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계장 이야기 - 63세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노동 일지 우리시대의 논리 27
조정진 지음 / 후마니타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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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임계장'은 소수의 사람에게만 해당할까?


'임계장'은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대다수의 직장은 정년이 있다. 그 정년이 57세부터 65세까지 다양하지만, 65세 정년인 직장은 거의 없다. 대부분 60세가 되면 정년이 되어 직장에서 나와야 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지금 우리 사회에서 60세면 편안한 노후생활을 할 수 있는 나이인가? 직장 생활을 30년 넘게 한 사람들이라고 그 다음부터 돈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을까? 산수를 해보자. 굳이 수학까지 갈 필요도 없으니.


지금 60대들은 결혼을 현재 젊은 세대들보다는 일찍 했을테니 남자로 계산하면 군대 갔다 오고, 가장 빨리 취업을 해도 20세 전후다. 그러니 20세에 취업했다고 하자. 그러면 40년을 근무한 셈이고, 결혼은 25세에 했다고 하자. 


그가 곧 아이를 낳았다면 60세가 되었을 때 큰 아이는 35세가 되어 있을테다. 그리고 둘째를 2년 터울로 낳았다고 하면 둘째 나이는 33세. 


지금 우리나라에서 35세와 33세는 운이 좋으면 직장을 갖고 부모에게 기대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퇴직을 한 다음에는 온전히 부모는 자신들을 위해서 살 수 있을텐데, 과연 그런가?


여기에 변수가 있다. 부모가 퇴직할 당시 빚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집을 얻기 위해 대부분은 빚을 지니고 있다. 자식들 대학에 보내드라 또다른 빚이 있고. 직장을 그만두는 순간, 신용이 없어져 이 책에서 말하듯이 빚을 갚으라는 독촉에 시달린다. 갚지 않으면 추심 들어온다고 한다. 그러니 그간 모아두었던 적금, 보험을 해지하고 빚을 갚아야 한다.


또 늦게 둔 자식이 있으면 그 자식 학비로 마련해야 한다. 결국 직장에서 정년을 하고 편안한 노후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빚이 없는 사람, 자식들이 모두 자립해서 살고 있는 사람들로 한정된다.


대다수의 부모들은 정년을 하고 나면 살 길이 막막해진다. 그때부터 갚아야 할 빚과 자식들을 부양해야 하는 돈이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러니 그들은 다시 직장을 찾아야 한다.


누군가는 말한다. 정년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고. 그런 사람들이 많은가? 이 책을 쓴 사람은 공기업에서 37년을 근무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는 제2의 인생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을 살아가야 했다. 살기 위해서.


이 사람을 보아도 '임계장'은 극소수에 해당하지 않는다. 많은 정년퇴직을 한 사람들에게 해당한다. 그들은 살기 위해서 직장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들을 필요로 하는 직장은 대부분 계약직이고, 하고자 하는 사람이 늘 대기하고 있어서 해고하기도 편한 그런 곳이다.


아파드 경비원, 빌딩 관리인 등등이 바로 그런 곳이다. 많은 정년 퇴직자들이 이런 일을 하고 있고, 또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그러니 '임계장'은 결코 소수가 아니다.


3D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암계장'들이 하는 일은 우리 생활에서 꼭 필요하지만 남들 눈에 띠면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일들이다. 그들은 소위 3D라 불리는 일을 한다. 힘들고 어렵고 더러운 일들. 그 노동으로 다른 사람들은 편하게 지낸다.


그러면 고마워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일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그 책임을 이들에게 묻는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넘어져도 경비원 책임, 자기 차에 흠집이 생겨도 경비원 책임, 쓰레기가 넘쳐도 경비원 책임 등등...


