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박스 - 남자다움에 갇힌 남자들
토니 포터 지음, 김영진 옮김 / 한빛비즈 / 201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 서로 다른 유리천장과 맨박스 : 피해자와 가해자


눈에 띄지는 않지만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고 있는 장치가 있다. 우리라고 했지만, 성별 분류법에 따라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여성과 남성을 우리하고 하자. 슬픈 일이지만 성소수자들은 우리라는 범주에서 잠시 제외하자. 


왜냐하면 여성이 차별을 받는다고 해도 그들의 차별은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에 갇혀 있지만, 성소수자들은 유리천장이 아니라 높고 굵고 단단한 벽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담장 안에 갇혀 겨우 간신히 출입할 수 있는 문만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이 글에서 우리라는 말에 주류 성별인 여성과 남성으로 한정하고자 한다. 아직도 성소수자들은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조차도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유리천장 하면 여성 차별을 떠올린다. 능력이 같더라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제약을 받는 경우를 일컫는 말로 많이 쓰인다. 이게 평소에는 보이지 않다가 여성이 사회에서 주어진 한계를 넘어서려 하는 순간 탁 부딪히고, 여성을 쓰러뜨리고 가두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유리천장을 지닌 여성은 피해자가 된다. 반면 맨박스는 남성의 행동을 제약한다. 이 역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을 제약하는 역할을 한다. 여성의 유리천장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역할은 정반대다. 맨박스는 다른 사람, 특히 남성을 의식하게 만든다. 남자다움이라는 것을 행동에서 이끌어내게 한다. 혼자 있을 때는 잘 발현이 되지 않다가도 여러 남성과 함께 있을 땐 아주 강하게 발현된다. 유리천장이 여성을 쓰러뜨리고 가둔다면 맨박스는 남성을 거칠게 행동하도록 유도한다. 특히 여성이나 다른 약자들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맨박스는 남성들이 주로 가해자로 행동하게 만든다. 맨박스는 자신의 우월감을 만족시키는 도구로 작동하기도 하고, 다른 남성의 평판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도 작동한다. 어떻게 작동하든 여성을 대상으로, 또는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가해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이 약자이고, 피해자가 된다는 식으로. 유리천장이 잘못된 사회적 인습이라면, 맨박스 또한 잘못된 사회적 인습이다. 우리가 벗어나야 할 인습. 이것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될 수 없는, 혁파해야만 할 인습인 것이다.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고 인식하지도 못한 상태로 가해자가 되게 하는 맨박스. 보이지 않지만, 여러 남성들과 함께 있을 때 자연스레 발현되는 그런 맨박스.


이렇게 유리천장과 맨박스는 보이지 않지만 여성과 남성의 행동을 제약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작동하지만 방향은 정반대다. 피해자와 가해자로. 자,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피해자와 가해자를 양산하는 제도나 관습이 필요할까? 당연히 필요없다. 없애야 한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21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없어지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을까?


그것은 책임을 개인에게 지우기 때문이다. 유리천장을 깨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도 노력을 덜한 여성의 책임으로, 맨박스에 갇힌 행동을 해도 그런 행동을 한 한 남성의 책임으로만 여기는 사회에서는 유리천장과 맨박스도 없어지지 않는다.


2. 해결책은 백신이다. 접종률이 60%가 넘어야 하는


이런 일은 한 개인의 책임으로 넘겨서는 안 된다. 또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해서도 안 된다. 가해자가 또는 가해자와 같은 범주에 속한 사람들이 해결하려고 해야 한다. 


이 책에서 언급된 성폭행 사건을 보자. 미국 대학에서는 성폭행 사건이 자주 일어난다고 한다. 주로 피해자는 여성이고 가해자는 남성이다. 그런데 해결책은 주로 여성에게 주어진다. 가해자인 남성에게서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 책에 언급된 내용을 보자. 지금 우리 사회에서 성폭행 사건이 일어났을 때 세우는 대책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한번은 내가 운영하는 단체인 ACTM(행동하는 남성들 A Call To Men이라는 단체의 약자다)이 대학 캠퍼스에서 발생한 끔찍한 강간 사건의 대응팀 회의에 초청받은 일이 있다. (중략)

