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 그날 그 자리에 있을 사람에게
심보선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날 그 자리에 있을 사람에게'라는 작은 제목을 달고 있는 시인이자 사회학자인 심보선의 산문집이다. 산문집이라는 말이 낯설다면 수필집이라고 하면 되겠다. 자기 생각이나 경험, 느낌을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쓴 글이라는 수필.

 

자연스럽고 솔직하기 때문에 어떤 수필은 개인사가 많이 나와 그 사람의 사적인 생활을 많이 알게 해주기도 하지만, 또 어떤 수필은 철학적인 단상을 많이 담고 있어서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 수필은 사회 문제를 주로 다뤄서 우리에게 현실의 모습을 생각하게 해주기도 한다.

 

심보선의 이 책은 철학적인 단상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생활에서 느낀 점과 예술가(시인 또는 비평가)로서 느낀 점, 우리 사회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한 생각 등이 담겨 있다.

 

총 3부로 묶여 있는데, 1부에서 주로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개인적인 생각이 표현된 글들이 나온다. 그래서 심보선이라는 개인이 어떤 일을 했으며, 그 경험을 통해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2부에서는 예술과 관련된 글들을 모았다.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2부가 친근하게 다가올 것이다. 또한 2부에는 심보선에게 영향을 준, 또는 그의 생각을 촉발하는 다른 작품들이 많이 언급되고 있어서, 책이 또다른 책을 부르는 역할을 한다.

 

다른 책을 읽게 하지 못하는 글은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책을 통해서 다른 책들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책은 다른 책을 이끌고 내게 다가온다. 나는 그런 책을 좋은 책이라고 하는데, 심보선의 이 책에서 2부가 그런 역할을 한다.

 

물론 1부가 의미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가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얻은 생각들을 표현한 그 글들을 우리가 밖에서 읽음으로써 또다른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개인적 경험을 하는 글쓴이를 바라보는 또다른 개인적 경험. 이것이 1부의 매력이라면, 2부는 다른 예술가를 통해 얻는 글쓴이를 바라보면서 글쓴이의 글과 또 그가 언급한 책들을 통해서 얻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 2부라고 할 수 있다.

 

3부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다룬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문제들에 글쓴이가 참여하면서 느낀 점들... 지금도 진행 중인 일들이 많아서 글쓴이를 통해서 그 문제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우리가 만났던 문제들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 문제를 가운데 놓고 글쓴이의 생각과 내 생각이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3부다.

 

이런 점들이 수필이 지닌 매력이기도 할 것이고.

 

글쓴이가 '그날 그 자리에 있을 사람에게'라는 말은 우리가 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같은 장소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간은 같지만 시간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으로 인해 변화가 있을 것이고, 그런 변화를 인식하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작은 제목이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날 그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라고 질문하는 것. 지금 내가 있는 풍경도 환하니, 그런 환한 풍경이 지속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담겨 있는 질문이라면 이 책에 실린 1부에 실린 글들은 어느 정도 이 질문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반대로 그날 그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라고 질문하는 것이 지금 내가 있는 풍경은 어두운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쪽의 풍경이 환한 쪽으로 바뀌었는가라는 질문일 수 있다. 사회가 좋은 쪽으로 변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3부가 아마도 이 질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2부는 두 질문을 어느 정도 모두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술이다. 환함과 어두움을 함께 품고 있는 것. 얼핏 모순되어 보일지라도 그것이 바로 현실임을 보여주는 것. 그러니 이 책은 서로 다른 시기에 쓰인 글들을 나름 분류해서 모아놓은 책이지만, 2부가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환한 풍경과 지금까지 어두운 풍경, 두 풍경이 모두 속해 있는 예술. 그래,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라는 질문은 지금 그쪽의 풍경이 환하다면 환함 속에 있는 어둠을 살필 수 있는 삶을 살았으면 한다는 마음과, 그쪽의 풍경이 어두움이라면 그 어둠 속에서도 환함이 있음을 찾을 수 있는 삶이었으면 한다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소설을 두 문장으로 정리하면 '한국이 싫어서, 내 행복을 찾아 떠났다.'가 된다. 행복을 찾아 떠나는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소설에서는 호주를 예로 들었지만, 그것은 한때 호주 이민을 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지, 호주가 딱히 행복을 보장해주는 나라는 아니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이 나라에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한국이 싫다고 호주로 떠난다. 호주에 가서 영주권과 시민권을 획득해 호주시민으로 살아갈 결심이다. 시민권을 따고 거기에 정착하기까지 한국과 호주에서 있었던 일을 빠른 문체로 표현하고 있다.

