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8
헤르만 헤세 지음, 박병덕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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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작품이다. 싯다르타.


우선 싯다르타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부처다. 고타마 싯다르타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이 소설 제목을 보고 부처의 이야기구나 하고 생각하기 쉽다. 작품을 읽지 않으면 저지를 수 있는 실수가 바로 싯다르타가 부처라고 생각하는 일이다.


소설 속 인물은 싯다르타는 부처와 다른 인물이다. 부처와 만나는 장면이 소설에 나오기는 하지만, 주인공은 부처가 진리를 말로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부처의 제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떠난다.


그러니 부처와 이름이 같은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한 인물의 이야기라고 하면 된다. 이 소설은. 물론 소설을 읽다보면 싯다르타가 부처가 되어 감을 알 수 있다. 부처가 무어라고 했나. 우리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부처가 되기 위해서 말에 의존해야 하는가? 글에 의존해야 하는가? 아니다. 그래서 부처는 나중에 아무 말도 없이 손가락을 들어 보이지 않았는가? 말에 의한 깨달음이 아니라 부처가 살아온 하나하나가 모두 진리가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부처의 말을 달달 외운다고, 어느 때고 부처께서는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산다고 해서 진리를 깨우쳤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리는 자신의 삶을 통해서 깨우쳐야 한다. 주인공 싯다르타가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친구였던 고빈다로부터 부처의 모습과 같은 모습을 지녔다는 말을 듣는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음을 이 소설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부처가 하고자 했던 말이 바로 독일의 작가에 의해 소설로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깨달음의 과정은 치열하다. 너무도 어렵다. 싯다르타는 젊은 시절에 자신의 뛰어난 능력으로 진리에 대한 욕망을 키우고, 그것을 목표로 정진한다. 하나의 목표를 세우고 자신을 나아가게 하는 것. 이것은 그 목표와 어긋나는 모든 것들을 배제한다는 부작용이 있다. 마치 경주마처럼 양 옆을 가리고 앞만 보고 달려가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싯다르타 역시 마찬가지다. 뛰어난 능력으로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집에서 나와 사문이 되고 결국 고타마 이야기를 듣고 그를 만나지만 그에게 머물지 않고 또 길을 나선다. 자신만의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이 목표를 이루는데 그가 겪는 일은 여자를 만나 사랑을 하는 일, 재산을 불리는 일에 참여하여 향락에 빠지는 일 등이다. 세속적 욕망을 거치지 않고 진리를 깨닫는 일이 얼마나 허망한 것임을, 젊은 싯다르타가 이런 일들을 겪는 과정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 일들의 허망함을 깨닫고 다시 길을 나서 강가에서 나름대로 해탈의 경지에 이르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자, 무슨 일을 겪어야 하나? 그것은 바로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세상 어떤 사랑보다도 끊기 힘든 것이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맹목적 사랑. 이것은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자식에 대한 사랑은 자식을 자신과는 다른 독립된 존재로 인정하기보다는, 자신의 영향 아래에 있는 존재로, 끊임없이 자신이 보살펴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를 떨쳐내지 못하면 자식을 독립된 존재로, 즉 스스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인정하지 못하게 된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싯다르타도 자식에 대한 사랑만은 어쩔 수 없어한다. 온갖 고뇌를 겪은 후에야 자식을 놓아줄 수 있게 되지만, 그 과정이 만만치 않다. 또한 다른 존재들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못난 존재를 동정할 수는 있지만 그들이 자신과 똑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기까지는 너무도 오래 걸린다.


오죽하면 불교에서도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있겠는가. 그런데 이 책, 싯다르타에서는 개를 넘어서 돌멩이도 나라는 존재와 같다는 인식이 나와 있다. 하나의 존재는 모든 존재이고, 모든 존재는 하나의 존재로 나타난다는 것.


그러므로 하나에는 모든 것이 들어 있으니, 서로 다른 존재는 없다는 것. 여기에서 시간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바로 여기에 모든 것이 있으니까. 과거도 미래도, 그리고 다양한 모든 존재들이 바로 지금 존재하는 것에 있으니까.


이렇게 바라문의 아들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어가는 과정을 소설로 쓴 것이다. 무엇보다도 깨달음은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지혜의 차원이고 이것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


스스로 깨닫기 위해서는 체험해야 한다는 것을 소설에서 말해주고 있다. 싯다르타가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얻게 되는 진리는 진리 추구라는 하나의 목표를 정해 오직 그것을 향해 매진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삶을 살면서 그것들이 다른 것이 아님을 깨달아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앞으로 앞으로만 달리지 말고 옆도 보고 함께 존재하는 다른 존재들을 받아들이며 사랑으로 함께 어울리는 것이 진리라는 것, 그래서 싯다르타는 강가에 머물면서 강이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더 큰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간다.


