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이슈]를 보면 젊은이의 감성을 느낄 수 있다. 젊은이들이 많이 사서 읽는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새로운 감성이 [빅이슈]에 담겨 있다.


  그래서 [빅이슈]를 읽으면 젊어지는 느낌, 새로운 세대와 소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기도 한다.


  표지 인물로 선정되는 사람들이 아는 사람도 있지만 모르는 사람들도 꽤 많고, 그 표지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니, 여러모로 새로움을 알게 되는 이로움을 얻게 된다.


  이번호는 특집이 "집으로의 휴가, 책장 파먹기"다. 특집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 코로나19가 더 기승을 부리고 있어서 이제 여행가기도 민망해지곤 한다. 그렇다고 집에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인데...


예전에 비해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연휴가 되어도 제발 이동을 자제해 달라는 정부의 호소에 나 몰라라 하고 여행을 떠나기도 좀 그렇고.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 집에서 그동안 못했던 일들을 할 수가 있다. 집정리를 할 수도 있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죄책감 없이 푹 쉴 수도 있고, 못 읽었던 또는 안 읽었던 책을 읽을 수도 있다.


그러니 '책장 파먹기'란 제목 마음에 든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 중에 안 읽은 책 또는 못 읽은 책이 꽤 있다. 없을 수가 없다. 그때는 읽어야지 하고 샀는데, 어찌어찌 하다보니 읽지 못하고 그냥 책장에 머무르게 한 책들.


시간이 많을 때 읽는 일, 좋은 일이다. 하지만 [빅이슈]의 특집처럼 이번 여름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음에도 나는 '책장 파먹기'를 하지 못했다. 오히려 '책장 비우기'를 했다. 그동안 책장을 채우고 있던 많은 책들, 내 과거 나와 함께 했던 책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책장에 자리를 잡지 못해 밖으로 나가 내 눈에 보이지 않던 책들, 책장의 칸이 아니라 위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책들.


정리해야지. 책장을 좀 여유롭게 만들어야지. 이번 여름에 내가 한 일이다. 어떤 책부터 비워야 하나? 어떤 책들 순으로 내 곁을 떠나게 하나?


어려운 일이다. 이 책들이 올 때 순서와는 상관없이 이제 내 관심도에 따라 떠나게 되었다. 그럼에도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책들, 이제는 활자체가 변해서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책들부터 정리한다. (역시 이런 책들은 내게 가장 먼저 온 책들 중 하나다. 책에 쓰인 활자들이 많이도 변했음을, 책을 시대 순으로 보면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또 한때는 명쾌한 논조로 우리 사회의 명암을 잘 드러내주었지만 몇 십 년이 지나 시류에 맞지 않게 된 책들도 떠나야 한다. (시사에 관한 책들은, 역사를 공부하고, 기록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하지 않는 한, 시간이 흐르면 시사성을 많이 읽게 된다. 그래서 그때그때 헌책방에서 다른 사람들을 빠른 시간 안에 만나지 않으면 나중에 다른 사람을 만나기도 힘들게 된다)


그렇게 한 권 한 권 빼서 쌓아두고 한꺼번에 집 밖으로 내보낸다. 그렇게 책들이 떠나가고 꽉꽉 차 있던 책장은 여유로운 공간이 생겼다. 다른 책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비워야 채운다고, 책장 비우기를 실행한 여름, 한결 넉넉해진 책장을 보면서 새로운 책을 맞이할 궁리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책들만큼 이제 이 책장의 넉넉함을 유지하겠다는 결심을 해본다.


이렇듯 [빅이슈] 257호를 읽으면서 책장이라는 공통점이 있음에 기쁜 마음이 들었다. 15일 간격으로 읽을 수 있는 [빅이슈]를 기대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나와의 공통점 찾기.


하여 이번호에서는 새로운 감수성을 느끼면서 또한 나와 공통점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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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8-30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장 파먹기!!!
 
