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 뜨겁게 우리를 흔든, 가만한 서른다섯 명의 부고 가만한 당신
최윤필 지음 / 마음산책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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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하다'는 말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는 말이다. 즉 남 앞에 나서서 특별한 존재로 우뚝 솟지 않았다는 말과도 같다.

 

어떤 사람들은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는 말이 잘 들어맞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꼭 알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신이 한 일을 남에게 이야기하고 남들에게 칭송을 받기 위한 삶을 사는 사람들.

 

이 책은 제목에 어울리게 아주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다. '가만한 당신'이라는 말에 맞게 '뜨겁게 우리를 흔든, 가만한 서른 다섯 명의 부고'

 

부고라면 죽음을 알리는 글인데, 이 책은 이들의 죽음 앞에서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그들이 한 일은 무엇인지를 기록한 전기문이라 할 수 있다. 약전(略傳)이나 소전(小傳)이라고 할 수 있는 글들인데... 한 명 한 명의 삶이 절대로 '가만한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하긴 정말로 이름 없이 살다간 필부들은 이렇게 남들에게 부고조차 남기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부고를 남길 수 있는 사람은 무언가를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만,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제목에 맞게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좋게 하기 위해서 삶을 살아갔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자신을 남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이름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름을 알리기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믿은 대로 행동하고 살아갔을 뿐이다. 이런 삶들이 다른 사람의 삶을 좀더 좋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공통점이 있고.

 

한 사람 한 사람 읽어가면서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네 세상이 좀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따라서 이 책은 참 의미가 있다. 이들을 기리는 부고 형식을 택했지만, 우리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된 존재들을 기억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들을 기억한다는 것은 바로 세상이 조금이라도 좋은 쪽으로 변해가도록 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대부분 처음 들어본 사람이다. 그들이 한 일이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님에도 그들은 그렇게 앞에 나서기 보다는 그냥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했을 뿐이다.

 

여성의 삶을 위해서, 흑인들의 삶을 위해서, 재소자들의 인권을 위해서, 또 어려운 처지에 있는 환자들을 위해서, 존엄한 죽음을 위해서, 세계 평화를 위해서 등등... 이 사람들 이름을 여기에 적어두지는 않겠다.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기보다는 이들이 살아온 삶을 기억하고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들에 관한 이 책. 읽을 만하다. 읽어야 한다. 우리들 세상에 소금이 된 사람들 이야기니까. 다음 권은 '함께 가만한 당신'이다. 이 책도 함께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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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가는 길
정찬주 지음 / 김영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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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이 쓴 답사기와는 좀 다르다. 소설가가 쓴 것이라 그런지 감상적인 내용이 많다. 주관적인 감정도 많이 들어가 있고.

 

그래서 돈황에 관한 책을 읽는 순서가 유홍준의 책을 맨 먼저 읽는 것이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유홍준은 돈황까지 가는 과정을 중시했다면 이 책에서는 서안(장안)에서의 일과 그 다음에는 비행기를 타고 가기 때문에 돈황까지 가는 중간 과정이 없다.

 

다만 서안에서 양귀비와 현종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어 호기심을 자극한다. 자고로 성에 관한 것들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게 마련.

 

이 책에서도 핵심은 돈황석굴, 즉 막고굴이다. 그 부분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특히 소설가답게 학문적인 분석보다는 직관에 따르는 글쓰기를 하고 있어서 더 친근하게 막고굴에 다가설 수 있다.

 

게다가 저자인 정찬주는 막고굴에 있는 벽화에서 삼국시대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감동을 받았고, 그때문에 돈을 더 주고도 삼국시대 사람이 나온 석굴을 돌아보았다는 사실이 그 먼 곳에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감동을 준다.

 

하긴 비단길이라고, 실크로드에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드나들었을테니 그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혜초도 있지 않은가.

 

이렇게 이 책은 저자의 직관을 앞세우고, 감정을 표나게 드러내서 서술하고 있다. 사진도 있어서 막고굴에 있는 문화유산들을 살펴볼 수도 있고.