강은 어느 하나의 소리만을 들려주지 않는다. 모든 소리들이 강의 소리에 들어 있다.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순간. 이미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싯다르타. 꼭 불교라는 종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마도 부처의 이름인 싯다르타라는 이름으로 불교를 연상하기도 하지만, 이 소설은 어느 특정 종교의 이야기로 국한해서는 안된다.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사람이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 소설, 또는 한 사람의 성장소설로 읽어야 한다. 그러면 적어도 삶의 자세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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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길이 되려면 - 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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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어째 책읽기가 거꾸로 되었다. 같은 작가의 책을 순서대로 읽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

 

대체로 순서 대로라기보다는 마음 내키는 대로, 아니면 먼저 읽고 그 책에 감명을 받아 다른 책을 찾아 읽는 경우가 많다.

 

김승섭의 책도 마찬가지다. [우리 몸이 세계라면]을 읽으면서 좋은 책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 우리 몸은 우리 자신의 것이라서 자신이 책임져야 하기도 하지만 우리 몸은 우주의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 몸에 대한 책임은 개인을 넘어서는 것이다.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의학에 관한 것들을 이야기해준 책이 [우리 몸이 세계라면]이었다면, 이 책은 질병에 관해서 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역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 책에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이 [우리 몸이 세계라면]에도 나오기 때문에 책을 읽는 순서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사회에서 약자라 불리는 사람들의 질병에 관해서 연구를 한다. 그리고 그 연구를 통해서 이들의 질병이 개인만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에 더 큰 책임이 있음을 밝힌다.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질병이 더 많고, 장시간 노동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질병이 많다는 것.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도 그렇겠지 하는 것들을 많은 사례들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질병은 개인의 책임도 있지만 사회의 책임이 더 크다는 그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사회적 약자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소방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관한 연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사람을 구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병으로 고생하고 있지만, 그것을 공표하지 못하는 상황이 많다는 것. 그래서 그들은 폭행을 당하거나 부상을 당해도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고, 이런 일들이 그들의 건강을 해치고 있다는 것.

 

경제적 대우, 근무 여건의 개선뿐만이 아니라 부상을 당했을 때는 당연히 공상처리가 되어야 하고, 또 폭행을 당했을 때는 그에 상응하는 조치가 취해져야 그것이 근무 여건의 개선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여기에 정리해고된 노동자들, 세월호 유가족뿐만이 아니라 생존자와 생존자 가족들. 그리고 이 책의 앞부분에 실린 낙태에 관한 문제.

 

지금 국회에서 낙태금지법이 다시 제정이 되었고, 여성단체에서는 그 법의 폐지를 주장하고 있는데, 김승섭은 낙태에 관한 다른 나라의 사례를 들어 낙태금지가 과연 누구에게 더 해로운지를 보여주고 있다.

 

입법하는 사람들이 이 책의 앞부분만을 읽었어도 그 법안을 그렇게 내지는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낙태에 대해서는 찬반이 팽팽한 것이 우리나라 현실인데, 여성의 권리와 태아의 생명권의 대립으로만 보지 말고, 여성의 건강권 관점에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 성소수자들이 얼마나 건강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도 사례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개인이 받은 유전적인 건강을 떠나 사회적인 질병으로 나타날 수 있다.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이 다른 사람에게는 건강의 악화로 나타날 수 있음을.. 그래서 사회적 관계가 잘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사람들도 건강하게 지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건강은 개인의 책임에 사회의 책임이 더해진다고 할 수 있다. 개인에게만 책임을 묻는 사회는 어쩌면 의사들 배만 불리는 사회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의사들은(다는 아니겠지만) 개인의 건강만을 본다. 개인의 식습관이나 운동습관을 이야기하고 약을 처방하고 수술을 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온전히 개인에게만 속해 있다.

 

역학을 공부하고 연구한 저자의 말에 따르면 사회가 중요한 역할을 하니, 그들의 식습관이나 운동습관이 그렇게 된 것은 사회 환경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는 것. 그러니 이들이 건강한 식생활을 하고, 운동을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지 않으면 이들 건강이 좋아지기는 매우 힘들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사들의 치료와 사회 환경의 개선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것. 이것이 꼭 필요한 일임을 이 책에서 김승섭은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덧붙이면 이 책에 나오는 전공의들의 건강상태 부분을 보면 기가 막힌다. 내가 행복해야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데, 내가 건강해야 다른 사람 건강을 돌볼 수 있는데, 전공의들의 건강상태는 아주 나쁨 상태에 있다는 것.