주요 의제는 학교 측의 즉각적이고 장기적인 캠퍼스 내 여성 안전조치였다. 토론을 거치면서 비상연락망 제작, 여학생들 간의 2인 1조 시스템, 여학생들을 위한 교내 셔틀 차량의 증편 등이 논의되었다. (중략) 이 방법은 남성이 저지른 폭력에 대처할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한다는 점이다. 대처할 책임을 여성들이 져야 할 뿐만 아니라 안전을 도모한다는 미명 하에 여성들의 행동을 제약하고 더욱 불편하게 만드는 대응책이었다. 남성들의 삶에는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은 채 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성 폭력 문제의 대응책이었다. (135쪽)


"... 남학생들을 차량으로 이동시키면 어떨까요? 남성이 범죄의 장본인인데 왜 남성이 저지른 폭력 때문에 여성들이 피해를 바야 하죠?" (136쪽)


학교는 교내 성폭력 대응 방침을 개선하는 한 달 동안 여학생이 아닌 남학생들을 차량으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했다. (137쪽)


바로 이것이다. 성폭행 사건이 벌어졌을 때 우리 사회에서 제시하는 방식도 여성의 안전에 대해서 논의를 먼저 한다. 대책도 그 선에서 나온다. 가해자인 남성을 제약하는 대처 방법은 나오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피해자의 행동을 제약하는 대책이 나온다. 마치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그리고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특정 개인, 즉 대다수의 남성은 그렇지 않은데, 문제 있는 몇몇이 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대다수의 남성에게는 책임이 없다. 그들은 착한 남성일 뿐이다.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이렇게 나간다.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착한 남성들이 많다. 너무도 착해서 문제를 일으킨 특정 남성에게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그들의 행동을 뒤에서 수군거리면서 나는 저렇게 행동하지 않아, 그 사람 행동이 잘못됐어라고는 하지만, 그 사람 앞에서 직접 그렇게 하면 안돼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냥 착할 뿐이다. 그리고 내가 아닌 것에 안도하고 그냥 넘어간다. 이러니 맨박스는 눈에 드러나지 않고 남성의 행동을 계속 규정지을 수 있게 된다.


이 책에서 토니 포터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한다. 소위 착한 남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잘못된 행동을 지적해야 한다는 것. 그것은 맨박스라고. 우리가 없애버려야 할 맨박스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착한 남성들이 말하기 시작하면 맨박스가 눈에 보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착한 남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맨박스를 예방하는 백신이다. 독감을 예로 들면 걸린 사람만 치료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독감은 늘 유행하게 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런데 백신을 60% 이상의 사람들이 맞으면 독감 유행을 어느 정도는 막을 수 있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다. 맨박스를 없앨 수 있는 방법. 바로 착한 남성들이 백신 역할을 해야 한다. 그들이 맨박스를 인식하고, 맨박스가 작동되었을 때 그것을 지적해야 한다. 이런 지적들이 쌓이고 쌓이면 백신처럼 맨박스가 작동하는 것을 멈출 수가 있다. 아주 좋은 지적이고 제안이다.


3. 이 책이 제시하는 방법 : 일곱 가지 메시지


1) 남성 중심주의는 사라져야 합니다. ... 오늘날 남자다움의 정의는 세 가지 큰 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인식입니다. 둘째,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인식입니다. 셋째, 여성은 남성의 성적 도구라는 시각입니다.


2) 가정 폭력과 성폭력을 근절하는 노력은 전적으로 남성들의 몫입니다. 


3) 폭력과 차별은 종류와 관계없이 사라져야 합니다.


4) 여성들이 내는 목소리에 귀 기울려야 합니다.


5) 여러 억압 행위에는 교차점이 존재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6) 지역 사회에 기반을 둔 참여를 유도해야 합니다.


7) 남성 스스로 남성에 대한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179-180쪽)


4. 무엇이 맨박스인가: 맨박스 10계명


남자는 울지 않는다  

남자는 분노 이외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남자는 쫄지 않는다

남자는 모든 것을 지배하고 통제한다  

남자는 약한 것들을 보호한다  

남자는 강하고 여자는 약하다  

남자는 여자처럼 굴지 않는다 

남자는 게이처럼 굴지 않는다 

남자는 여자를 소유한다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


이게 십계명이란다. 남자다움의 십계명. 설마 이 십계명을 금과옥조로 여기면서 살아가는 남자로 살고 싶지는 않겠지. 남자이기 전에 사람이다. 여자이기 전에 사람이다. 성소수자이기 전에 사람이다. 우리는 모두 사람이다. 사람은 모는 사람을 차별할 권리가 없다. 사람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할 책임이 있다. 사람은 모든 사람을 자기 자신처럼 대해야 한다. 그러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 


이 책, 모든 남자들이 읽어야 한다. 맨박스에 자신도 알게모르게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이 책의 5장을 보면 다른 남자들의 사례를 통해서 자신을 비춰볼 수 있다.


