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인간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0
랠프 엘리슨 지음, 조영환 옮김 / 민음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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랠프 엘리슨, 처음 들어보는 작가. 하긴 미국 작가 중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다른 책을 읽다가 이책에 대한 내용을 보고 읽어보고 싶어졌다. 보이지 않는 인간이라니. 투명인간이란 말인가? 하지만 아니다. 투명인간 류의 소설이 아니다. 미국 흑인에 관한 이야기다. 미국에서 흑인으로 살아가는 일이 어떠한지를 남자 주인공을 통해서 보게 된다.

 

고등학교에서 연설을 잘해서 장학금을 받는 주인공. 백인들이 그를 초대한다. 연설이 훌륭했다고, 다시 그 연설을 들려달라고. 한껏 기대에 부풀어 간 곳에서 그가 맞닥뜨린 것은 배틀로열과 그를 모독하는 백인들의 괴롭힘이다.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고 자신들이 마냥 갖고 놀아도 되는 존재로만 인식한다. 그에 합당한 돈을 주면 된다는 식. 장학금이라는 것도 그들이 베푸는 시혜에 불과하다. 위에서 아래로 철저하게 차등을 둔,자신들의 우월함을 과시하고 그럼에도 자신들의 관용을 보여주는 하나의 장치.

 

그런데 주인공은 깨닫지 못한다. 그들에게 잘보이려고 한다. 대학에 들어가 3학년이 되었을 때 대학 설립자 친구인 이사를 안내하는 일을 한다. 그에게는 그것이 너무도 중요한 일이다. 잘보여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두 가지 실수를 한다. 그것이 실수일까?

 

백인 이사에게 흑인들이 사는 집을 보여주고, 그 집에서 겪은 일을 듣게 하는 일이 실수? 또 흑인들이 주로 모이는 술집에 어쩔 수 없이, 백인 이사는 위스키를 달라고 재촉하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그가 알고 있는 술집은 그곳밖에 없었으니까 간 것이 실수라고?

 

그건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럼에도 그는 그 일로 인해 대학에서 퇴학당한다. 흑인 총장에게서. 취업을 알선받는 것처럼 속아서. 결국 흑인 총장은 피부만 흑인이지 살아가는 방식은 백인과 다를 것이 없다. 아니 백인보다 더하다.

 

파농 말에 의하면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인 것이다. 아니다. 이 소설의 흑인 총장은 이 말을 뒤집어야 한다. 그는 하얀 가면을 쓴 것이 아니라 마음 속이 하얗게 된 것이다. 하얘지고 싶어서 자신의 출신을 잊고, 오로지 백인들의 구미에 맞는 말과 행동을 하는 존재.

 

그것을 깨닫지 못한 주인공. 감지덕지하며 대학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로 북부로 떠난다. 북부에서 드디어 그들의 위선을 알게 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아직도 그는 백인처럼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우연히 길거리로 쫓겨나는 흑인 노부부를 보면서 그는 연설을 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동지회에 가입하게 된다. 사람들이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동지회. 그에게 새로운 길이 열린 것이다. 새로운 이름을 그들에게 받는다. 이제는 하얗든 꺼멓든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는 일하려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 제목인 '보이지 않는 인간'답게 주인공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 존재하되 남들이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동지회에서 이름을 받았음에도 소설에서는 그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 아니 불린지는 몰라도 독자인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다. 그런데 이게 그만의 문제일까? 최근에 미국에서 일어난 플로이드 사건을 보라.

 

저항을 하지 못하는 사람 목을 눌러 질식해서 죽게 만든 경관들. 그 경관은 백인이다. 21세기에도 여전히 흑인은 안전하지 못하다. 하나의 존재로 온전히 인정받지 못한다. 그러니 2권 연보를 참조하면 이 소설은 1945년에 집필하기 시작하여 1952년에 출간되었다고 하는데, 여전히 진행형이다.

