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가족 - 가족의 눈으로 본 한국전쟁
권헌익 지음, 정소영 옮김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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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가족을 파괴한다. 더 설명이 필요없는, 전쟁하면 떠올릴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전쟁은 목숨을 앗아가는데, 가족 구성원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은 가족을 파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족 구성원이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의도하지 않는 재난으로 목숨을 잃었을 때 가족들은 충격에 빠진다. 전쟁을 통해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지니는 상실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가족을 잃었음에도 그 슬픔을 표현하지 못하게 강제된다면? 전쟁이 더욱 비극적인 이유는 어떤 사람이나 가족, 친족에게는 전쟁으로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행위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이방인이 되거나 박해받는 위치에 서게 된다는 데 있다.

 

우리나라가 특히 더 그랬다. 전쟁을 겪고 나서 극심한 이념대립. 그 이념대립으로 인한 가족의 해체, 친족의 해체.. 그리고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 책임지게 하는 정치권력.

 

하여 긴긴 세월동안 가슴에만 묻어두었던 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 슬픔들이 민주화가 되면서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고, 이제는 당당하게 추모할 수 있게 된 경우도 있지만, 아직도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전쟁 희생자들이 있다.

 

그런 희생자들의 가족, 친족에게는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끝나지 않았다. 물리력만으로 전쟁을 설명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자는 책의 끝부분에서 우리나라 전쟁 희생자들이 걸어왔던 길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코리아에서의 학살 이후 친족의 정치적 삶은 산 자가 죽은 자를 친근한 존재로 기억할 양도할 수 없는 권리, 뒤르켐이 영혼의 권리(the right of soul)라고 정의했던 그 권리를 다시 찾기 위한 길고 지난한 싸움이었다. 영혼의 권리란 죽은 이에게는 친족의 세계에 존재할 수 있는 권리의 회복이고, 살아 있는 이에게는 정치적 사회 내의 시민권의 회복과 동일한 의미이다.' (265쪽)

 

이런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제주 4.3사건을 예로 든다. 이제는 대통령도 추념식에서 공식적인 사과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친족들도 쉬쉬 하면서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난과 탄압이 있었는지.

 

가족이 해체되고, 친족이 붕괴되고, 마을 공동체가 파괴되어 버린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을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여기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공동체가 어떻게 회복되어 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오렌 세월동안 수많은 고통을 겪었지만, 지금은 그래도 많이 치유가 된 상태. 전쟁으로 인해 상대를 적으로 만들뿐만 아니라, 가족 구성원, 친족들, 마을 공동체원들 사이에서도 적이 되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죽고 죽임을 당했던 그런 역사 속에서 갈등이 지속되지 않도록, 이제는 화해와 치유를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 온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영혼의 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해 온 과정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3과 6.25로 인해 많은 가족, 친족, 마을 공동체가 파괴되었고, 그 중에는 아직도 회복되지 못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래도 조금씩 그 갈등으로부터 치유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물론 남북 관계가 잘 풀려야 이런 과정이 더욱 잘 진행될텐데... 아직까지는 그렇지 못한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전쟁에 참여한 당사자만이 아니라 그 후대 세대들이 겪어야 했던 일들, 가족 구성원으로 인해 가족들, 친족들이 겪어야 했던 일들... 근대는 개인주의가 확립된 사회라고 하지만, 전쟁은 그것이 허구임을 만천하에 보여주었고... 

 

전쟁은 연대책임임을 뼛속 깊이 인식하도록 했음을, 전쟁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이 겪은 일을 통해서도 잘 알고 있다. 결국 전쟁은 가족, 친족을 배제할 수 없는, 개인 또는 국가의 문제만이 아니라 가족, 친족, 마을공동체의 문제가 됨을 이 책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이제는 치유와 화해가 정립되어갈 때다. 그래야 한다. 근대를 넘어서려 하는 이때 적어도 가족 구성원, 친족 구성원, 또는 마을 공동체 사람이 한 일로 인해 다른 구성원들이 어려움을 겪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리고 용서를 바탕으로 더 나은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 적어도 '영혼의 권리'는 지켜줘야 하지 않겠는가. '영혼의 권리'를 지켜줘야 산 자들이 더 나은 세상에서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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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이슈]하면 집이 없는 사람을 떠올릴 수 있다. 그들이 재활하도록 돕는 잡지이기 때문이다.


