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 청소년 현대 문학선 27
정찬 지음 / 문이당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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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제목을 보면 어떤 내용인지 연상할 수가 없다. 배경이 무엇인지를 제목만 보고는 찾을 수가 없다. 광야라... 그런데 읽다보면 이육사의 '광야'가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소설의 주인공 중 한명인 박태민이 기자인 머턴에게 한 말이다.

 

'해방 광주의 전사는 사라졌지만 새로운 전사들이 역사의 광야를 가로지르며 진실의 불꽃을 향해 달려올 것입니다. 해방 광주는 패배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의 패배일 뿐입니다.광야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195-196쪽)

 

자, 이 대사와 이육사의 '광야'에 나오는 구절.

 

'지금 눈 나리고 /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다시 천고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지금-여기에서 이기냐 지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진실은 역사의 흐름 속에 있다. 그것을 인식하고 행동하는 사람, 패배할 수가 없다. 역사 속에서 승리할 수 있다. 이것이 광주가 주는 의미다.

 

소설은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으로 시작해서 다시 독일 장벽이 무너지는 때로 돌아온다. 머턴 기자가 서술자로 나오는 장면인데, 그는 광주민주화 운동 때 그곳에서 취재를 한 기자다. 왜 광주를 이야기하는데 독일 장벽이 무너지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었을까?

 

분단, 이념 갈등. 그러나 결국은 무너지고 만 장벽. 광주민주화 운동 때 사람들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 바로 레드 컴플렉스라고 한다. 이념의 벽. 그것은 견고한 것을 넘어 사람들 마음 속에 들어와 행동을 낚아채고 있었던 것.

 

결국 광주민주화 운동이 그 당시에 성공하지 못하면서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게 되는 것은 이런 레드 컴플렉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나 레드 컴플렉스가 강하냐면 남북이 서로 교류하는 것도 철저하게 막혀 있었고, 언제든지 간첩이라는 말로 사람들을 옥죌 수 있었다. 하지만 독일은 어느 정도 교류가 있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적어도 레드 컴플렉스가 전가의 보도처럼 작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저러나 당시 광주에서는 이 점을 조심할 수밖에 없었고, 광주를 다룬 다른 소설들보다 이 소설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에 깔려 있었던 이념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권력을 쥔 자들이 권력이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몰아가는지를 보면, 섬뜩할 지경이다. 폭도로 몰아야 한다. 그런데 폭도가 되려면 적어도 경찰서와 같은 관공서를 습격해야 하고, 무장을 해야 한다. 총기를 소지한 폭도를 군인들이 제압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소설에서는 이 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진압 대상의 규모를 군사 작전이 가능한 범위 안으로 축소시켜야 하는 것은 필연이다. 그와 함께 신군부에게 절실한 것은 군사 작전의 명분이다. 쇠파이프나 각목 등 지극히 원시적 무장 상태인 시위대를 대상으로 현대식 무기를 앞세워 진압한다면 정당성을 획득할 수가 없다.

  신군부의 발포 목적은 명확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시위대를 총기로 무장시키기 위함이었다. 시위대의 총기 무장이야말로 수십만 시민들 속에서 소수 강경파를 가려내는 마법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국가 질서에 반역한 폭도임을 선전하는 데 대단히 유용한 모습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78-79쪽)

 

'도로 양편에 매복한 계엄군이 시위대 차량이 지나가도 총 한 번 쏘지 않았다. 화순경찰서 무기고에서 카빈총 80여정을 싣고 광주로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계엄군들은 시위대 차량에 실린 총을 빤히 보고도 가만히 있었다.' (83쪽)

 

소설은 상상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그 상상이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 있음직해야 한다. 충분히 개연성 있는 이야기 전개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신군부는 광주를 무력으로 진압한다. 이렇게 그들은 광주 시민군을 폭도로 규정하고 행동한다. 또한 도청에 남은 사람들을 분열시키기 위해 '간첩'을 활용한다. 진짜 간첩이든 가짜 간첩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간첩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사람들은 하나에서 여럿으로 분열된다. '간첩'이라는 말은 무시무시하게 작동한다. 사람들의 행동을 주저하게 하고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게 만든다.