 

참 무거운 주제고, 진지한 주제임에도 소설은 경쾌하게 넘어간다. 이 경쾌함이 때로는 씁쓸함을 자아낸다. 어쩌면 성공담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호주 시민이 된 것으로 설정이 되었기에, 한국에서 하는 정도의 노력이면 충분히 영어공부를 하고 호주 시민권을 딸 수 있을 거라는 것... 이것이 역설적으로 한국이 참 힘든 나라임을 드러내 준다.

 

소설 속 화자가 호주에서 겪은 일들이 결코 가볍지 않다. 순탄한 일만 겪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은? 이런 질문을 하면 한국에는 개인의 능력에 다른 외적인 것들이 더해짐을 생각해야 한다.

 

이제는 해체된 '학벌없는 사회'. 학벌없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에 해체된 것이 아니라 이미 경제적 세습으로 학벌이 세습되는, 손을 댈 수 없는 지경이 되었기 때문에 '학벌없는 사회'라는 단체가 해체된 것이다. 학벌만으로 우리나라를 설명할 수 없기에.

 

이 소설에서는 학벌이 여전히 중요함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학벌에는 부모들의 능력이 뒷받침되고 있음 역시 잘 보여주고 있다. 결국 학벌의 대물림이 고착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곳에서 '개천에서 용 났다'는 표현은 사전 속에나 존재하는 말이 되었다.

 

거꾸로 이야기하자. 왜 개천에서 용이 나야 하는가? 개천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미꾸라지나 다른 물고기들, 그리고 다른 생명체들이 되면 안 되나? 꼭 개천을 좁게 여기는 용이 되어야 하나?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개천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라면 '한국이 싫어서' '행복해지기 위해' 다른 나라로 갈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표현한 한국은 개천에서 행복하게 살 수 없는 나라다. 그러니 자신의 행복을 찾아 떠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야 이룰 수 있을 테지만, 그마저도 하지 못하는 곳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렇다고 환상을 갖지는 말자. 그만큼 자신이 노력을 해야 한다. 소설 속에서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 동포를 등처먹는 사람도 있고, 유색인이라고 차별을 당하는 일도 있으며, 시민권을 얻더라도 번듯한 직장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가능성이 있다. 직업으로 서열이 정해지지는 않으니까. 적어도 겉으로는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지니까.

 

소설 화자를 통해 직설적으로 우리나라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한국 사회는 우리가 꼼꼼하게 살펴봐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거울처럼 비추고 있으니까.

 

'한국이 싫어서, 행복해지기 위해 떠났다'라는 말을 '행복해지기 위해 한국에 살겠다'라는 말로 뒤집을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가 그렇게 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수월하게 읽히는 이 소설이 결코 가벼운 소설이 아님을,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꾸만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려고 한다. 구분한다는 것, 나는 다르다는 것. 그들과 나 사이에 벽을 쌓고, 그들을 내 테두리에서 밀어내는 것.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데, 함께 살아가면서 다른 점을 찾기보다는 비슷한 점을 더 많이 찾을 수 있을 텐데...

 

  다른 사람의 안 좋은 모습보다는 좋은 모습을 찾는 눈을 지녀야 하는데,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주제에 다른 사람 눈에 있는 티끌은 왜 이리도 잘 보이는지...

 

  그 티끌을 침소봉대해서 마치 큰 허물을 지닌 양, 그 사람과 상종하면 안 되는 양 여기며 지냈던 것은 아닌지...

 

그렇게 자꾸만 남을 밀어내는 마음이,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들까지 밀어내게 된 것은 아닌지... 이 지구상에 있다는 것 자체가 존재이유가 될 텐데...

 

정철훈 시를 읽으며, 이 시에 나오는 숱한 밀어내기를 만나면서, 그렇게 밀려나간 삶을 시에서 만나면서 나를 생각하게 된다.

 

내가 밀어내는 만큼 남들 역시 나를 밀어낼 텐데...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다가는 서로 꽉 막힌, 소통할 수 없는 존재로 살아가게만 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철훈 시집 [살고 싶은 아침]에는 세상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렇게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숱하게 밀려난 사람들, 아마도 시인의 가족사와도 연결이 되겠지만, 그런 밀려난 삶들에서도 닮은 점을 찾으려 한 시인에게서 삶의 자세를 배우게 된다.

