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흑인이라서, 다른 이유는 없다
제임스 볼드윈 지음, 박다솜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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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단지 흑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온갖 차별을 받아야 한다면? 그게 온당한 일일까? 아니 온당하다는 표현을 넘어서 그것은 범죄에 해당하지 않을까? 혐오 표현, 혐오 행동을 세계적으로 범죄로 취급하고 있는데, 피부색을 이유로 차별을 받는 것 역시 혐오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런 행위를 한 사람들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것도 강하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자유민주주의의 나라라고 하는 미국에서, 걸핏하면 미국을 본받자고 성조기까지 들고 나와 시위하는 이 나라 사람들이 그렇게도 선망하는 미국에서 흑인은 여전히 차별받는, 혐오당하는 존재다.

 

노예해방이 이루어지고, 흑백 분리가 철폐되었지만 현실에서 흑인은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다. 주변부로 밀려날 뿐만 아니라 백인의 폭력에 희생되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유리 천장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대놓고 흑인을 폭행하는 백인 경찰들이 여전히 많은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대다수의 흑인이 사는 동네는 할렘이다. 도시에서 공동화된 곳. 그곳에는 마약과 폭력이 넘쳐난다. 백인들은 감히 그곳에 들어가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게 바로 지금 미국 흑인들이 처한 현실이다. 그들이 그런 삶을 원하겠는가. 원하지 않음에도 어떻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반에 나온 볼드윈의 이 책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이 슬프고, 그가 외친 것들이 실현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 답답하다. 그렇지만 현실을 부정할 수 없으니...

 

이 책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조카에게 보내는 편지 내용과 자신의 체험을 담은 글. 두 편 모두 흑인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런 흑인이기 때문에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주장들이 지금도 실현되지 않고 있어서 씁쓸하지만, 이 주장을 피부색에만 적용하지 말고 우리의 삶에 적용을 하면 '혐오 표현'에 대해서 반성하게 되기도 할 것이다.

 

조카에게 쓴 편지글에 이런 내용이 있다.

 

네가 백인처럼 되려고 애쓸 까닭은 없다. 그들이 너를 수용해야 한다는 주제넘은 가정에는 근거가 없다. 내 오랜 친구야, 정말 끔찍한 사실은 네가 그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다. 아주 진지하게 하는 말이다. 너는 그들을 받아들이되,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저 순진한 사람들에게는 다른 희망이 없으므로. 과연 그들은 아직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역사의 덫에 걸려 있고, 그 역사를 이해하기 전에는 덫에서 풀려날 수 없다. (27쪽)

 

늘 강자로 살아온 사람은 약자의 설움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한다. 자신은 그런 처지에 있지 않았으므로. 그의 주변에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들만이 있을 뿐이므로.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진실이 아님을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니 볼드윈이 조카에게 백인처럼 되려고 애쓰지 말고 오히려 네가 그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것도 사랑으로 받아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모르고 있음으로. 아는 네가 우위에 있는 것이므로. 너는 더 잃을 것도 없으므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 길도 흑인들에게는 험난한 길임을 조카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자(백인이다. 문맥상 보면)들은 네 형제들이다. 네가 잃어버린 어린 형제들이다. 만약 <통합>이라는 단어에 의미가 있다면 이런 뜻일 테다. 우리 형제들이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보고, 현실 도피를 그만두고, 현실을 바꾸기 시작하도록 우리가 사랑으로 강요해야 한다는 것. (28-28쪽)

 

그런데 백인들은 여전히 현실을 보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렇게 그들 주변은 왜곡되어 있다. 진정한 현실을 볼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존재, 그 존재가 바로 흑인이다. 그 짐을 흑인들이 기꺼이 져야 한다고 볼드윈은 말한다.

 

다른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흑인들만의 나라를 미국에서 만드는 것에 반대한다.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흑인들의 권리 향상이 이루어진 것도 흑인들의 노력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상황과 맞물려 이루어진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한다. 또한 흑인들이 증오가 아닌 사랑으로 백인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이 책이 나온 지 60년이 되어가는 지금 미국에서 보여주고 있으니...

 

그가 이 책에서 쓴 글은 지금도 유효하다. 몇몇 내용을 인용한다.