  이번 호를 읽으면서 결핍이라는 말이 참 긍정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정문정이 쓴 글 '너에게는 내가 모르는 종류의 결핍을 주고 싶어'에 나오는 이 말을, 사랑으로 바꾸어도 된다는 생각을 했다.


  결핍은 곧 사랑이다. 왜냐 비워야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없음을 알아야 있음을 추구할 수 있다. 세상에 자신에게 채울 공간이 없는데 어떻게 무언가를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부모는 자신에게 결핍되어 있어 자신을 힘들게 하고, 그것만은 꼭 채우고 싶어하는 마음을 자식들이 겪게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에게 없었던 것들을 자식들에게는 있게 하려고 노력한다.


자신에게 있던 것이 자식에게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들이 살아오면서 결핍이라고 느낀 것들을 자식에게는 주지 않으려 한다.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내가 충분히 누릴 수 있었던 많은 일들이 바로 내 부모에게는 결핍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충분히 누린 일들은 부모들은 누리지 못했던 일이고, 내게 결핍되어 있는 무엇들은 부모들은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하는 그 무엇일 수 있음을...


이번 호에서 정문정이 쓴 글은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그리고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빅이슈]는 내게 결핍을 보여주고 있고, 그 빈공간을 무엇으로 채우게 하고 있다는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내게는 소위 교양이라고 하는 미술, 음악, 또 근사한 분위기의 음식점 등등은 저 멀리 있다. 내게 결핍된 것들이다.


이 결핍들을 [빅이슈]를 통해 조금씩 조금씩 채워가고 있다. 특히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또는 보고도 그냥 지나쳤던 사물들, 존재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번 호에서 다루고 있는 한복도, 서울 광화문 거리나 전주 한옥 마을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입고 다니지만 그냥 관광으로서 특정한 날에 특정한 장소에서나 입는 우리나라 옛날 옷이라는 생각을 하고 말았는데...


아닐 수 있음을,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도 또 패션으로서도 입을 수 있는 옷임을, 또한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또 캐릭터를 통해서 한복을 만날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결핍을 깨닫고, 결핍을 인식하는 순간, 이제는 어떻게든 채울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빅이슈]에는 유명인들이 표지 사진을 찍고,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린다. 이것 또한 전혀 유명하지 않은, 평범한 일상인인 내가 유명인을 만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일종의 결핍... 그러나 이건 내가 잘 의식하지 않는 결핍인데.. 그럼에도 이런 글을 만나, 그들의 삶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아가는 일도 내 삶에는 또다른 채움이 된다.


다양한 글들이 실려 있고, 다양한 분야에 대한 이야기를 실어주고 있어서 [빅이슈]는 내게 내 결핍을 인식하게 해주고, 어떻게든 결핍을 채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다. 


결핍의 잡지 [빅이슈]가 아니라 읽는 사람에게 자신의 결핍을 깨닫고, 그것을 채우게 하는 잡지, 삶의 충만함을 채우는 잡지가 바로 [빅이슈]다.


이번 호는 내게 그런 생각을 하도록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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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왼손 어슐러 K. 르 귄 걸작선 1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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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름을 받아들이는 자세 - 낯선 행성에 도착할 때


소설은 낯선 행성과 친교를 맺기 위해 온 특사 '겐리 아이'와 그 행성을 이루는 나라 중 한 나라 카르히데의 수상인 '에스트라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보통 낯선 곳에 도착하여 자신들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두려움이 앞선다.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받아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보장받을까? 흔히 두려움때문에 무장을 하고, 혼자가 아닌 여럿이 낯선 곳에 함께 간다.