 

어떻게 진행이 되는지 2권으로 넘어간다. 1ㅡ2권 세트로 책이 묶여 있으면 한 번에 쓸 수 있어서 좋을텐데, 그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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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7 1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17 15: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직까지는 질문은 인간의 특권이다. 인간만이 질문을 할 수 있다. 물론 언어를 통해서 말이다. 인공지능이 나와서 질문을 하게 된다면 인간이 지닌 가장 큰 특권이 사라지는 것이 될 것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입력이 곧 출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입력과 출력 사이에 다른 많은 활동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는 1을 입력했다고 1이 출력된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1을 입력해도 다양한 결과를 출력할 수 있다. 입력과 출력 사이에 질문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질문은 소중하다. 질문을 억압하지 말아야 한다. 질문은 우리를 더욱 다양한 세상으로 데려가 주기 때문이다.

 

파블로 네루다. 그가 쓴 74개의 질문의 시를 묶어놓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네루다는 시를 통해서 많은 질문을 한다. 그는 나이들어서도 닫힌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열린 세상을 본 것이다. 그것을 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 질문을 하자. 질문을 억압하는 자는 닫힌 세상을 추구하는 자다. 그런 세상은 전체주의다. 질문이 봉쇄된 사회. 그 닫힌 사회는 독재가 횡행하는 사회다. 그런 사회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질문이 활발하게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질문을 잘하는가? 예전에 오바마 전 미국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할 때 우리나라 기자들에게 특별히 질문 기회를 주었다고 하던데... 그때 제대로 질문을 한 기자가 없었다는 글을 어디서 읽은 기억이 있는데...

 

기자란 질문을 업(業)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 아닌가. 그런 사람들조차도 질문을 잘 하지 못하면 누가 질문을 하지? 정답!! 시인!!!

 

이건 아니다. 시인들은 당연히 질문을 한다. 그래서 시를 쓴다. 그들에게는 입력과 출력 사이가 멀어도 한참 멀다. 그 먼 거리에서 그들은 수많은 질문들을 하고 답을 찾고 또 그 답에 대한 질문을 하고 답을 찾고를 반복한다. 그들은 단 하나의 답을 찾지 않는다. 오히려 계속되는 질문이 있는 답을 선택한다. 그런 존재가 시인이다.

 

이런 시인들이 존중받는 사회, 그런 사회는 자연히 질문이 많은 사회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74개의 질문 중에 44번 시를 인용한다. 이 시와 더불어 70번 71번 시도 읽어볼 만하다. 히틀러에 관한 질문. 그런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다면 아마도 이 세상 독재자들 섬뜩할 것이다. 하여간 44번 시를 보자.

 

       44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그는 알까

그리고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왜 우리는 다만 헤어지기 위해 자라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썼을까?

 

내 어린 시절이 죽었을 때

왜 우리는 둘 다 죽지 않았을까?

 

만일 내 영혼이 떨어져나간다면

왜 내 해골은 나를 좇는 거지?

 

파블로 네루다. 정현종 옮김. 질문의 책. 문학동네.2013년. 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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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달리기 (리커버) 푸른숲 역사 동화 7
김해원 지음, 홍정선 그림, 전국초등사회교과 모임 감수 / 푸른숲주니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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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가 좋았던 아이가 있다. 잘 달려서 도 대표가 되어 전국소년체육대회에 나가기 위해 합숙훈련에 들어간다. 합숙소는 광주에 있고, 나주에 살던 명수는 이곳에서 6호방을 쓴 나머지 세 명의 아이와 만나 우정을 쌓는다. 자신과 같은 종목인 1000미터에 출전하는 정태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그를 이기기 위해 이를 악물고 연습을 하는데...

 

어느날 이들이 무단으로 외출을 해서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을 만나게 된다. 군인들이 무지막지하게 진압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두려움에 떠는 아이들.

 

그 와중에 명수에게 시계를 주러 오던 명수의 아버지가 총을 맞아 돌아가신다. 비극은 명수에게도 닥친 것이다. 명수는 가족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친구들의 도움으로 나주로 간다. 동화는 이렇게 전개된다.

 

시작은 시계방을 찾은 남자로부터 시작한다. 회중시계를 고치러 온 남자. 그 회중시계를 심상치 않은 눈으로 보는 시계방 주인. 이야기는 여기서 과거 명수로 돌아간다.