 

지금은 이때보다 달라졌을테지만, 그래도 한번은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유홍준처럼 과정을 중시하는 답사도 좋지만, 일반 관광객에게는 정찬주처럼 여행할 수도 (물론 그도 학문을 하는 사람들에 묻어서 가긴 했지만)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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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초 대나무 숲에 새 글이 올라왔습니다 우리학교 상상 도서관
황지영 지음, 백두리 그림 / 우리학교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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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숲'

 

우리나라 전래 동화에 의하면 마음 속에 쌓여 있던 비밀을 털어놓은 곳. 세상에 비밀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곳이 바로 '대나무 숲'이다.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이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라고 이상은 말했다지만, 자신만의 비밀을 끝까지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드물다. 그 비밀이 자신의 마음을 꽉 차지하고 있어서 불편하기 때문이다. 하여 비밀을 쏟아낼 공간으로 '대나무 숲'을 만들어 운영하지만, 비밀이란 잘못되면 다른 사건을 불러일으킨다.

 

이 작품(동화)은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주요 인물은 세 명이다. 유나를 중심으로 건희와 민설이 나온다. 가장 밝은 아이인 유나에게 일이 생긴다. 그 원인은 민설이지만 민설이는 두려워서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 여기에 건희가 나서서 진실을 밝히고자 하지만 일은 더욱 꼬여만 간다.

 

유나는 그날 이후로 얼굴에 흉터가 생겨서 그것이 계속 자신을 괴롭히고, 피해자인 자신이 오히려 아이들 구설수에 오르는 것이 마음 쓰이고, 민설이는 자신이 의도적으로 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유나가 다치게 되었는데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남아 있다. 또 학교 폭력으로 전학을 와 마음을 다잡고 지내려 했던 건희는 친해진 유나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이렇게 사건이 전개되면서 아이들이 지닌 상처들이 드러나게 된다. 부모의 이혼으로 힘들어하는 민설이. 난타를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추스리려 했지만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고 새출발을 하려는 엄마에게 걸림돌이 될까 마음 쓰고..

 

학교 폭력 가해자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 건희는 새로운 출발을 하려 하지만, 그또한 친구들과 잘 어울리려는 마음에서 한 행동이었음을, 자신이 이용당했음을 알고, 나중에 자신이 괴롭힌 아이가 마음 속에 계속 남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햇빛초 대나무 숲 운영자가 바로 건희 자신임을 유나에게 밝히고, 그 대나무숲으로 인해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생각에 계정을 폐쇄해 버리는데...

 

그럼에도 이 작품은 갈등이 완전히 해결이 된 상태로 끝내지 않는다. 동화들이 자칫하면 완전하게 결말을 짓는 일이 많은데, 이 작품은 결말을 열어두고 있다. 물론 행복한 결말이라는 예상을 하게 되지만, 문제는 각자가 알아서 해결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내 문제는 누구도 대신 해결해 줄 수 없음을 민설이가 직접 자신이 한 일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알 수 있게 된다. 건희 역시 마찬가지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유나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계정운영자임을 밝히는 것이다.

 

문제해결이 주체가 바로 자신임을 드러내는 장면들이다. 유나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이 해결하는 것이다. 민설이 엄마에게 자신에게도 사과하라고 하는 장면에서, 또 민설이를 난타 연습실로 들어오게 하는 장면에서 그 점이 잘 표현되고 있다.

 

아이들 사이에서 작은일이 큰일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하면 그 작은일이 더 커지기 전에 해결해야 함을 생각할 수 있다.

 

동화가 지닌 힘은, 직접적으로 이래라 저래라 하기보다는 자기 또래의 인물들이 하는 행동을 보고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볼 수 있다는 데 있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다. 요즘 아이들은 친구를 사귀기 힘들어 하고 또 형식적으로만 사귀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음을, 아이들은 누구나 자신을 이해해주는 친구를 사귀고 싶어함을, 친구들이 아이들 관계에서 무척 중요함을 이 작품이 잘 보여주고 있다.