이 책을 읽다보면 이런 아파트 주민들이 있나 싶을 정도다. 그런데 있다. 오죽하면 아파트 입주민의 갑질로 목숨을 끊는 경비원들이 나오겠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편리하게 사는 대가가 바로 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을 한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이런 일들은 잘하면 표가 안 나고, 못하면 바로 표가 나는, 그래서 지적을 하기 쉽고, 주민들 입장에서는 큰소리 치기 쉬운 일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는 않지만, 정말 선량한 사람들도 많지만, 극소수의 사람이 갑질을 한다해도 그 여파는 상당하다. 사람을 그렇게 대하면 안 되는데, 경비원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그런 아파트라니... 지금은 좀 나아졌으려나? 아니지, 아직도 보이지 않게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이 책에서 저자가 겪은 일을 알게모르게 저지르고 있지 않나.


'공부 안하면 저 사람처럼 된다.' 이게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말이다. 이런 말을 듣고 자란 자식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들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서 험한 일을 하는 사람을 존중하겠는가. 그러니 보이지 않는 노동에 대한 존중. 또 자신들이 왜 깨끗하고 편리한 환경에서 지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

 

태일의 외침은 여전히


이 책을 읽으면서 '임계장'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켜라'고 외치며 온몸을 불사른 지 50년이 되었는데도 노동자들의 조건은,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건은 여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회 이곳저곳에서 전태일의 외침이 계속되고 있는데도, 아직도 전태일의 소망이 실현되지 않고 있다. 


여전히 아침에 집을 나서서 저녁에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많은 현실. 그런 현실 속에서도 더욱 힘든 삶을 지니는 '임계장'들. 또 이런 사람들을 자기들끼리 감시하게 만드는 관리자들.


아프면 치료해주지 않고 곧바로 해고하는 그런 직장들. 대기업이라고 들어가도 대기업 직원이 아닌 용역업체 직원으로 들어가게 되는 현실. 일은 대기업이 시키면서도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용역회사에 떠넘기고, 용역회사는 노동자 개인에게 전가하는 그런 일들이 여전히 비일비재하고 있으니.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그러니 우리 사회는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는 한없이 약한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빌딩 관리인이 되었을 때 본부장 차는 지정 주차 구역이 있고, 이를 잘못 알고 다른 차를 주차시켰을 때 난리가 나는 현실.


또한 경비원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경비반장에게 맡기고, 그에게 정년 연장과 근무에서 특권을 부여해 그로 하여금 회사에 충성하게 만드는 그런 노동 관리 실태.


신영복 선생이 그랬던가. 감옥에 있을 때 한여름 더위에는 바로 옆에 있는 감방 동료들이 미워진다고, 어쩔 수 없이 붙어자야 하는 그들에게 한여름 더위는 견딜 수 없는 일인데 그 화살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가기 쉽다고 했다.


경비반장 역시 자신이 살기 위해서 그런 행동을 하겠지만, 자신과 같은 처지의 경비원들을 감시하고 회사에 신고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 이는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모습이다. 그리고 이 사회는 그렇게 하기를 강요 아닌 강요를 하고 있다.


이래서는 안된다. 환경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은 조직이 되지 않았고, 또 조직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아직도 갈 길은 멀지만.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사회


하지만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은 서로 도울 때도 많다. 휴가를 가기 위해서는 대체 근무자를 구해야 할 때 함께 구해주는 모습이나, 감기에 걸리면 동료에게 옮길까봐 홀로 나가 자는 고속터미널 관리인들. 


이런 모습들. 또 아파트 경비원들에게 친절한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 자신의 마음을 담은 물건을 주는 사람들.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들도 있지만, 그들이 그렇게 하기 전에 먼저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고속터미널의 상무라는 사람, 핀셋으로 이쑤시개까지 주우면서 관리원들에게 보여주는 모습, 자 이 모습이 어떤가? 


고속터미널 환경 관리를 관리원들이 하기 힘드니까 도와주는 모습으로 보이는가? 아니, 그 모습을 본 관리소 직원들은 관리원들을 다그친다. 상무님이 왜 저런 일을 해야 하냐고? 이는 강자가 약자를 배려하는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약자에게 일을 더 시키는 모습이다.


오죽하면 상무는 관리인들이 화단에서 이쑤시개를 찾아 청소하는 관리인들을 보면서도 하지 말라는 소리를 한번도 하지 않았을까. 이는 함께 사는 사회가 아니다.