 

교회에는 진실로 사랑이 없었다. 증오와 자기혐오와 절망을 가리는 가면만이 있을 뿐이었다. 성령의 거룩한 힘은 예배와 함께 끝났고, 구원은 교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나는 모두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 말은 신을 믿는 <우리>에게만 해당되었고, 백인에게는 전연 해당 사항이 없었다. (66쪽)

 

대학을 나와도 버젓한 직장을 가질 수 없었던 미국 흑인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펼칠 수 있는 무대는 교회였다. 이것이 초기 흑인 민권운동에서 목사들이 많았던 이유라고 한다. 볼드윈 역시 교회에 나가 설교를 한다. 그런데, 그는 교회의 한계를 깨닫는다. 그 점을 드러내고 있는 말이다. 지금 교회는 어떤가? 미국 교회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교회도 볼드윈의 이 말에 해당되지 않는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자, 가진 자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글이 있다. 명심해야 할 말이다.

 

예속된 자들에게 잠재되어 있는 미개척의 힘과 마주하기 위하여, 도덕적 무게를 지니고 움직이는 인간으로서 살아남기 위하여 미국과 다른 서구 국가들에게 주어진 과제가 있다. 스스로를 점검하고, 현재 신성시되는 것에서 풀려나고, 너무나 오랫동안 자신들의 삶과 고뇌와 범죄를 합리화하는 데 사용해 온 대부분의 전제를 버리는 것이다. (72쪽)

 

그들의 조상이 자유를 사랑하는 영웅들이었다는 미신, 그들이 최고로 위대한 나라에 태어났다는 미신, 미국인들이 전시에는 무적이고 평시에는 현명했다는 미신, 미국인들이 멕시코인과 인디언과 다른 이웃이나 약자들을 언제나 명예롭게 대했다는 미신, 미국 남성이 세상에서 가장 솔직하고 정력적이며 미국 여성들은 순수하다는 미신. 니그로들은 그런 미신을 믿기에는 백인 미국인들을 너무나 잘 안다. (140쪽)

 

자신을 걸지 않는 한 아무것도 줄 수 없다. 자신을 걸 수 없는 사람은 단순히 줄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자유를 주는 유일한 방법은 그를 자유롭게 풀어 주는 것이다. 미합중국은 니그로에게 자유를 줄 만큼 충분히 성숙한 적이 없었다. (122쪽)  

 

이런 백인에게 흑인들의 처지를 맡길 수만은 없다고 한다. 그렇다.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 그것도 서로를 증오에 빠뜨리는 폭력이 아닌, 서로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포용의 방법으로. 볼드윈의 이 말들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분쟁에도 적용이 될 수 있겠단 생각을 한다.

 

사람은 자존감 없이 살 수 없고, 그것을 되찾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한다. 그것이 잃을 것 없는 사람이 어떤 사회에서든 제일 위험한 피조물인 이유다. 그런 사람이 열 명이나 필요한 것도 아니다. 한 명이면 족하다. (109쪽)

 

자신의 상태를 견딜 수 없지만 심한 억압에서 자신의 상태를 바꿀 능력도 없는 사람은 항상 부도덕한 권력자들의 손바닥 위에 놓이기 때문이다. (126쪽)

 

백인이 해방되는 대가는 도시와 시골, 법 앞과 정신 속에서 흑인이 완전하게 해방되는 것이다. (134쪽)

 

증오를 쏟아부으며 당신의 목을 짓밟는 자를 마주 증오하지 않으려면 대단한 영적 회복력이 필요하다. 당신의 아이들에게 증오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으려면 그보다 더 큰 기적에 가까운 통찰과 관용이 필요하다. (138쪽)

 

유한한 지구다. 우주 역시 무한하다고 하지만 인간의 한계일 뿐, 우주 역시 유한하다. 그렇다면 유한한 공간에서 유한한 시간 속에 사는 인간들이 서로를 보듬고 살면 좋지 않겠는가. 똑같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내가 다른 존재들이 있음으로 해서 유한한 삶을 무한하게 확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지 않겠는가.