 

장시간 노동, 부족한 수면, 쌓이는 스트레스, 과중한 업무 등등으로 그들은 자신의 건강을 돌볼 여유가 전혀 없다고 하는데... 그런데도 의사 집단의 특수성 때문에 전공의들이 자신들의 근무 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하기가 힘들다는 현실.

 

이들이 국가를 상대로 진료거부를 하는 것은 의사 집단의 동질성을 배경으로 한 것이라면, 전공의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선배 의사들에게 대항하는 것으로 비춰진다는 것.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장시간 노동을 줄이는 방법은 인원수를 늘리는 것 아닐까? 같은 일을 한 사람이 할 때보다 두 사람, 세 사람이 하면 시간을 줄일 수 있지 않나. 그들도 여유로운 시간을 갖고 사색을 하면서 환자들을 만나는 수련을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무슨 법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이것도 전공의들 개인에게 맡겨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건강하게 수련을 해서 건강한 의사가 되도록 하는 것도 사회의 책임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 법의 일부를 보자. 과연 이 법대로만 한다면 건강한 전공의가 될 수 있을지 판단해 보라. 다른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과 비교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전공의의 수련환경 개선 및 지위 향상을 위한 법률 ( 약칭: 전공의법 )

[시행 2017. 12. 23.] [법률 제13600호, 2015. 12. 22., 제정]   

 ① 수련병원등의 장은 전공의에게 4주의 기간을 평균하여 1주일에 80시간을 초과하여 수련하게 하여서는 아니 된다. 다만, 교육적 목적을 위하여 1주일에 8시간 연장이 가능하다.

 

② 수련병원등의 장은 전공의에게 연속하여 36시간을 초과하여 수련하게 하여서는 아니 된다. 다만, 응급상황이 발생한 경우에는 연속하여 40시간까지 수련하도록 할 수 있다.

 

③ 수련병원등의 장은 전공의에게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연속수련 후 최소 10시간의 휴식시간을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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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이 세계라면 - 분투하고 경합하며 전복되는 우리 몸을 둘러싼 지식의 사회사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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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은 우주다. 우리 몸은 세계다. 그런데 세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 방대한 세계를 다 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우주라면 어떨까? 우리는 아직도 우주의 일부만을 알고 있다.  또 알고 있는 것이 잘못된 사실일 수도 있다.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사실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우리 몸 역시 마찬가지다. 의학이 발달하면서 우리 몸에 대해서 많은 것들이 알려졌고,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수준도 많이 높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원인을 알 수 없는 병들과, 또한 치료가 힘든 불치병, 난치병들이 즐비하다. 게다가 우리나라 사망 원인 1위라고 하는 암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몸에 대해서 잘 알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를 다른 존재에게 넘겨주고 있다. 특히 의사들에게. 우리나라 의사들의 권위적인 모습을 보라. 그들이 진료 거부를 할 때 주장했던 것을 보면 그들이 지닌 자세를 알 수 있다. 전교 1등에게 진료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공부는 못하지만 의사가 되고 싶었던 사람에게 진료를 받을 것인가라고 당당하게(?이건 당당이 아니라 뻔뻔이지만) 주장하다가 그것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모습을 생각하라.

 

이들은 우리 몸을 재단한다. 자신들이 판단한다. 그리고 그 판단이 맞다고 옳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환자의 죽음으로 이어지더라도 그들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 오로지 환자의 잘못이다. 수많은 의료사고에서 의사들의 과실을 증명하기가 얼마나 힘든가. 그만큼 의사들이 잘못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의사들의 카르텔이 공고하다는 얘기다.

 

이 책에 나오는 제멜바이스의 예를 보면 의사들이 우리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우가 많음을, 그리고 그들이 그 책임을 회피하려는 자세에 대해 알게 된다. 자신들이 시체 만진 손을 닦지 않아 산모들을 감염시켜 죽음에 이르게 했음에도 인정하지 않았던 의사들. 그것을 밝힌 제멜바이스는 오히려 의학계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음을 이 책에서 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자본의 힘에 굴복하는 경우도 있다. 거대 자본으로부터 연구비를 받고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경우도 많다. 특히 담배와 관련된 일들은 이 책에 잘 나와 있다. 수많은 사실 중에서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사실들만 골라 그것이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다른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이유로.

