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 삶과 책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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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귄의 글들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일 때가 많다. 그래, 그렇지 감탄하면서 읽는다. 자꾸 르귄의 책을 찾아 읽게 된다. 소설도 생각할 거리가 많지만, 이렇게 수필이나 서평을 쓴 글을 통해서도 생각할 거리가 많아진다.


페미니즘이라고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르귄은 여성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한다. 여성이 차별받지 않는 사회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동등한 인간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래서 '여자들이 아는 것'이라는 글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가 여자들에게 무엇을 배우느냐는 질문에 답해 볼까요? 제가 첫 번째로 내놓을 거대한 일반화는 우리가 인간이 되는 법을 배운다는 겁니다' (149쪽)


바로 이거다. 우리는 남성인 인간, 여성인 인간, 성소수자인 인간 등으로 자라는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하지만 남성의 가르침은 이렇지 않다고 한다. 


'남자들의 가르침은 현 상황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여자들의 가르침은 개인적이기에 더 전복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152쪽)


이런 말을 보면 여성들이 수동적이라고 하는 말은 용납이 되지 않는다. 인간이 되는 법을 가르치고 배운다면 세상이 인간을 가르고 차별하는 모습을 보면 그것에 저항할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전복적이 된다. 이것이 바로 여자의 가르침이다.


국가, 사회, 집단에 개인을 매몰시키지 않는다. 국가, 사회, 집단은 개인이 존재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인데, 남자들의 가르침은 국가를 위해, 사회를 위해, 집단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라고, 개인을 내세워서는 안된다고 가르치는 경향이 많다. 이런 경향 속에서 여성의 주장은 집 안으로 국한되기 일쑤다.


하지만 르귄은 아니라고 말한다. 개인적인 가르침이 결국은 국가, 사회, 집단을 더 풍요롭게 한다는 것, 그것의 바탕은 바로 인간이 되는 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데 있다고 한다. 명심할 말이다.


이 책에서 또 하나는 문학과 장르 문학을 비교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비교가 아니라 대조라고 할 수 있다. 문학에 비해 장르 문학은 수준이 떨어진다고 하는 주장.


르귄이 쓴 소설은 SF소설이라는 장르 소설로 흔히 분류한다. 그리고 SF소설은 문학에서 청소년들이나 읽는 작품으로 폄하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주장에 르귄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세상에 문학과 장르 문학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는가?


그 많은 문학의 종류에 장르 문학이 속할 뿐인데... 이쪽 저쪽 편가르기를 하면 그것은 이미 문학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다. 사람을 남성, 여성, 기타 다른 성으로 나누어 다르게 대우하는 것이 잘못되었듯이, 문학도 이런 문학, 저런 문학 나누어 구별짓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SF소설은 단순한 공상이 아니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를 꾸며낸 소설이 아니다. SF소설은 우리를 다른 세계로 데려가는 통로다. 나니아 연대기나 앨리스 이야기를 보면 다른 세계로 인물들이 갈 수 있는 통로가 나온다. 그 통로를 통해 다양한 경험을 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다.


SF소설도 마찬가지다. SF소설을 통해 우리는 현실의 다양한 면을 인식하게 된다. 오히려 SF라는 특성때문에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차분하게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도 있다. 미래의 세계나 과거의 세계를 현재로 데려오는 '타임머신'의 역할을 SF소설이 한다. 그래서 SF소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현실적이지 못한 SF소설에 대해서는 르귄 역시 가차없이 비판하고 있다.


그러니 문학과 장르 문학을 구분하고 차별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이겠는가? 르귄이 그러한 구분을 참지 못하고 이 책의 여러 글에서 비판하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


또한 이 책에는 다양한 서평이 들어있고, 다양한 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마음에 드는,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작가들도 있다. 그렇게 르귄은 또다른 작품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준다.


특히 주제 사라마구. '눈 먼 자들의 도시'는 코로나19가 발생했을 때 처음 '페스트'와 함께 떠올랐던 작품. 인간은 이제 어느 한 순간에 자신들이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에 맞닥뜨릴 수 있게 되는데, 그때 우리는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그런 소설이었는데...