사자와 수다
전김해 지음 / 지식과감성# / 2021년 3월
평점 :
절판


그림책이라고 할 수도 있다. 우화집이라고 할 수도 있고. 하지만 어떤 특정 장르로 국한시킬 수 없는 책이다. 아주 짧은 이야기들이 그림과 함께 실려 있는데, 그 짧음 속에 깊음이 담겨 있다. 짧은 말들 속에서 다른 말들을 계속 덧불일수가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어린이들이 보기보다는 어느 정도 경험을 쌓고 책을 읽고 생각을 한 사람들이 읽어야 좋다. 아니면 아무 편견없는 어린이들이 읽고 자기 생각을 그냥 풀어내도 좋고.


이야기에 이야기를, 이야기에 생각을 붙여넣을수록 더 많은 내용들이 이 책에 담겨 있게 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자를 좋아한다고 한다. 사자를 '지루한 쓸쓸함. 삶의 권태, 허무를 읽는다. 그래서 모든 가졌음에도 여전히 슬픈 인간의 모습을 닮아버린 사자는 내 가슴에 아련한 연민으로 남아있다. 하여, 사자를 그리는 일은 나와 세상을 안아주고 위로하는 작업 같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사자에 더해 수다도 좋아한다고 한다. '나는 말수다 대신 글수다로 풀어낸다. 나의 머릿속에서 지글거리는 수다를 풀어내면서 '볼진의 나'를 알아간다'고.


사자와 수다. 전혀 어울리지 않게 보이는 대상들이 하나로 엮여 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동물의 왕인 사자는 다른 존재와 이야기를 많이 못할 가능성이 많다. 높은 자리에 있는 존재는 그만큼 고독하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수많은 대화를 했을 수도 있다. 사자는 자연스럽게 나오는 수다를 그리워했을 수도 있다.


수다는 마음을 풀어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말들. 이 말들 속에는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진리가 있다. 옛날 여인들이 우물가나 빨래터에서 수다를 떨면서 진실을 뱉어내고 마음을 치유했듯이.


이 책을 읽고 나서 정여울이 쓴 [소리내어 읽는 즐거움] 287-289쪽에 나오는 내용이 떠올랐다. 이순신 장군이 좌수사로 취임하고 나서 백성들에게 자유롭게 먹고 마시고 이야기할 공간을 마련해 주고, 또 자신도 그들과 어울렸다는 내용.


처음엔 어려워하던 백성들이 이순신 장군을 편하게 대하고, 이런저런 자신들이 경험한 이야기들을 수다로 풀어냈고, 그 수다에서는 바다에 관한 내용 중에 물길에 대한 내용이 많이 있어, 그것을 귀담아 들은 이순신 장군이 작전을 펼칠 때 활용했다는 내용. 


이런 내용과 더불어 창의성을 다루고 있는 책들에서도 창의적인 생각은 진지한 회의에서보다는 커피를 마시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더 많이 나온다는 내용도 있으니...


이렇게 수다는 유용한 진실을 담고 있다. 그래서 예전 왕들이 평복 차림을 하고 시중에 나가 백성들의 말이나 삶을 살피곤 하지 않았던가. 이만큼 수다는 그냥 버리는 말들이 아니라 새겨들어야 할 말을 담고 있다.


그러니 '사자와 수다'라는 제목, 안 어울릴 것 같은데 잘 어울린다. 이 책에 있는 글들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하지만, 그 중에서 특히 '슬픔이의 슬픔'이라는 글이 마음에 와 닿았다.



슬픔을 멀리해야 한다고 흔히 생각하지만, 슬픔 없이는 기쁨도 없음을 생각하게 하는데, 그래서 우리는 슬픔을 멀리하지 말고 슬픔을 받아들이고 그것과 함께 살아가야 다음에 올 존재들을 맞이할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이 글은 이렇게 끝나고 있다. 