남자들이 맨박스에서 벗어나면 여자들도 유리천장을 깰 수 있다. 그리고 둘 다 없는 세상에서는 성소수자들도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은 남자만의 또 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람들의 문제인 것이다.


이 책은 그 점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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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로포트킨이 생각났다. 상호부조론. 쉽게 말하면 '만물은 서로 돕는다'는 의미.

 

  우리는 서로 얽혀 있다. 연관되어 있다. 홀로 살아갈 수는 없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말은, 나는 세계에서 유일한 존재라는 것. 내가 유일한 존재가 될 때 다른 존재 역시 유일한 존재라는 것.

 

  우리는 유일한 존재들이 모여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런 세상이 따스한 세상이다. 적자생존이라든지, 약육강식이라든지 하는 말들이 세상을 규정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이 말들보다 앞서 있는 것이 바로 상호부조다.

 

우리는 서로 돕고 살 수밖에 없다. 이렇게 서로 돕고 살지는 못하더라도 따뜻한 외면을 할 수 있다. 외면은 본래 따뜻한 것이 아니라 차가운 것인데, 상대를 돕기 위해 외면할 때 그때는 따뜻한 외면이 된다.

 

남들에게 관심을 표명하는 것이 상대를 위하는 것일테지만, 가끔은 아주 가끔은 외면해줄 때 상대를 위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복효근이 쓴 이 시집을 보면 마음이 따스해진다. 그러한 시들이 많다. 그 중에 시집의 제목이 된 '따뜻한 외면'을 보자.

 

  따뜻한 외면

 

비를 그으려 나뭇가지에 날아든 새가

나뭇잎 뒤에 매달려 비를 긋는 나비를 작은 나뭇잎으로만 여기고

나비 쪽을 외면하는

늦은 오후

 

복효근, 따뜻한 외면, 실천문학사. 2013년. 43쪽.

 

따스하다. 관심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관심을 주어야 하고, 외면하는 것이 좋을 때는 외면할 수도 있는 것. 그것은 바로 내 관점에서 상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능력, 감수성을 지닌 것이다.

 

이런 감수성이 더욱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한다. 오로지 공정성이라는 이름으로, 한 가지 기준으로 사람들을 줄 세우는 그런 사회보다는, 공정성이 획일적이지 않게 각 사람에 맞는, 또는 각 존재에 맞는 기준을 마련할 수 있는 여유를 지니는 것.

 

그런 세상에 대한 꿈을 꾼다. 시를 읽으며.

 

이와 비슷하게 시집에서 '장작 패는 법'이라는 시에서 한 구절을 마음에 새긴다. 이 역시 '따뜻한 외면'이리라.

 

           (생략)

 

제 몸의 상처를 감싸고 돌처럼 굳어진 옹이엔

도끼날을 들이대지 않아야 하네

옹이는 나무의 사리이므로

상처를 사리로 만드는 기나긴 나무의 생에 대한 예의이므로

온몸에 불을 붙이고 제 갈 길 제가 밝히고 가는 장작,

장작에 대한 예의이므로

 

복효근, 따뜻한 외면, 실천문학사. 2013년. '장작 패는 법'에서.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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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코로나 19에 대한 이야기와 또다른 하나는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던 의사들의 진료거부 문제나 또는 공공의료 문제다.

 

  코로나 19는 세계를 대혼란에 빠뜨렸다. 어쩌면 이 코로나 19로 세계가 위기의식을 지니고,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위기는 곧 기회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여전히 성장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세계 각국, 그리고 우리나라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재난이 앞으로도 계속 발생할 가능성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삶을 바꾸지 않으면 코로나 19와 같은 재난은 반복됨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재난으로 재난 소득이나 기본 소득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이것이 중도에 멈추었다는 생각이 든다.

 

재난 소득이나 기본 소득은 우리의 생존에 필수불가결임을 생각해야 하는데, 일회성으로 그치고 말면 안 되는데, 그렇게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씁쓸하다.