 

여기에 어떤 약은 개발이 되고, 어떤 약은 개발이 지연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돈이 되느냐 안 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경제적으로 어려운 국가에서 주로 걸리는 병들에 대한 치료제 개발이 더딘 이유는, 그것이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서글픈 이유를 이 책에서 만나게 된다.

 

또한 그들이 지니고 있는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것은 무척 힘들다.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같은 의사들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관념에 도전하는 의사는 배척당하기 일쑤다. 이 점을 이 책 6장에서 다루고 있다.

 

통념이 된 의학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기존의 관념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것도 합리성을 추구한다는, 소위 과학적 사고를 한다는 의사 집단에서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우리 몸에 대한 통제권을 찾아와야 한다. 주체적인 인간으로 서야 한다. 4장을 보면 사람들의 끝, 즉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끝을 맺는가?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이 세상을 떠나는가? 아니다. 병원에서 의사들에게 자신의 끝을 맡기고 있다. 연명치료라고 하는 것들...

 

이 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라고 한다. 그리고 건강이 과연 개인적인가? 여기에 대해서 고민하라고 한다. 보건의료를 담당하는 사람들에게는 건강이 개인의 문제일 수가 없다. 내가 잘 못 챙겨서 병이 걸렸다고 쉽게 이야기하지 못한다.

 

사회적인 문제가 깊숙히 개입돼 있기 때문이다. 일란성 쌍둥이도 자신이 자란 환경에 따라서 각기 다른 질병을 앓고, 그들의 건강한 생활에도 많은 차이가 난다고 한다. 그러니 건강은 개인의 책임도 있지만 그보다 더 사회의 책임이 크다는 것.

 

하여 건강은 정치와 경제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3장에서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2장도 마찬가지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사람들의 몸을 가지고 어떻게 식민정책을 펼쳤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이 책은 우리 몸을 통해서 사회, 문화,정치, 경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렇기에 우리 몸은 바로 우주라는 것. 이 우주를 소중하게 여겨야 하고, 주체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

 

읽기에도 쉽고,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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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박한 세상, 어쩌면 각자도생의 세상인지도 모르겠다. 서로가 서로를 돕고, 나보다 못한 사람,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세상이 아니라, 오로지 내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세상일지도 모른다.

 

  그런 세상이 과연 행복할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세상으로 우리는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유란 이름으로. 시장이란 이름으로.

 

  그렇게 양지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여기지만, 세상살이는 꼭 그렇게 생각한 대로 살아지지 않는다.

 

  이럴 때 낮은 곳을, 어두운 곳을 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의 밀알이 떨어져 싹을 틔우고, 결실을 맺듯이 세상을 조금 더 밝고 좋게 만드는 밑거름이 된다.

 

그들이 바로 좋은 세상의 종자가 된다. 굽어보고, 뒤돌아볼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그리워지는 세상이다. 이정록의 시를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런 사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런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다짐... 참 어렵지만 적어도 굽어보고, 뒤돌아보는 자세를 지니려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해 지는 쪽으로

 

햇살동냥 하지 말라고

밭둑을 따라 한줄만 심었지.

그런데도 해 지는 쪽으로

고갤 수그리는 해바라기가 있다네.

 

나는 꼭,

그 녀석을 종자로 삼는다네.

 

벗 그림자로

마음의 골짜기를 문지르는 까만 눈동자,

속눈썹이 젖어 있네.

 

머리통 여물 때면 어김없이

 

또다시 고개 돌려 발끝 내려다보는 놈이 생겨나지.

그늘 막대가 가리키는 쪽을

나도 매일 바라본다네

 

해마다 나는

석양으로 눈길 다진 그 녀석을

종자로 삼는다네.

 

돌아보는 놈이 되자고

굽어보는 종자가 되자고.

 

이정록,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창비. 2016년.10-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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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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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이 직접 쓴 글인 [폴 고갱. 슬픈 열대]를 읽고 이 소설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갱을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이니, 사실과 허구가 어떻게 교차하고 있는지 살피는 재미도 있을 터였다.

 

그런데 굳이 고갱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지식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 고갱이어도 좋고 다른 예술가라도 좋을 것이다. 예술을 위해서 삶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다만 타히티라는 지명과 증권중개업자라는 직업이 명백하게 고갱을 가리키고 있으므로, 고갱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다면 이 소설을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든다.

