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콥스키, 나는 마야코프스키로 알고 있던 사람. 러시아 이름이 길기도 하지만, 풀어서 쓰기도 하고 붙여서 쓰기도 하니, 어떤 글을 읽었느냐에 따라 사람 이름이 약간은 달라지기도 한다.


  마야콥스키 하면 러시아 미래파 시인이라는 기억만 남아 있다. 그의 시를 읽은 적도 없고. 우리나라에서 카프 문학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인용이 되기도 했다는 기억은 있는데...


  중고서점에서 그의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이제는 소련도 해체되고, 사회주의 국가라고 하는 거대한 실험을 하는 나라들이 하나둘 사라져 갔고, 그에 따라 사회주의를 주요 내용으로 삼던 문학가들도 문학사에서 하나둘 이름이 지워지기 시작했는데...


  왜 마야콥스키인가? 그냥 단순히 알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까? 아님,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에 호기심을 느꼈을까? 사회주의 혁명을 열렬히 찬양했던 시인이 사회주의 국가가 실현되자 자살을 한다? 이런 모순된 행동을 어떻게 봐야 할까 하는 호기심.


그러다 이 선집을 읽으며 마야콥스키가 사회주의 국가 소련에서 견딜 수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선집에 실린 시 중에 그런 생각을 강하게 하는 시들이 있다. 이런 생각을 지닌 사람이 어떻게 혁명 이후 사회에서 견뎌낼 수 있었겠는가.


그 시들 제목을 들면 회의광(1922년), 관료주의(1922년), 수뢰자(1926년), 관료주의자의 공장(1926년), 자아비판에 대한 비판(1928년), 아첨꾼(1928년)이다.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갈 때부터 나타난 현상. 혁명의 배반. 그것은 혁명의 지속, 또는 혁명의 유지라는 이름을 걸고 나타난다. 마야콥스키는 그 점을 통렬하게 지적한다. 시를 통해서. 


그는 러시아 혁명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뒤로, 뒤로 복고로 가고 있다고 보았다. 그렇게 보았기에 이런 시들을 썼을 것이다.


혁명은 순식간에 전 사회를 뒤집는다. 그런데 뒤집은 다음이 문제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데, 새로운 세상에 대한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그냥 과거를 뒤집을 뿐이다. 그러니 혁명을 이룬 사람들은 초조해 진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주변에는 혁명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고, 자칫하면 혁명은 실패하고, 혁명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인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만이 혁명을 완수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아첨꾼을 낳고, 관료주의를 낳는다. 오로지 회의를 통해서 결정하려고 하는 회의광들이 생기게 되고, 자아비판이 무슨 만능인 것처럼 판치게 된다. 마야콥스키는 그 점을 보았다. 그래서 시를 통해 이렇게 변해가는 사회가 과거 사회와 어떻게 다른지를 꼬집고 있다.


혁명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내는 것이지, 과거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는 참 힘들다. 그래서 마야콥스키가 쓴 시는 지금도 유효하다.


혁명이라고 하지 않더라도 전 정권과 다른 정권이 집권했을 때 그들이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전철을 밟는 모습이 너무도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새롭게 집권한 정당, 또 사람은 더욱 어려운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길을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 길에 나타날 수 잇는 장애들이 무엇인지, 마야콥스키의 시를 통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 마야콥스키의 시가 지금도 유효한 것이다. 한 시대만을 대표하고, 그 시대로 끝나는 시가 아닌, 우리들 삶에서 반복되기 쉬운 점들을 시로 표현하여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선집에 실린 비록 마야콥스키와 실제로 대담한 것은 아니지만, 가상 대담이 실려 있다. 번역한 이가 여러 책을 참조해서 마야콥스키의 생각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마야콥스키의 이름을 빌려 우리에게 이야기해주고 있는데... 마지막에 나온 말.


그래서 마야콥스키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말...