그렇다면 낯선 이들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또 어떤가? 처음부터 환대를 하는가? 아메리카 대륙을 생각해보면 낯선 존재를 환대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낯선 이들을 환대하는 모습, 그것은 낯선 이들에게 침략당하지 않은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또한 다른 존재를 자신들과 다른 존재로 인정하고 그들에게 편리를 제공하려는 태도가 드러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낯선 이들을 경계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게센 행성은 네 나라로 구성이 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 소설에 나타나는 주요 나라는 카르히데와 오르고레인이다. 자기 나라에 온 낯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상반되는데... 카르히데에서는 낯선 사람을 환대한다. 반면에 오르고레인에서는 온갖 감시소에 여러 신분증명서를 요구한다. 물론 두 나라 다 낯선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게는 하는데...


에큐멘 행성에서 특사로 온 겐리를 통해 두 나라가 낯선 이를 만나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우리가 낯선 이들을 만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과연 국경을 통제하면서 낯선 이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또한 낯선 곳에 갈 때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도 생각하게 하는데... 에큐멘에서는 낯선 행성으로 사람을 보낼 때 그 행성 사람들이 두려움을 지니지 않도록 가능하면 한 사람만 보낸다고 한다.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기술을 과시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낯선 행성을 정복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서로 신뢰를 지니고 교류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 특사를 파견하니 한 사람이 낯선 행성에 도착해서 그들과 교류하고, 신뢰 관계를 쌓은 다음에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이다. 낯선 곳, 낯선 이들을 만나려 할 때와 만날 때 우리가 지녀야 할 자세. 두려움을 떨치고 상대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함께 하려는 태도. 르귄은 이 소설을 통해서 이런 만남의 자세, 특히 국가와 국가, 행성과 행성의 만남이 이루어질 때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2. 다름을 인정하기 - 성(性)에 대하여


게센 행성 사람들은 양성이다. 이들은 때와 장소에 따라서 남성이 되기도 하고 여성이 되기도 한다. 그들에게 한 성만 지니고 있는 사람은 성도착자에 불과하다. 그러니 겐리는 성도착자라고 할 수 있다. 


겐리는 우리 성 구분에 의하면 남성에만 해당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양성으로 구분된 세상에서만 살아왔던 겐리에게 양성을 다 지니고 있고, 때로는 남성, 때로는 여성으로 변하는 게센 사람들은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겐리는 최대한 이해하려고 한다. 물론 그들이 지닌 성은 겐리가 이해하고 말고를 떠나서 겐리가 어찌할 수 없는 그들 본유의 성 정체성이다.


마찬가지로 게센 행성 사람들에게 한 성만 있는 겐리는 성도착자에 불과하다. 그들 역시 겐리를 이해할 수 없다. 남성만, 여성만 있는 성을 만나보지 못했던 게센 행성 사람들에게 겐리는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런데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어찌해야 한다고 하면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어찌할 수 없는 본유의 특성은 이해하고 말고를 떠나 받아들여야 한다. 그냥 다름일 뿐이다. 가치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가치가 개입하는 순간, 다름은 틀림이 되고, 다름을 교정하려는 강압이 이루어지게 된다. 강압, 폭력이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타고난 내 모습을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이유로 바꾸게 강제한다면, 그보다 더 심한 폭력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성 정체성은 이해 여부를 떠나 받아들여야 할,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 배척이 아니라 수용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겐리와 게센 행성 사람들을 통해 르귄은 이 점을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다.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도 없다. 소설에서는 너무도 당연하게 서로의 다름을 인식하지만 함께 살아가야 함을, 다름이 틀림이 아님을 인물들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3. 환대와 인정만으로는 부족 - 겐리와 에스트라벤이 하는 모험


낯선 사람을 환대하고 다른 성 정체성을 지닌 모습을 인정한다고 해도 쉽게 함께 하지는 못한다. 이들이 함께 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과정을 모험이라고 해도 좋겠다. 소설은 그래서 에스트라벤이 반역자로 추방당해 이웃나라 오르고레인으로 도망치고, 겐리 역시 카르히데에 더 이상 머물지 않고 - 자신이 온 목적을 달성하기 힘들어졌으므로 - 오르고레인으로 간다.


