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에 대하여 - 용서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강남순 지음 / 동녘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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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라는 말을 생각한다. 용서받지 못한 자, 아니 용서를 할 기회를 주지 않는 자가 많은 세상에서, 용서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그냥 나는 너를 용서한다라고 쉽게 말하지만 용서가 어디 그리 쉽게 되는 것인가? 조금 시일이 흘렀지만 영화 '밀양'을 보라. 자식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하기 위해 그 엄마는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는가? 자책하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하고 분노에 빠지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고 온갖 감정들을 겪고 겪은 다음에 살인자를 용서하려는 마음이 들고, 그 살인자를 만나 용서하겠다고 용기를 냈는데... 이미 살인자는 자신은 용서를 받았다고 한다. 누구에게? 신에게? 이런 다시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피해자의 엄마.

 

이 영화 이청준이 쓴 '벌레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라고 한다. '용서'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소설과 영화였는데... 이 책은 이런 용서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에서 살피고 있다.

 

용서가 무엇인지 살핀 다음 용서의 종류를 살피는데... 용서의 종류에는 자기 용서, 대인 관계적 용서, 정치적 용서, 형이상학적 용서가 있다고 한다. 용어를 보면 대략 어떤 용서인지 알 수 있게 되는데...

 

개인적 용서도 힘든데, 대인 관계적 용서에서 정치적, 형이상학적 용서는 더더욱 힘들다. 왜냐하면 용서에는 기본적으로 '진실'과 '기억'이 작동해야 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246=247쪽 참조)

 

그런데 '진실'이 밝혀지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에서 용서가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다. 또한 용서를 하면 잊는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용서가 아니라 망각일 뿐이라는 것이다. 기억하지 않는 용서는 재반복 될 뿐이라는 것.

 

기억하지 않으려 한 용서들이 폭력을 계속 부르고, 학살을 계속 불러왔던 것이 우리 인류의 역사 아니었던가. 마찬가지로 진실도 권력을 쥔 자들이 왜곡하거나 은폐하거나 하지 않았던가.

 

물론 용서에도 전제가 필요하지 않는 무조건적 용서가 있지만, 그런 용서로 나아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것은 자신을 신의 위치에까지 올려놓아야 가능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용서일까? 나를 대리해서 신이 용서를 할까? 영화 '밀양'이나 소설 '벌레 이야기'는 그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용서는 당사자가 우선 되어야 한다. 피해자 본인이 아니라면 피해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우선 되어야 한다. 적어도 그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다스리고, 피해를 당한 사실을 기억하고 그것을 통해서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도록 하는 용서여야 한다.

 

당사자를 제외하고 다른 존재들을 용서 운운하는 것은 피해자를 또다른 피해로 몰아가는 것이고, 가해자에게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4장 종교와 용서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다. 다른 존재에게 피해를 단 한 번도 주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그래서 인간은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으며 살아가는 존재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 그러니 당연히 용서를 해야 한다. 이렇게 가면 가해자가 뻔뻔해 질 수 있다. 왜 용서를 안 해주냐고 도리어 큰소리를 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내가 용서를 해줬으니 너도 이렇게 해라 하는 것은 교환일 뿐이다. 그것은 용서가 아니라 댓가를 바라는, 즉 빚을 주고 받는 채무관계로 변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용서가 아니다.

 

이만큼 용서는 단순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무조건적인 용서를 추구하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무조건적인 용서를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모두 조건적인 용서를 할 수도 없다. 조건적인 용서는 이미 주고 받는 무언가가 있기에 용서라고 하기 힘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조건적 용서'를 하나의 기준으로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 기준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기준조차 없으면 안 된다. 무조건적 용서를 기준으로, 그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가해-피해자가 새로운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 한다.