 

갈등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해야 더 커지지 않을지, 또 갈등을 잘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코로나 19로 아이들까리 관계를 맺을 기회가 더 줄어들고 있다. 그것은 단지 학업성취라는 측면을 떠나서 함께 관계를 맺는 활동이 사라지고 있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아이들에게는 많은 고민이 있다. 그 고민은 스스로 해결해야겠지만,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바로 관계다. 가족, 친구, 선생님(이 작품에 나오는 보건교사를 보라.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아이들의 고민을 받아줄 뿐이다)과의 관계를 통해서 해결하는 힘을 얻게 된다.

 

이 책에서 유나, 민설, 건희는 바로 이런 관계들을 통해서 스스로 자신들의 상처를 보듬고 성장해 나가는 것이다.

 

덧글

 

출판사에 책읽기 신청을 해서 받은 책이다. 잘 읽었다. 보내준 우리학교 출판사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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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좀 걱정을 하기도 했었다. 과연 녹색평론 174호가 나올 수 있을까 하는. 김종철 선생이 돌아가시고 이 잡지가 지속될 수 있을지 궁금했는데...

 

  지속된다. 아니 지속되어야만 한다. 아직도 김종철 선생이 주장했던 것들이 진행형이기 때문에. 우리들 삶이 여전히 불안하기 때문에. 이 불안함 속에서 그래도 길을 비춰주는 빛 역할을 할 존재가 필요하기 때문에라도.

 

  녹색평론은 이런 빛이었다.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는.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그런 빛. 단지 그런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따스함을 전해주는 온기 역할도 했다. 빛은 밝기와 열기를 함께 지니고 있지 않은가.

 

앞으로도 녹색평론이 지속될 것이라는 생각에 그나마 위안을 삼으면서 이번 호를 읽었다. 이번 호는 김종철 선생을 추모하는 글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단순히 한 사람을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녹색평론이 해온 일을 정리하는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

 

한 세대 넘게 녹색평론을 이끌어 오면서 우리들에게 끊임없는 죽비를 내렸던 김종철 선생에 대한 추모글을 통해 그 죽비가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함을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 우리는 어른 한 분을 잃었다.

 

하지만 그 어른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녹색평론을 통해 그분이 했던 말들을 잊지 않는다면.

 

읽으면서 '꼰대와 어른'이라는 두 단어를 떠올렸다. 김종철 선생은 분명 어른이었다. 그런데 이분이 어떤 사람들에겐 꼰대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하는 불경한 생각. 이분을 꼰대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에서 변화는 불가능하다는 생각. 하지만 이 분을 어른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사회에서는 변화가 가능하다는 생각. 

 

꼰대는 자신의 경험만을 중심으로, 오로지 자신이 옳다는 신념으로 그것을 끝없이 남에게 강요하는, 그것도 자신의 권력을 기반으로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정의가 김종철 선생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어른은 바로 이런 꼰대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넘어 세계로, 또 타인에게로 나아가는 자세, 내 이익이 아니라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워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사람, 결코 권력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 스스로 행동함으로써 그점을 보여주는 사람. 김종철 선생은 그런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시대의 어른이었다는 생각. 우리는 또 한분의 어른을 잃고 슬픔에 잠겨 있지만, 이제 우리도 그런 어른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이번 호였다.

 

언제까지나 우리는 김종철 선생을 어른으로 모시며 그분에게 배움을 요청하는 존재로만 남아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가 어른이 되어야 한다. 꼰대가 아니라. 그러니 좀더 근본적인 문제에 천착할 수 있는 시야를 갖자. 자신의 틀에만 갇히지 말자. 그 점을 생각한다.

 

이번 호에서 김종철 선생에 대한 추모글도 좋았지만, 농업과 교육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이근행과 정형철의 글도 좋다. 코로나19로 농업과 교육에 대해서 근본적인 성찰을 했으면 좋겠는데, 너무 피상적으로만 흐르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는데, 이번 호에서 그 점을 잘 지적해 주고 있다.