 

명수가 겪은 일들이 서술되고 끝부분은 다시 시계방으로 돌아온다. 회중시계를 갖고 온 남자는 당시 군인이었고, 집으로 돌아가는 명수에게 총을 겨누었던 사람. 그는 시간이 지나도 멈춰진 회중시계처럼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군인이었던 사람들도 명령에 따라 움직였지만, 그들 역시 엄청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었음을 이 동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자신이 총을 쏘지 못했던 아이를 수소문해서 그 아이가 잘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하는 모습.

 

아이가 시계방을 운영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그는 안도한다. 어느 정도 죄의식에서 벗어나고 있는 모습이다. 이렇게 동화는 화해를 이루고 있지만, 그것은 피해자들의 화해다. 여기서 진정한 가해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피해자들 뒤에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도 나타나지 않고 있으니, 책임도 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죄의식이 있겠는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책임져야 할 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

 

소아마비로 다리를 저는 아버지에게 달리기를 잘하는 아들은 자랑스러운 존재. 비록 다리를 절지만 시계를 고치는 것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는 아버지. 평소에 무뚝뚝한 아버지가 전국대회에 나가는 아들에게 시계를 선물하기 위해 광주민주화 운동 과정에 나주에서 광주로 오다가 총을 맞게 되는 비극.

 

이런 비극이 명수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겪었던 이 비극. 이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데... 아직도 진행 중이니.

 

이 동화를 읽어보면 코끝이 찡할 때가 있다. 그냥 읽으면서 광주의 슬픔을 만나게 된다. 그럼에도 이 동화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지속되고 있음을...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시계방을 운영하는 명수에게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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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에선가 이 시를 본 순간, 시집을 사서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렇게 강렬하게 마음을 붙잡는 시를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이다. 그래도 시집을 산다는 것이 시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가격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책값이 다른 물가에 비하면 그리 비싸다고는 할 수 없지만, 두고두고 읽을 수도 있어서 일회성 소비에 그치지 않는다고 하지만, 현재 내 소비의 순위에서 책은 좀 뒤로 밀리지 않았나 싶은데, 특히 시집은 주로 중고서점을 통해서 구입을 하고 있기에 망설이고 망설이고...

 

  그럼에도 '동태'란 이 시가 워낙 강렬하게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으니, 에라 모르겠다 시집을 사자, 이와 비슷한 시를 또 만날 수도 있지 않겠냐 하고 새 시집을 구입.

 

이래야 시인도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을텐데, 시집을 통해서 독자들과 만나고, 시집만으로도 시인이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마음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는 나조차도 우선 순위에서 시집을 뒤로 돌리고 있으니... 반성하면서 시집을 읽다.

 

시집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마음에 와닿는 시들이 제법 있다. '동태'만큼 강렬하지는 않지만, 시집에 두번째로 실려 있는 '등'이라는 시도 좋다. 등, 자신은 자기 등을 보지 못하지만 남들은 본다. 그런데 내가 보지 못하는 등이 남에게는 든든한 버티목일 수 있다는 사실. 그렇게 자신의 등을 내어주는 사람들로 인해 좀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는 것.

 

조금 더 넘기면 '숲'이란 시... 신영복 선생의 글에서 보았던 나무가 외쳤다는 말, 우리 모여 숲을 이루자고. 그렇게 모여 숲을 이루는 사람들. 함께 사는 사람들.

 

그러다가 '개미'란 시를 보면 섬뜩해진다. 우리가 처한 현실이 어쩌면 지금 이 상태인지도 모른다.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주식시장이 개미에게 열리면서부터 / 자본과 노동을 한 몸에 갖게 된 개미들은 / 자기가 자본가인지 노동자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박상화, 개미 1연. 70-71쪽)

 

이렇게 헷갈린 사람들이 나중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이런 모습이다.

 

'노동자는 착취를 당한다는 말도 뺏겼고 / 노동의 꿈도 뺏기고 / 노동자라는 말도 뺏겼다. / 뺏긴다는 말도 뺏기고 나면 / 진짜 개미처럼 일만 하다 죽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박상화, 개미 6연?. 70-71쪽)

 

돈이라는 것만을 추구하다가 마지막으로 도달해야 할 모습에 대한 경고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가 노동자임을 망각한 결과, 뺏긴다는 말조차 빼앗겨 버리게 되는 일. 이렇게 되면 안 되겠지.

