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거의 갇혀 지내다시피 하고 있다. 6시 이후에는 2인까지만 모일 수 있으니, 아는 사람들과 저녁에 만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그렇다고 사람이 집에만 갇혀 지낼 수는 없는 일. 세상에. 자신이 원하지 않는데도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지치게 한다.


  가뜩이나 더운데, 더워서 집 안에 있으면서 에어컨을 틀고 나만 시원해도 되나, 안이 시원해지는 만큼 밖은 더 더워질텐데 하는 생각에 마음이 그리 편치만은 않고.


  그럼에도 틈을 이용해 바깥 나들이를 한다. 나들이를 하면서도 방역수칙이 어떻게 되더라 고민도 하고, 방역수칙을 어기지 않도록 조심하고.


이 참에 받아본 [빅이슈] 256호는 표지부터 시원함을 줬다. 바다다. 그래 사람들이 집 안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밖에 대한 동경은 더 커지고있는데... 


이번 호에서 다뤄준 바다 특집이 그나마 집 안에서 피서를 할 수 있는, 눈이 시원해지는 만큼이나 마음도 상쾌해지는 그런 글과 사진이었다.


어려울 때일수록 조금이라도 누군가를 편하게 해주는 존재가 있는데, 이 어려운 시기에 [빅이슈]가 그런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 이야기부터, 연예인들이 해주는 이야기, 또 각자 자신들이 생각하고 살아온 이야기. 예전에 학교 다닐 때 국어책에서 배운 수필들... 수필가라는 직업이 있었고 또 유명인사들이 글을 써서 수필이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이라고 배웠음에도 쉽게 인정을 할 수가 없었는데...


빅이슈를 읽으며 이런 글들이 바로 수필이구나. 정말 수필은 자신의 생각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솔직하게 쓴 글이구나. 그래서 감동을 주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가식이 없는 글. 사람에 대한 사랑이 듬뿍 묻어나는 글들. 어려운 존재와 어떻게든 함께 가려고 하는 모습들이 글에서 배어나온다. 그래서 좋다.


이번 호를 바다 특집으로 한 이유도 그런 [빅이슈]의 역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지쳐가는 여름,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19에 이어 무더위까지 참 힘들게 하는데, 이 잡지를 읽는 순간만큼은 그것들을 다 잊고 청량감에 마음을 맡길 수 있게 된다.


그래, 힘들 때일수록 함께 해주는 존재들이 있다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지. 그래야만 우리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또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존재들이 있다는, 특히 사람들이 있다는 인류애를 잃지 않고 살아가겠지.


8월에 처음 만난 [빅이슈] 256호는 내 심신이 지쳐가고 있을 때에 내게 위안과 휴식을 주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말복이 지나간다. 그리고 더위도 지나가겠지. 이처럼 코로나19로 지나가고, 모두가 다시 저녁에도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때가 오겠지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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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자의 노트 - 식물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
신혜우 지음 / 김영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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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자의 노트라는 제목으로 여러 식물에 관해서 알려주고 있는 책이다. 전문적인 이야기보다는 일반인들이 알기 쉽게 직접 그린 그림과 함께 식물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던 식물에 관해서도 모르고 지냈던 부분들을 알게 된다.


특히 식물하면 움직임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식물 역시 살아남기 위해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고, 식물도 경쟁을 하기도 하지만, 협동을 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므로 식물을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생각이나 행동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여기에 식물에 관한 이야기를 마치는 부분에서 다시 우리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말로 끝맺음을 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모든 존재에게서 배울 수 있다. 아니 배워야 한다. 식물에게도 마찬가지다.


관심을 가지고 식물을 바라본다면, 또한 사랑하는 마음으로 식물을 바라본다면 그 식물을 통해서 배울 점이 있다. 그런 배움은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


이 책을 읽으며 두 책을 떠올렸다. 조금 오래된 책이긴 한데, 윤구병이 쓴 "잡초는 없다"라는 책과 황대권이 쓴 "야생초 편지"다. 다 식물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통찰하는 내용의 책이었는데... 이 책도 마찬가지다.