 

피부색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다름도 차별이 되어서는 안 됨을 다시금 생각하는 글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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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8-28 1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읽으려고
빌려 놓았는데 아직도 민기적거리고
있네요.

최근 위스콘신에서 또다시 총에 맞은
세 아이의 아버지 뉴스에 충격을 받았
습니다...

어떤 종류의 차별에도 반대합니다.

kinye91 2020-08-29 09:50   좋아요 0 | URL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다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동경하는 미국에서 여전히 차별이 존재하고, 차별이 생명을 위태롭게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는 것, 그것이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것이 안타까워요. 어떤 형태든 차별은 사라져야 한다고 저도 생각해요.
 
파우스트 박사 2 - 한 친구가 이야기하는 독일 작곡가 아드리안 레버퀸의 생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5
토마스 만 지음, 임홍배.박병덕 옮김 / 민음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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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 이어서...

 

1권의 막바지에 악마와 계약하는 장면이 레버퀸의 글을 통해서 전달되고 있다. 이에 레버퀸은 이제 대단한 작품을 낼 것이며, 사람들은 열광에 빠질 것이고, 그는 정점에 올랐다가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길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게 된다.

 

이런 예상에 맞게 소설은 전개된다. 다만, 레버퀸이 급작스레 죽지는 않는다. 레버퀸은 치매 상태에 빠진다. 자신의 기억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 그 과정까지에는 두 죽음이 자리잡고 있다. 악마와 계약할 때 레버퀸에게 금지된 것이 바로 '사랑'이다. 이런 '사랑'을 하는 순간 그는 파멸을 맞을 수밖에 없다.

 

두 죽음이 비중있게 다뤄진다. 레버퀸이 정점에서 몰락하는데 일조하는 죽음이다. 소설 속 화자보다 더 가까운 관계가 되는 바이올리니스트 슈베르트페거와 조카 네포무크. 결국 이 두 죽음은 그를 치매와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런 파멸의 과정을 2권에서 풀어가고 있다.

 

이런 줄거리, 대부분 유럽 사람들이 알고 있는 줄거리로 괴테라는 유럽에서 인정받는 작가가 이미 쓴 파우스트 이야기를 또 쓴다는 것은 무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레버퀸이라는 천재 음악가를 통해 토마스 만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뭘까? 그게 소설을 읽어가면서 우리가 계속 해야 할 질문이다.

 

이 책 작품해설에서 번역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작품만큼 난해한 작품이 없다고. 그래서 작가인 토마스 만도 이 작품을 이렇게 읽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토마스 만 자신도 이 소설의 난해성을 의식했는지 한 가지 독법을 추천했는데, 일단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통독해서 전체적인 개요를 조망하고, 작품의 결말을 다 아는 상태에서 처음부터 다시 아주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기를 권했다. 시간이 있는 독자들은 그렇게 읽는 방법이 최선책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음악에 관심과 흥미가 있는 독자들이라면, 이 소설에서 비교적 길게 언급되는 다양한 음악 작품의 해당 부분들을 직접 들으면서 소설을 읽어 나가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528쪽)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읽기도 힘든 이 작품을 두번 세번 읽을 독자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시간과 인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소설을 전문적으로 분석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이토록 긴 소설을 여러 번 읽는다는 것은 거의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동원하는 한 방법. 시대와의 관련성을 찾아보는 것. 그래서 작가의 의도와 작품의 전개를 연결짓는 것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소설을 너무도 도식적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많다. 소설을 소설로 읽지 못하고, 작가의 논설로 읽게 될 위험성이 있는 것. 작품해설에서 이렇게 이 작품의 창작동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망명기의 토마스 만이 가장 고심했던 것은 학문과 예술을 숭상해 온 문명국가 독일에서 어떻게 히틀러 정권과 같은 극단적인 야만 세력이 등장했으며, 20세기에 들어와 두 차례나 세계 대전을 일으키는 반인간적 핼위를 자행했는가 하는 문제였다. 토마스 만은 바로 이 문제와 정면 대결하기 위해 근현대 독일 정신의 전통과 독일인의 정체성 문제를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소설 [파우스트 박사]의 집필을 결심했다. (510쪽)

 

그러나 이것은 창작동기일 뿐이다. 소설 속에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의 독일 이야기가 나오고, 그것에 대해서 비판적인 서술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꼭 작가가 말하고 있는 창작동기와 연관지어서 읽을 필요는 없다.