강자는 약자를 편들어 주어야 한다. 약자가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좋은 사회는 약자에게 약하고, 강자에게 강한, 그래서 약자들이 삶을 살아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사회다. 


그리고 그런 사회가 우리 모두 함께 살아가는 사회다. 우리도 '임계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임계장'을 우리만큼 존중받아야 할 존재로 여기는 사회가 바로 그런 사회다.


이 책을 참 짠했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저녁이 있는 삶이 아직도 없는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이 있는 삶. 이를 더 넓게 확장하면 노년이 있는 삶이다. '임계장'들이라고 불리지 않고 '제2, 제3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가 되어야 젊은이들도 행복하지 않을까 한다.


'임계장'이 젊은이들의 미래가 아니라 '제2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 젊은이들의 미래가 되어야, 그런 사회가 함께 하는 사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함께 살기 위해, 더불어 행복해지기 위해. 내 삶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기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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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공녀 강주룡 - 제2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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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이유는 많겠지만, 노동자들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이유는 낮은 곳에 있으면 그들의 주장을 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들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주장이 묻혀버리고 만다. 그들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왜 주장하는지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니 자기 주장을 알리기 위해서는 높은 곳으로 가야 한다.


가장 주목받지 못했던 삶을 주목받는 삶을 바꾸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더라도.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버릴 각오를 하게 되는 노동자들. 식민지 시대 노동자만이 아니라 지금 노동자들도 그런 경우가 많다.


체공녀 강주룡. 강주룡이라는 이름은 을밀대와 더불어 내 머리에 각인되어 있다. 을밀대 위에 올라가 자기 주장을 펼친 노동자. 그리고 그 강주룡이라는 이름과 지금 우리 시대의 김진숙이 겹쳐진다. 을밀대 위와 타워크레인 위.


그럼에도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다 얻었는가. 아니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그것도 불법이라는, 경찰의 탄압을 받으면서.


소설은 강주룡이 을밀대에 올라 있는 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가 거기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시간 순서대로 서술해 간다. 간도에서의 삶, 결혼, 남편의 죽음, 조선으로 귀환, 다시 시집을 보내려는(딸을 팔려는) 가족으로부터 도망, 평양에서 고무공장 직공으로 살아가는 모습, 파업에 참여, 을밀대에 오르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냥 읽어도 술술 읽힌다. 그러면서 한 여성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여성으로 식민지를 살아가는 데에는 남자들보다 더 많은 질곡이 있음을 강주룡의 삶을 통해 알게 된다.


원하지 않는 결혼, 그 다음에 독립군에 참여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의 구설수에 오르게 되는 모습은 지금도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이다.


이 소설에서 강주룡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는지를 역사적으로 사실관계를 따지는 일은 의미가 없다. 이 작품은 소설이니까. 그런데 이 소설에서 표현된 강주룡의 모습에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쓴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가 떠오르니, 전쟁은 확실히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같은 독립운동을 하더라도 여자에게 주어진 역할, 또는 여자를 바라보는 시각은 전근대적, 가부장적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요즘 군대내 성폭력 사건을 보면 그런 일이 전근대적 사건이라고만은 할 수가 없다.


동등한 존재로 대하지 않고 자신들과는 다른 존재, 그것도 자신들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태도가 이 소설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데, 이 점은 강주룡이 평양에 와서 노동운동을 하게 될 때에 겪게 되는 일과도 겹치게 된다.


노동운동을 한답시고 토론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대부분 남자들인데, 이들이 콜론타이 저작을 읽고 토론을 한다. 정작 여기에 참석한 여성은 강주룡 혼자 뿐. 이때 강주룡이 그들에게 한 말은 두고두고 생각할 만하다. (201-202쪽)


굳이 페미니즘이라는 잣대를 들이댈 필요도 없다. 독립운동을 하건, 노동운동을 하건 거기에 남녀 구분이 없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음을 소설은 비켜가지 않는다. 오히려 정면으로 다루면서 강주룡을 통해 지금 너희들은 어떠냐고 묻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소설은 한 인간으로서, 노동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으로 성장해가는 강주룡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강주룡의 외침이 허공 중에 사라지지 않게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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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학적인 표현이 제법 많은 시집인데... 