이 책 곳곳에서 르귄은 사라마구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그 중에 하나. '존엄의 예: 주제 사라마구의 작업에 대한 생각들'이라는 글을 보면 그에 대한 생각이 너무도 잘 드러나 있다.


'눈 먼 자들의 도시'를 읽던 르귄은 그 작품에 압도되어 읽기를 멈춘다. 작가를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먼저 한다. 그리고 사라마구의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한다.


그가 쓴 소설들을 죽 읽으면서 사라마구에 대한 믿음이 생긴 르귄은 다시 '눈 먼 자들의 도시'를 읽는다. 그러면서 그 작품이 왜 좋은지를 느끼게 된다. 마찬가지로 '눈 먼 자들의 도시' 이후에 나온 작품들도 찾아 읽고.


이런 태도다. 작가를 만나고 작품을 읽게 되면 그 작가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진다. 작품을 더 읽고 싶어진다. 찾아서 읽는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르귄의 작품을 하나하나 찾아 읽기 시작한다. 르귄이 '사라지는 할머니들'이라는 글에서 이런 말을 했는데, 그 말이 이제는 통용되지 않는 세상을 위해.


'나는 여자들의 소설을 문학 정전에서 한 권씩 한 권씩, 한 명씩 한 명씩 배제하는 흔한 기법이나 수법을 네 가지 알고 있다. 이 수법들은 폄하, 누락, 예외화, 그리고 질송이다. 이 넷이 쌓여 지속적으로 여자들의 글을 주변으로 밀어낸다.' (160쪽)


이 말이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다면 여성작가란 말도 사라지겠지. 문학을 무슨 무슨 문학으로 구분짓는 것도 사라지겠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하는 르귄의 책이다. 그래, 이렇게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 책. 다른 작가, 다른 작품으로 인도하는 길잡이.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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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5-08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좋은 주말 되세요~

kinye91 2021-05-09 08:1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05-08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

kinye91 2021-05-09 08:1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1-05-09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kinye91 2021-05-09 10:3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트릭 미러 - 우리가 보기로 한 것과 보지 않기로 한 것들
지아 톨렌티노 지음, 노지양 옮김 / 생각의힘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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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치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추천한 글이 실려 있다. 이렇게 많은 찬사를 받은 책이니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하려는지. 좋은 책은 이런 추천글이 없어도 읽는다. 읽을 생각이 들고 읽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굳이 이런 추천사를 나열한 이유가 있을텐데...


어쩌면 이런 추천사를 통해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환상을 깨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냥 트릭 미러라는 제목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유발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적어도 읽을 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게 해야 읽기 시작하는데...


기술이 발달하면서 빅데이터에 기반해 사람들이 읽을 책도 그런 경향의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있으니,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읽히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가? 그런 빅데이터를 통한 추천과 이렇게 알려진 사람들의 추천사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잘 알려진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들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만이 그들이 추천한 책을 집어들게 되지 않을까? 결국 [트릭 미러]는 이러한 추천사에도 적용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 네가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어. 그리고 이렇게 추천하고 있어. 그러니 너도 읽어.


이 책을 읽은 소감은 이렇다. 작가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이 책을 추천한 사람들 글이 우리나라 판에 이렇게 책 앞장에 소개되어 있는 것도 일종의 [트릭 미러]가 아닌가 하는 생각.


이들과 너는 생각이 비슷하니, 이 책을 읽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책은 너에게 만족을 줄 것이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들도 만족했으니.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한번 더 생각해야 한다. 이 책이 의도하는 것은 이런 추천사를 믿고 따르라는 것이 아니다. 추천사는 추천사일 뿐이다. 그냥 그 사람들의 생각은 이렇다고. 너는 네 나름대로 책을 읽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가 이미 지니고 있는 관점을 벗어나기가 얼마나 힘든가. 확증편향이라는 말이 공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자신의 관점을 지지하고 굳히는 내용의 책으로 관심이 가는 경향이 있고, 자신이 지지했던 사람들이 쓴 책, 추천한 책을 읽는 경향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앞의 추천사를 곱씹어야 한다. 그 추천사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추천사는 '트릭 미러'가 아니라 '미러(거울)'가 되게 해야 한다.


