 다섯 편이 모두 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다, 관동별곡은 정철이 쓴 가사 작품이니까. 가사 작품은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시와 수필의 요소를 갖추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정철의 관동별곡,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 주요섭의 사랑 손님과 어머니,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황순원의 소나기다.

 

이들을 각자 좀비와 만나는 작품으로 재탄생 시켰는데... 기존 작품의 틀을 유지한 작품도 있고, 기존 작품에서 빈 틈을 찾아내 메운 작품도 있다.

 

관동별곡, 강원도 관찰사로 가는 정철의 이야기...갈 때 만나는 좀비, 좀비들을 퇴치할 수 있는 약(김치)을 만드는 것. 관료들의 무책임. 이런 것들을 잘 버무린 김성희가 쓴 소설인데... 제목을 영화 부산행을 연상할 수 있게 '관동행: AMA TO GWANDONG'이라고 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죽어라 외웠던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쓴 정철을 떠올리기보다는 몰락한 양반, 꾀죄죄한 양반을 떠올리지만, 그럼에도 단점을 장점으로 만들어내는 주인공에게 공감할 수가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로 일컬어지는 김시습의 '금오신화'에 실려 있는 작품 중 하나인 만복사 저포기를 비틀어서 '만복사 좀비기'로 바꾼 정명섭의 소설. 소설에서는 부처님과 내기에 이겨 귀신과 결혼하는 사람이야기지만, 여기서는 그 자신이 좀비로 죽임을 당하는 쪽으로 내용이 바뀌었다. 좀비와 인간의 구분은 보통 아주 명확하게 나오는데, 이 소설에서는 끝에 가서야 좀비와 인간의 구분을 알 수 있는 추리적인 요소까지 겸비하고 있다. 만복사 저포기의 기본 축을 바탕으로 내용을 뒤집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지금은 옥희의 말투를 재미있어 하기도 하는 '사랑 손님과 어머니'를 비튼 소설 '사랑 손님과 어머니, 그리고 죽은 아버지'라는 작품은 전건우가 썼는데, 예전 관습을 거스르지 못하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원작 소설을,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를 스스로 탈피해 나가는 여성 주인공으로 어머니를 내세운 것이 특징이다.

 

좀비 앞에서도 결코 당황하지 않고 당당하게 그들을 물리치는 여성 주인공. 소설에서는 아버지가 죽은 것으로 나오지만 이 작품에서는 아버지가 살아 있고, 결국 죽음에 이르고 좀비가 되는, 가부장의 모습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가부장적 사회가 여성에게는 좀비처럼, 또는 좀비보다도 더 무서운 족쇄였음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조영주가 쓴 '운수 좋은 날'은 제목을 그대로 따왔다. 다른 작품들이 제목을 조금씩 변형했다면 이 소설을 제목을 그대로 쓴 대신 내용은 크게 변형했다. 아마도 제목을 다른 것으로 했다면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떠올리기 힘들지도 모른다. 물론 작품의 끝부분에 김첨지가 등장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두 소설의 연관성을 짐작하기가 쉽지는 않다.

 

이 작품이 지닌 참신성은 김첨지가 오래도록 살아남은 데 있다. 좀비는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피가 공급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살아있는 인간의 목을 물어 뜯는다. 피를 먹어야 하기 때문. 그렇기에 그들은 인간에게 위협이 되고, 인간과 좀비는 목숨을 걸고 서로를 없애려고 한다. 피, 고기. 육식성의 극한, 살인. 그것이 좀비다.

 

이 작품은 이런 틀을 벗어난다. 채식 좀비의 등장이다. 좀비가 채식을 한다? 그렇다면 인간과 적대적일 이유가 있을까? 없다. 오히려 육식을 하는 인간을, 그런 좀비를 거부하려 한다. 그게 이 작품이다. 새로운 좀비를 제시한 작품.

 

차무진이 쓴 '피, 소나기'는 슬프다. 원작 '소나기'도 슬프지만 이 소설은 좀비가 된 소녀가 또 죽게 되는 데서 슬픔은 배가 된다. 좀비이기 때문에 공격적이고 피를 원하는 것은 공통적이지만 말을 할 수 있는 좀비. 이를 이해하는 소년. 소년에게만은 공격하지 않는 소녀 좀비.

 

또 한번의 죽음을 맞으며 '죽기 직전에 제 할아버지한테 자기가 죽거든 입었던 옷을 꼭 함께 묻어달라고." (330쪽)말했단 구절, 소나기의 마지막 구절을 다시 한번 만나게 하는 것으로 소설의 결말을 삼은 작가는 소녀의 첫번째 죽음을 우리에게 불러옴으로써 소녀의 죽음을 좀비의 죽음으로 치환하지 않게 한다.