'들어갈 때를 보며 숨을 고르는 큰 슬픔이 뒤로 / 겸손이, 뉘우침이와 돌이킴이, 감사함이 같은 기쁨이들도 / 종종거리며 들어설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작은 슬픔이 들이 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만이'들이 들어가 '큰 슬픔이'가 들어가게 되면 산산조각이 나 버린다고 한다. 작은 슬픔이들을 받아들였을 때 오만이가 들어설 자리는 없고, 그러면 혹 큰 슬픔이가 오더라도 곧이어 올 겸손이, 뉘우침이, 돌이킴이, 감사함이들을 맞이할 수 있다고 한다.


짧은 글이지만 결코 짧지 않다. 이렇게 짧은 글을 통해서 우리 인생의 깊고 깊은 면들을 깨우치게 하는 내용이 이 책에는 많다. 한 편 한 편을 가지고 여러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다면, 어렵게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내용이 아니라 그냥 이 책에 나온 글 한편을 가지고 수다를 떨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덧글


이 책은 선물로 받았다. 늘 책을 선물받는 일은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고마운 일이다. 덕분에 잘 읽었고,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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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나선 사람들이 상대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에 자신과 경쟁을 하는 상대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듯이 함부로 말을 한다. 함부로... 정말로 보통 사람들은 입에 담지 않을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귀를 씻어도 씻어도 그 말들은 귀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왜? 말들이 얼마나 더러운지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정치를 한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 씻어서 밖으로 내보낼 틈도 없이 또다른 더러운 말들이 들어오니까.


  겨 묻은 개가 있나 싶을 정도로 똥 묻은 개들이 네 똥에서 냄새난다고 짖어대는 꼴이다. 표현이 개들에게 미안할 정도다. 아마, 개들은 네게서 사람 냄새난다 또는 사람처럼 욕한다, 사람처럼 행동한다 등을 욕으로 사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경쟁자이기 때문에 무조건 낮추고 비방해서는 안 된다. 경쟁자이기에 더욱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자신과 엇비슷하기 때문에 경쟁자가 되었으니, 거의 대등한 존재도 예의로 대하지 않으면 못하다고 여기는 사람을 대할 때는 예의를 생각도 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경쟁자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자신과 경쟁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예의를 갖출 수 있게 된다. 


사람이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없는데 이들은 마치 경선 과정이 전부인 양 칼이 되는 말들을 쏟아붓고 있다. 영화 [신기전]에서 화살이 로켓처럼 날아가듯, 칼이 된 말들이 상대를 향해 수없이 날아가고 있다. 여기에는 어떠한 예의도 없다. 


아주 작은 예의도 없이 그렇게 정치판이 굴러가는데, 그와 반대로 우리에게는 예의가 필요하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들과의 관계에서는 예의가 필요하다. 예의란 관계를 잘 맺게 해주는 기본 요소이기 때문이니.


그런 점에서 이 시집에 실린 문성해의 시... 요즘 정치인들이 꼭 읽어봤으면 하는 시다. 정치를 하려면 시인의 감성을 지녀야 하는데, 이들은 상대를 어떻게든 누르고자 하는 투사의 감성만 지니고 있으니... 그것도 미래는 보지도 않고 오직 현재, 내 앞에 있는 상대를 이겨내는 데만 관심이 있으니... 예의란 이들에게 승리하기 전까지는 꺼내지 않을 그런 판도라의 상자 속에 가둬두어야 할 존재일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들이 과연 이 시를 읽으며 자신의 행동, 자신들이 뱉어낸 말들에 대해서, 또 상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볼까 하는 의문은 있지만, 그래도... 문해력이 많이 떨어졌다고 청소년들을 비판하지 말고 자신들부터 이 시를 읽고 의미를 깨우쳤으면 한다.

