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을 읽다가 김남일이 쓴 글(시대와 소설(7)-이대로는 안된다, 통일 결사반대!)에서 이태준이쓴 단편소설 "복덕방"을 다시 만나게 됐다. 너무도 오래 전에 읽어서 무슨 내용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은 소설.


  책을 찾아본다. 분명 읽었으니 책이 있으리라. 책꽂이를 뒤져보니, 구석에서 책이 나온다. "이태준 전집2. 단편.희곡" 있긴 있구나! 


  소설은 짧다. 등장인물도 몇 안 된다. 그 중에 안초시라는 인물이 중심이다. 그가 복덕방에 함께 드나드는 박희완영감에게 들은 말... 관변에 있는 모 유력자가 흘렸다는, 황해연안에 제이의 나진이 생긴다는 말.


  자, 부동산 투자다. 땅값이 두 배 세 배도 아니고 몇십 배 또는 몇백 배 뛴다고 하니, 돈도 없는 안초시지만, 딸에게 이야기해서 삼천 원을 투자한다. 세상에, 자기 안경 다리를 바꿀 돈도 없는 사람이 거금을 땅에 투자하는 것. 결과는 뻔하다.


축항후보지로 측량까지 하기는 하였으나 무슨 결점으로인지 중지되고 마는 바람에 너무 기민하게 거기다 땅을 쌌(샀?)던, 그 모씨가 그 땅 처치에 곤란하여 꾸민 연극이었다(47쪽)고.


일제시대에 쓰인 소설이다. 지금과 무엇이 다른가? 땅에 투자하여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 지금도 신도시 개발이 될 예정지들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지 않은가. 이 정보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그 땅을 사놓기도 했고.


또 자신이 아는 사람들에게 그 정보를 넘기기도 했고. 많은 공무원들이 관련되어 수사를 받고, 어떤 사람들은 재산권을 행사하지 못하게도 되었는데...


저축을 통해서는 돈을 모을 수가 없고, 또 그렇게 모았다치더라도 올라가는 집값을 따라갈 수가 없으니, 사람들이 너나 없이 부동산으로 몰리게 된다.


똑똑한 집 한 채라고 해서 몫이 좋은 곳에 있는 아파트 한 채를 수십, 수백 억을 주고 매입하기도 하고, 또 개발 차익을 노리고 땅을 사놓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어김없이 돈을 번다. 적게는 몇 배, 많게는 몇백 배까지.


하지만 있는 사람들은 돈이 돈을 낳는다고 계속 재산을 부풀려 갈 수 있지만, 이 소설에 나오는 안초시 같이 돈이 없는 사람들은 땅이나 집을 사기 위해서는 빚을 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돈이 아니라 빌린 돈으로 투자를 할 수밖에 없다. 투자가 아니라 투기, 모험이라고 해야 하고, 잘못된 투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날리고도 보충할 수 없게 만든다.


안초시가 세상을 뜨게 되는 이유도 이것이다. 그는 땅을 사서 돈을 번다는 환상을 품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파산뿐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현실은 어떤가? 이태준이 이 소설을 쓴 때가 1930년대라고 하는데, 2000년대가 된 지금 이 소설에서 그려진 현실과 얼마나 달라졌는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 "영끌"이라고 영혼까지 끌어다 빚을 낸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들에게는 돈이 모이지 않고 오히려 빚만 더 늘어나고 있는 현실이니...


오랜 전 소설 "복덕방"을 다시 읽으며 예전부터 있어 왔지만,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방송한 작년부터 벌어진 부동산 광풍, 또 권력 또는 정보를 이용해 부동산을 매입했던 씁씁한 현실을 생각하게 된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려면 특정한 개인에게 책임을 묻기보다는 이런 현상을 막을 수 있는 제도 개선에 대해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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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색평론" 178호를 읽으면서 가슴이 뻥 뚫리기보다는 더 답답해짐을 느꼈으니, 웬일인가?


  "녹색평론"에서 하는 주장들이 계속 허공에만 맴돌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가?


  아니면 "녹색평론"에서 하는 이야기들이 실현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해서인가? 실현가능성? 다른 말로 하면 "대안"이라고 한다.