 

이런 식으로 다섯 편의 작품이 예전 작품을 토대로 새롭게 탄생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작품을 이런 식으로 비튼 것들은 우리 문학이 지속적으로 재탄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도 다양한 활동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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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심리 수업
테리 앱터 지음, 최윤영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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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가지 판단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때 판단은 자신이 남을, 또 남이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다. 사회적 동물이라고 일컬어지는 우리 인간이 이러한 판단을 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판단을 포기하는 순간 사회에서 고립되거나 또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다른 사람의 뜻대로 움직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판단은 우리 인간에게 필수인 요소다.

 

저자 역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활동이다. (296쪽)

 

그렇다. 우리는 어떻게든 판단하면서 살아간다. 그것을 이 책은 어린시절부터 소셜 미디어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판단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신생아부터 시작해서, 칭찬, 비난, 가족, 우정, 부부, 직장, 소셜 미디어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판단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칭찬과 비난으로 나누고 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칭찬을 갈구하면서 비난을 모면하려고 하는데... 둘 다 지나치면 좋지 않음이야 알고 있지만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하는지 그것을 살아가면서 익혀가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니 칭찬이라고 다 칭찬이 아니고 비난이라고 다 비난이 아님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비난을 비판이게 하는 요소가 있고, 이것은 긍정적인 비난이 된다. 칭찬도 지나치면 독이 디니, 그때 칭찬은 부정적이 된다.

 

결국 우리는 판단을 하면서 또 판단을 당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판단당하는 것이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한다면 내가 어떻게 하면 제대로 판단하고 살 수 있을까?

 

나는 판단이 역동적이고 활력 있는 대인 관계 형성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 우선 적극적으로 자신의 판단을 탐색하고 조사해야 한다. 적극성은 자기 수용의 바탕 위에서 가능하다. 즉, 우리는 판단하는 존재이고 내면의 판단 장치는 사회적 동물로서 우리의 삶에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 다음 단계는 우리의 판단이 사실에 기반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328쪽)

 

이 말이 이 책의 내용을 종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판단들이 검증되지 않은 채 사실이라면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돌아 다니고 있다. 또 알게 모르게 정확한 사실에 기반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

 

남의 판단에 동조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휩쓸리지 않으려면 저자가 언급한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렇게 이 책은 다양한 관계에서 판단을 하면서, 또 당하면서 살아가는데 어떻게 판단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지 고민하게 한다.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 주는 말들을 인용한다.

 

우리에게는 공정하고 균형 잡힌 판단을 내리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그러나 자칫 잔혹하고 맹목적인 판단을 해 버릴 여지도 충분히 있다. (44쪽)

 

하임 기너트의 말 "칭찬은 마치 페니실린 항생제와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투여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약이니만큼 복용 시간과 정량, 알레르기 반응 등 용법과 주의사항을 정확히 지켜야 합니다." (54쪽)

 

아이들이 성공적으로 학교 생활을 하고 어떤 도전이든 용감하게 나아가기 원한다면, 아이들의 지식이나 재능, 능력보다는 성실한 노력과 인내, 끈기를 칭찬하라는 것이다. (60쪽)

 

지속적으로 수치심에 노출되면, 뇌의 생리 작용에도 변화가 일어나 회복 탄력성과 자기 통제력이 감소한다. (100쪽)

 

수치심은 우리 내면의 경찰관 노릇을 하면서 무엇이 기대되고 용납되는 행동인지 끊임없이 상기시켜 준다. (107쪽)

 

잘못에 대한 후회보다 중요한 것은 미안하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는 곧 나의 잘못된 행동으로 상처받은 상대방을 가치 있게 여긴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09쪽)

 

단 하나의 부정적인 판단으로 사람 전체를 평가하는 것은 일반화된 비난이다. 보통 비난이 구체적이고 객관적인지, 혹은 일반적인지에 따라 우리의 반응은 매우 다르다. (125쪽)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전제가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때로 화를 내거나 공격적인 모습을 보여도, 내 배우자는 기본적으로 존경할 만한 좋은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갖는 것이다. (227쪽)

 

'나르시시스트'는 ... 심리학에서는 ... 자존감이 낮고 스스로를 과장되게 떠벌리는 사람, 타인의 관심에 집착하며 이를 통해 자존감을 높이려는 사람을 칭한다. ... '과연 내가 빛날 수 있는가?' 이들의 관심사는 오직 그것뿐이다. (248-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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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박상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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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으로 최근 소설의 경향을 경험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젊은 작가라 함은 나이를 뜻하기보다는 (물론 나이도 어느 정도는 관계 있다) 등단한 지 오래되지 않은 작가를 의미하는데, 이 책은 뒤에 실린 심사평을 보면 등단한 지 10년이 넘지 않은 작가들의 중단편 가운데 일곱 편을 뽑은 작품집이라 하니, 그래도 최신 경향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현실에서 벗어나 현실을 생각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 작가들이 작품에서 표현하고 있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실려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박상영,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김희선, 공의 기원