 

이 해설을 작품에 도입하면 작품은 레버퀸은 독일이고, 독일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국가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해서 한때 성공했지만, 결국 파멸의 길로 돌아서게 된다라는 단순한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이런 도식 사이사이에 있는 많은 은유들, 표현들, 등장인물들의 갈등 등을 쉽게 넘어가게 된다.

 

이때는 작가가 제시한 읽기 방법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 이미 줄거리는 다 안다. 결말도 안다. 이것은 이 작품을 끝까지 읽지 않아도 이미 '파우스트 이야기'에 내재되어 있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그 결말을 내기 위해서 중간중간에 작가가 어떤 장치를 했는지 그것을 찾는 읽기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소설의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방법이지만.

 

우선 이 소설은 1000쪽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다. 거기다 온갖 음악 지식들이 나오고 있다. 여기에 곳곳에 숨어 있는 독일적인, 또는 유럽적인 비유, 상징들이 있다. 그것들을 꿰고 있어야만 작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난해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도 당연하다.

 

난해한 작품이지만 '파우스트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을 꿈꾸기에 이런 이야기가 계속 우리 곁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무한을 추구하면서 자신이 이 세계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이야기가 말해주고 있다.

 

이는 한계를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 한계 내에서 자신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찾는 것이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소설의 주인공인 레버퀸이 대단한 작품을 냈다고는 하지만, 그는 작품을 내기 위해서 빛을 보지도 못하고, 극심한 두통 속에서 지내게 된다. 인간적인 행복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을 생각해 보라. 잠시 동안의 성공. 그러나 그 성공이 독일 국민들을 행복하게 해주었던가.

 

작품을 얻는 대가로 레버퀸이 밝은 세상을 잃고 심한 두통을 얻었듯이, 독일 국민들은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과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의 죽음, 그리고 다른 국가들의 원망을 사지 않았던가. 그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치매 상태에 빠져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는 죽음과 같은 상태에 빠진 레버퀸이 치뤄내야 할 결과는 그가 악마과 계약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고자 했던 결과. 그 결과는 결코 행복일 수가 없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것. 결국 우리가 무리하게 추구하는 일이 사랑과 행복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레버퀸의 생애를 통해 알 수 있다.

 

길고 난해한 작품이지만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겠단 생각을 버리고 그냥 주인공의 삶을 따라가면 읽을 만하다. 그 다음에 더 생각나면 천천히 읽으면서 더 많은 이해를 추구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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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7 10: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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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7 10: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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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7 10: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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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7 12: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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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박사 1 - 한 친구가 이야기하는 독일 작곡가 아드리안 레버퀸의 생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4
토마스 만 지음, 임홍배.박병덕 옮김 / 민음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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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악마와 거래를 한 사람. 악마의 도움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지만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줄 수밖에 없는 사람. 결국 악마와 하는 거래란 자신의 영혼을 잃는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영혼을 잃더라도 불멸의 작품을 얻을 수 있다면? 이 때는 판단을 쉽게 할 수 없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지만 무한을 꿈꾸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비록 자신의 육체가 영원하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의 이름만은, 또는 자신의 무엇인가만은 영원하길 바란다.

 

그럴 때 영혼마저도 팔 수 있단 생각을 한다. 물론 보통사람들은 절대로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않는 것이 아니고 못한다. 영혼을 팔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이미 비범한 사람이다. 이 사람들은 악마와 거래를 하기 전에도 이미 다른 사람보다는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주인공 아드리안 역시 남들과 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다.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 능력은 인간의 영역에서 존재한다. 이것은 인간을 초월할 수가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이 한계는 절망을 부르고, 절망은 결국 악마를 불러내게 된다. 인간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악마를 불러내고, 악마와 계약을 하는 것이다.

 

세속적인 인간다운 삶을 죽이는 대신 영원한 그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서. '파우스트'란 이름을 보면 그런 존재를 떠올리게 된다. 서양에서 '파우스트'가 악마와 계약을 한 존재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파우스트'하면 괴테가 쓴 '파우스트'를 떠올린다.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더불어.