그 책들과 마찬가지로 식물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만 결국은 우리 삶에 관한 이야기다. 만물은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고, 어떤 존재의 사라짐은 우리 삶의 풍요로움이 순차적으로 빠져나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식물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 식물에 대한 애정이 사람에 대한 애정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결국 어떤 존재를 사랑하는 일은 우리들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한 장 한 장 천천히 읽으면서 또 여러 번 읽으면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식물들에 관해서 생각하고, 이 책에는 없지만 주변에 있는 많은 식물들에 대해서 더 큰 관심을 지녀야겠다는 마음도 지니게 하고, 또 식물을 비롯한 다른 모든 존재들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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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 가능한 세계들
앤 드루얀 지음, 김명남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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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하면 내게는 칼 세이건이 쓴 책이 먼저 떠오른다. 물론 우리나라 늦여름부터 가을이면 지천에서 볼 수 있는 꽃인 코스모스도 떠오르지만. 그 꽃만큼이나 칼 세이건이 쓴 [코스모스]는 내게 코스모스의 대명사라고 할 만할 정도였다.


그만큼 칼 세이건의 책이 내게 경외감을 주었는데... 그 내용을 이해하고 말고의 차원을 넘어서서, 그 책을 읽는다는 사실에서 행복을 느꼈고, 광대한 우주를 세이건과 함께 여행하는 느낌을 지니곤 했다. 지금도 그 책을 읽었을 때의 감동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데...


그러다가 도서관에서 또다른 책인 [코스모스]를 봤다. 어라, 세이건 책이 아니네. 앤 드루얀. 어떤 내용이지. 작은 제목이 있다. '가능한 세계들'


우주 속에서 우리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지닌 별을 찾을 수 있다는 내용인가? 제목이 코스모스니 우주에 관한 내용이리라 추측을 하고 빌렸다. 읽어야지, 당연히. 세이건이 쓴 [코스모스]와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날지 궁금해 하면서 읽기 시작했는데...


읽기 전에 저자를 보니, 칼 세이건과 함께 작업을 했던 사람, 세이건이 죽기까지 함께 살았던 사람이다. 그들은 함께 우주를 탐색하고, 과학을 대중들에게 알리려는 일을 했던 사람이다. 앤 드루얀이 [코스모스]란 제목으로 여러 번의 작업을 했음도 작가 소개에 나와 있으니 책에 대한 기대가 더 커진다.


이 기대는 감탄으로 바뀌는데는 책장을 얼마 넘기지 않아서였다. 칼 세이건에게 감동을 주었다는, 1939년 뉴욕 세계박람회장에서 아인슈타인이 했다는 말. 그 말 하나면 이 책을 정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말 하나로 과학자가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되었고.


"과학이 예술처럼 그 사명을 진실하고 온전하게 수행하려면, 대중이 과학의 성취를 그 표면적 내용뿐 아니라 더 깊은 의미까지도 이해해야 합니다." (26쪽)


이 말을 실천하는데 칼 세이건만큼 행동한 사람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앤 드루얀도 마찬가지다. 이 책 역시 이해하기 쉽게 쓰였다. 과학은 골방에서 연구를 하는 과학자들만에게 해당하지 않고 우리 인류 모두에게 필요한 학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듯이.


우주에 대한 방대한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는다. 우주를 이야기하기 위해 앤 드루얀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그리고 우리 지구가 걸어온 역사와 인물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지금 인류세라는 절명위기 시대를 겪고 있지만, 지구 역사, 우주 역사를 보면 그런 일들은 늘 있었고, 그것을 거쳐온 과정이 지금까지 우주 역사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절망만 할 필요도 없다. 많은 과학자들이 예언을 했다. 이 책에 나오는 카산드라 이야기처럼, 과학자의 예언을 믿지 않고 오히려 강하게 반대하는 이익집단들이 있었다. 하지만, 카산드라의 예언은 비극적일망정, 사실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의 예언은 실현된다.


과학자들의 예언은 예언이라기보다는 예측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에 기반한 증거를 해독해서 그 증거를 토대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들을 예측한다. 그러므로 예측은 행동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즉 예측을 통해 결과를 바꿀 수 있다는 말이다.