백수린, 시간의 궤적

이주란, 넌 쉽게 말했지만

정영수, 우리들

김봉곤, 데이 포 나이트

이미상, 하긴

 

이렇게 일곱 편의 소설들. 각자 나름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 소설인데, 하나하나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이들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폭력'을 느꼈다면 지나친 감상일까? 동성애에 관한 부정, 이건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국민을 대변한다는 국회에서, 그것도 집권여당에서 나름 주도적인 자리에 있던 국회의원이 동성애를 대놓고 반대하는, 논쟁이 되는 정당과는 손잡을 수 없다는...아예 우리나라 국회에는 성소수자를 대변하는 국회의원은 없어야 한다는 말로 들리는 그런 말을 공공연하게 했으니...이보다 더 심한 폭력이 있을까?

 

박상영과 김봉곤의 소설에서 이런 폭력을 느꼈다면, 백수린과 이주란의 소설에서는 말이 지닌 폭력, 아니 우리들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지도 생각지도 않고 무심히 뱉어버린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칼은 말일 수도 있다. 물질로서의 칼이 육체를 벤다면, 말은 마음을 베어버리고 쉽게 봉합하거나 아물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김희선과 정영수 소설에서는 딱히 폭력을 느꼈다고 하기는 힘든데, 김희선 소설에서 언론이 어떻게 조작될 수 있는지, 현실과 희망이 어떻게 전도될 수 있는지, 그렇다면 희망에 따라 현실을 왜곡하는 것 역시 폭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

 

정영수 소설에서 '우리들'이라고 하지만,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글쓰기를 통해서 자기 구원에 이르는 것 같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세계로만 들어가는, 남들을 배제하는 그런 상황을 합리화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래서 소설 속에 '내년'이라는 미래가 나왔을 때 그 말과 더불어 남들이 자신들의 시야에 들어오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닫아버린 세계 역시 폭력이 아닐까.

 

'폭력'이란 이름으로 이 수상작품집을 꿰려는 무리한 오독을 하면, 그 정점에 있는 소설은 바로 이미상이 쓴 '하긴'이란 소설이다.

 

빛바랜 이야기 같지만, 아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를 주름잡는 사람들은 세칭 86세대들이니, 이들이 자신들의 관점을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강요하고 있는지 (물론 겉으로 강요하지 않는다. 그것은 독재다. 전체주의다. 바로 헤게모니라는 말, 자발적 동의를 얻어내는 그런 과정을 거친다.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폭력, 이것이 더 무서운 폭력이다) 소설을 읽으며 느낄 수 있다.

 

섬뜩하다. 후일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아니다. 이건 후일담이 아니다. 86세대가 지닌 모습을 풍자가 아니라 적나라하게 드러낸 소설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대학입시라는 것을 통해 기성세대의 위선을 비판하는 것 같지만, 중심은 86세대다. 그들이 얼마나 오만하게 자신들의 세상을 살아가는지를...그것도 자신들이 비판했던 모습과 비슷하게.

 

이 소설을 읽으면 당연히 86세대가 떠오르고, 여기에 김누리 교수가 했던 말이 함께 겹친다. 우리나라는 68혁명을 겪지 않았다고. 그래서 생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언어유희를 좀 하면 정치 민주주의와 생활 민주주의를 구현한 세대가 68세대라면, 뒤집힌 86세대는 정치 민주주의도 생활 민주주의도 이루지 못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김누리,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해냄. 책 참조)

 

그래서 무서워졌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는.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들 답게 한편 한편이 다양한 표현방식과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인간 사회에서 없애지 못한 것이 폭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도 하고 있다. 다른 작품들에서 공통점을 찾아내려고 어거지로 짜 맞추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많은 폭력이 발현되고 있는지 생각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 다 떠나서 이 작품집을 읽으며 참 좋다고 생각한 것은 소설이 있고, 그 소설을 쓰게 된 작가의 말이 있고, 그 작품에 대한 젊은 작가에 상응하는 젊은 평론가들의 글이 있다는 것이다. 심사평이야 이런 수상작품집에는 늘상 있는 것이니 논외로 하고.

 

그래서 좋다. 소설도 읽고, 작가의 육성도 들을 수 있고, 이 소설에 대한 비평도 읽을 수 있으니. 각 소설의 내용이 궁금하면 읽어보면 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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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좀 별나긴 합니다만... - 아스퍼거 증후군 이야기
쥘리 다셰.마드무아젤 카롤린 지음, 양혜진 옮김 / 이숲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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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퍼거 증후군에 속한 사람으로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림으로 생각한다는 템플 그랜딘이 있다. 그랜딘의 책을 읽으며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 자신이 지닌 능력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음을, 그 다름을 같음으로 묶으려고 하면 안 됨을 알게 되었는데...