 

따라서 용서는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는, 좀더 발전적인 관계로 나아가는 과정으로서의 용서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과정으로서의 용서에는 가해자의 반성이 있어야 한다. 가해자의 반성이 없는 용서는 있을 수가 없다. 반성 없는 무조건적인 용서는 가해를 감추는 장막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

 

수동태로서의 용서. 우리 문법으로 하면 피동형으로서의 용서라고 해야 하나. 성경에는 수동채로 당신은 용서받았다고 나온다고 한다. 내가 당신을 용서했다가 아니라 당신은 용서받았다다. 용서받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진실하게 다가가야 하고, 통렬하게 반성해야 한다. 피해자에게 용서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러한 잘못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용서는 그 다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피해자가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가해자의 태도 변화로 피해자가 '당신은 용서받았습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면 둘의 관계는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게 된다.

 

우리가 지금 일본과 과거사 문제로 갈등을 벌이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또 기억하지 않고 망각하려고 하는 일본의 자세때문이다. 일본이 진실을 밝히고 그들이 한 행위를 기억하고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핸 장치들을 마련하고 그렇게 해나가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때 우리나라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일본을 용서합니다'가 아니라 '일본, 당신은 용서를 받았습니다'라고. 이렇게 나아가야 한다. 이렇게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든 생각이다. 용서는 우선 피해자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가해자에게서 오지 않는 용서는 변화되지 않은 관계를 지속하는, 과거를 망각한 용서일 뿐이라고.

 

용서를 구하는 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들은 용서를 피해자에게 구하기 전에 자신들이 진실을 밝히고 성찰하고 참회하고 변화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때서야 '용서'란 말이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 역시 조건적 용서이겠지만, 무조건적 용서가 그냥 덮어놓고 용서하는 것은 아니니까... 여전히 용서는 어렵다. 더 많은 성찰이 필요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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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가 있다. 그런 말도 있고.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지, 그 아름다움을 서로 인정하고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자신이 좀더 권력을 지녔다고 권력이 없는 사람을 막 대하고, 자신이 돈이 좀 많다고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현실에서 다시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이 먼저다'라고 했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해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다면 그 과학기술이 무슨 소용이랴? 오히려 디스토피아로 가는 지름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 아닐까.

 

그러니 과학기술의 발전보다도 먼저 사람을 생각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과학기술을 떠나서 사람을 동등한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반성해야 한다.

 

말로는 사람이 먼저다, 우리는 국민을 위한다, 시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 모두가 서민을 위한 정책이다라고 하면서도 실상 따져보면 있는 자들을 위한 일이 많다.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니라, 그냥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이용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 결코 행복하지 않다.

 

사람을 도구로, 수단으로 생각하고 대우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는 존중받아야 할 사람이니까.

 

기본소득 논의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한 사회구성원이 되어서 생존에 위협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 기본소득 논의의 중심은 바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한다는 데 있다.

 

이것은 바로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자신과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것이다. 정희성 시인의 시집을 읽다가 첫시 '당신에게'를 읽고 이런 생각이 더 들었다.

 

부처가 그랬다고 하던가. '천상천하 天上天下 유아독존 唯我獨尊'이라고. 이건 나만 존귀하다는 것이 아니고, 모두가 다 존귀하다는 것이다. 개인은 모두 천상천하에 유일하게 존재한다는 것.

 

정희성 시인의 시를 보자.

 

  당신에게

 

세상에는 이름 모를 신이 많다

나는 자신이다

어쩌면 당신도 신

당신이라는 이름의 신인지 모른다

 

정희성, 흰 밤에 꿈꾸다. 창비. 2019년. 10쪽

 

과연 시인이다. 나도 신, 당신도 신이다. 나는 자신, 당신은 당신. 우리 모두는 신이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낮추어서도 또 자신만 높여서도 안 된다. 동등한 존재. 존귀한 존재. 그런 신들의 사회. 그것이 우리 사회였으면 좋겠다.

 

살기 힘들다는 소리가 사방에서 나온다. 코로나19로 힘들던 사람들이 얼마나 더 고통 받는지 이번 일을 통해서 잘 알게 됐다. 그래서 모두들을 위한 정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는 기회를 가졌다.