 

그 중에 '옷걸이가 닮았네'란 시를 읽으며 그간 내가 너무 다른 존재들을 밀어내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했다.

 

 옷걸이가 닮았네

 

여럿이 함께 걸려 있네

바지도 저고리도 같이 걸려

같이 나부끼고 같이 흔들리고

태양도 달도 같이 거기서 운행하네

옷걸이에서 지난 긴긴 밤들이 닮았네

체위가 닮고 몸이 닮고 청바지와

양말과 발바닥과 발가락이 닮았네

양말 구멍까지 닮았네

여럿이 함께 잠을 자네

발가락과 양말과 그들의 역할이 함께 있네

그들의 기능이 모두 함께 있네

끊어진 것과 이어진 것이 함께 있네

옷걸이의 세상은 무덤이라도 좋아서

무덤이 닮고 옷걸이가 닮고 티셔츠가 닮고

우리의 불그죽죽한 영혼과 거죽과 입술과

그 무엇이라도 옷걸이에서 닮았네

문순태와 김준태와 작고한 조태일이 태로 닮았네

하나의 태로, 하나의 형태로 옷걸이에 걸려 있네

광주도 모스끄바도 평양도 서울도

정말 거짓말처럼 닮았네

광주의 옷걸이가 충장로의 옷걸이와

서울의 옷걸이가 남산의 옷걸이와 닮았네

얼마나 쾌청한 지평이었으면

옷걸이가 닮을까 세상이 휘뜩휘뜩

소멸할 듯 사라질 듯 서로 닮았네

얼마나 즐거운 지평이었으면

석양이 일출과 함께 지평에 걸리고

청바지와 가을과 고양이와 하늘이

연속극과 요절복통과 흔들리는 눈동자와

수많은 요동과 사랑과 이별이 모두

하나의 옷걸이에서 나부끼네

해탈과 해찰이 지들끼리 방실방실 함께 있네

아무런 감춤이 없고 아무런 숨김이 없네

무엇이라도 무엇이 되네

여럿이 함께 옷걸이에 걸려 있네

 

정철훈, 살고 싶은 아침. 창작과비평사. 2000년. 16-1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면의 꿈 이청준 문학전집 중단편소설 3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2002년 9월
평점 :
절판


가끔 이런 비평을 만나면 절망한다. '해설'이란 이름을 달았지만, 해설이 더 어려운 경우. 대학교수들이 소설에 대해서 해설을 쓸 때 왜 그리도 현학적인지. 도무지 모를 말들을 나열하면 그것이 잘된 해설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학자들이라서 그런 어려운 말들이 자신에게는 쉬운 말이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해설'을 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해설이란 그 글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청준 소설은 결코 쉽지 않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여러 번 읽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해설'의 도움을 빌리려 하는데, 이 놈의 '해설'이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 경우가 있다.

 

이 작품집의 경우를 보자. 이렇게 '해설'에 쓰여 있다.

 

... 이 소설집의 텍스트들은 대개 세 가지 측면에서 주목에 값한다. 1. 탈난 세계의 한계 억압 체증 양상의 재현 가능성. 2. 탈난 세계에서 탈난 개인의 탈의 한계 효용 체감 양상의 재현 가능성. 3. 억압의 한계 체증과 탈억압의 한계 체감 사이의 대립 상황에서 소설의 한계 체험에 대한 반성적 질문의 유효성 등 셋이 바로 그것이다. (370쪽)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잘 이해가 안 된다. 언뜻 물리학 법칙 같이 정리를 해서 간명해 보이기는 하나, 도무지 '한계 억압 체증'이라든지, '한계 효용 체감 양상'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 말을 한번 풀어서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어렵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가면의 꿈>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작가의 문제의식과 마주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의 의미와 그 서사적 형상화 양상, 그리고 그런 문제의식과의 새로운 비판적 대화 등이 이 소설집 독서의 핵심사다. (370쪽)

 

하여간 소설 속에 나타난 내용을 비판적으로 읽으면서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파악하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말인데, 여전히 어려운 말들이 나열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또 한번 설명하고 있다.