 

그렇게 광주를 진압하지만 그것으로 광주는 끝나지 않는다. 끝까지 도청에 남았던 사람들이 뿌려놓았던 그 '노래의 씨'들이 싹을 틔운 것이다. 마지막에 죽을 줄 알면서도 도청으로 가는 박태민, 그리고 도예섭 신부. 머턴 기자는 이들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이런 이들의 태도로 인해 지금의 우리가 있게 된다.

 

'창 너머에 있는 죽음을 엿보기 시작하면서부터 떠나지 않는 두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 박태민과  신부 도예섭이었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그들의 입가에는 똑같이 미소가 어렸다. 한 사람은 상냥하게, 또 한 사람은 천진하게.' (12-13쪽)

 

소설에는 여러 인물이 나온다. 항쟁지도부가 되는 인물(박태민), 신부(도예섭), 군인(강선우), 대학생(김창길), 기자(머턴)가 나와 그 당시의 현실에서 자신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행동을 하도록 표현하고 있다. 그런 인물들을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생각할 수 있다.

 

같은 상황에 있더라도 누구가 같게 행동하지는 않는다. 광주에 있었던 이 사람들, 서로 다르게 행동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아무런 고민도 없이 그냥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고뇌를 통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 것이다. 그것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행동들 중에서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같은 장소, 같은 상황이지만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해주는 소설을 통해서, 역사책에서 볼 수 없었던 생생한 행동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인물 중 누군가에게 내 감정을 담게 된다. 이게 소설이 지닌 힘이다.

 

이 소설 생각할거리가 참 많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 그때의 상황을 여러 각도로 볼 수 있게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제목이 광야인 것은 이 광야에 뿌린 씨는 비록 '가난한 노래의 씨'일지 몰라도 언젠가는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됨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광주 시민들은 절대로 패배하지 않았음을 소설은 박태민을, 도예섭 신부를 또 그밖의 사람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광주를 다룬 여러 소설들과 함께 읽으면 더 좋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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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시집을 만나면 반갑다. 한국문학의 재발견이라는 주제로 한 작고문인 선집이다. 이런 작업을 한 출판사와 문학관련 사람들이 고맙다.

 

  자칫하면 잊혀질 문인들을 이렇게라도 우리 곁에 있게 한 것이 반갑고 고맙다.

 

  이동주 시,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디선가 본 시가 있다. 혼야(婚夜)와 강강술래는 예전에 본 시다. 이동주라는 시인 이름이 내 기억 속에 있는 것은 이 시들이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다는 얘기리라.

 

이동주 시를 읽으면 한폭의 수채화라는 생각이 든다. 화려한 칼라보다는 흑백 사진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나라 예전 모습을 풍속화로 그려놓은 듯한 시들이 있는데, 그런 시들을 읽으며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과거의 모습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잔잔하다. 마음이 편하다. 어려운 말도 별로 없다. 다만 사투리가 쓰여 있어서 생소한 어휘들이 있지만, 오히려 토속적인 멋을 드러내고 있다.

 

시들이 길지도 않아서 읽기도 편하고. 예전 정서를 경험할 수 있다는 면에서도 좋다. 긴 시가 전집에 한 편(사모곡) 있는데, 그 시는 시인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시로 쓴 것이다. 시집 와 고생하면서 자식들을 키운 어머니에 대한 정을 시인은 이렇게 시로 표현하고 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예전 어머니들이 자신들이 재능을 펴지 못하고 한평생을 보낸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아야 하는데...

 

시인의 첫시집인 [혼야]에 어머니의 글이 실려 있다. '서문에 대하여' 라는 김현승의 글 다음에 '동주에게'라는 어머니의 글. 시인은 그만큼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어머니가 쓴 글 가운데 '너 어려서 입버릇이 첩첩이 쌓인 내 포한을 글로써 풀겠다더니 그예 시 쓰는 법을 배우고 말았구나'라는 말. 이런 어머니의 삶이 바로 시 '사모곡'에 잘 나오고 있다.

 

시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강강술래'를 보자. 운율도 잘 살아있어서 읽기에도 좋다.

 

  강강술래

 

여울에 몰린 은어떼

 

삐비꽃 손들이 둘레를 짜면

달무리가 비잉, 빙 돈다

 

가아응 가아응 수우워얼 래에

목을 빼면 설움이 솟고……

 

백장미 밭에

공작이 취했다

 

뛰자 뛰자 뛰어나보자

강강술래

 

뇌누리에 테프가 감긴다

열두 발 상모가 마구 돈다

 

달빛이 배이면 술보다 독한 것

 

기폭이 찢어진다

갈대가 스러진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송영순 엮음, 이동주 시전집. 현대문학. 2010년.  57-58쪽.