 

이번 호에서 강남훈이 쓴 '재난소득 논쟁에 답한다'는 글은 꼼꼼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재난 소득을 넘어 기본 소득으로 논의가 확장되어야 한다.

 

여기에 이러한 재난 상황에서 우리는 k-방역이라고 해서 성공적으로 코로나 19에 대처했다고 자화자찬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면에서 보면 과연 우리나라 공공의료가 제대로 확립되어 있나 하고 질문을 하면 그렇지 않다는 답이 나온다.

 

공공의료에 대한 지원보다는 민간의료에 대한 의존도가 훨씬 높음을, 우리나라가 k-방역에 성공했다고 하지만, 공공의료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정부 정책에 협조한 결과고, 또한 감염되지 않도록 사전에 차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전에 감염을 차단하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우리들의 정보를 순순히 넘겨주었던가. 내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기록되고, 남에게 알려지는 일을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세상이 되지 않았는가?

 

개인정보보호 운운하지만,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공개되고, 기록되는 이 세상에서 촘촘하게 짜여진 이러한 사회에서 감염은 차단되기 쉽지만, 이러한 차단의 성공으로 치료를 하는 공공의료 부분에 눈을 돌리지 못한 것이 현실이라고 한다.

 

그러니, 성공의 이면에 있는 것들. 의사들이 진료거부를 한 것이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들의 의견도 참조하면서, 개혁을 추진해야 하고, 또 공공의료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민간 의료를 더욱 확장하는 식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번 호에서 지적하고 있다. 

 

김종철 선생은 갔지만 여전히 녹색평론은 우리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준다. 지금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책.

 

읽고 읽고 읽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내 삶의 방식을 바꾸려는 노력을 하게 만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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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 슬픈 열대
폴 고갱 지음, 박찬규 옮김 / 예담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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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폴 고갱 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고흐다. 그리고 장소로는 타히티다. 또 그를 떠올리면 소설 '달과 6펜스'도 떠오른다. 읽은 것 같은데,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소설. 어쩌면 제목만 보고 지나쳤는지도 모른다. 해설만 읽고 넘어갔을 수도 있고. 아님, 어릴 때 읽었는데, 기억에서 사라졌는지도... (이 참에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여간 고갱이라는 사람은 요즘 컴퓨터 검색 용어로 치면 연관 검색어에 많은 것들이 떠오른다.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화가의 길로 들어선 사람. 파리라는 대도시의 삶을 견디지 못해 타히티라는 원시성이 강한 곳으로 가, 그곳에서 삶을 마감한 사람.

 

고흐와 공동 작업을 하기도 했지만, 불화로 헤어졌지만, 고흐에 관한 그의 글을 읽어보니, 고흐를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가족과 헤어져 살았는데, 어찌보면 무책임한 가장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지만, 예술에 대한 열정과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이 가족과도 떨어져 살 수밖에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글들이 많다.

 

그렇게 헤어져 살고 있으면서도 가족에 대한 생각을 그치지 않았던 고갱. 부인인 마테에게도 타히티에서 같이 살자고 말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국 홀로 타히티로 갈 수밖에 없었던 고갱.

 

전시회에서 호평을 받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림은 잘 안 팔리고, 그래서 궁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고, 타히티에서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하지만 그것마저 여의치 않아 자살 시도까지 했다고 하니... 고흐 역시 자살로 삶을 마감했는데.

 

이 책에서 고갱이 쓴 편지글을 보니 자살 시도를 했지만 비소(?)를 너무 많이 먹은 바람에 다 토해서 살아났다는 것.(223쪽)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심장마비(이게 사인이라고 추정한다고 한다. 216쪽)로 급작스레 죽음을 맞이했다고 하는데...

 

어쩌면 고생은 현세에서의 삶은 지지리도 궁상맞은 삶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세속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가정 생활도 그다지 행복하지는 못했을 것이고. 자식이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견뎌내야 했으니...

 

하지만 그는 역작을 남겼다. 제목도 철학적인 작품.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작품.

 

이 작품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 그림을 아무렇게나 그린 미완성 작품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네. 자기 작품을 스스로 평가한다는 게 어떨지 모르지만, 이 그림은 내가 전에 그린 어떤 작품보다도 뛰어나고 앞으로도 이보다 더 좋은 작품은 나오기 어려우리라고 믿네.