 

예컨대 이런 질문들이다. 자유롭기를 열망하는 개인을 억압하는 탈난 세계의 억압 기제는 어떻게 작동되는가, 그 억압 기제는 허구적 현실을 어떻게 구성하는가, 억압의 구성적 상징은 어떤 서사 효과를 묘출하는가, 탈난 억압 현실에서 개인은 어떤 탈을 쓰게 되는가, 그 탈은 '환부다운 환부가 없는' 환자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 것인가, 개인의 탈마저 억압되는 상황에서도 개인의 탈주는 가능한가, 이런 문제적 현실에서 소설은 무엇을 어떻게 꿈꾸고 재현할 수 있는가…… (370쪽)

 

'해설' 시작이 이렇다. 시작에서 어려운 말들이 다 나왔다. 그 다음부터는 구체적인 작품을 예로 들어 설명하기 때문에 이렇게 현학적인 말들보다는 훨씬 이해하기 쉽다. '해설'의 앞부분도 좀 간결하고 쉬웠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만큼 이청준 소설을 이해하는 방법이 다양하다는 것이다. 그가 사용한 표현방식이나 소재가 다양하기도 하고.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이 1960년대에서 70년대 창작되었기 때문에 지금으로 보면 좀 오래되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 당시 상황을 잘 모르고 있기도 하니까.

 

그렇지만 이 소설집 소설을 읽으며 몇 가지는 파악할 수가 있다. 사람들을 옭아매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 그것이 사회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책임은 개인이 질 수밖에 없다는 것.

 

첫소설 '굴레'에서부터 그렇게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그 개인이 그러한 굴레에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표현한 작품들이 있다. '굴레'를 비롯하여 오히려 제목을 굴레라고 붙였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가학성 훈련' 그리고 자신은 언제든지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말도 그렇게 하고 있지만 막상 자신의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하는 '보너스'라는 소설. 이런 굴레에 속한 소설로 '가면의 꿈'과 '엑스트라'와 '들어보면 아시겠지만'을 들 수 있겠다.

 

천재 소리를 들으며 자라 성공가도를 달리던 주인공이 등장하는 '가면의 꿈'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굴레(짐)은 너무도 무거워 가면을 써야지만 안심하게 된다. 하지만 가면도 쓰면 쓸수록 효용성이 떨어진다. 효용성이 덜어지는 가면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파멸해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는 '가면의 꿈'

 

더 많은 소설들이 있지만, 남북관계를 의미하는 듯한 소설(새를 위한 악보 중 돌담 이야기)도 있고, 당시 비틀어진 사회 모습을 비판하는 소설 (새를 위한 악보 중 웃음 선생)도 읽을 만하다.

 

무엇보다도 이 이청준 소설집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개인이다. 결국 소설은 사람의 이야기 아니겠는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소설이다. 그러니 해설에서 말한 탈난 세상이라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돕고 사는 평화로운 공동체가 무어진 세상이라는 뜻이고, 그런 세상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청준 소설은 그런 세상에서 개인들이 굴레에 매여 있으며 가면을 쓰고 살아갈 수밖에 없고, 그것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정확이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들.

 

문제는 있는데, 그 문제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해야 해결이 되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지만 거기에 대해서 포기하지 않고 나름대로 궁리를 하는 인물들이 바로 이청준 소설의 인물들이다.('배꼽을 주제로 한 변주곡'에서 이런 점이 잘 나타나 있다)  

 

이청준 특유의 문체가 있어서 거기에 익숙해지면 읽기에는 무리가 없다. 편하게 읽을 수는 있다. 그렇게 읽어가면서 이청준이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는지는 생각해 보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5 제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정지돈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끔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른다. 그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 있으면 망설이지 않고 고른다. 소설을 멀리한 지는 꽤 되었고, 삶이 소설보다 더 극적이라고 느끼고 있는 요즘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소설을 읽으면서 남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소설은 어쩌면 드라마에 비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많은 작품들에서 거부감을 보이면서도 눈을 떼지 못한다는 것, 자꾸만 빠져들어가게 되어서 결말까지 가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것.

 

최근 소설들에서 요즘 삶의 모습들이 표현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소설을 읽으면서 삶을 거꾸로 발견하는 경우도 있으니, 드라마 역시 소설과 비슷한 역할을 하기도 하니까 둘은 비슷하다. 그럼에도 의식적으로는 멀리하려고 하기도 하니...