앤 드루얀은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우리가 자연을 완전히 경험하지 못하도록 막는 어둠의 커튼을 살짝 들추는 방법을 하나 안다. 그것은 바로 과학의 기본 규칙들이다. 어떤 발상이든 실험과 관찰로 확인해 볼 것, 시험을 통과한 발상만 받아들일 것, 통과하지 못한 발상은 버릴 것, 어디든 증거가 이끄는 대로 따라갈 것, 그리고 모든 것을 의심할 것. 권위에 대해서도. 이 규칙들만 지킨다면, 코스모스는 우리 것이다." (33쪽)


자연을, 우주를 완전히 안다는 생각을 버린다. 그저 살짝 들출 뿐이다. 그런데 살짝 들추는 방법도 쉽지는 않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증거들을 왜곡해서 받아들이는가. 또한 증거가 있음에도 권위에 굴복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 과정이 이 책에도 나와 있지만, 역사는, 코스모스의 역사는 그러한 과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옳은 길을 향해 뚜벅뚜벅 나아간 결과다. 그런 과정을 감동있게 표현하고 있기도 한데...


특히 바빌로프(4장.바빌로프)에 관한 부분에서는 지금 우리 인류가 어떠해야 할지를 생각하게 된다. 굶주림 앞에서도, 굶주려 죽어가면서도 인류를 위해 씨앗(종자)를 먹지 않았던 학자들. 바빌로프의 동료들. 


그들은 인류가 굶주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종의 다양성을 확보해야 하고, 그 종들을 통해서 인류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세계를 돌아다니면 세계의 씨앗들을 모아두었다. 전쟁으로 굶주림에 시달릴 때 그 씨앗들을 먹으면 굶어죽을 일이 없을텐데도, 그들은 미래를 위해서 굶어죽는 길을 택했다.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알기에, 그 미래를 파괴하면서 현재를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 과학자들이 기본적으로 지녀야 하는 태도 아닌가. 그것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사람들이 택해야 하는 천형과도 같은 윤리다. 그 윤리를 저버리면 이 책에서도 말하지만 (10장, 두 원자 이야기)원자폭탄을 비롯한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는데 참여한 데서 더 나아가 더욱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텔러와 같은 과학자처럼 된다.


로트블렛이라는 과학자는 전쟁이 끝나자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하는데, 그보다 더한 폭탄을 개발하는 쪽으로 나아가는텔러와 같은  과학자도 있다고 하니...참고로 아인슈타인이 마지막으로 서명한 문서가 핵개발을 반대하고 세계 평화를 위해 인류가 합심하자고 하는 버트런드 러셀이 쓰고 로트블렛이 발표한 문서였다고 한다. 


텔러라는 과학자와 아인슈타인 또는 로트블렛이라는 과학자가 걸어간 길은 다르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길은 바로 아인슈타인과 로트블렛이 걸어간 길. 즉 과학이 파멸의 길로 가지 않게 해야 하는 책임이 있음을 의식하는 과학자. 그리고 그런 과학을 깊은 의미까지 이해해야 하는 우리들이 지금 시대를 살아가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미 과학자들은 예측을 했다. 그들을 카산드라로 만들지 않을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힘을 합쳐 그들의 목소리에 반응해야 한다. 그래야만 예측을 통해 결과가 바뀔 수 있게 할 수 있다. 아주 작은 힘만으로도 결과는 엄청나게 바뀔 수 있음을 이미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앤 드루얀이 쓴 이 책, 광대한 우주 이야기가 결국 우리 인간 이야기임을, 우리 역시 우주임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멀리 별을 보아도 좋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보아도 좋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온갖 존재들을 보아도 좋다. 우리는 모두 우주니까.


그런 코스모스에서 우리는 함께 살아가고 있고, 또 함께 살아가야 하니까.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으면 앤 드루얀과 칼 세이건이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게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칼 세이건을 만날 수 있다는 행복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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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집을 읽다가 한 시를 읽으며 갑자기 권영길 전 의원이 했던 말,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란 말이 떠올랐다.


  세상이 민주화됐다. 그랬다. 형식적, 또는 절차적 민주주의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독재정권이 아니다. 우리 손으로 뽑은 정치인들이 정치를 하는 세상이다.