'나의 유토피아는 숨 막히는 완전 사회에 대한 꿈이 아니며, 독일의 철학자 블로흐가 주장한 것처럼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한 지향입니다. 여기 번역된 나의 시가 지금의 한국 독자들에게는 '언젠가 그 안에 담겨 있었을 진정성과 절실함은 휘발되어버리고 단지 우스꽝스러운 기표로만 남겨진' 시대착오적인 구호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믿고 있습니다.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 시도 문학도 새로운 힘과 사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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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2-04 14: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 완전 강렬해요! 따귀 얼얼한 느낌!!ㅎㅎ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 EBS CLASS ⓔ
강신주 지음 / EBS BOOKS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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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넘쳐나는 시대다.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도대체 구할 수 없는 것이 없다. 그런데 구하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한다. 돈이 모든 것을 구하게 하는 자본주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돈이 없다면? 모든 것이 넘쳐나는 시대지만 돈이 없으면 모든 것이 없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러니 넘침이 곧 행복은 아니다. 이 넘침에는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돈이라는 조건.


자, 돈이 없어도 얻을 수 있는, 넘쳐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그 질문을 해야 한다. 자본주의 시대라고 하지만 모든 것을 돈으로만 해결할 수는 없다. 이 질문을 뒤집으면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는 것이 있을까가 된다.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는 것, 돈이 없어도 구할 수 있는 것. 그것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주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


이 책의 제목은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이다. 책 뒷부분으로 가면 사랑과 아끼다를 함께 쓰고 있다. 사랑 애(愛) 자에는 아낀다는 뜻이 있다고 한다(284쪽). 그렇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을 아껴주겠다는 말을 하니, 사랑과 아낀다는 말은 함께 쓰이는 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 공기의 사랑'이라는 앞 제목에는 이미 아낀다는 말이 들어 있는 것이다. 한 공기라는 말이 사랑을 꾸며주는 데서 찾을 수가 있다. 사랑을 주는데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주는 것, 그것이 바로 '한 공기'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상대를 아끼는 행위이다. 상대가 부족하지도 않게 하고, 또 물리지도 않게 하는 행위. '한 공기'에 담겨 있는 사랑이다.


뒷제목인 '아낌의 인문학'은 이 용어를 빌리면 '사랑의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데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학문이 인문학이라면 인문학은 당연히 사랑이어야 하고, 사랑은 아낌이니, 아낌의 인문학이 될 수밖에 없다. 


다만 인문학이 지닌 효용에 대해서 잘 들어오지 않는 사람을 위해 우리가 몸으로 인식할 수 있는 '한 공기의 사랑'을 앞에 둔 것이다. 그렇다. 인문학은 우리에게 한 공기의 밥과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에게 힘을 주는 그런 역할.


책은 총 8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강은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번째 부분은 김선우 시를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시는 그 자체로 인문학이다. 하여 이 책에서는 김선우의 시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참고로 김선우 시집 '녹턴'에서 시를 인용했다고 한다.


시로 시작한 강의는 두번째 부분에서 부처(불교)로 넘어간다. 그렇다고 불경 강의냐 하면 그것이 아니다. 부처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들이 삶을 행복하게, 사랑이 찬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손가락일 뿐이다. 그러니 부처에 대한 이야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부처의 이야기가 가리키는, 또 가르치는 쪽을 보아야 한다. 따라서 부처와 더불어 동양의 사상가들, 서양의 여러 철학자들도 언급되고 있다.


이렇게 이 책은 자연스럽게 세번째 부분으로 넘어간다. 우리가 일상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이야기한다. 이론에 머물지 않고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 앎과 실천이 함께 하는 철학자의 말하기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인데, 이렇게 세 부분이 합쳐져 한 강의를 이룬다.  


강의는 8강으로 나뉘어 있지만 하고자 하는 말은 하나다. 우리 사랑하는 삶을 살자고. 서로 아끼면서 살자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들이 있으니 그것들을 실천하자고.