  지금 사회를 비판하면 "그래서 대안이 뭔데?" 라는 질문이 돌아온다. 대안도 없으면서 비판하지 말라고 한다. 이렇게 현실을 비판하기조차도 힘들어지고 있단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지고 말았다.


"녹색평론"에서 계속하고 있는 주장들을 몇 가지로 정리해보면, 소농이 중심이 되는 농업, 모두에게 돌아가는 기본소득, 그리고 생태와 환경을 중시하는 민주주의. 더 많이 들 수도 있지만 이 정도만 들어도 된다.


이 중에 하나도 이루지지 않았기 때문에... 농업이 중요하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는데도, 소농이 중심이 되는 농업정책은 요원하고, 오히려 기계농을 비롯한 대량생산 체제로 농업도 개편하려고 하고 있으니... 농촌이 공동화되고 있는 지가 오래되었음에도, 여전히 성장 성장 하면서 자급자족할 수 있는 농업을 키우려 하지 않는다.


농민들이 또는 농촌에 사람들이 모여 살게 하려면 기본 생활이 보장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농민기본소득 또는 농촌기본소득으로 풀어가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음에도, 아직도 멀었다. (송원규, 농 기본소득이 열어줄 미래)


꼭 농촌기본소득만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기본소득 논의가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나고 있으니, 이번 호에서 다루고 있는 여러 논의들을 참조할 만하다. (이유진, 어떤 탄소중립사회를 만들 것인가, 안효상, 기본소득의 오디세이아, 남기업, 기본소득형 국토보유세, 생태적 전환의 길 등등)


어려운 경제학 지식을 동원해서 논의할 필요도 있지만, 성서에 기반해서 탈성장을 이야기하는 글도 매우 소중하다. (조현철, 탈성장과 상상력, 성서에 길을 묻다)


출애급기를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출애급을 기존 세상과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해석하고,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은, 기존 현실에서 믿고 있었던 잘못된 관념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으로, 그리고 광야에서 40년을 헤매는 이유는, 과거와 단절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음을 생각해야 한다는 글.


여기에 또 안식일이라는 개념... 그렇다. 일만 죽어라 해서는 안 된다고, 쉴 때 쉬어야 한다고, 성장만을 추구하지 말고 적당한 노동을 해야 함을 그렇게 찾아내고 있으니... 엄청나게 많은 수의 기독교 신자가 있는 우리나라, 과연 그들은 성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여전히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을 자랑하고, 중대재해처벌법이 유명무실해서 많은 사람들이 노동현장에서 죽어나가는 현실. 이런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성장논리를 극복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이렇게 "녹색평론" 178호는 기후위기에 대응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어 "녹색평론"이 지속적으로 제기한 이 문제들이 또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기는 하지만, 그래도 문제제기를 꾸준히 하고 있는 잡지가 있다는 생각에 위안을 삼기도 한다.


이번 호에 실린 박남준의 글(안테나 켰습니다)과 이병철의 시(그 죽임의 삽질을 내려놓아라)는 아직도 우리가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마음으로도 느끼게 해주고 있다.


"대안이 뭐냐?"는 질문에 "지금 이대로 가다가는 공멸하고 만다는 사실은 확실하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지만, 공멸을 막기 위해서는 이렇게 꾸준히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이 있다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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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 사이언스 - 프랑켄슈타인에서 AI까지, 과학과 대중문화의 매혹적 만남 서가명강 시리즈 2
홍성욱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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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이 점점 세분화되고,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더 알기 어려워지고 있지만, 그럴수록 다양한 학문들이 서로 교류를 하고, 융합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과학분야에서는 더더욱.


이 책은 과학에 대해서 쉽게 접근하게 해준다. 크로스라는 말은 교차한다, 겹친다는 말로 쓰일 수 있기에, 과학과 대중문화의 겹침, 융합 정도로 이 책 제목을 해석하면 된다.


우리가 지니는 과학자의 이미지부터 시작해서 인류가 꿈꾸던 세상, 그리고 로봇과 인간, 또 우리는 과학이 발전한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등을 살피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이 지닌 장점은 어렵지 않음에 있다. 과학 하면 어렵다, 너무 전문적이다 하기 쉬운데, 이 책은 전문 분야에 대한 설명보다는 대중문화 속에서 과학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기에 이해하기 쉽게 서술되고 있다.