  가령 소금쟁이를 '저수지의 옷을 수선하는 수선공'(92쪽)이라고 표현한다던지, '쥐의 여행'라는 시에서 고스톱 치는 장면을 '아버쥐, 똥 먹어/아버쥐, 그냥 죽어/아버쥐, 쌌네'라는 표현에서 아버지 대신 아버쥐라고 한 표현도 재미있는데, 다음에 나오는 구절들, '아버쥐, 인분 드시죠/아버쥐, 그만 작고하시지요/아버쥐! 사정하셨습니다'(85쪽)라는 표현에서는 안 웃을 수가 없다.


  부모 자식 간에도 상(성)스러운 말이 오가는 고스톱 치기에서, 쥐가 등장하고, 그 쥐를 통해서 해학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이런 재미 있는 표현들이 많이 나오는 시인데, 이는 웃음이 점차 사라지고 소위 썪은 미소(썩소)만이 넘치는 사회에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제공하고 있는 시들이 많다.


그럼에도 슬픈 시들도 많은데, 집값을 위해서 죽음까지도 단합하는 모습을 그린 시 '공범'(87쪽)에서는 박완서의 소설 '옥상의 민들레꽃'이 떠오르기도 한다. 죽음보다 집값을 우선하는 물신시대. 그런 시대를 시를 통해서 비판하고 있는데... 


이런 시도 있지만 이 시집에서 '페로몬'이라는 시를 읽으면 장인수 시인은 우리에게 웃음 페로몬을 내뿜어, 그 웃음으로 자신을 따르게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시집 제목이 된 유리창이라는 시는 정지용의 유리창을 떠올리지만, 정지용의 유리창이 자식을 잃은 슬픔을 담고, 자신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비통함을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하고 탄식이 절로 나오게 하지만, 장인수의 유리창은 그 죽음을 승화하고 있다. 물론 장인수 시에서 죽음은 새들의 죽음이다. 유리창에 부딪쳐 죽는 새들. 그러나 유리창에 부딪쳐 죽은 새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한다.


'유리창에 부딪쳐 죽은 새는 다시 살아나 / 유리창을 마음대로 통과하며 살아간다고 한다/산맥과 달님도 마음대로 뚫으며 날아다닌다고 한다' (23쪽)


그러니 그의 시는 죽음이라고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다음이 있다. 그 다음이 있으니 우리는 절망에서 허우적대서는 안된다. 비극을 딛고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시인은 우리를 이끈다. 


    페로몬


카페이 앉아 있는 남녀 고등학생

공원 벤치에 누워 있는 남녀 고등학생

담배를 피우고, 이어폰을 꽂고, 만화책을 보고 있는 

그들에게서

성페로몬 향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하나님을 갈구하는 예배당에 모인 신자들의

영혼에서도

주님을 향한 길안내페로몬 향기가 솟아오르고 있다

나의 몸에 돼지 수컷 페로몬을 바르면

암컷 돼지들이 난리를 피우며 따라붙을 것이다

이끌림의 에너지인 페로몬 향기처럼

생애의 물꼬가 터졌으면 좋겠다


장인수, 유리창, 문학세계사. 2006년 초판 2쇄. 93쪽.


보통 어른들이, 특히 교사들이 일탈행위라고 하는 고등학생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차지 않고 성페로몬이 발동했다고 하고, 종교적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서도 페로몬을 발견하며, 자신에게도 그런 페로몬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 시의 화자는...


그런 역할을 하는 존재가 바로 시인이다. 우리에게 페로몬을 발산해 그 페로몬으로 우리를 끌어당기는 존재.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시를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삭막한 시대에는 더더욱 '생애의 물꼬'를 트기 위해서도 시를 읽는지도 모른다.