한 강 한 강 읽어나가면서 나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를 생각하게 된다. 나는 나만으로 존재하지 않으니. 단지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 점에서 이 책은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모든 존재를 아껴야 한다는 것. 모든 존재는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 그래서 내가 아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고, 돈이 없어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아껴줄 때 세상은 더 살 만해질 것이다.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 

이 책은 우리 삶에 한 공기의 밥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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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제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황정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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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데 거의 의식하지 않고 지낼 때가 행복할까? 아니면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의식하게 될 때가 행복할까?


이런 사람과의 관계를 공기와 사람의 관계로 치환할 수 있을까? 우리가 행복할 때 행복을 느끼지 못하듯이, 공기는 우리 곁에 늘 있기 때문에 희박해지지 않는 한 의식하지 못한다. 그냥 내 삶의 일부일 뿐이다.


사람과의 관계도 좋을 때는 의식하지 못한다. 그냥 내 삶일 뿐이다. 내 삶일 뿐인 관계에서 그 사람이 문득 내게 의식이 되는 순간, 거리가 생긴다. 거리로 인해서 의식을 하게 되고, 의식이 점점 강해지면 의심으로 나아가게 된다.


단순하게 도식으로 나타내면 '의식-의심->갈등->파탄'으로 가는 길과 '의식->의심->갈등->해소'로 가는 길이 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서 평생 상대를 의식 안 할 수는 없다. 사랑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사랑이란 행위가 생각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면 사랑은 이미 의식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나 이외의 존재를 의식하고, 그 존재와 잘 관계맺기 위해 노력을 하게 된다. 그런 의식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때 그때 사랑은 결실을 맺는다. 그러나 결실을 맺은 사랑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 영원히 지속되기 위해서는 의식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자신과 다른 사람과 어떻게 하면 제대로 된 관계를 맺을 수 있나를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다. 의식이 의심으로, 의심이 결국 파탄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많고, 파탄으로 나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 의심을 묻어버리는 일도 많다.


이번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작품들이 상대방을 의식하는데서 나아가 의심으로, 결국은 관계의 파탄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황정은이 쓴 '상류엔 맹금류' 최은미가 쓴 '창 너머 겨울' 손보미 '산책'이 그런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상대를 의식하면서 관계가 파탄으로 치닫는 그런 소설들. 이 소설들에서는 함께 하지만 함께 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무언가 관계가 자꾸만 어긋나는 듯한 모습들.


이들은 서로를 이해한다고 하지만, 상대를 존중하고 받아들인가고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일 뿐이다. 이들은 겉모습과는 다르게 자신의 내면에서 담을 쌓고 있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 그러면서 상대가 모든 것을 보여주길 원한다. 세 소설 중에서 특히 손보미의 '산책'이 그런 느낌을 준다. 


반면에 조해진이 쓴 '빛의 호위' 윤이형의 '쿤의 여행' 최은영이 쓴 '쇼코의 미소'는 상대를 의식하지만 그 상대로 인해서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렇다. 상대는 내 삶을 피폐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내 삶을 돌아보며 새로운 삶을, 자신의 삶을 찾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 세 소설은 읽으면 새로운 삶에 대해 두려움보다는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기준영의 '이상한 정열'은 그럼에도 삶은 지속된다는 것을, 우리의 일상에서는 이러한 의식으로 인한 파탄도, 또 해결도 함께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서 이번 소설집에서는 관계의 두 방향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한 쪽면만 나타날 수는 없기에, 우리들 삶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이번 작품집이다.


다만, 우리는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게 나만의 철옹성을 쌓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세계에 다른 사람도 함께 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다. 


함께 하되 다른 삶을, 다르되 함께 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장소를 내 삶에 마련하는 것. 거기에 성공하면 삶이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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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2-01 1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를 통해서 소설을 읽는 좋은 시각을 배웠네요! 잘 배우고 갑니다. 즐거운 한주 되십시요!

kinye91 2021-02-01 10:5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막시무스 님, 좋은 한주 되십시오.
 