그러니 이 책 표지에 작은 글자로 또 다른 제목이 있다. '우리가 보기로 한 것과 보지 않기로 한 것들'


이걸 계속 의식하면서 책을 읽으라는 말로 읽힌다. 이 책이 우리의 관점을 강화시키는 역할만을 하게 하지 말고, 우리 관점 너머를 볼 수 있는 역할을 하라고.


총9편의 글이 실려 있는데, 이 글들은 다른 내용이면서도 연결이 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자신이 살아온 배경을 통해서 보게 되고, 때로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세상을 판단하면서 살아가게 된다는 점을 생각하게 하는 공통점이 있다.


한번 손에 들면 책 내용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면서내 관점을 반성하게 된다. 세상이 선과 악으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음을, 모든 것을 이분법으로만 해석할 수 없음을. 그런데도 디지털 세상에서는 0과 1로 디지털을 운영하듯이 이것과 저것으로 나누는 일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하는데, 이 말을 계속 생각하니, 좌나 우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 그것도 서로의 모습을 왜곡해서 비춰주는 [트릭 미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런 모습을 잘 알 수 있는 글이 '어려운 여자라는 신화'다. 


여성과 여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 페미니즘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데, 성에 대한 관점에 숨어 있는 다른 관점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하게 된다.


이 글과 관련하여 '우리는 올드 버지니아에서 왔다' 역시 사건의 본질을 보는 것이 중요함을 생각하게 한다. 대학의 성폭행 사건을 단순히 개인의 일탈로 보지 않고, 그 행위에 녹아 있는 '관습'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관습'이 어떻게 일탈을 정당화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주류 세력에 의해 공고화 되어 왔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민주주의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받는 제퍼슨이 세운 대학 '버지니아 주립대학'에서 벌어진 사건을 두고, 그 기저에는 성차별만이 아니라 인종차별까지도 깊게 내면화되어 있음을.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눈에 보이는 것 너머를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우리의 관점을 통해 굴절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야 하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역시 우리 관점으로 인해 가려졌을 가능성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


'우리가 보기로 한 것과 보지 않기로 한 것들'을 인식할 수 있는 눈을 지녀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인터넷, 리얼리티쇼, 사기(특히 무슨 무슨 펀드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경제 사기), 성차별, 종교와 마약, 결혼제도 등등에 대해 내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 밖에 있는 것들을 생각해야 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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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호를 여는 글 제목은 '정확하게 이해하기'다. 이해하기도 힘든데,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더 힘들다.


  내 관점을 버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 어떤 글도 내 관점을 거쳐 이해되기 때문에, 나는 정확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바로 이런 경우에 대화가 필요하다. 내 이해와 네 이해를 서로 이야기하면서 정확하게 이해하는 길로 가는 것. 하지만 이런 대화는 그냥 나오지 않는다. 여유에서 나온다.


  영화 '미나리'로 요즘 많이 언급되는 배우 윤여정이 했다는 "사람이 여유가 생기면 감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여유가 있어야 이해를 한다고, 그것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다른 나라 인권을 문제 삼는 미국에서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행위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그들은 과연 자신들의 행동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을까? 자신들이 하는 그 행동들이 혐오행동이고,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이들에게는 삶의 여유가 있을까? 오히려 살기 힘들기 때문에, 그 이유를 강한 자들에게서 찾고, 그들을 향해 주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보다 더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화살을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들은 여유가 없기 때문에 감사뿐만이 아니라 이해할 마음도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면에서 [빅이슈]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령 음식에 관한 글이 있는데, 고급스러워 보이는, 사람들이 잘 가지 못하는 디저트 음식을 파는 곳을 소개하는 글. 그 글을 보면서 과연 노숙인들 자활을 돕는 잡지인 [빅이슈]에서 그런 사치스럽다면 사치스러운 음식에 대한 글을 실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아니다. [빅이슈]이기 때문에 그런 글을 실어야 한다. 노숙인이라고 해서 무료 급식소에서만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그들 역시 고급스러운 음식을 먹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음식에는 빈부귀천이 없다.