  우리 손으로 뽑았다? 이 말은 대의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다는 뜻이고, 우리 손으로 뽑았으니, 그들은 우리를 대변하는 정치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살림살이는 나아져야 한다. 나아졌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우리 손으로 뽑은 정치인들에게 만족감을 표할 수 있다. 그런 정치인을 뽑은 우리들 자신에게도 만족할 수가 있고.


지금 2021년에 다시 한번 이 말을 떠올려본다.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그래요, 나아졌어요. 라고 말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코로나19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니다. 꼭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이상하게 절차적 민주주의가 성숙해 가고, 이제는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당당하게 선진국이라고 말하는 이때에도 빈익빈 부익부는 착실히 진행되어 네라고 대답할 수가 없다.


우리네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는데, 나라는 선진국이다.


최저임금이 만 원도 안 되지만, 그 최저임금조차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고, 여전히 사람 대우를 받지 못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일하러 가서 집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저녁을 맞이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노동자와 더불어 자영업자도, 또 등록되지 않은, 통계에 잡히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생계에 허덕이고 있는 지금이지 않나 싶다. 


지금 읽은 시집은 오월시 동인시집 제4집이다. 2020년에 다시 발간되었는데, 원래는 1984년에 발간된 시집이었으리라. 머리말에 지난해(1983년)이라는 말이 나오니. 그러니 지금으로부터 38년 전 시다. 독재 정권을 극복하고 민주 정치를 하고 있는 지금에는 어울리지 않아야 할 시집이다. 


그런데 아니다. 아니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특히 이 시집에 나오는 시 '김용오 씨'를 보면 정말 지금 우리 사회에는 '김용오 씨'와 같은 사람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안 되지 않나. 이렇게 성실하게 살아가는 '김용오 씨'들이 잘사는 사회가 되었어야 하지 않나. 온갖 부정으로 감옥에 간 사람을 특별사면이다 뭐다 감옥에서 나오게 하려고 하는 움직임보다는, 이런' 김용오 씨들'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사회가 되었어야 하지 않나.


김용오 씨


  내가 근무하는 학교는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데 김용오 씨는 아파트와 학교를 단골로 구두닦기와 구두수선을 했다. 고향은 충남 공주인데 거기에 유년기를 보냈던 고아원이 있다고 했다. 열세 살 때 고아원을 뛰쳐나와 구두닦이 십이년 째, 장래 소망은 제화점을 차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지런히 열심히 구두를 닦았다. 하루에 보통 오십 켤레씩. 전남 해남에서 올라와 양장점에서 일하는 아가씨를 꼬였다는 그의 어린 아내는 늘상 아이를 업고 교무실에 들어와 구두를 받아갔다. 그들의 아이가 자라듯이 그들의 저축도 부쩍부쩍 늘어서, 드디어 소원성취하는 모습 가까이서 보려고 나는 잔뜩 기다렸다. 그러나 갑자기 생선 궤짝을 나르던 그의 형의 오토바이가 사람을 치이자 닦아놓은 일터를 팔아넘겨 그 자리 값을 형수에게 건네고 다른 일터를 찾아 떠났다. 

(최두석 외, 다시는 절망을 노래할 수 없다. 그림씨. 2020년. 16쪽.) 


아,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 하는 질문에 바로 이런 김용오 씨들이 '네, 나아졌어요.' 하는 세상은 정말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일텐데... 이렇게 자신의 삶을 위해 일하는 김용오 씨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또 삶터를 잃지 않고 소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좋은 세상일텐데...


지금 우리 사회, 38년 전 김용오 씨는 무엇을 하고 살고 있을까? 아니, 그 자식은 무엇을 하면서 살고 있을까? 시를 읽으며 그런 질문을 하면 마음이 먹먹해진다. 김용오 씨와 그 자식들이 생계 걱정을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가 바로 민주주의 사회 아니던가. 


민주주의는 자유만을 이야기하는 사회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날개로 나는 사회여야 한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그런 사회, 지금 우리는 살고 있는가?