   

   조그만 예의

- 문성해


새벽에 깨어 찐 고구마를 먹으며 생각한다

이 빨갛고 뾰족한 끝이 먼 어둠을 뚫고 횡단한 드릴이었다고

그 끝에 그만이 켤 수 있는 오 촉의 등이 있다고

이 팍팍하고 하얀 살이

검은 흙을 밀어내며 일군 누군가의 평생 살림이었다고


이것을 캐낸 자리의 깊은 우묵함과

뻥 뚫린 가슴과

술렁거리며 그 자리로 흘러내릴 흙들도 생각한다


그리하여

이 대책 없이 땅만 파내려 가던 붉은 옹고집을

단숨에 불과 열로 익혀내는 건

어쩐지 좀 너무하다고


그래서 이것은

가슴을 퍽퍽 치고 먹어야 하는 게 조그만 예의라고 생각한다


허연 외, 북회귀선에서 온 소포 (2014 현대문학상수상시집, 현대문학 2013년. 65쪽)


고구마에게도 이런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그것이 '조그만 예의'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는데, 과연 우리는 다른 존재들에게 예의를 지키고 있는가.


예의란 상대를 존중하는 일. 그렇게 내가 먼저 상대를 존중해야 상대도 나를 존중하지 않겠는가. 관계에서 일방은 없다. 쌍방이 있을 뿐이다.


최근 정치판에서 난무하는 비방, 욕설, 상대를 깎아내리는 폄훼 등등을 보면서 이 시를 생각한다. 정말 우리 '조그만 예의'를 지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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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내어 읽는 즐거움 - 삶을 바꾸는 우리말 낭독의 힘
정여울 지음 / 홍익 / 2016년 10월
평점 :
품절


글을 눈으로만 읽지 말자. 입으로 읽자. 소리를 내어 보자. 물론 많은 사람들이 있는 데서는 그렇게 하기 힘들겠지만,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면 그 소리를 내가 다시 듣게 된다.


눈으로 보고, 입으로 소리내고, 귀로 듣고, 이 세 가지 일이 거의 동시에 일어남으로써 뇌는 더 활발하게 작동한다. 글에 들어 있는 의미들을 생각하게 된다.


의미를 생각하기 전에 어쩌면 입에 착착 감기는 소리의 울림에 더 마음이 편해질지도 모른다. 특히 시를 읽을 때는 말의 의미보다는 말의 소리에 더 마음이 끌릴 때가 있다. 운율이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부드럽게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들을 듣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런 소리의 울림이 시에만 머물지 않는다. 산문도 마찬가지다. 좋은 산문은 읽기에 좋다. 자연스레 읽힌다. 소리를 내어 읽어도 자연스럽다. 예전 서당에서 학동들이 글을 읽는 소리를 듣는 즐거움을 생각해보면 된다. 


옛날 학동들은 시만이 아니라 모든 글을 소리내어 읽었으니 말이다. 정여울이 쓴 이 책 [소리내어 읽는 즐거움]을 소리내어 읽었으면 좋았으련만... 어떤 글은 소리내어 읽기도 했지만, 대부분 글들은 그냥 속으로 읽었으니...


책에서 권하고 있는 방향과 다른 방식으로 읽다니... 그러고보니 책을 소리내어 읽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창시절에 국어시간, 시를 함께 낭송하던 때, 교사에게 지명당해 교과서를 읽을 수밖에 없었던 때, 그때 이후로 소리를 내어 읽기보다는 속으로 읽는, 소리를 밖으로 내지 않는 읽기를 하면서 지내왔다.


의미파악에 주력하는 읽기. 말의 아름다움, 문자는 소리를 표기한 기호인데, 그 기호를 그냥 기호로 받아들이고, 기호가 지니고 있는 소리를 무시한 읽기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제 가끔은 소리내어 읽으려고 한다.


소리내어 읽으면 속으로 읽을 때와는 다른 느낌을 받을 테니까. 이 책은 소리내어 읽는 즐거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 책은 이동을 할 때, 버스 안이나 지하철 안에서 읽기 딱 좋다. 물론 저자가 원하는 대로 소리내어 읽을 수는 없겠지만, 그냥 읽어도 이동하는 시간에 쫓기듯 읽을 필요가 없이, 맘에 드는 글을 한편 한편 읽어가면 되니까...