 

위기였다. 그러나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야 한다. 그렇게 가는 기본 출발점,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를 신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가 되는 출발점에 섰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어쩌면'이 아니라 '당연히' '당신도 신'이어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신'으로 대해야 한다. 나도 신, 당신도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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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나 광장에서 베르니니와 만나다 - 로마가 사랑한 다섯 미술가
나윤덕 지음 / 을유문화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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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사람들은 조상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리스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이들은 조상 덕분에 수많은 관광객을 전세계로부터 불러 모은다. 엄청난 문화유산이다. 그리스가 고대 문화유산으로 지금도 득을 보고 있다면, 이탈리아는 르네상스 시대까지도 수많은 문화예술품들이 남아 있어서 더 많은 득을 보고 있다.

 

그것도 미술 분야에서 이탈리아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술가들을 대보라고 하면 먼저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를 든다. 이들이 모두 이탈리아에서, 그것도 로마에서 활약한 작가들이다. 이들 말고도 더 많은 이름을 댈 수도 있지만,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카라바조, 베르니니, 보로미니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잘난 조상을 둔 덕분에 로마는 지금도 전세계인들이 한번씩은 들러보고 싶은 도시가 되어 있다. 로마뿐이 아니라 이탈리아 곳곳이 그러한 조상들로 인해 지금도 명성을 누리고 있다. 그럼에도 관광객들이 이러한 문화유산을 꼼꼼하게 보고 지나가는가 하면 아니다.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휙 스쳐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훌륭한 문화유산이라도 짧은 시간에, 그것도 많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감상하게 되면 제대로 감상할 수가 없다. 그런 점을 아쉬워한 작가가 로마의 '나보나 광장'을 중심으로 다섯 명의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에 대해서 들려주고 있다.

 

많은 사진들과 그들의 일생이 흥미롭게 펼쳐져 있어서 좋다. 읽으면서 재미와 지식을 모두 얻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많은 작가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다섯 명의 작가들을 뽑아 그들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이야기해주고 있어서 더 좋다.

 

미켈란젤로로부터 시작하여 라파엘로, 그리고 카라바조, 베르니니, 보로미니를 다루고 있다. 미켈란젤로야 더 말할 것도 없이 세계적으로 너무도 알려진 사람. 예술에 대한 그의 고집,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심지어는 교황에게도 굽히지 않는 성정들에 대해 이 책은 잘 말해주고 있다.

 

여기에 미켈란젤로와 다른 성정의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으로도 유명한 그가 그 그림에서 자신이 아는 사람들의 얼굴과 자신도 등장시키고 있다는 것.

 

빛을 너무도 잘 살린 카라바조. 성당 건축부터 조각까지 능력을 발휘한 베르니니와 보로미니. 하지만 사이가 너무도 나빴다는 협조자에서 경쟁자로 변한 그 두 사람의 관계까지 이 책에서는 많은 것들을 알 수 있게 된다.

 

중간중간에 나오는 작품 사진들, 성당 사진들을 통해 이들이 만들어낸 예술 세계를 만날 수가 있다는 장점도 지니고 있는 책.

 

로마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가고 싶은 마음을 늘 지니고 있었는데, 이렇게라도 그 마음을 위로해주고 있는 책이다. 아마도 로마에 가게 된다면 가기 전에 꼭 다시 읽고 또 지니고 가고 싶은 책이다.

 

자, 이 책에서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 왜곡되었다는 것. 시스티나 성당에 천장화를 그리는 미켈란젤로. 누워서 천장화를 그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디서 그런 글을 보았더라? 생각은 안 나지만. 이 책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이 어느 것일까?

 

'흔히 추측하는 것처럼 미켈란젤로는 비계 위에 누워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다. 그가 설계한 구름다리 형태의 비계 위로는 일하는 사람들이 서서 걸어 다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작업에 필요한 도구들을 늘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비계 위에 올라선 미켈란젤로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팔을 위로 쭉 뻗은 자세로 천장에 그림을 그렸다.' (77-79쪽)

 

아마도 오랜 세월에 걸쳐 그림을 그리려면 누워서 그리기는 힘들었으리라. 그렇다 해도 이렇게 그림을 그리면 눈과 몸이 망가지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 대단한 작가임에 틀림없다. 이런 글들이 이 책 곳곳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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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좀비스 스토리콜렉터 35
스티븐 킹 외 33인 지음, 존 조지프 애덤스 엮음, 최필원 옮김 / 북로드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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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방대하다. 다 읽는데 좀비들이 그렇게 느리다고 표현하던데, 그만큼 읽는데도 좀비만큼이나 오래 걸렸다. 한 구간을 가는데 천천히, 비틀비틀 그렇게 가는 좀비들. 그렇게 읽을 수밖에 없는 좀비 소설들.