[바베트의 만찬]이란 소설을 보라. 최선을 다해 고급스러운 음식을 대접하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바베트. 자신의 전재산을 음식을 장만하는데 쓰고도 만족해하지 않던다. 그것을 사치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사치가 아니라 자신에게 베푸는 만찬이다.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베푸는 만찬. [빅이슈]에 실리는 음식에 관한 글을 보면서 그렇게 [바베트의 만찬]을 떠올리고, 그런 글들도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번 호에서 문구, 다이어리를 다루고 있는데, 특히 만년필로 글을 쓴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예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어린 시절 펜촉에 잉크를 묻혀 글을 쓰던 모습, 펜촉을 꽂을 펜대를 사기도 했지만, 모나미 볼펜 뒤에 꽂아 쓰던 기억. 그리고 한 쪽을 쓰기 위해서 여러 번 잉크를 찍어야만 했던 기억. 그렇게 펜촉으로 글씨를 쓰면 빨리 쓸 수가 없다.


매끄럽고 빠르게 쓱쓱 써지던 볼펜과 달리 펜으로 쓰는 글씨는 천천히 쓸 수밖에 없었다. 글씨가 머리에 떠오른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기도 했던 시절이었는데, 펜촉에서 벗어난 건 만년필을 선물 받고부터... 한번 잉크를 넣으면 꽤 오랫동안 쓸 수 있었던 만년필은 새로운 세계였다.


펜촉보다는 빠르게 쓸 수 있지만 볼펜보다는 느리게 쓰던 만년필... 이번 호에서 그런 기억을 소환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나 할까.


그렇게 펜촉으로나 만년필로 글씨를 쓴다는 것도 여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 여유는 남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을 내 맘 속에 비워둔다. 나를 꽉 채워 더이상 다른 존재가 들어올 수 없게 하지 않고 나를 비워 다른 존재로 하여금 나를 채울 수 있게 한다.


이런 비움은 곧 여유고, 여유는 내 관점만을 고수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자연스레 이해를 동반하게 된다. 이해를 하게 되면 많은 것에 감사할 수 있게 될 테니... [빅이슈]를 만나면서 내 맘에 빈 공간이 생기게 되었다고나 할까. 여러모로 고마운 [빅이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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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문제.


  식민지 유산을 청산해야 하는데, 해방 된 지 70년이 넘었음에도 문제가 남아 있다. 가해국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은 책임을 회피하고 있으며, 그런 일본에 책임 묻기를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한 상황.


  여기에 식민지로 인해 분단이 되었는데, 통일로 가는 길이 보이기는 커녕 오히려 더 캄캄해지고 있는 현실.


  또 식민지로 인해 세계 여러 곳으로 흩어진 우리 동포들 문제도 남아 있다. 여러 곳으로 흩어졌던 동포들 중에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도, 또 후손들에 대한 관심도 많이 부족한 상황이지 않나 싶다. 이동순이 쓴 이 시집은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다 구 소련 땅에 남아 있던 우리 민족 사람들이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삶터를 잃고 쫓겨나는 과정이 형상화되어 있다.


일본 스파이가 될까봐 또는 일본에 협조할까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우리 민족들. 그들 중에는 강제 이주를 비판하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다. 또 강제 이주 당해 중앙아시아에서 생을 마감한 사람도 있는데...


이 시집에는 그런 사람들 중에 홍범도 장군이 나온다.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임에도 강제 이주의 칼날은 그를 피해가지 않았다. 그 역시 극장의 경비원으로 살다가 죽음을 맞이했다고 하는데...


엄청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 간에 인류애는 살아 있음을 이 시집에서 보게도 된다.


지금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된 사람들. 소련 당국에서는 고려인들에게 도움을 주지 말라고 했는데도, 많은 도움을 준 사람 이야기도 나온다. 