 

살아 있을 때 많은 시집을 내지는 않아서 그래서 더 소중한 전집이다. 자칫하면 사라질 뻔한 작품들을 모아놓아 우리 곁에 남겨 놓았으니.

 

이런 작업들이 앞으로도 지속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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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정희진의 글쓰기 2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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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는 쓰기다. 쓰기는 읽기다. 읽으면서 머리 속에 글을 쓴다. 그냥 글자만 따라가지는 않는다. 문자를 읽으면서 그 문자에 속한 또는 문자가 포괄하고 있는, 문자를 통해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이 자연스레 쓰인다.

 

마찬가지로 쓰기는 읽기다. 쓰면서 읽게 된다. 읽지 않을 수가 없다. 결국 쓰기와 읽기는 같은 행위가 된다. 그런데 왜 읽기와 쓰기를 할까? 그것은 자신을 알기 위해서다. 자신을 알고, 자신이 아는 것을 밖으로 표현해내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구절이 이 책에 있다.

 

'독서의 목적은 생각하는 긴장과 외로움, 쾌락을 얻기 위함이다. 독서는 이 목적에 충실해야 한다. ... 독서는 타인의 삶을 사는 행위다. 자기만의 사고와 태도, 시각은 과정에서만 얻을 수 있다.' (121쪽)

 

혼자만 알고 있으면 읽기 단계에 머무를 수 있다. 그냥 읽는 것이다. 이때 읽기가 쓰기라고 했으니 어디에 쓰는가 하면 바로 자기 자신에게 쓴다. 자신의 몸에 마음에 쓰는 것, 그것이 바로 문자를 통해 남들에게 알리지 않는 쓰기다.

 

이것도 의미가 있지만 읽기가 남들에게 알려지는 쓰기로 전환이 되면 더 많은 파장을 만들 수 있다. 나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이 되기 때문이다. 내 읽기가 쓰기를 통해 다른 사람의 읽기로, 다시 다른 사람의 쓰기로 간다. 이렇게 읽기와 쓰기가 연결되면서 끊이지 않으면 사람들은 무지에서 벗어나게 된다.

 

무지를 알게 되는 것, 그것은 바로 읽기와 쓰기에서 나온다. 무지를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읽기와 쓰기를 굳이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냥 행할 뿐이다. 이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해결하기 어려운 권력은 '몰라도 되는 권력'이다' (178쪽)

 

바로 읽기/쓰기가 필요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그냥 행한다. 그것이 잘못된 건지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지는 권력에서 비롯된다. 권력은 부패하기도 하지만 무지로 굳어지게 되기도 한다.

 

무지로 굳어진 권력은 자신들의 세계가 당연하다고 여기고 행동한다. 그렇게 살아간다. 이 책은 이런 당연한 세계에 틈을 내고 있다.

 

정희진의 읽기가 쓰기로 전환되어 우리의 읽기를 촉발하고 다시 우리에게 쓰도록 하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지의 세계, 당연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할지 생각하게 하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이 구절을 보자.

 

'앎이란,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지식을 다르게 배치하는 것이다. 지식이 자료에 불과함을 증명하는 일이다. 그래서 진보(進/步)의 방식은 계속 걷기고, 보수(保/守)의 도구는 과거를 지키는 익숙함(진부함)이다. 쉬운 말은 지배자, 사기꾼, 게으른 이들의 언어다. ... 사회는 약자가 말만 해도 폭력으로 간주한다.' (165쪽)

 

결국 읽기가 쓰기로 나아가지 않으면, 익숙함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타인에 대해서 성찰할 기회를 잃는다. 왜 우리는 읽기와 쓰기를 통해서 타인이 되어야 할까?

 

'타인이 됨으로써 약자의 저항(탈전통)과 융합을 강조하는, 공동체의 원리를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169쪽)

 

바로 우리가 홀로 살아가지 않고 함께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읽기/쓰기는 공동체의 삶에, 자신의 지식을 재배치하는데 도움을 준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을 '나를 알기 위해서 읽는다'로 바꿀 수가 있다. 우리는 나를 알기 위해,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알기 위해 읽어야 한다. 자신의 관점을 뒷받침해줄 책만이 아니라 자신과 정반대에 있는 관점을 제시하는 책도 읽어야 한다.