그렇게 읽으면, 비록 소리내어 읽지 않더라도 마음이 편해질테니까. 좋은 글을 만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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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읽을 때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존재들을 이어주는 표현을 만나게 된다. 그런 구절을 만나면 와! 하는 감탄사와 함께, 시의 내용이 아니라, 그 표현이 마음에 자리잡는다.


  가령 서정주 시 '푸르른 날'에 나오는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라는 표현... 단풍을 초록이 지쳤다고 표현할 수 있다니... 


  여기에 다양한 해석을 필요로 하는 이육사 시 '절정'에 나오는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는 구절.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시 전체 내용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특정한 구절때문에도 그 시를 중요하게 여기는 경우가 있다.


  그래도 도무지 연결이 되지 않는 말들이 나열될 때,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을 때, 이런 말을 어디서 찾아야 하지 할 때, 시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한다. 


시가 이렇게 시인에게만 또 몇몇 비평가들에게만 통용되면 되는 존재일까 하는 생각. 시는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으면 안 된다. 시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하지만 시를 사람들에게 다가가게 하는 역할은 시인이 해야 한다.


시인, 그러니 시인은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존재, 또 인식하지 못했던 사실들을 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알려준다. 시적 표현을 통해서. 그렇다면 시적 표현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몇 개의 징검다리가 있어야 한다.


징검다리 없이 강 건너편에 그냥 이것이 바로 시다라고 하면 시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배를 타고 건널 수 있는 사람 몇 외에는 없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강 건너에서 멀찍이 떨어져 시는 우리와는 거리가 있는, 우리가 다가갈 수 없는 존재구나 하고 포기하게 된다. 그러면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있지 못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히게 된다.


문보영 시집을 산 이유는 '김수영 문학상 수상시집'이라는 제목이 있어서다. 김수영이 누군가? 시는 온몸으로 써 나가야 한다고 외쳤던 사람 아닌가. 자신만의 세계가 아니라 그 세계를 사람들에게 가져온 시인 아니던가. 그러니 그는 '폭포'를 쓰고 '풀'을 쓰고,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에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고 절규하지 않았는가. 


조그마한 일... 그래서 시인은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고.(인터넷을 찾아보면 적으냐와 작으냐가 혼재되어 있다. 민음사에서 나온 김수영 전집(시)에 보면 적으냐로 나와 있으니... 작다는 개념과 적다는 개념이 차이를 보이는데,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시인은 언어를 통해 낯설게 하기를 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시인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살았던 시인 아닌가. 그런 시인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받았으면 이 시집 역시 무엇인가 우리에게 생각거리를 제공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기대를 한다.


이 기대는 시인의 말에서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콘페니우르겐의 임신 기간은 / 사십 년으로 / 지구에서 가장 길다 그런데 / 콘페니우르겐의 평균수명이 / 이십칠 년인 것은 / 하나의 수수께끼다 (2017년 겨울 / 문보영)


콘페니우르겐... 동물이다. 임신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그런데 찾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만들어낸 동물인데...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낸 동물인지 알 수가 없다. 시인의 말을 따라가보면 수명보다 긴 임신을 한다. 어떻게 출생을 하지? 조산? 그렇다면 콘페니우르겐이 '시'라면 모든 시는 자신의 수명 기간보다도 더 긴 세월을 지내다 사람들 곁으로 와야 하는데... 결국 모든 시는 '조산'이다. 그러니 그 '조산된' 시를 돌보고 보살펴서 성숙하게 하는 역할은 다른 사람들이 해야 한다? 


40년을 지내야 온전하게 출생할 수 있는 콘페니우르겐이 멸종하지 않고 종족을 유지하려면 조산밖에는 없다. 조산한 콘페니우르겐이 죽지 않고 살아가게 하려면 다른 존재들이 보살펴야 한다. 그것도 기를 쓰고. 그만큼 시는 간단하지 않다. 어렵다. 살리기 어렵다. 그렇게 봐야 하나? 나, 참...