  죽기 전에 내게 남은 모든 힘과 극한상황에서 나오는 고통스런 열정을 모두 쏟아붓고 순수하고 티없는 이상을 불어넣었네. 그래서 작품의 미숙함은 사라지고 삶이 솟아올라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지.

  이 그림은 모델과 기교를 배제하고, 그림이 내세우는 규범들을 무시해버렸네. 망설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전부터 이런 것들을 뛰어넘고 싶었네. (223쪽- 226쪽) 

 

이렇게 그는 우리에게 작품을 남겼다. 그가 살던 곳을 과연 슬픈 열대라고 할 수 있을까? 그가 세속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자신이 만족할 만한 작품을 남긴 곳인데... 슬픈 열대라고 하기보다는 작품의 안식처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슬픈 열대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고갱이 살아가던 그곳이 다른 식민주의자들에게는 그저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곳에 불과했다는 것. 동등한 인간으로서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것을 고갱이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그는 말년에 탄압받는 원주민들을 위해 일을 하려 했다고 한다. 탄원서도 내고. 그에겐 그곳이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억압받고 무시 당하는 그런 곳이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비록 그가 일의 결말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자신의 예술을 지속하게 해준 그곳을 그는 적어도 동등하게 대했음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고갱 자신이 직접 쓴 글을 통해서 그가 어떤 고민을 했는지, 어떤 삶을 살려고 했는지를 엿볼 수 있게 된다. 고갱의 글을 읽음으로써 고갱의 작품에 더 많은 의미가 있음을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글만큼 고갱의 그림이 많이 수록되어 있으니, 여러모로 고갱을 알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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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 읽으며 제목이 정말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제목을 붙일 수 있을까? 시 제목이 '제목을 붙일 수 없는 슬픔'이다. 차마 제목을 붙이지 못하는.

 

  이육사 시 '청포도'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러지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라는 말.

 

  청포도에 전설과 하늘이 함께 들어와 있다는 것인데, 이는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 함께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게 현재는 과거와 미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과거와 미래를 부정하는 현재는 제대로 된 현재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를 부정하면서 살아오지 않았던가. 우리나라가 이루었던 근대화라는 것은 과거와의 단절 아니던가. 

 

과거를 받아들여 미래로 나아가는 디딤돌로 삼은 것이 아니라 과거는 그냥 엎어버려야 할 유물로만 취급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지내온 우리는 뿌리뽑힌 삶을 살아가게 되지 않았던가. 그런 생각을 한다. 청포도 시와 전혀 상반되는 세상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지 않나 하는 슬픈 생각.

 

제목을 붙일 수 없는 슬픔

 

할아버지가 돌아가지자

국민학교 출신 아버지는 무덤을 만들어주고

중학교 출신 그의 아들은 10년 후

어느새 아예 그 무덤을 없애버리고

그 자리에 밭을 일구어 고구마를 심고

20년 후, 또 그의 손자는 그 밭마저

아파트업자들에게 미련없이 팔아버리고

아 그리하여 옛사람의 그림자도 사라졌다네

 

김준태, 꽃이 이제 지상과 하늘을. 창작과비평사. 1994년. 77쪽. 

 

이게 시적 표현에 불과할까. 아니다. 이렇게 지내온 것이 우리 현실이다. 하지만 옛것이 무조건 좋다는 것을 떠나서 옛것은 모두 사라져야만 할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그냥 엎어버리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옛사람의 그림자도 사라졌다네'라는 말이 들린다면, 우리가 무엇을 위해 이토록 달려왔던가. 이렇게 과거를 지운 사회가 행복한 사회일까? 아닐 것이다.

 

오에 겐자부로가 쓴 글 중에 '아이들이 왜 학교에 가야 하는가'에서 학교는 과거와 현재를, 과거의 사람과 나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나를 다시 미래로 연결지어 주기 때문에 가야한다는 의미의 글이 있었다.

 

학교가 존재하는 이유가 그것이라면, 우리가 지금을 살아가는 이유도 이것이다. 과거와 미래를 현재에 이어 함께 살아가는 것. 그래서 과거를 잊고, 과거를 밀어버리고 살아가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시인은 그 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현실에 어떻게 제목을 붙일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일이 되풀이 되지 않게 해야 하지 않을까. 시를 읽으며, 하루하루 급변하는 이때, 다시 과거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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