 

이번엔 만화로 표현한 아스퍼거 증후군 사람의 이야기다. 템플 그랜딘도 여성이지만, 이 만화 속 주인공은 마그리트라는 20대 후반의 여성이며, 그때까지 자신이 아스퍼거 증후군에 해당하는 사람이라는 진단을 받지 않았다. 않았다라기보다는 못했다라고 하는 편이 옳겠다.

 

아스퍼거 증후군은 약 4대1의 비율로 남성이 여성보다 많다고 한다. 남성이 많은 이유가 어쩌면 여성은 아스퍼거 증후군 진단을 받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남성보다는 여성이 더 사교적이라고 하고, 여성이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잘 맞춰준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보면 그래왔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때문에 여성 아스퍼거 증후군 사람들은 사회 생활을 하면서도 별로 티가 나지 않고, 또 그 이유로 진단을 받기 힘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책의 주인공 마그리트도 마찬가지다. 여러 병원, 여러 의사, 여러 상담사를 만나봤지만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지 못한다. 단지 다른 사람보다 더 예민할 뿐. 그렇기에 충분히 남들과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때문에 마그리트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장소에 원하지 않는 사람들과 있게 되는 경우도 많고 직장에서도 자신의 다름을 인정받지 못한다. 특히 소음에 민감한 마그리트에게 여러 사람이 모이는 사교장이나 또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함께 모여 이야기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남들보다 훨씬 민감한 피부를 지닌 마그리트는 옷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 아무 옷이나 입을 수 없기 때문인데, 이 역시 직장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다. 결국 마그리트는 별난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런 마그리트가 정확히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기뻐하는 모습이란... 자신이 왜 이렇게 지내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냥 별난 것이 아니라 마그리트는 본래 그랬던 것이다.

 

물론 이런 진단을 받았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지닌 편견이 쉽사리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마그리트에게는 명확한 진단이 있다. 자신은 아스퍼거 증후군에 걸린 사람인 것이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냥 마그리트는 아스퍼거 증후군이 있는 사람일 뿐이다.

 

진단이 나왔다. 다음엔 그 진단에 맞게 살아가면 된다. 말처럼 쉽게 되지는 않지만, 마그리트는 문제를 발견했기에 해답을 찾아간다. 아스퍼거 증후군 진단을 받은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 위로도 받고, 또 자신을 이해해 줬던 친구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이 하기 싫어하는 끔찍히도 괴로워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한다. 자신에 맞는 생활을 찾고 공부를 하고, 그에 걸맞는 일도 한다.

 

사람과 직접 대면하기보다는 간접적으로 대면하는 것이 더 편한 마그리트에게 세상과 소통하는 길이 블로그, 유튜브 등과 같은 매체를 이용한 소통이다. 그런 방식으로 마그리트는 자신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그 다름을 인정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그러나 때로는 함께 살아간다.

 

그런 이야기를 만화로 그린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책 초반엔 칸트가 떠올랐다. 어쩌면 칸트도 아스퍼거 증후군 진단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고장을 한번도 떠나지 않았다고 하고, 늘 정확한 시간에 산책을 하곤 했다고 하니.

 

만화 주인공인 마그리트 역시 정확히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간다. 그런 반복 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급작스럽게 일이 생기면 불안해 진다. 물론 다른 사람의 농담을 이해할 수도 없고. 이런 모습이 변하지는 않는다. 다만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런 모습으로 사회에 자신을 드러내 놓는 것이다.

 

쉽게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고 말을 하지만 막상 다른 점을 발견하면 불편해 하지는 않았는지 이 만화를 통해 생각하게 된다. 자신에게는 아주 사소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너무도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마그리트의 경우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너무도 쉽게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기준에 맞추려고 하지 않았는지, 기준을 지니고 다른 존재를 보면 안 된다는 것을, 그냥 모두가 자신만의 기준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그리고 그런 기준을 없애고 그냥 그 존재 자체로 다른 존재를 인정해 주는 태도를 지녀야 함을, 함부로 남을 재단하면 안 됨을 생각하게 됐다.

 

이 책 152쪽에 있는 이 장면...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장면이다.

 

다름을 병으로, 치료해야만 하는 질병으로 너무도 쉽게 인식하는 그런 태도를 지니지 않았는지 반성하게 하는 장면.

 

좋은 만화다. 내용을 따라가도 또 그림을 음미하면서 읽어도 좋은 책. 자신이 정상이라고, 주류에 속한다고 여기는 사람들, 또 자신은 편견이 없는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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