밤새도록 가족들과 빵 구워 담은 자루 / 식지 않도록 이불로 덮어 / 나귀 등에 싣고 온 / 카자흐 사내 막심 이크바로브 / 내 가족을 위해 자기 집도 냉큼 비워준 / 친형제보다 더 깊이 정든 / 카자흐 사내 / 원동에서 온 고려인에겐 / 말도 붙이지 말고 / 음식도 베풀지 말고 / 최소한의 접촉도 하지 말라던 / 당국의 지시 묵살하고 / 무엇보다도 인간의 도리 막중히 여기던 / 막심 아크바로브

('내 친구 막심' 중 일부. 96-97쪽)


그렇다. 당국과는 달리 민중은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려고 한다. 자신들도 어렵게 살기 때문에 어려운 삶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국적을 떠나서.


하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집단도 있다. 바로 군대라는 집단. 군인이 되면, 군복을 입는 순간 인간성, 인류애는 군복 속으로 사라진다. 오로지 명령만이 남는다. 그들에겐 명령뿐이다. 명령으로 사람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지금 미얀마에서처럼.


열차 바닥에 / 뜷어놓은 작은 구멍 / 거기 쪼그리고 앉는다는 게 / 죽기보다 싫었다 / 여자니까 / 내가 무슨 짐승인가 / ... / 여인들은 철로 옆 깔밭으로 뛰어들었다 / 하나가 뛰니 여럿이 우르르 / 한꺼번에 들어갔다 / 흰옷 입은 여인들 깔밭 사이로 보였다 / ... / 그때 돌연 총소리 탕탕 들렸따 / 탈주로 착각한 소련 병사 / 따발총 갈겨버린 것/ ('깔밭의 참변' 중. 62쪽=63쪽.)


이렇게 '깔밭의 참변'이란 시를 보면 피도 눈물도 없는 군인들과, 인간적인 면을 지키려는 여인들 사이에 벌어졌던 비극이 잘 표현되어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들의 존엄은 지키기 위해 참고 참았다가 깔밭(갈대밭)에 들어가 볼일을 보던 여인들.


그런 여인을 탈출하는 것으로 오인하여 총을 쏴버리는 군인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군인들이 인간성을 군복 속에 집어넣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소련 군인들의 만행은 도처에서 나온다. 그냥 사람을 죽이거나, 버려두거나 하는 모습들. 과연 인민의 조국이라고 한때 자부했던 소련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이 민중을 위한 군대라고 할 수 있는가? 소련 역시 우리나라 비극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식민지가 된 조국, 전체주의자에 의해 강제 이주 명령을 받은 힘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인간성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노력마저도 항거로 받아들여지는 현실.


그런 비극. 이 시집에는 그러한 비극이 너무도 잘 표현되어 있다. 나라를 잃는 민족이 어떤 설움을 겪는지, 지금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살아가는 고려인 3세, 4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그곳에서 살아가게 되었는지를 이 시집을 읽으면 알게 된다.


그리고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비극이 왜 일어났던가. 도대체 이 비극에 누가 책임을 졌던가. 아직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그렇다. 책임은 끝까지 지지 않으면 언제고 책임을 다할 때까지 물어야 한다. 그것을 회피하거나 무시하거나 없는 걸로 칠 수는 없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겪은 이 비극. 이동순의 '강제이주열차'를 읽으며 다시 되새기겨 본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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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암살자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1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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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 여러가지로 직조된 이야기들을 꿰어맞추느라 읽기에 속도가 붙지 않았다면, 2권에선 빠른 속도로 읽을 수 있게 된다. 이야기들이 하나의 결말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소설 속 이야기 속 소설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 소설에서는 전쟁을 주로 다루고 있는데, 전쟁은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한 개인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그보다는 더 사소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비껴갈 수 없는 것이 우리들 삶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 정작 우리 목숨을 끊는 것은 전쟁이 끝난 다음일 수도 있다는 것.


아이리스의 동생 로라의 죽음에 얽힌 사연이 밝혀지게 되는 과정까지 소설은 긴박하게 진행된다. 그리고 결말은?