 

무려 900쪽이 넘는 작품집이다. 소재는 모두 좀비다. 주제는 소설마다 다르다. 그럼에도 좀비들에 관한 소설이 이렇게 많은 이유는 사람들의 어떤 욕구를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어떤 욕구일까?

 

나는 왜 좀비 소설을 읽을까? 사실 좀비 소설을 읽는 이유는 영화 '월드 워 Z' 때문이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좀비들을 그렇게 무차별 학살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

 

좀비가 되기 전까지는 우리 곁에서 함께 숨쉬며, 웃으며, 울며 지냈던 사람 아닌가? 죽지 못하고 시체로 소생한 존재는 사람이 아닌가? 사람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단지 겉모습이 흉측하다고 좀비를 함께 해서는 안될 존재로 여기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전세계에서 좀비 소설이 읽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좀비 소설을 읽으며 무슨 생각을 했나? 좀비는 인간이 아니다. 그렇다. 좀비는 과거 우리 곁에 있었던 사람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그것도 완전한 형상이 아니라 여기저기 찢기고 깨지고 훼손된 형상으로) 존재일 뿐이다.

 

그냥 형태만 사람일 뿐. 그들에게는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렇게 좀비를 파악했다. 한데, 이 소설집에 있는 '해골 소년'이라는 소설을 보면 좀비도 생각을 한다. 작전도 세운다. 세상에? 이런 일이? '좀비가 부른 노래'라는 소설을 보면 좀비가 되어 죽지 못하는 음악가가 자신을 죽여달라는, 이제는 쉬고 싶다는 말이 나온다. 그래, 좀비라고 다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좀비는 무엇이다고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다만, 이들은 자가증식을 다른 사람들을 죽이는 데서 얻을 수밖에 없다. 생각하든 생각하지 못하든 좀비는 스스로 재상산(?)을 하지 못한다. 즉 생물이면 자가증식을 해야 하는데, 사람이라면 자식을 낳을 수 있어야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가 그렇다는 얘기) 하는데, 좀비들에게는 그것이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들은 그래서 생물이 아니다. 한때 사람으로 살았지만 사람의 형상을 지니고 그대로 사라지지 않는 존재, 좀비. 그들은 분명 위협적인 존재다.

 

이것은 사람들이 죽지 않았을 때, 즉 영원히 살아 있을 때 인간 사회에 닥치게 될 위험을 좀비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면, 그 사회에 득시글 대는 인간들이 과연 행복할까?

 

너무도 많은 인간들로 인해 지구는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지옥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죽음은 너무도 무서운 존재이지만 또한 죽음이 없는 세상 역시 좀비 세상처럼 무서울 것이다. 그러니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죽음을 받아들이고 삶을 제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을 이런 좀비 소설들이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총34편의 좀비 소설이 묶여 있다. 다양한 좀비 세상을 보여주고 있는 소설들. 한편 한편 읽을 때마다 다른 좀비들을 만날 수 있다. 게다가 좀비들에 대한 관점도 다양해서 수많은 좀비들을 만날 수도 있다.

 

다시 영화로 가보자. 좀비를 세상에서 없애는, 좀비와 전쟁을 벌이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것은 사라져야 할 존재는 사라지는 것이 인간을 위하는 길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형기의 시 '낙화'처럼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좀비는 가야 할 때임에도 가지 않는 존재이기에 흉측한 존재를 넘어 퇴치해야 할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 삶이 그렇지 않겠는가. 있을 때와 가야 할 때를 구분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사람다운 사람 아니겠는가. 그것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좀비와 다를 바가 없다는. 사람들에게 배척당할 수밖에 없다는 그런 진실.