 

이 소설은 괴테 소설과는 다르게 한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작은 제목이 '한 친구가 이야기하는 독일 작곡가 아드리안 레버퀸의 생애'다. 아드리안 레버퀸이라는 사람이 뛰어난 음악을 남기고 죽었는데, 그 과정을 전기문이라는 형식으로 어린시절부터 함께 지냈던 친구가 쓴다는 형식으로 써내려간 소설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줄곧 친구인 '나'가 이끌어가는데, 아드리안의 천재성과 그런 그가 어떻게 성장해 가는지를 친구의 시선으로 서술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1권 마지막 부분에 즉 이 소설에서 구분한 장으로 치면 '25'에서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직접 나온다.

 

그가 쓴 글을 인용하는 형식으로 아드리안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 드디어 설명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니 1권은 그냥 전기적인 형식을 띤 소설로,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파우스트와 관련이 되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는데, 드디어 25에 가면 아, 이래서 파우스트와 관련이 되는구나 하게 된다.

 

괴테는 메피스토펠레스를 불러냈다면, 토마스 만은 사마엘을 불러낸다. 사마엘은 '죽음의 독을 선사하는 천사'라는 뜻이야. (442-443쪽)라고 하니, 결국 인간에게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을 주지만, 그를 인간의 세계에 머물게 하지 않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주인공인 아드리안에게 제시하는 조건은 그래서 사랑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내가 내세운 조건은 명확하고 공정했어. 지옥의 당연한 질투에 의해 정해진 조건이지. 사랑이라는 게 따뜻한 인간미를 지닌 것인 이상 자넨 사랑을 해선 안 돼. 자네의 삶은 냉정해야 하니까. 그래서 자넨 누구도 사랑해선 안 돼. (483쪽)

 

메피스토펠레스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상태라고 말하는 순간 그 영혼을 가지겠다고 했는데, 사마엘은 사랑을 하면 안 된다고 한다. 그렇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세계에 머무른다는 것이니... 결국 괴테의 파우스트를 구원하는 것은 사랑인데... 그러니 후대에 나온 작품에서 사랑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제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랑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경멸하는 병에 걸려야 한다. 아드리안이 에스메랄다라는 사람을 찾아가 잠을 자고 매독에 걸리는 일. 그 일부터 악마와 계약이 성립하기 시작한다. 왜 그런 병일까? 사마엘은 말한다.

 

사람들에게 내보이기를 꺼려 하는 추잡하고 은밀한 병이야말로 세상과 평범한 삶에 비판적으로 맞설 수 있게 해 주고, 시민적 질서에 아이러니의 정신으로 반항하게 하며, 자유로운 정신과 책과 사색에서 피난처를 찾게 하지. (451쪽)

 

예술가는 범범자와 광인의 형제야. 범범자와 미치광이의 생태를 이해하지 못하고서 일찍이 그럴싸한 예술 작품이 나온 적이 있다고 생각하나? (459쪽)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힘을 증대시켜 주는 비(非)진리는 불모성의 어떤 도덕적 진리보다 낫다는 거야. 천재성을 발휘하게 하는 창조적인 병, 모든 장애를 당당히 뛰어넘어 대담한 도취 상태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이 병이야말로 좀스럽게 꼼지락거리는 건강보다 백 배 천 배 더 멋진 인생을 보장한다 이 말이야. 병적인 것에서는 병적인 것밖에 나올 수 없다는 말은 정말 멍청한 소리지.  ... 생의 활력이라는 원칙을 기준으로 보면 병과 건강의 구별은 무의미해. 건강을 앞세우는 족속들은 병든 덕분에 독창성을 얻은 병적인 천재의 작품 앞에서 맥을 못 추지. 그런 무리들은 오히려 병적인 천재의 작품에 감탄하고, 찬양하고, 높이 받들고, 받아들이고 변화시켜서 문화유산으로 전승하지. (471쪽)

 

이제 2권에서 아드리안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작품을 창작할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 근대 소설가인 김동인이 '광염소나타'라는 작품에서 비정상적인 상태에서만 명곡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주인공처럼. 하지만 그 순간은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악마와 한 계약은 끝이 있다.