  컨택트, 언컨택트, 언택트


  세상이 이렇게 변해가나 보다. 우리는 직접 만남에서 소리를 통한 만남으로, 그 다음에는 소리가 아닌 문자를 통한 만남, 그것도 아닌 그냥 비대면이라고 하는, 서로가 접촉을 하지도 않고 물건을 통해서만 만나게 된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해서 배달음식들도 이제는 용기를 회수해 가지 않는다. 배달하는 사람들도 그 업소에 소속되어 있지 않고, 특정 플랫폼에 소속되어 있으니, 어떤 물건을 통해서 우리는 소속감을 느낄 수도 없다.


  그냥 문자로 신청하고, 내게 온 물건을 소비하면 끝이다. 그 물건을 만든 장소가 어디인지, 누가 배달했는지 전혀 신경쓸 필요가 없다. 


그렇게 우리는 비대면의 세계로 접어들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없다. 그냥 물건들만 돌아다닐 뿐이다.


함성호 시집에서 '자장면은 전화선을 타고 온다'는 시를 읽고 이 시가 지금 우리 현실을 앞서 경험했다는 생각을 했다. 


자장면은 전화선을 타고 온다


자장면 왔습니다

자장면집 배달원이 자장면을 가지고 왔다

거기 놓으세요

가장 어린 직원이 신문지를 편다

야근을 자장면 먹듯이 하는 때

우리는 둘러앉아 자장면을 먹는다

만 사천 원입니다

덤으로 튀김만두도 가져온 배달원은

빈 철가방을 들고 나갔다

우리는 자장면을 먹으며

자장면집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생각했다

어느 집이나 다쿠앙의 맛은 다 비슷하고

배달 오토바이의 종류도 다 비슷하다


우리는 자장면을 먹으며

비닐 랩이 없던 시절에도 국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그 초절 기교의 배달원들을 생각했다

그때도 자장면집은 존재하지 않았다

자장면을 다 먹고 빈 그릇을 복도에 내놓으면

언제 와서 가져가는지 모르는

과연 그 자장면집은 어디인가?

전화를 걸어

"자장면"

하면, 오는

말이 이루어지는


함성호, 너무 아름다운 병. 문학과지성사. 2010년 초판 4쇄. 54-55쪽.


이 시 역시 언택트라고 하는 비대면의 상황을 말해준다. 자장면집이 어디인가? 라는 물음이 그것이다. 이 물음은 자장면집이 어디인지는 몰라도 자신들이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비대면의 시대를 말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비대면의 시대와는 다른 점이 이들은 함께 모여 자장면을 먹는다. 지금은 자장면을 시켜도 함께 먹을 수 없다. 코로나19라는 감염병이 바꿔놓은 풍습이다. 여기에 배달원은 자장면집 소속이 아니다. 그리고 그릇을 이제는 가져가지 않는다. 


더더욱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이 줄어들고 있다. 어디를 가도 '셀프'라는 이름으로 '키오스크'라고도 하는 기계 앞에서 사람과 만나지 않고 일을 처리하게 된다. 그런 시대가 되었다. 물건들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사용이 되고 나면 이제는 재활용품이 되거나 쓰레기가 된다.


그렇게 시대가 변했다. '말이 이루어지는'이라고 했는데, 이때 말은 그래도 사람의 실체를 어느 정도 담고는 있다. 지금은 말도 아니다. '앱'을 통해 다 해결하게 된다. 


20년 전에 쓰인 이 시를 읽으며 지금 시대를 생각하게 되니, 앞으로는 어떻게 변해갈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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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30 17: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30 19: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 제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종옥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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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수상집에는 다양한 내용의 소설이 실렸다. 어느 하나로 정리하기가 힘든, 또 일곱 편의 소설을 몇가지 주제로 나누기가 힘든 그런 소설들이다. 그러니 이 수상집에 있는 소설을 하나로 뭉뚱그리는, 또는 어떤 공통점을 찾는 일은 포기하자.


젊은작가들이란 나름 기성세대를 뛰어넘으려는 실험을 하는 패기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으니, 기존 소설의 문법에 충실한 작가들이 젊은작가상을 받았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 해 무언가 새로운 주제, 새로운 내용, 새로운 형식을 잘 드러난 작품들이 젊은작가상이라는 상을 수상했다고 봐야 하는데...