 

'동태'라는 시와 상반되게 같은 명태인데, 황태는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단단하게 자신을 무장하지 못하면 이렇게 된다. 제목도 '황태'가 아니라 '지옥도(地獄圖)'다.

 

  지옥도(地獄圖)

 

살아가 죄가 많으면 지옥엘 간다지

창자는 꺼내 소금에 절여지고

입술을 꿰어 묶이고

알몸으로 매달려 겨울바람 찬 눈에 살이 터지면

붉게 달궈진 석쇠에 얹혀 몸 비틀며 살 타는 냄새

갈기갈기 찢겨지고

냄새나는 이빨에 물려 질겅하고 씹히고 나서

알코올에 잠겨 굳은 몸 풀리면 토해진다지

살아서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길래

황태여

 

박상화, 동태, 푸른사상. 2019년. 76쪽.

 

이게 지옥이 아니고 뭔가. 이런 지옥에서 그나마 벗어나는 일, '황태'에서 '동태'로 가는 일이다. 자, 마음에 남아 있는, 내게 강렬한 인상을 준 '동태'란 시를 인용하며 맺는다.

 

   동태

 

동태는 강자였다 콘크리트 바닥에 메다꽂아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동태를 다루려면 도끼 같은 칼이어야만 했다

아름드리나무 밑둥을 통째로 자른 도마여야 했다

실패하면 손가락 하나 정도는 각오해야 했다

얼음 배긴 것들은 힘이 세다

물렁물렁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한때 명태였을지라도,

몰려다니지 않으면 살지 못하던 겁쟁이였더라도

뜬 눈 감지 못하는 동태가 된 지금은

다르다

길바닥에 놓여진 어머니의 삶을

단속반원이 걷어차는 순간

그놈 머리통을 시원하게 후려갈긴 건

단연 동태였다.

 

박상화, 동태, 푸른사상. 2019년.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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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청소년 현대 문학선 27
정찬 지음 / 문이당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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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제목을 보면 어떤 내용인지 연상할 수가 없다. 배경이 무엇인지를 제목만 보고는 찾을 수가 없다. 광야라... 그런데 읽다보면 이육사의 '광야'가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소설의 주인공 중 한명인 박태민이 기자인 머턴에게 한 말이다.

 

'해방 광주의 전사는 사라졌지만 새로운 전사들이 역사의 광야를 가로지르며 진실의 불꽃을 향해 달려올 것입니다. 해방 광주는 패배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의 패배일 뿐입니다.광야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195-196쪽)

 

자, 이 대사와 이육사의 '광야'에 나오는 구절.

 

'지금 눈 나리고 /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다시 천고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지금-여기에서 이기냐 지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진실은 역사의 흐름 속에 있다. 그것을 인식하고 행동하는 사람, 패배할 수가 없다. 역사 속에서 승리할 수 있다. 이것이 광주가 주는 의미다.

 

소설은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으로 시작해서 다시 독일 장벽이 무너지는 때로 돌아온다. 머턴 기자가 서술자로 나오는 장면인데, 그는 광주민주화 운동 때 그곳에서 취재를 한 기자다. 왜 광주를 이야기하는데 독일 장벽이 무너지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었을까?

 

분단, 이념 갈등. 그러나 결국은 무너지고 만 장벽. 광주민주화 운동 때 사람들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 바로 레드 컴플렉스라고 한다. 이념의 벽. 그것은 견고한 것을 넘어 사람들 마음 속에 들어와 행동을 낚아채고 있었던 것.