과학자에 대한 인상부터 그렇다.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을 우리가 잘못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지부터 살피는데, 피조물의 이름이 아니라 피조물을 창조한 과학자의 이름이 프랑켄슈타인임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 여성 과학자에 대한 차별이 있었음도 살피고, 여성 과학자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인 마리 퀴리에 대해서 그간 잘못 알고 있었던 사실도 알려주고 있다. 마리 퀴리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서 썼던 전략에 대해서도.


이러한 과학자들의 이미지에, 이제는 과학기술로 우리가 만들 수 있는 세상을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로 나아갈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과학기술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사는 세상이 달라질 수 있음을, 그리고 과학기술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바람직한지 생각하게 한다. 이것은 인공지능, 로봇으로 나아가면 더 생각할 거리가 있고, 인간 자신의 유전자에 대해서까지 우리가 관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앞으로도 과학기술은 더욱 발전할테고, 지금은 화성에 우주선을 착륙시켜 화성을 촬영하고, 또한 화성에서 비행에 성공하기도 했다고 하니, 우주 밖으로 나아가는 이러한 과학기술과 또 인간 자신의 몸에 대한 과학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시킨 이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과학에 대한 맹신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과학기술을 무시해서도 안 되니, 적절한 균형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것이 이 책을 쓴 목적이기도 하겠다.


책의 말미에 가면 '창백한 푸른 점'이라고 지구를 표현한 구절이 나온다. 그렇다. 우리 지구는 우주 전체에서 보면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하다. 작고 연약한 지구.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 점을 명심한다면 우리가 이 '창백한 푸른 점'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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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아일랜드
올더스 헉슬리 지음, 송의석 옮김 / 청년정신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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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더스 헉슬리 소설이다. "멋진 신세계"에서 디스토피아 세상을 그렸다면, 이번에는 유토피아 세상을 그렸다. 그런데 유토피아란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곳이니, 유토피아는 존재해서는 안되는 곳이 되어야 한다.

 

"멋진 신세계"에서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되어 인간을 배아 단계에서 이미 결정하는 결정론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다면, 이 소설 "아일랜드"에서는 개인의 존엄을 인정하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개인, 노동, 예술, 가정, 사회, 나라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헉슬리는 이런 세상을 바란다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과연 이런 세상이 존재할 수 있느냐다.

 

제목을 아일랜드, 즉 섬이라고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겠다. 우선 다른 나라들로부터 떨어져 있어야 한다. 영향을 덜 받아야 자신들이 지닌 이념을 지켜낼 수 있다. 하지만 섬은 정체될 수 있다. 즉, 자신들끼리 행복하게 지낼지 몰라도 외부 발전과 동떨어져 있기에 외부의 침략에 대비할 수 없게 된다.

 

외부 침략에 대비하려면 그에 맞서는 기술을 갖춰야 하는데ㅡ 기술 발전이 인간 사회를 행복보다는 파멸로 이끄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일랜드와 같은 유토피아에서는 그런 발전을 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일랜드 역시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풍부한 자원이나 또는 다른 나라들이 생산하지 못하는 것을 생산해야 한다. 아무리 아일랜드라고 해도 '닫힌 체계'만으로는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비극이다.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나, 외부 세력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곳. 이것을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유토피아는 사라지고 만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풍부한 석유자원을 지니고 있어 외국 세력의 노림수가 된다. 여기에 진보를 주장하는, 아마도 그것이 진보를 가장한다고 해야 하겠지만, 정치세력에 의해 팔라라는 아일랜드는 유토피아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윌이라는 사람을 등장시켜 팔라 섬에 들어가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관찰하고 경험하게 한 다음, 그들에게 동조하게 만드는 소설 줄거리 속에서, 우리는 과연 유토피아란 가능한가 하는 질문을 해야 한다.

 

닫힌 체계만으로 유토피아를 이룰 수는 없는데, 그렇다고 열린 체계를 지향한다면 유토피아는 더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다. 팔라의 경우처럼, 그들은 최소한의 교류를 원하지만, 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는 주변국들은 그럴 의향이 별로 없다.