다른 작품들은 그다지 큰 느낌을 주지 못했는데 첫작품 김종옥이 쓴 '거리의 마술사'는 마음에 남았다. 왕따를 다룬 소설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우리가 다름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서 그랬다고 할 수 있다.


다름에도 종류가 있다. 찬사를 받는 다름과 멸시를 받는 다름. 그냥 나랑 다르네 하고 인정을 받는 다름. 이렇게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그 중 마지막 부류, 나랑 다르네 하는 범주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포함된다.


왜냐하면 쌍둥이조차도 완전히 똑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직 실현되지 않아서 모르지만 복제인간이 나타난다고 해도, 복제인간과 세포(핵)를 제공한 인간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사람은 누구나 다르다. 어, 나랑 다르네. 이것은 배제가 아니라 인정이다. 함께 살아갈 때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발견하는 모습.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다수는 다름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많이 다를 때는 양 쪽으로 분화가 된다. 찬사와 멸시로.


찬사를 받는 다름은 뛰어남으로 인정받는다. 숭앙의 대상이 된다. 우상이 된다. 그런 사람들은 다름으로 인해 남들에게 인정을 받고, 그 다름을 자랑스러워 하며 지내게 된다. 다른 사람들도 그 다름을 부러워할 뿐이다.


김종옥 소설에서 이런 찬사를 받는 다름의 부류에 속하는 인물은 안나와 거리의 마술사다. 안나는 뛰어난 외모로 연예인으로 활동하는 학생으로, 그 학교 아이들의 찬사를 받는다. 달라도 너무나 다른 생활을 하는 안나에게 누구도 시비를 걸지 않는다. 무시도 못한다. 그냥 경이에 찬 눈으로 안나를 바라볼 뿐이다. 그야말로 탤런트다. 재능이 많은 사람. 부러운 사람.


반면에 멸시를 받는 인물로 남우가 나온다. 소설 속에서 잠깐 등장하지만 남우를 영어로 'Rain Man'으로 낙서해 놓는 장면이 나온다. '레인 맨' 자폐를 앓는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그런데 학생들은 이 '레인 맨'을 인정으로서가 아니라 무시를 넘어서는 멸시로 낙인 찍는다. 


남우는 학교에서도 특이한 걸음걸이와 다른 행동들로 학생들과 다르다고 인정되고 있었지만, 처음에는 그저 나랑 다르네 정도였다. 그러다 반대쪽 다름에 있는 안나와 짝이 되면서 정확하게 안나의 반대편에 서게 된다. 다름의 천칭이다. 하나는 찬사로서의 자리, 하나는 멸시로서의 자리.


결국 남우는 거리의 마술사를 흉내내지만 실패하고 만다. 남우의 다름은 거리의 마술사처럼 다른 사람의 찬사를 자아내지 못하고 죽음을 부르고 만다. 그렇다. 우리는 이렇게 다름을 다르게 대한다.


자신이 감히 넘보지 못하는 사람의 다름에는 찬사로, 자신보다 한참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다름에는 무시 또는 멸시로,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인정으로. 


소설은 그 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단지 '왕따'에 관한 소설이 아니다. 우리들 삶에 관한 소설이다.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사람들. 다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런 우리들이 인정할 수 있는 다름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생각하게 한다.


이제는 학교를 넘어서 직장에서도, 또 사회 전반에 걸쳐 다름으로 인한 '왕따'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도대체 왜 다름이 우리를 더 다양하게 풍요롭게 할 수 있음에도 우리는 다름에도 경계를 긋고 마는지 생각하게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경계의 확장 아닐까? 멸시를 받는 다름은 말할 것도 없지만 지나친 칭송을 받는 다름 역시 일반 삶에서 배제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니 우리는 대다수의 인정받는 다름 속에서 두 다름을 배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대다수가 속해 있는 다름의 영역을 점점 넓혀가야 한다. 경계를 점점 더 엷게 해야 한다. 알게 모르게 그 경계들이 하나로 합쳐질 수 있게. 경계가 사라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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