 

결국 광주민주화 운동이 그 당시에 성공하지 못하면서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게 되는 것은 이런 레드 컴플렉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나 레드 컴플렉스가 강하냐면 남북이 서로 교류하는 것도 철저하게 막혀 있었고, 언제든지 간첩이라는 말로 사람들을 옥죌 수 있었다. 하지만 독일은 어느 정도 교류가 있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적어도 레드 컴플렉스가 전가의 보도처럼 작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저러나 당시 광주에서는 이 점을 조심할 수밖에 없었고, 광주를 다룬 다른 소설들보다 이 소설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에 깔려 있었던 이념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권력을 쥔 자들이 권력이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몰아가는지를 보면, 섬뜩할 지경이다. 폭도로 몰아야 한다. 그런데 폭도가 되려면 적어도 경찰서와 같은 관공서를 습격해야 하고, 무장을 해야 한다. 총기를 소지한 폭도를 군인들이 제압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소설에서는 이 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진압 대상의 규모를 군사 작전이 가능한 범위 안으로 축소시켜야 하는 것은 필연이다. 그와 함께 신군부에게 절실한 것은 군사 작전의 명분이다. 쇠파이프나 각목 등 지극히 원시적 무장 상태인 시위대를 대상으로 현대식 무기를 앞세워 진압한다면 정당성을 획득할 수가 없다.

  신군부의 발포 목적은 명확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시위대를 총기로 무장시키기 위함이었다. 시위대의 총기 무장이야말로 수십만 시민들 속에서 소수 강경파를 가려내는 마법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국가 질서에 반역한 폭도임을 선전하는 데 대단히 유용한 모습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78-79쪽)

 

'도로 양편에 매복한 계엄군이 시위대 차량이 지나가도 총 한 번 쏘지 않았다. 화순경찰서 무기고에서 카빈총 80여정을 싣고 광주로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계엄군들은 시위대 차량에 실린 총을 빤히 보고도 가만히 있었다.' (83쪽)

 

소설은 상상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그 상상이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 있음직해야 한다. 충분히 개연성 있는 이야기 전개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신군부는 광주를 무력으로 진압한다. 이렇게 그들은 광주 시민군을 폭도로 규정하고 행동한다. 또한 도청에 남은 사람들을 분열시키기 위해 '간첩'을 활용한다. 진짜 간첩이든 가짜 간첩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간첩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사람들은 하나에서 여럿으로 분열된다. '간첩'이라는 말은 무시무시하게 작동한다. 사람들의 행동을 주저하게 하고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게 만든다.

 

그렇게 광주를 진압하지만 그것으로 광주는 끝나지 않는다. 끝까지 도청에 남았던 사람들이 뿌려놓았던 그 '노래의 씨'들이 싹을 틔운 것이다. 마지막에 죽을 줄 알면서도 도청으로 가는 박태민, 그리고 도예섭 신부. 머턴 기자는 이들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이런 이들의 태도로 인해 지금의 우리가 있게 된다.

 

'창 너머에 있는 죽음을 엿보기 시작하면서부터 떠나지 않는 두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 박태민과  신부 도예섭이었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그들의 입가에는 똑같이 미소가 어렸다. 한 사람은 상냥하게, 또 한 사람은 천진하게.' (12-13쪽)

 

소설에는 여러 인물이 나온다. 항쟁지도부가 되는 인물(박태민), 신부(도예섭), 군인(강선우), 대학생(김창길), 기자(머턴)가 나와 그 당시의 현실에서 자신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행동을 하도록 표현하고 있다. 그런 인물들을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생각할 수 있다.

 

같은 상황에 있더라도 누구가 같게 행동하지는 않는다. 광주에 있었던 이 사람들, 서로 다르게 행동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아무런 고민도 없이 그냥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고뇌를 통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 것이다. 그것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행동들 중에서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같은 장소, 같은 상황이지만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해주는 소설을 통해서, 역사책에서 볼 수 없었던 생생한 행동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인물 중 누군가에게 내 감정을 담게 된다. 이게 소설이 지닌 힘이다.

 

이 소설 생각할거리가 참 많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 그때의 상황을 여러 각도로 볼 수 있게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제목이 광야인 것은 이 광야에 뿌린 씨는 비록 '가난한 노래의 씨'일지 몰라도 언젠가는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됨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광주 시민들은 절대로 패배하지 않았음을 소설은 박태민을, 도예섭 신부를 또 그밖의 사람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광주를 다룬 여러 소설들과 함께 읽으면 더 좋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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