권영길 전 의원이 했던 말, 지금 다시 하고 싶어진다. "살림살이들 좀 나아지셨습니까?" "네."라고 대답하고 싶은데... 정말, 그렇게 대답하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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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전하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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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다. 총 7편의 소설이 실렸는데, 다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가 현실에서 겪고 있는 일들이 소설에 담겨 있으니..,


우선 세계적으로 한국 영화, 또 한국 대중문화의 위상이 높아졌는데, 그렇게 높아진 위상 속에서도 여전히 허덕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영화의 화려한 모습 뒤에 드러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들어 있음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 물론 소설은 흥행 영화의 뒷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흥행 영화에서도 스탭들이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는 많은 언론보도를 통해서 기사화됐지만, 소설에서는 그보다는 독립영화를 소재로 삼아, 독립영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영화 100주년 기념을 하는 때에 오히려 독립영화관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현실, 독립영화를 하는 사람들이 먹고 살기 힘들어, 자신이 추구하는 영화를 할 수 없게 되는 현실. 너무도 힘든 독립영화의 현실 속에서 그럼에도 독립영화를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야기.


어쩌면 선진국에 들어섰다고 거들먹거리는 우리나라에서 그늘에 감춰져 보이지 않는 이들도 있음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몇 편이 세계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고 수많은 상도 받고 또 돈도 벌지만, 사실 영화라는 산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사람들처럼, 선진국이라는 이름 아래 알려지지 않은 먹고살기 위해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서이제가 쓴 '0%를 향하여'는 영화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대상을 받은 전하영이 쓴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소설은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우선 '조명등'이라는 말에서 남들 눈을 의식하는 삶이라는 생각을 한다. '많은 시간'에서는 그렇게 사람들이 보내야만 했던 시간. 자신을 찾기 위한 시간을 생각하고, '보냈다'는 말에서 과거형이네, 이제는 자신의 삶을, 남의 눈이 아닌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삶을 살겠지 하는 생각을 하는데...


소설의 결말 부분은 아직도 '조명등 아래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어쩌면 내 삶만이 아니라 남들의 삶도 '조명등 아래서' 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사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사회적 관계를 떠나기 힘든 존재이기에 어느 정도는 남을 의식하고 살 수밖에 없다. 남을 완전히 의식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다만, 그 과정을 깨닫고 서서히 자신과 남의 관계에서 주체성을 찾아가야 한다. 그것이 성장이다. 소설은 그 점을 보여주고 있지만, 또한 그 성장이 얼마나 힘든지도 보여주고 있다. 


김지연이 쓴 '사랑하는 일'과 한정현이 쓴 '우리의 소원은 과학 소년'은 성소수자를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지만 내용은 전혀 다르다. 성소수자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다.


좀더 오랜 시간이 걸려야 과거의 이야기로, 그때는 그랬지라는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현재진행형이기에 젊은 작가들 소설에서 자주 다뤄지는 소재다. 소설 소재로 자주 다뤄진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성소수자 문제에서 우리 사회가 한발짝 더 나아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지만, 한정현의 소설에도 나오고 있듯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물론 김지연의 소설에서는 핍박받는 성소수자의 모습보다는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성소수자가 나온다. 세상이 많이 변했는데, 그러한 시대에 따른 성소수자의 삶을 잘 보여주는, 그럼에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 한정현이 쓴 소설이다. 한정현의 소설은 그래서 울림이 있다. 


여기에 자식 교육 문제도 만만치 않다. 박서련이 쓴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이라는 소설을 보면 참 씁쓸하다. 이 소설에 나오는 엄마는 문제적 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회를 가장 잘 대변하고 있는 인물.


모든 것을 자식에게 바치는, 자식이 잘 되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일을 하는 그런 사람. 하지만, 그런 엄마에게 엄마가 욕으로 자리매김된 게임 현실은 충격일 수밖에 없다. 자식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한다고 여기던 엄마, 그런 '엄마'라는 말이 욕이, 그것도 심한 욕이 될 수밖에 없는 모습.


이 소설들에서 다룬 현실이 소설 속이라고? 허구라고?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음을 젊은작가들이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젊은작가수상집은 우리 사회가 지닌 모습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주고 있다. 소설은 비판하기 위해서, 무엇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기보다는 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 사람들이 살아가는, 특히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세계를 보면서 우리는 내가 살아가는 세상,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영화를 보듯이, 또는 거울을 보듯이 보게 된다. 젊은작가상수상작품집은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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