 

자네는 우리에게서 시간을 얻었어. 독창적인 시간, 고귀한 시간을. 우리는 이십사 년이라는 시간을 자네한테 전적으로 제공한 거야. 자네가 목적지에 도달하는 시간인 셈이지. 이 시간이 만료되면, 물론 그게 언제가 될지는 예측할 수 없고, 따라서 시간은 곧 영원이라 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자네를 데려가겠네. (481쪽)

 

이런 계약으로 인해 이 소설의 서술자는 60세가 된 때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드리안의 이야기를 글로 쓴다. 그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어떻게 다음 내용이 펼쳐지는지는 2권으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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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건 여자들뿐이거든요 바통 3
강화길 외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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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사라지는 건 여자들뿐이라니? 남자와 여자가 함께 일을 해도 빛을 보는 건 남자들이고, 늘 남자들 뒤로 사라지는 게 여자들이라는 의미일까?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한 만큼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을 형상화한 작품집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제목이었다.

 

그런데, 읽다보니 아니다. 이 정도면 여자이기 전에 사람이라는,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주장하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이 겪는 일들이 전개되어야 하는데, 이 소설집은 그 방향과는 다르다. 여성들이 겪게 되는 고통이나 공포를 다루고 있지만, 그들에게 이런 고통, 공포를 유발하는 존재는 기존 관념과는 달리 여성들이다.

 

여성이 여성에게 고통을 일으킨다. 여성에게 공포의 존재는 여성이다. 이런 소설이 나오게 된 것은 이제 여성도 어느 정도 사회적 약자의 자리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 실질적으로 여성은 아직도 약자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몇몇 남성의 자리를 차지한 여성이 권력을 지닌 것처럼 보여, 여성이나 남성이기 전에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착시현상에 불과할 뿐이다 -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집에는 8편의 소설이 실려 있고, 모두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집에서 여성을 괴롭히는 존재로 엄마를 들고 있는 소설이 있고(강화길, 산책. 최진영, 피스. 지혜, 삼각지붕 아래 여자), 엄마를 살해하는 딸의 모습을 그린 소설(천희란, 카밀라 수녀원의 유산)도 있다. 여성의 적은 여성인 소설, 여성의 삶을 더욱 힘들게 하는 존재로 등장하는 여성들을 표현함으로써 이 소설은 여성들의 공포가 외부에서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내부에서도 일어남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겉으로는 온화한 여성지도자이지만 알고보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것들을 짓밟는 존재가 등장하는 소설(임솔아, 단영), 또 자기처럼 희생당하는 여성들을 지켜보는 소설(손보미, 이전의 여자, 이후의 여자)도 실려 있다.

 

거기에 여성을 질투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여성과 여성이 함께 유대하지만, 그런 모습을 질투하는 유령을 등장시키는 소설(최영건, 안(安)과 완(完)의 밤)이 있으며, 여성들이 실종되지만, 그에 대해서 무관심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허희정, 숲속 작은 집 창가에)이 있다.

 

모두들 여성들이 겪는 고통을 이야기하지만, 이 소설들에서 여성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남성이나 또는 사회적 제도라기보다는 그 사회에서 살아남은 여성들일 수도 있다는 것을 공통 주제로 하고 있다.

 

소설의 소재를 더 넓힌 소설집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여성 스릴러물이라기에는 조금 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몸을 오싹하게 만드는 공포는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에 유령이 등장한다든지, 개연성이 없는, 도대체 죽은 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든지 하는 장면들이 나와 몰입을 방해하기도 한다.

 

무언가 생각하지 못했던 반전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세상의 절반이라고 하지만 여성들이 그동안 받아왔던 차별과 억압들이 그들의 삶에 극적인 상처를 남기지 않더라도 은연중에 두려움으로, 공포로 새겨졌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이 소설집은 그렇게 드러내놓고 공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에게 그동안 내재되어 왔던 억압과 차별들이 그들 몸에 박혀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말 무서운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억압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는 억압, 그래서 상대의 동의를 얻어 행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지금까지 여성들의 삶은 어쩌면 그렇게 드러나지 않는. 안으로 안으로 쌓인 차별과 억압들이 그들에게 공포로 다가왔음을, 이제서야 그런 공포를 소설로 표현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 이 소설집은 다시 읽어볼 가치가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여성 억압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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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와 현대 발터 벤야민 선집 7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 길(도서출판)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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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 자신도 쉽지 않은 사람인데, 그 사람이 카프카에 대해서 글을 썼다니...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인데, 이렇게 연결이 되다니.. 그것도 벤야민이 카프카에 대해서 이토록 열광을 했다니.