 

아니, 좋은 읽기는 자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내가 안주하고 있던 세상을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에 내가 발딛고 있는 현실을 흔들지 못하는 읽기는 나를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정희진의 이 책을 읽으며 놓치고 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나 역시 무지와 당연 속에서 살고 있었음을. 그냥 내게 주어졌기 때문에 의식조차 하지 않고 살고 있었던 경우가 많았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이 좋은 읽기라고 생각한다.

 

정희진이 읽은 책을 평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 것이 이 책이다. 수많은 책이 나오고, 많은 생각들을 만나게 되지만 주를 이루는 것은 여성에 관한 글들이 많다. 그 중에 몇 구절을 인용한다.

 

'여성 대상 폭력의 특징은 가장 죄질이 나븐 사례가 법으로는 가장 문제가 없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186쪽)

 

'차별은 심한데 인식이 낮은 사회에서는 가해자가 피해자가 된다. 남성의 자연스런 일상이 여성에게는 모욕, 차별, 생명위협이다. 남성은 자신의 행동에 대응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행복권 침해'로 생각하고 증오와 피해의식을 느끼기 쉽다.' (218쪽)

 

'여성 살해는 일상이 연결이자 수순이다. 성소수자나 '흑인'의 경우와 같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포기를 해결책으로 삼는다.' (225쪽)

 

'여성에 대한 폭력은 남성(아버지)들 간의 자존심, 자원, 욕망을 둘러싼 갈등을 여성의 몸에 실천하는 체계화된 사회 시스템이다. (227쪽)

 

미국에서 '흑인'에 대한 살해들이 문제가 되고,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운동, 그와 더불어 백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외침,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 누군가에 의해 침해될 수 없는, 누구도 함부로 해서는 안될 생명이다. 약하다는 이유로,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어떤 생명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

 

이 책을 읽어보라. 읽기를 통해 자신의 쓰기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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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 19 사태가 장기화 되면서 녹색평론 이번 호를 기다리게 됐다. 이번 호에서 분명 코로나 19를 다룰텐데, 어떤 관점에서 다룰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칭찬받는 'K-방역' 쪽으로 논지가 흘러갈 것 같지는 않았고, 감염병 자체만을 다룰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분명 코로나 19 사태는 환경-생태 문제와 연결되어 있을테니, 그 관점에서 사상 초유라고 하는 이 코로나 19 사태를 분석하는 글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그렇다. 코로나 19는 질병으로만 판단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흔히 백신이 개발되면, 치료제가 나오면 아무렇지도 않게 예전처럼 다시 생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됨을 이번 호에서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백신과 치료제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코로나 19와 같은 바이러스는 어떤 형태로든 계속될 것이고, 전세계를 팬데믹 상태로 몰고간 이번 일이 반복되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 19를 코로나 19에만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살아온 삶의 형태, 또는 근대물질문명, 신자유주의, 성장우선주의, 민주주의와 연결시킨 글들이 많았다. 그렇다. 우리는 코로나 19 이전과 이후는 판연하게 다른 세상일 거라고, 우리는 결코 코로나 19 이전처럼 살아갈 수 없을 거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번 호를 통해서 생각하게 된다.

 

코로나 19와 관련된 글들 제목만 나열해 본다.

 

한국형 뉴딜과 재난자본주의(강수돌), 균형재정론은 틀렸다(홍기빈), 팬데믹의 역사가 가르쳐주는 것(프랭크 스노든), 농업·농촌부터 살리는 그린뉴딜을(김해창), 팬데믹과 쿠바의 의료국제주의(원영수), 코로나, 흑인인권, 미국의 실상(전홍기혜)

 

얼핏 보면 코로나 19와 관련이 없을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 기후변화 아니, 기후위기. 에너지에 관한 문제... 이런 글들을 '에너지 전환보다 중요한 것'이라는 제목으로 묶었다.

 

기후변화에 대한 거짓 해결책들(메리 와일드파이어), 스크린의 배후-인터넷 접속의 진정한 비용(케이티 싱어), 기후위기의 시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장병윤) 

 

이중에 건강 문제도 건강 문제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기후위기를 조장하고 가속하는 것이 인터넷이라는 것. 우리가 편리하게 살기 위해서 얼마나 지구에 해를 끼치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하는 글이 바로 '스크린의 배후-인터넷 접속의 진정한 비용'이란 글이다. 이에 관련된 더 많은 자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김종철 선생의 글, 아마도 살아계셨을 때 쓴 마지막 글들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은데...