 

그린뉴딜이라는 말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 그린뉴딜에서 농업이 과연 얼마나 차지하고 있는가 보면 농업은 여전히 뒷전이다. 이근행은 그 점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녹색성장'을 내세우며 4대강을 파헤치고 보를 쌓는 데 세금을 낭비하고 물난리를 초래한 토건세력과, '그린뉴딜'을 내세우며 데이터와 스마트 산업에 100조를 투자해 '똑똑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정치세력은 얼마나 다를까? 포클레인이 컴퓨터로 바뀌면 우리는 '더 보호받고 따뜻한 나라'에서 살 수 있을까? '사람이 중심인 나라다운 나라'는 각자도생의 사회는 아니지 않겠는가. (이근행, 그린뉴딜의 본류는 농(農)이다에서. 163쪽)

 

그러니 농업 정책에 대해서 농민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목소리를 내야 한다. 농업을 등한시하면서 우리들 삶이 유지될 수는 없다. 우리는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으니까. 그리고 농업은 우리의 삶을 지탱할 수 있는 가장 기본이니까.

 

여기에 온라인수업이 성공적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앞으로 교육은 온라인수업과 대면 수업을 병행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는데, 정형철은 그 점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다.

 

  어떠한 형태나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해도, 온라인교육으로는 '교습'이나 '강습'이 가능할 수는 있어도 궁극적으로 아이들이 '배움'에 도달할 수는 없음이 명확해진 것이다. ...

  스크린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하게 배움을 차단하는 장벽이다. ...

  온라인을 통한 스크린교육은 배움의 공간에서 일어날 수 잇는 자질구레한 모든 배움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정형철, 코로나 시대에 교육을 생각한다에서. 189쪽) 

 

교육이, 한 사람의 민주시민으로 성숙해가는 아이들의 '배움'에 그 목적이 있지 않고, 지금 우리 사회의 입시교육처럼 '성과'를 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우리 교육이 온라인교육으로 대체된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여전히 대학입시 제도가 우리 사회의 모든 교육과정을 짓누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아무런 성찰과 변화 노력 없이 교육의 미래를 이야기한다면, 온라인교육이 현재의 교육시스템을 대체해나간다고 해서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정형철, 코로나 시대에 교육을 생각한다에서.190쪽)

미래교육이라는 이름을 달고 지속적으로 교사와 학생, 학부모를 현혹하는 전문가들이나 관계자들의 배후에는 에듀테크 자본이 자리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기술자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거나 아니면 놀아나는 교사들이나 교육전문가들이다. 이들은 현실의 교육문제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오인하고 잘못된 길로 유도한다. 지금도 지나친 기술주의와 교육시장화가 우리 교육을 좀먹고 있음에도, 이들은 점점 더 강력한 기술주의 해법과 비즈니스 전략을 들고 미래교육을 떠들고 있다. (정형철, 코로나 시대에 교육을 생각한다에서. 193쪽)

 

더 많은 내용이 있지만, 온라인수업의 병폐가 드러나고 있는데, 그것을 성공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스스로 교육을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봐야 한다. 코로나19가 심각해지는데도 고3들은 입시하는 이유로 등교를 해야 하는 나라가 우리나라이지 않은가.

 

여전히 대학입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교육 목표다. 이런 대학입시에 대한 변화가 없으면 온라인수업은 성공이다. 성공할 수밖에 없다. 교육이 지니고 있는 다른 모든 면들을 제외하고, 오로지 문제풀이에 집중할 수 있을테니.

 

하지만 그로 인한 격차들, 또다른 문제들, 그리고 '관계'를 통한 배움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농업과 교육, 코로나19로 근원에서부터 다시 생각하고, 개혁을 할 수 있는 분야일텐데, 그것을 엉뚱한 쪽으로 몰아가면 안 된다는 것을 이번 호에서 지적하고 있다.