 

결국 유토피아는 열린 체계에서 주변국을 고려해야만 한다. 이 소설은 그렇게 한 나라만으로는 유토피아가 가능하지 않음을,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들은 받아들이고 자신들이 지향하는 바를 추구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이나 르귄의 소설에 나타나는 유토피아는 결코 완성된, 모두가 행복한 곳은 아니다. 이들이 그리고 있는 유토피아는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는 완벽하지 않은,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고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는 사회다. 그런 사회가 유토피아라는 것을 명심하고... 주변국과 관계를 잘 고려할 수 있어야 함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이 책에 나와 있는 유토피아의 모습은 누구나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팔라에서는 매일 2시간의 노동을 하는데, 의무가 아닌 즐거움으로 하는 노동이 되어야 한다(228쪽)고 한다. 이만큼 유토피아에서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관계를 확립해야 한다.

 

또한 유토피아는 전쟁을 반대하고, 다른 사람보다 4-5배 이상 부유한 사람이 없는 사회(233쪽)라고 한다.

 

이 소설에 나와 있는 이 구절...지금 우리가 곱씹을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기, 중공업, 산아제한을 다른 말로 바꿔보는 것도 괜찮을 듯.

 

전기에서 중공업을 빼고 산아제한을 더하면 민주주의와 경제적 풍요가 되고, 전기에 중공업을 더하고 산아제한을 빼면 빈곤, 전체주의와 전쟁이 되는 거지. (231쪽)

 

이미 중공업을 넘어서 과학기술이 이 소설이 발표된 때보다 더 앞으로 간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우리가 서로를 위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가 살아가고자 하는 사회를 상상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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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가 자전거를 처음 만들었을까 - 가짜 뉴스 속 숨은 진실을 찾아서
페터 쾰러 지음, 박지희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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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뉴스 속 숨은 진실을 찾아서'라는 글이 표지에 실려 있다. 뉴스라고 하면 사실을 전달한다고 여기기 쉬운데, 뉴스에서도 사실을 얼마나 많이 왜곡하는지는 우리가 이미 많이 겪고 있다.

 

수많은 사실들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서도 사실이 잘못 전달될 수 있는데, 악의를 지니고 왜곡한 사실을 파악하기는 매우 힘들다. 그것도 언론에 발표가 되면.

 

하지만 언론에 발표된 일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언론에 발표된 일들에 대해 꼼꼼하게 판단하는 습관을 지녀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면 더더욱 그렇다. 우리가 그동안 잘못 알고 있던 사실들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있는데, 이미 그것들은 잘못된 사실로 판명되었음에도 한번 퍼진 소문을 바로잡기는 쉽지 않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비판적인 읽기를 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처음 미국의 전 대통령이었던 트럼프로부터 시작한다. 그가 한 말 중에 많은 말들이 사실이 아님에도 사람들은 트럼프의 말을 믿고 싶어했다는 것. 즉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고자 하는 것을 보고, 믿고자 하는 것을 믿으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

 

그러므로 그러한 경향에 부합하는 뉴스들이 난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뉴스만이 아니라 역사에서도 사실공방이 지금까지도 벌어지고 있는 경우가 많으니, 한번 잘못된 사실을 전달하면 그것에 대해서는 더 많은 사실들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잘못된 사실에는 과학적 연구도 많이 포함된다. 특히 유물을 발견해서 발표하는 경우에 수많은 잘못된 사례들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유물뿐만이 아니라, 상대를 몰락시키기 위해 악의적으로 퍼뜨리는 소문들이 많았음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너무도 많은 날조된 사실들이 열거되어 있어서 참 세상 못 믿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 책은 우리에게 신문이나 방송에서 다루고 있는 일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 자신이 사실을 판단할 수 있는 자료들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해야 하고, 또한 발표된 날조된 일들은 가만히 살펴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일들이 많이 있음을 찾아내야 함을 알려주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도 한 가지 일을 두고 서로 다른 방향에서 뉴스가 나오기도 한다. 팩트 체크라고 사실을 확인하는 방송도 있지만, 그들 역시 자신들의 처지에서 확인을 한다. 세상에 늘 팩트 체크는 있어왔다. 다만 어느 관점에서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그것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사실을 꼼꼼하게 확인하게 할 필요가 있음을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아마도 이 책을 읽으면 그동안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졌던 가짜 뉴스들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그런 가짜 뉴스에 속지 않아야 하고, 우리들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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