'코로나 시즌, 12개의 단상'

 

코로나 19와 기후위기가 연관되어 있다면, 이것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진정한 민주주의. 민주주의 실현 없이 기후위기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고, 기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생태계 파괴가 계속될 것이라는 이야기니, 코로나 19와 같은 감염병은 지속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

 

그렇다면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 민주주의를 실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국회. 따라서 '21대 국회를 바라보는 눈'이라는 제목으로

 

21대 국회가 해야 할 일(하승수), 21대 국회는 국민발안권부터 제정하라(최자영) 는 글이 실려 있다.

 

한데 21대 국회, 과연 제대로 일을 할까? 이들은 여전히 예전과 같은 행태를 되풀이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국민들은 이들을 어찌할 수가 없다. 4년동안 속만 끓이며 지켜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국민은 주권을 지니고 있다고 헌법에 명시되어 있지만 어떤 법률을 만들 권한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국회의원들을 소환할 권리도 없고.

 

그러니 이번 호에서 주장한 국회의원들을 뽑는 문제, 세상에 꼼수 정당, 위성 정당이라는 말을 듣는 정당들을 만들어 국회에 들어가고 만 그 행태들을 두 눈 뜨고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말로만, 헌법에만 조항으로 있는 주권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에 대한 제안을 한 글들은 의미가 있다.

 

국민들이 제대로 주권을 발휘해야 자신들만이 아니라 후손들이 살아갈 세상을 위해 특정 집단의 이익이 아닌 모두의 이익을 위한 사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나만이 아니라 후손들까지도 고려하는 사람들에게는 생태 파괴는 있을 수 없고, 생태 파괴가 멈춰진다면 코로나 19와 같은 감염병을 예방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세상만사는 모두가 연결되어 있음을, 코로나 19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후위기와 민주주의의 정체와도 연결되어 있음을 이번 호를 읽으며 생각하게 됐다. 민주주의 정체는 특정 집단의 이익을 앞세우는 신자유주의, 성장 우선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 그것을 극복하는데는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성찰해야 함을 생각하게 해준 이번 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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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라고 당당히 말해요 - 자유와 인권을 지키기 위한 외침 라임 틴틴 스쿨 15
다니엘레 아리스타르코 지음, 니콜로 펠리존 그림, 이현경 옮김 / 라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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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이 읽어야 할 책이다.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익하다는 것을. 사회를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책이다.

 

그런 사람들을 허균의 말을 인용하면 호민이다. 앞서 가는 이. 이들이 앞서 갔기에 후대 사람들이 조금더 좋아진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호민들. 나중에 역사 책이나 전기에서 보면 그들이 위대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들 역시 그렇게 행동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었는지도 알아야 한다.

 

그냥 고민없이 행동으로 나서지는 않는다. 어떤 행동을 할 때 그에 따르는 불이익이 엄청나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행동하면 많은 사람들이 따른다.

 

이 책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짧은 분량으로 그 사람들이 한 일을 정리해주고 있어서 청소년들이 읽기에 좋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일들을 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어서 좋다. 또한 그 행동을 한 시기도 나와 있어서 역사의 흐름을 이해할 수도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도 있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 인간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생각하면 이들에 대해서 꼭 알아야 한다.

 

체사레 베카리아(사형 제도에 반대한 사람), 에멀린 팽크허스트(여성에게 참정권을 위해 노력한 사람), 나짐 히크메트(글 쓸 자유를 위해 감옥에서도 시를 외부로 내보낸 터키 사람), 지몬 비젠탈(나치 범죄자들을 추적한 사람), 프랑카 비올라(성폭력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몸 권리를 지킨 사람), 마바쉬 사베트(종교의 자유를 위해 포기하지 않은 사람) 등등.

 

이들의 행동에 대해서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이다. 행동해야 한다.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리고 교육은 지식을 넘어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

 

적어도 배우는 공간에서 부당함을 느끼면 그것부터 고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것. 청소년들에게 이런 책을 읽히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생각하는 인간, 주체로 설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 인간 역사를 통해 호민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책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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