 

좀더 깊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이렇게 농업과 교육 문제를 지속적으로 다뤄야 할 것이다. 농업과 교육은 분명 '생태'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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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클라마칸 - 돌아올 수 없는 사막
브루노 바우만 지음, 이수영 옮김 / 다른우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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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그야말로 모래가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곳. 물이라곤 찾을 수 없고 보이는 것은 모래들뿐. 사막하면 그런 심상이 떠오른다. 사막하면 대표적으로 사하라 사막과 고비 사막을 떠올리는데, 예전에 타클라마칸 사막에 대해서도 이름만은 들어본 적이 있다. 실크로드와 관련해서.

 

유홍준이 쓴 중국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촉발해서 돈황에 관한 책을 읽고, 돈황을 지나 펼쳐져 있는 타클라마칸 사막에 대한 책을 읽게 되었다. 이렇듯 한 책은 다른 책을 불러낸다.

 

스벤 헤딘이라는 사람이 1890년대에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한 다음에 책을 냈다고 한다. 그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정도로 매우 고생을 했다고 하고, 현지인 두 명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또 낙타들도 많이 잃고 간신히 물이 있는 호탄 강까지 도착했다고 하는데...

 

그가 쓴 책을 읽고 그와 똑같는 시기에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가 한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자세로, 또 스벤 헤딘이 사막이 놓고 온 것들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모험을 감행한다.

 

약 100년 뒤. 그러니까 스벤 헤딘이 살았던 시대보다 더 월등히 성능이 좋은 장비를 갖추고 출발을 하는 것이다. 스벤 헤딘이라는 사람의 기록이 있었기에 물도 더 준비하고... 그가 간 경로를 따라 가는데...

 

그런데 사막은 우리 인간이 예상한 것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존재할 때가 많다. 타클라마칸 사막도 마찬가지다. 낙타 6마리와 현지인 두 명, 통역할 수 있는 중국인 한 명, 그리고 동료 한 명과 함께 출발한 바우만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에게는 위성으로 위치를 알려주는 도구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먼저 간 사람의 기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사막이 그의 계획대로 되어 주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물이 떨어지자 낙타들이 죽어 간다. 함께 했던 사람 중 한 명도 낙타에게 걷어차여 더 이상 갈 수가 없게 된다. 여러 가지 일들이 겹쳐서 죽음을 생각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다행히 이들은 사막을 무사히 건너 호탄 강가에 도착하지만, 사막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읽으면서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 인생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인생을 흔히 고(苦)라고 하지 않는다. 인생은 고해(苦海)라고도 한다. 만만치 않다는 얘기다.

 

그래서 준비를 많이 한다. 함께 가야 할 사람도 있어야 한다. 사람만이 아니다. 다른 존재들에게도 빚을 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아무리 준비를 잘해도 인생에서는 우리가 예상하지 또 예측하지 못한 어려움을 만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내게 소중했던 존재들을 잃기도 하고, 큰 어려움에 처해 이도저도 못할 때도 있고, 그럼에도 다른 존재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나기도 한다. 큰 어려움을 이겨냈다고 안도한 순간, 더 큰 어려움이 다가오기도 한다. 마치 이 책의 저자인 바우만이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할 때 겪었던 일처럼.

 

이 책 318쪽에 있는 사막 사진을 보자. 정말 광대한 사막이다.

 

 

이 사막에 있는 한 점의 모래와 같은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다. 그만큼 인생은 사막 한 가운데 있는 것처럼 막막하기도 하다. 그러나 언젠가는 끝이 있기 마련이다. 그 끝을 행복하게 마치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준비를 하고, 많은 존재들과 함께 살아간다.

 

어쩌면 이렇게 광대한 사막을 횡단하려는 모험을 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인생이 이와 같은 모험이라는 것을 보여주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진과 먼저 간 스벤 헤딘의 발자취와 그를 통해서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하는 바우만의 여정이 우리의 인생과 겹쳐서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바우만처럼 이렇게 사막을 횡단하지는 못하겠지만, 사막 횡단 이야기를 통해 내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계기를 갖게 해준 책이라는 점에서 즐겁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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