 

현대를 연구하는 학자,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에 대해서 이야기한 학자, 그런 학자인 벤야민이 카프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것은 카프카가 현대를 대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점에서 카프카가 현대를 대변한다고 생각했을까?

 

카프카 작품을 현대 사회를 표현한 작품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오히려 기괴한 작품으로 파악하고 제쳐두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벤야민이 카프카에서 본 것은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삶이 아니었을까?

 

무엇이든 결론을 내지 못하고 과정 중에 있는, 그 과정에서 미래를 실현하려고 하지만 결코 미래를 현재에 실현할 수 없는 현대를 카프카의 작품에서 찾았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현대라는 괴물에 한없이 작아지기만 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는 어떤 논리도 통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려고 발버둥치지만 제자리에서 맴돌던지, 어떤 알지 못할 힘에 휩쓸려 사라져버리든지, 아니면 끊임없이 나아가고는 있지만 제한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현대인들. 그러니 현대인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벌레로 변하거나 하지 않았던가.

 

벤야민이 브레히트와 대화한 것을 기록한 내용에서는 아킬레스와 거북이 이야기가 나온다. 절대로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는 아킬레스. 하지만 카프카 소설에서 브레히트는 말 타기의 행위로 이야기를 대체한다고 한다.

 

말 타기의 행위가 아주 작은 부분들로 - 우발적 사건들은 차치하고라도 -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면 어느 누구도 이웃 마을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러한 말 타기를 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하지만 여기서 잘못은 '어느 누구도'에 있다. 말 타기가 세분화되듯이 말 탄 사람도 세분화 되기 때문이다. 인생의 통일성이 사라지듯이 인생의 짧음 또한 사라진다. 인생이 짧으면 짧은 대로 두어도 된다. 그래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길을 떠난 사람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이 마을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303-304쪽)

 

이 말을 카프카 소설에 대입하자면 소설을 너무 부분으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소설을 이해할 수 없다. 소설 속 장면 속에 갇혀 나올 수가 없게 된다. 수많은 담장 안에 갇혀 아무리 밖으로 나가려 해도 나갈 수 없는 카프카 소설 속 사람처럼 되어 버린다.

 

이때는 과감하게 부분들을 포기해야 한다. 건너뛸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카프카는 이렇게 단편 속에 갇힌, 부분 속에 갇힌, 전체가 아닌 부분들로 나뉜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미래를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대는 이렇게 사람들을 부분으로 나누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체를 파악할 수 없는 사람들. 따라서 카프카는 이런 현대인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비극을 작품에서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분에 갇힌 현대인들. 그런 모습을 표현하기에는 그동안의 소설로는 부족했다고 여겼을지도.

 

그러므로 벤야민에게 '도식적으로 말해 카프카의 작품은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 사이의 매우 보기 드문 연결고리를 보여주는 작품들 중 하나이다'(310쪽)라는 평가를 받는지도 모른다.

 

굳이 벤야민이 해석한 카프카를 따라갈 필요는 없다. 다만 카프카를 이렇게 보기도 한다는 것을 알면 된다. 학자나 평론가가 주장한 내용을 따라가는 것은 아킬레스와 거북이 경주와 같다. 부분들로만 나누어, 부분들로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절대로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작품을 그렇게 부분으로만 쪼개서 볼 수는 없다. 카프카를 역시 여러 부분으로만 보아서도 안 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카프카 작품을 읽는 것이다. 읽고 자신이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 생각들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보태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벤야민이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다. 카프카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그는 혼자만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나 다른 비평가와도 토론을 한다. 많은 서신을 교환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다듬는다. 우리는 그래서 카프카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자료를 더 첨가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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