서로 영토 분쟁을 하고, 왕이 있고 왕이 통치하는 나라와, 또 친교인들이 공동 통치를 하는 나라를 겐리를 통해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소설은 이들이 정보를 통제하면서 나라를 운영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는데, 겐리를 유일하게 완전히 믿고, 겐리에게 불신을 받는 사람인 에스트라벤이 이용가치가 없다고 수용소에 갇힌 겐리를 구출해 다시 카르히데로 가는 과정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더 알아가고 이해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그렇다. 환대와 인정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들은 함께 일을 해야 한다. 함께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마음을 열고 완전한 신뢰로 나아갈 수 있다.


적어도 낯선 행성, 낯선 나라, 낯선 사람과 만날 때는 반드시 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쇠도 두드려야 강해지듯이 낯선 이들은 함께 하는 과정에서 더 강한 유대감을 형성한다. 이런 유대감을 통해 신뢰가 이룩되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더 좋은 관계로 나아가게 된다.


겐리가 카르히데를 떠나 다시 카르히데로 돌아오기까지, 에스트라벤과 함께 하는 과정에서 그는 마음으로 대화를 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어느 정도 마음으로 대화를 할 수 있게도 된다.


마음으로 대화를 하게 되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이들이 마음으로 대화를 하게 되면서 이들에게는 완전한 믿음이 형성된다.


우리가 남극을 횡단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그들이 겪었던 고난을 상상할 수 있듯이, 이 소설에서 오르고레인을 탈출해 카르히데로 가려는 이 둘의 모험은 남극을 횡단하는 모험을 하는 사람들이 겪었던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던 모습을 떠올리게 해주고 있다. 그 과정에서 둘이 우정을 쌓아가는 모습도... 


4. 왜 어둠의 왼손인가 - 어둠의 왼손은 빛


소설 제목이 된 어둠의 왼손을 보면서 왜 어둠의 저편이 아니고 왼손이지 하는 생각을 했다. 보통 우리는 빛과 어둠이라고 하지 않나... 그러니 왼손이라는 말은 좀 낯설었는데, 소설을 읽다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빛은 어둠의 왼손 / 그리고 어둠은 빛의 오른손 / 둘은 하나, 삶과 죽음은 함께 있다. / 케메르를 맹세한 연인처럼, 마주 잡은 두 손처럼, / 목적과 과정처럼.' (321쪽)


게센 행성은 겨울 행성이라고 불릴 수 있다. 추위와 눈보라, 얼음으로 뒤덮인 행성이다. 그럼에도 이들에게도 봄은 있다. 어찌 겨울만 있겠는가? 추위 속에서도 따뜻함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낯선 곳에 온 겐리가 겪는 고난도 새로운 세상을 위한 희망과 다르지 않다.


하나로만 되어 있지 않다. 게센 행성 사람들이 양성을 구비하고 있듯이 이들에게 어둠의 왼손은 곧 빛이다. 그러니 고통은 곧 행복의 다른 면이다. 하나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겨울 행성이었던 게센, 그리고 특사인 겐리의 말을 믿지 않거나 또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부정했던 사람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나지 않음을, 이러한 어둠을 통해 빛으로 나아가게 됨을 르귄은 소설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결국 소설 제목인 어둠의 왼손은 여러 행성들이 서로 교류를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인 빛을 향해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 우리에겐 무엇이 있나? 이것 아니면 저것? 아니다. 이것과 저것은 음과 양처럼 결코 떨어질 수 없다. 태극에서 음양이 나오고 어쩌고 하는 동양철학을 운운하지 않아도 된다. 세상은 결코 하나로만 존재할 수 없다.