 

제목은 달과 6펜스다. 6펜스는 가장 낮은 가격을 지닌 은화라고 하던데, 우리나라 동전으로 하면 1원짜리라고 할 수 있으려나? 아니면 100원짜리 동전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그건 중요하지 않다. 다만 달로 상징되는 예술의 세계와 6펜스로 말해지는 현실의 비루함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고 보면 된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6펜스를 가지고 불리고 불려 더 많은 돈을 가지려 노력할 것이다. 그들은 6펜스의 세계를 벗어나기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이다. 달의 세계에 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6펜스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목표로 삼고 살아갈 것이다.

 

그들에게는 현실의 삶이 중요하고, 현실을 삶을 초월한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6펜스의 세계는 비루한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가에게는 비루한 삶일지 몰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6펜스의 세계는 삶 자체일 수 있다. 6펜스보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살아가는 삶. 그들은 그런 삶에 만족하고 살고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을 경원하게 된다. 

 

이 소설에서 6펜스의 삶이라고 하면 돈을 벌지 못하는 경제적으로는 무능력한 삶. 또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삶이다. 주인공인 스트릭랜드는 6펜스의 삶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오히려 6펜스의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달을 꿈꾼다. 달은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서 흔히 인용되는 대상이다.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이상을 추구하는 삶. 그 세계가 바로 달의 세계다. 그리고 많은 예술가들은 달의 세계를 지향한다. 그런 예술가들을 이렇게 작품에서 말하고 있다.

 

아스팔트에서도 백합꽃이 피어날 수 있으리라 믿고 열심히 물을 뿌릴 수 있는 인간은 시인과 성자뿐이 아닐까. (70쪽)

 

6펜스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바로 예술가의 세계,즉 달의 세계다. 이 소설에서 스트릭랜드의 부인과 주변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세계가 바로 그런 세계다. 그런 사람들에게 달의 세계를 추구하는 스트릭랜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예술가가 들려주는 건 하나의 멜로디인데, 그것을 우리 가슴속에서 다시 들을 수 있으려면 지식과 감수성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어야 해. (102쪽)

 

지식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들에게는 감수성과 상상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의 작품은 이상한 것에 불과하다. 그의 작품을 당대에 알아보는 사람은 파멸할 수밖에 없다. 그의 감식안 역시 시대를 앞서 갔기 때문이다.

 

6펜스의 세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시대에 달의 세계를 엿본 사람은 현실의 세계에 적응할 수가 없다. 스트릭랜드의 작품 진가를 알아보는 스트로브가 아내를 잃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가 우스꽝스럽게 표현된 것은 그에게는 예술을 알아보는 눈과 감수성은 있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능력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희화화 될 수밖에 없다.

 

예술가를 고정된 관념, 물질적 세계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의 작품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예술가는 이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습관이 오래되면 감각도 무뎌지게 마련이지만 그러기 전까지 작가는 작가적 본능이 인간성의 기이한 특성들에 너무 돌무하는 나머지 때로 도덕 의식까지 마비됨을 깨닫고 당혹스런 기분을 느끼는 때가 있다. 악을 관조하면서 예술적 만족감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고 약간 놀라기도 한다. 하지만 정직한 작가라면, 특정한 행위들에 대해서는 반감을 느끼기보다 그 행위의 동기를 알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강렬하다는 것을 고백할 것이다. (197쪽)

 

자기가 창조해 낸 인물에 살과 뼈를 부여함으로써 작가는 다른 식으로는 방출할 수 없는 자신의 본능에 생명을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작가의 만족이란 하나의 해방감인 것이다.

작가는 판단하기보다 알고자 하는 데 관심이 더 많은 사람이다. (198쪽)

 

소설의 화자는 결국 이러한 스트릭랜드의 세계를 이해한다. 처음에 그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상하게 그에게 끌린다. 그리고 그의 예술관을 알아가게 된다. 작가란 바로 이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타히티에서 함께 사는 아타는 영국에서 결혼해 살던 부인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영국의 부인은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는 관습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면 타히티의 아타는 오로지 스트릭랜드를 이해하는 예술의 세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그와 끝까지 함께 하는 모습에서, 어떤 인위적인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주인공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하는 모습에서 달의 세계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렇다. 이 소설을 굳이 고갱이라는 실존 인물의 삶에 비추어 읽을 필요는 없다. 예술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 간의 간극 속에서 예술의 세계를 추구하는 한 인물의 삶을 알아가는 과정. 달의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6펜스의 세계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음을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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