 

너무 두꺼워서 읽는이를 질리게 하지만 그래도 한편 한편이 단편이어서 천천히 읽으면 재미도, 생각도 누릴 수 있는 작품이다. 좀비 문학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을 먼저 읽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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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주의에 물든 과학
조너선 마크스 지음, 고현석 옮김 / 이음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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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인종에 따라서 인간의 특성이 다르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인종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해, 나름의 합리성을 획득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이러한 움직임과 더불어 인종에 따라서 능력이 다르며, 그에 따라서 차별은 당연하다는 논리를 펴는 사람들도 있다.

 

과연 그럴까? 인종이라고 분류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이 기준을 명확히 제시할 수 있는가? 기껏해야 피부색? 피부색에 따라서 사람을 분류하기 시작하면 머리카락 색깔에 따라서 분류하는 것은? 또 눈동자 색깔로 분류하는 것은? 아니면 머리카락의 형태로 분류하는 것은?

 

아마도 머리 색깔로 사람을 분류해 흑발, 은발, 금발, 갈발(갈색머리), 홍발(빨간머리) 등으로 구분하고, 경제력과 정치력이 우세한 사람들을 주요 인종으로 하고, 나머지는 열등하다고 하면 그것을 따르겠는가? 아,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인종구분이니, 머리 색깔에 따라서 사람들을 다르게 대하는 것이 옳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렇게 인종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지를 이 책은 여러 사례를 들어서 주장하고 있다. 거기다 인종주의자들은 아직도 과학계에서 퇴출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창조론자들이 과학계에서 거의 퇴출되다시피한 것에 비하면 심각한 문제라고 한다.

 

지금 세계 곳곳을 보라. 특히 우리가 민주주의가 잘 실현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보자. 미국은 노예해방이 이루어지고도 한참 동안 인종에 따라서 엄청난 차별을 받았다. 그 차별이 1960년대에 들어서 형식적으로 없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인종차별은 일어나고 있다.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보면 미국의 인종차별은 뿌리가 깊어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럴 때 이 책은 인종주의라는 말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인종이라고 구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다양한 사람들을 인종이라는 틀로 구별하고 틀지우는 것이 얼마나 문제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결론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종은 공식적인 과학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보통은 과학자가 접근하기 힘들다. 인문학을 통해서만 역사적, 경험적, 정치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진전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인간의 변이가 과학적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인종의 특징과 연결되는 결과를 내지는 않는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이루어졌다. 103쪽.

 

이 말에 이어서 그는 '인간의 차이를 인종과 차별화해오면서 우리가 갖게 된 긍정적인 지식과 양자 간의 상호관계를 정리'하고 있다.

 

1. 인간의 집단은 주로 문화적으로 구별된다.

2. 집단들 안에서의 변이가 집단 간 변이보다 훨씬 더 크다

3. 인간의 생물학적 변이는 분리적이지 않고 연속적이다

4. 인구 집단은 생물학적으로 실존하지만, 인종은 그렇지 않다

5. 인간 집단에는 만들어진 구성요소도 있다

6. 인구 집단을 무리로 묶는 것은 임의적이다

7. 사람들은 근처에 있는 사람들과 비슷하고 멀리 있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8. 인종 분류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이며, 자연적인 생물학적 패턴을 반영하지 않는다

9. 인간은 유전자 변이가 거의 없다

10. 인종 문제는 사회적·정치적·경제적이지 생물학적이지 않다 104-114쪽.

 

이 점을 명심하면, 우리는 인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인종은 없다. 인간이 있을 뿐이다.

 

인간 집단은 서로 다르다. 하지만 인종 이론이 예측하는 방식으로는 아니다. 과학이 인간 다양성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지식을 받아들여 학자의 전문 지식을 대체하는 데 사용할 때, 과학은 인종주의적이 된다. 인간의 변이를 연구하는 것은 사람들을 서로 다르게 만드는 자연적 패턴을 연구하는 것이다. 118쪽.

 

인종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부끄러워할 수 있게, 아니 부끄러워서 그런 주장을 할 수 없는 사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 창조론자들이 공공연하게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지 못하듯이 인종주의자들도 그렇게 되는 사회가 되기를...

 

다시 한번 정리하자. 인종은 없다. 인간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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