읽으면서 눈먼 암살자라는 소설 속 소설이 어떤 의미일지 생각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현실에서는 도대체 누가 눈먼 암살자인가?


우선 암살이라는 말 자체가 '모르게' 또는 '비밀스럽게'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니, 자신의 행적을 알리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눈먼'이라는 말에서는 자신이 하는 행동을 자신도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는 의미가 첨가된다는 생각이든다.


소설에서 주인공과 관련된 죽음은 셋이다. 동생 로라의 죽음, 남편 리처드의 죽음, 그리고 알렉스의 죽음.


알렉스의 죽음이야 전쟁으로 인한 죽음. 세상의 흐름을 피해갈 수 없는, 그것도 당시 급진적인 사고방식을 지녔던 젊은이라면 죽음에 이를 가능성이 농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알렉스는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선택했기에, 그의 죽음에는 '눈먼'이라는 말이나, '암살'이라는 말이 개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알려지지 않은, 또는 알릴 수 없는 죽음을 당한 인물은 로라와 리처드인데... 이들의 죽음이 알렉스의 죽음과 다르다고 하면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이 바로 '눈먼 암살자'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너무나 단순하다. 죽은 사람을 제외하고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아이리스와 리처드의 여동생인 위니프리드뿐인데... 위니프리드는 오로지 서술되는 인물에 불과하니... 


하지만 뭔가 석연치 않다. 아이리스에게 책임을 지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리스는 그야말로 어려운 시대, 집안을 지탱하기 위해 희생당한 우리들의 맏딸과 같은 역할 아니던가. 자의든 타의든, 아이리스의 결혼은 희생에 바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아이리스가 살아남았다고 해서 과연 그것이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지, 그녀는 자신의 딸과 헤어지고 딸마저도 잃고 손녀도 어디론가 떠나 만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자, 눈먼 암살자는 누구인가? 자신이 죽이는 존재를 보지 못하는 암살자. 그런 눈먼 암살자를 꼭 사람으로만 국한시킬 필요가 없다. 오히려 이 소설에서 생기 있는 인물은 아이리스와 로라를 보살펴주던 리니와 또 나이들어 거동이 힘들어진 아이리스를 끝까지 돌봐주는 리니의 딸 마이라가 아닌가. 


이들을 침범하지 못했던 것이 무엇이었던가. 바로 돈으로 인한 비열함, 황금만능주의. 돈으로 권력까지 사려는 모습 등이 아니던가.


아이리스와 로라에게 닥친 비극의 원인은 무엇인가? 돈이다. 그것으로 인해 그들은 비극의 수렁 속으로 빠져든다. 리처드와 같이 돈만 지닌,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의 손아귀로.


그럼에도 소설은 희망을 지니게 한다. 아이리스가 글을 쓰는 것이다. 자신의 또 동생 로라, 딸인 에이미의 비극을 글로 남기는 것은 누군가에게 읽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읽히기를 바라는 것. 그것은 읽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려는 목적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은 비극이지만, 그 비극을 넘어서고 있다. 사브리나라는 손녀 딸에게 읽히기 위해 쓴 아이리스의 글을 통해서.


이미 결말은 나와 있지만, 그 결말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여러 이야기가 겹쳐 나오기에 읽어갈수록 흥미진진해진다. 그리고 생각하지 못했던 결말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눈먼 암살자'가 누구일지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그런 '눈먼 암살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1권에서 다루어졌던 눈먼 암살자와 혀를 잘린 소녀의 이야기가 왜 계속되지 않는지 소설을 읽으며 궁금해 했는데...


굳이 소설 속 소설의 이야기인 눈먼 암살자와 혀를 잘린 소녀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소설 속에서 탈출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 그들이 잘먹고 잘살았더라 하는 이야기는 필요없는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갈지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리스에게서 혀를 잘린 소녀를 보게 되는데, 그러나 혀를 잘린 소녀는 말을 할 수 없지만 글을 쓸 수는 있다. 아이리스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말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지는 않지만 글로 남긴다. 그렇게... 진실을, 그리고 희망을, 당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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