 

2015 제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다. 이번에 선정된 작품들은 내용이 다 달라서 어떤 공통점을 찾기가 힘들다.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의 소설에 마음이 더 갈 수밖에 없는 작품집인데, 그럼에도 이토록 다양한 삶들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 중에 특별한 용어를 보고서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정지돈이 쓴 '건축이냐 혁명이냐'는 소설인데, 작가 소개와 해설을 금정연의 소개에 '후장사실주의'라는 말이 나왔다. '후장 사실주의?'

 

사실주의니까 리얼리즘이라는 뜻인데, 후장은? 후장? 우리가 아는 장의 맨 뒤. 소위 직장 쪽인가?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정지돈, 금정연 등이 후장사실주의를 표방하고 나섰단다. '후장 사실주의'란 잡지도 냈다고 하는데, 읽어보기는커녕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으니... 2015년 시네21 인터뷰에 이런 글이 있다.

 

2013년 <문학과사회> 신인상에 <눈먼 부엉이>가 당선돼 등단했을 때 정지돈이 쓴 당선소감엔 후장사실주의의 탄생설(!)이 나와 있다. “2012년 여름 오한기와 후장사실주의 그룹을 결성했다. 통화 중에 우연히 나온 것으로 내가 후장사실주의를 결성하자고 말하자 오한기는 핸드폰을 손에 쥐고 데굴데굴 굴렀다. 후장사실주의는 <야만스러운 탐정들>(로베르토 볼라뇨)에 나오는 내장사실주의의 패러디다.” 기성문단을 공격하고 기성질서를 파괴하길 서슴지 않았던 로베르토 볼라뇨가 20대 초반 초현실주의를 패러디해 인프라레알리스모(밑바닥사실주의-내장사실주의)를 결성했고, 정지돈과 오한기는 다시금 로베르토 볼라뇨의 말을 패러디해 후장사실주의를 만들었다. 더불어 에 실린 정지돈의 글을 인용해 후장사실주의를 설명하면 이렇다. “내가 제일 잘하는 건 인용이다. 문학은 세계의 인용이다. (중략) 후장사실주의는 문학의 인용이다. 그러므로 후장사실주의는 세계의 인용의 인용이다.”

 

(출처 :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2409)

 

후장 사실주의? 어려운 말이다. 그런데 쉽게 이야기하면 사실주의에 똥침을! 정도로 하면 안 되겠나 싶다. 사실들은 사실들인데, 그것들을 어떤 논리적 관계로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무작위로 배열하는 것. 그래서 사실적이기는 한데 도무지 사실적이지 않은 느낌을 주는 소설. 이 정도 아닐까?

 

이 수상작품집에 실린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보면 도시개발이 되기 시작하는 서울의 건축을 이야기하는 것, 그런 서울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이 소설이지만, 소설은 기존의 사실주의를 넘어서고 있다. 여러 사실들이 나열되고 중첩되고 있는데, 이런 사실들이 모자이크 식으로 또는 몬드리안의 추상화처럼 표현되고 있다. 그래서 낯선 느낌을 주는데, 그 점이 이 소설의 장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집에서 공통점을 찾으라면 바로 이런 '낯섬'이 아닐까 한다. 가까이 있지만 서로에게는 낯선 존재이기만 한 관계들.

 

최은미의 '근린'이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한 공간에 같은 시간에 모여 있지만, 이들은 육체적 거리는 가깝지만 마음들은 서로 닫혀 있다. 몸은 가깝고 마음은 먼 상태. 그래서 '근린'이라는 가까운 이웃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이 제목이 가까이 지내지만 서로 낯선 존재로 지낼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낯섬은 사람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주인공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거리를 두고 지낼 수밖에 없는 현대인 또는 사람들.(이장욱, 우리 모두의 정귀보. 김금희, 조중균의 세계) 한 집에서 지내더라도 서로에게 자신을 완전히 열어보지 못하고,  서로의 영역을 지키며 지내야 함을 어느 가정에 보모로 들어가 지내는 사람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손보미의 '임시 교사', 함께 지내더라도 이해한다고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상대를 자신의 틀에 가두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윤이형의 '루카'. 그리고 백수린의 '여름의 정오'

 

일곱 편의 소설들이 각기 다른 내용으로 다가오지만, 그래서 다른 삶들을 엿보고, 내 삶을 돌아보는 역할을 하게 하지만, 공통적으로 현대인들은 서로에게 '거리'를 두고 있다는, 가깝지만 결코 가깝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2015 제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새로운 용어를 만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반가운 소설집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