그러니 이 소설처럼 어둠의 왼손은 빛이고, 빛의 오른손은 어둠이다. 또한 단일한 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지만, 융이 주장하듯이 우리 역시 단 하나의 성만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남성성-여성성 중에 어느 성이 더 우세하게 나타나는가 하는 점이 있을 뿐이다.


게센인들이 지니고 있는 양성이 때와 장소에 따라서 다르게 발현하듯. 그리고 그럼에도 이들은 한 성만을 지닌 존재도 인정해주는, 다름이 다름일 뿐이라는 인식을 지니고 살아가듯, 개인간 만남이든, 나라간 교류든, 또는 외계 존재와 만날 때든 우리가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할지에 대해 이 소설은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역시 르귄은 배신하지 않는다. 소설을 읽으며 마지막 장을 덮기가 아쉽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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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7-07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kinye91 2021-07-08 04:4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1-07-08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kinye91 2021-07-08 04:4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왜 칸트인가 - 인류 정신사를 완전히 뒤바꾼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서가명강 시리즈 5
김상환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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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파스칼이 한 말이라나.. 우리 인간을 다른 종과 구별해 주는 특징으로 꼽을 때 생각하는 능력은 빠지지 않는다. 그만큼 인간은 생각하는 능력을 지닌 존재다.

 

이렇게 생각하는 능력이 잘 발현되는 부분이 바로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은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학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학교에서 철학을 잘 배우지 않고, 철학자들이 한 주장을 거의 한 문장으로 여약해 외우는 수준으로만 배우고 있으니 문제다.

 

철학보다는 철학자를 배우는 그런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철학자들이 한 주장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특히 칸트는 좋은 말을 인용할 때 찾아보고 써먹기도 하지만, 그가 펼친 철학의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어렵다. 어렵기도 하거니와 차분히 들여다볼 시간도 가지지 못했다. 그냥 학교에서 배운 피상적인 내용과 여러 사람이 해설해 놓은 책들을 몇 권 읽었을 뿐.

 

이 책은 '철학은 왜 칸트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가'라는 질문을 하면서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칸트의 유명한 저작인 삼비판서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칸트 철학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그런 칸트 철학이 철학사에서 지닌 의미만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까지 나아가서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렵다. 사실 눈에 들어오는 개념들이 적기 때문이기도 하다. 선험적 종합판단이라는 말도 어려운데,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간다. 실천이성에서 판단력까지... 그리고 세계 평화까지... 그의 영구평화론을 보라.

 

칸트의 이상이 실현되었다면 세상은 전쟁으로 얼룩지지 않았을텐데, 하지만 칸트가 주장한 자율성, 바로 인간 중심의 철학... 물론 그는 신학을 배격하지 않는다. 당시 신학을 배격할 만한 철학을 어떻게 전개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만... 신을 제외하고, 칸트가 주장하는 바를 따라가면 인간의 자율성, 능동성, 주체성을 최대한 살리고 있다.

 

우리가 우리 삶에 대해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환경에 대해서, 또 우리의 행동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에 대해서, 우리의 느낌에 대해서 칸크는 삼비판서를 통해 탐구하고 있다.

 

그래서 과거 철학에서 인간이 주변으로 밀려나 있었던 것을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인간은 진리를 만들어갈 수 있음도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만 단순하게 이해하면 안 되겠지만 적어도 인간이 눈에 보이는 현상계를 벗어나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곳까지 나아가는 능력을 지녔다는 것은, 이미 결정된 것만을 받아들이는 상황을 넘어 인간이 결정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면 인간은 이미 있는 존재만을 발견하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를 만들어가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이 책은 칸트가 쓴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을 순차적으로 해설하면서 이들이 지닌 관계를 설명하고, 이 책들이 기존 관념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 책들을 통해서 우리 인식이, 삶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도 생각하게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렵다. 어렵지만 어렴풋이나마 칸트란 사람이 인식을 포기한 '물자체'를 도입하고 멈춘 철학자가 아니라 거기서 더 나아가려고 하는 철학자였다는 느낌을 받는다.