그래서 이 시집에 있는 '멀리서 온 책'을 생각한다. 그냥 내쳐버리고 싶은 생각. 하지만 아무리 내치려고 해도 없앨 수가 없다. 그렇게 꾸준히 살아남는다. 조산해서 도무지 어떤 존재인지 알 수가 없어서 알게 되기까지 특별한 보살핌을 줘야 하는데, 그 과정이 쉽지 않다. '멀리서 온 책'을 보자. 그냥 이 시를 읽으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시들이 어떻게 되는지, 그럼에도 왜 시들이 살아남는지, 마치 시인의 말에서 나온 '콘페니우르겐'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멀리서 온 책


  책을 펼치자 문장들이 이중 매듭 만들기에 몰두하고 있다. 끊임없이 몸을 비비 꼬고 있다. 무의미한 움직임만을 수년간 반복하는, 바위에 깔린 벌레들처럼. 문장들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느라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다. 주변을 신경 쓸 재간도 없이, 미래를 도모하지도 않고, 오직 한 자리에서 홈을 파며, 어쨌뜬, 바닥에 흔적을 내고, 그것을 위해 몸을 꼴 대로 꼬며 깊어지는 동작만을 반복하고 있다.


  어린이는 책을 가져다준 어린이가 너무 멀리서 온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한다. 어린이는 이런 책은 필요치 않다. 어린이는 읽을 수 있는 책이 필요하다. 나는 이런 책을 읽었다, 고 외칠 수 있는 책이. 너무 멀리서 온 책은 세상에 없어도 된다고.


  멀리서 온 어린이는 모든 문장이 동일해 보이는, 똑같은 수준으로 몸을 비비 꼬고 있는 문장들 중 하나를 흰 손가락으로 콕 짚으며, 나는 이 문장이 마음에 든다, 너는? 하고 묻는다. 그래, 이 문장은 다른 문장에 비해 더 오랜 기간 외롭게 매듭을 만들고 있으며 고유한 방식으로 몸을 꼬고 있는 것 같다, 고 어린이는 동조의 뜻을 가장한다.


  어린이와 멀리서 온 어린이는 저녁놀이 비치는 창가에서 함께 책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사이 석양빛이 몸을 꼬는 벌레들의 잿빛 줄을 붉게 적셨다. 둘은 무릎을 꼭 붙이고, 책을 들여다본다. 어린이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책과 멀리서 온 어린이를 창밖으로 던진다.


  나무로 된 현관문을 잠근다. 더 잠글 것이 필요해 머릿속으로 몇 개의 문을 상상해 낸다. 문을 하나하나 잠근다. 아무도 살지 않는 섬의, 아무도 모르는 나무 그늘에 뜻 모를 바위가 숨 쉬고 있으며, 그 바위는, 셀 때마다 다리의 개수가 달라지는 검정 벌레들을 키운다. 어린이는 그것을 잊기 위해 더 많은 문을 닫는다. 두개골의 작은 틈 사이, 불편하게 나앉은 바위 위로 벌레가 모습을 드러낸다.


문보영, 책기둥, 민음사. 2018년 4쇄. 134-135쪽


이상하게 시인의 말에 나오는 '콘페니우르겐'이 이 시에서 '멀리서 온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버리고 싶은, 그러나 아무리 버리려고 해도 이미 내 뇌속에 자리를 잡은, 그런 존재... '콘페니우르겐'이나 '멀리서 온 책'이나 모두 '시'로 바꾸어도 말이 성립된다. 


문보영 시집 [책기둥]을 통해서 알지 못하는, 알 수 없는 '콘페니우르겐들'을 만나는 일도 한번쯤은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아직까지 나는 이런 시를 이해하려고 하면 김수영 말처럼 '얼마큼 적으냐'는 한탄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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