 

차근차근 더 시간을 내어 읽어야 할 책이라는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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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아름다운 수학이라면 - 내 인생의 X값을 찾아줄 감동의 수학 강의 서가명강 시리즈 3
최영기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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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수포자"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수학 공포심이 만연한 우리 사회에서 이런 제목을 달고 나온 책이 통할까? 


한때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란 책이 많이 팔린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가장 공부가 가장 어렵다고 말하는 학생이 다수일텐데, 이 책은 반대로 이야기하고 있으니...


다시 학생들에게 수학이 아름답냐고 물어보라. 아마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대답이 나오거나, 이상한 질문을 하는 사람이라는 비웃움이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수학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정말로 아름답다고... 그 아름다움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한다고. 그들에게는 수학은 아름다움의 절정이다. 숫자나 기호로 표시되는 너무도 아름다운 세계.


이런 아름다운 세계 속에서 그들은 황홀경에 빠져 산다. 그러다 몇몇이 기록으로 남겨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들이 발견한 수학이 알려진다. 다만, 그들이 느꼈던 아름다움을 느끼기 보다는 절망하거나, 어려움에 빠지는 사람이 더 많겠지만.


이 책은 수학이 지닌 아름다움을 사람들이 느꼈으면 하는 의도로 썼다고 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여러분이 수학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느껴 수학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더불어 이제라도 우리가 어떻게 수학을 가르치고 배우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12쪽)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마는... 우리나라 수학은 여전히 수학이 지닌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지 못하고, 오로지 정답을 찾아내는 일에 몰두하게 한다.


그것도 빠르고 정확하게 찾는. 주어진 시간 안에 주어진 문제를 모두 실수 없이 풀도록 하는 문제풀이 기계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 수학교육이다.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하리라.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이런 바람으로 수학에 대해서 문제 풀이가 아닌, 수학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느끼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도 대학입시가 버티고 있는 한, 여전히 문제풀이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런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수학에서 만나게 되는 애매함은 견딜 수 없는 장애다.


애매함, 모호함, 불명확함, 명료하지 않음 등을 인식하고, 명료함으로, 아름답게 정리되도록 한 수학자들은 애매함을 견뎌냈다고 한다. 이런 말이 이 책에 인용되고 있다.


미래가 요구하는 창의성은 불확실한 애매함을 견디는 것이다. (로버트 스턴버그의 말이라고 한다. 186쪽)


불확실한 애매함을 견디는 힘, 그것이 창의성일텐데, 수학은 바로 이러한 불확실한 애매함을 숫자나 기호를 통해 명료하게 정리해 내는 학문. 우리가 불완전함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기보다는 완전함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니. 소위 황금비율도 바로 수학 아니던가. 이렇게 불확실한 애매함을 견뎌내고 명료함, 완전함에 이르는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순간, 수학자들은 더이상 바라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시작하면서 괴테가 쓴 파우스트를 인용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겠다. 수학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간, 그 순간 수학자들은 영혼을 악마에게 넘겨버리는 파우스트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리라.


그렇다면 수학에 대해서 지긋지긋하다고, 인생에서 수학은 학교에서 시험볼 때 또 대학입시에서나 중요하지 다른 분야에서는 전혀 자신과 상관없다고 여기는 사람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많은 수학 공식을 이야기하지 않고, 수학이 어떻게 우리들 삶에 들어왔는지, 세계를 인식하는 틀을 제공했는지 또 어떤 수학자들이 있었는지 등을 쉽게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단 한 권의 책으로 수학이 지닌 아름다움을 느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런 책을 읽음으로써 수학이 문제풀이보다 더 많은 면모를 지니고 있음을 생각할 수는 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 이렇게 기존에 갖고 있던 수학에 대한 인식에 균열을 내는 일부터 시작하면 된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수학에 질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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