가끔은 시를 읽으며 나도 모르는 세계로 들어설 때가 있으니, 시인들은 이렇게 페로몬을 발산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인수 시집을 읽으며 그 페로몬이 시인만의 것이 아님을, 우리 모두는 자기만의 페로몬을 지니고 있음을... 그래서 그 페로몬으로 다른 사람을 이끌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의 페로몬에 이끌려 함께 가기도 한다.


함께 함. 이게 바로 인류가 만물의 영장이 된 이유 아니겠는가. 그러니 우리 서로에게 긍정 페로몬을 발산했으면 좋겠다. 서로가 서로를 이끌며 사는, 아니 굳이 이끌 필요도 없다. 그냥 함께 있어도 좋은 페로몬을 내뿜으며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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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봄 2021 소설 보다
김멜라.나일선.위수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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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봄보다는 뒤에 나온 계절 소설을 먼저 읽었다. 하긴 소설을 꼭 계절에 따라 읽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 그 계절에 좋은 작품이라고 평가 받는 소설을 실었을 뿐이니... 어느 순서로 읽어도 상관은 없다.


소설이 계절에 따라 읽기 적합성을 띤다면, 그 소설이 어떻게 오래 동안 사람들에게 읽히겠는가? 좋은 소설은 계절을 넘어서 시대를 넘어서는 작품들 아니던가. 그래야만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작품이 될텐데.


이 책에도 세 편의 소설이 실렸다. 편집자들이 엄선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뜻하지 않게도 이번 책에도 2021젊은작가상수상작품집에 실린 소설이 한 편 있다. 그때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김멜라가 쓴 '나뭇잎이 마르고'란 소설이다. 마음 속에 남아 있던 소설. 단편임에도 첫 문장을 보자마자 아, 읽은 소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읽으면서 여러 생각을 했던 소설이라 기억에 남아 있었나 보다.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는 일은 참 힘든데, 여성이자 장애인, 성소수자로 살아가는 '체'라는 인물을 등장시킨 소설. 체는 남들이 뭐라 해도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지만, 과연 우리 사회에서 체를 받아주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한 소설.


왜 체는 마음씨라는 동아리에서 양귀비 씨앗을 뿌릴까? (이들이 뿌리는 씨앗이 양귀비 씨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체와 관련지어서 양귀비 씨만으로 국한시키고자 한다) 예전에는 약으로도 쓰였던 양귀비라는 식물이 아편의 재료라고 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재배해서는 안 되는 식물이 되었는데, 양귀비는 그대로인데, 그가 어떤 시대에 있느냐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니...


이 사회에서 양귀비나 체나 변두리로 밀려나기는 마찬가지. 그렇지만 체는 당당하다. 자신이 할 말을 하고 산다. 그렇다. 양귀비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 눈에 띠는 곳에서는 재배를 하지 못하지만, 자신이 자라고 있는 곳에서는 그 역시 하나의 생명으로 자라게 된다.


우리들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그 사람을 보기 보다는 그 사람의 주변을 더 많이 보지 않나 하는 생각. 그 사람의 신체조건이라든지 사회, 경제, 교육 상황 등등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그 사람은 그 사람일 뿐인데, 우리가 재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등을 생각하게 한 소설이다.


소설의 역할은 바로 이것이다. 낯설게 보게 하기. 우리는 소설을 통해서 낯선 세상을 만난다. 내게 익숙한 세상이 아니라 내게 익숙하다고 여겨졌던 세상이 낯설게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소설.


위수정이 쓴 '은의 세계'가 바로 그렇다. 지환에게 낯선 환경(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지 않는다)에서 다가온 하나. 그 하나와 함께 살지만 하나의 가족(사촌)은 또다른 낯선 존재들이다. 하나 역시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소설은 또 하나의 낯선 세계, 코로나19로 전세계가 팬데믹에 빠진 상황 역시 제시하고 있다.


이런 낯섬 속에서 자신의 삶이 아니라 죽음의 순간을 환상 속에서 경험하는 지환. 이는 정말 낯선 세상이다. 서로가 잘 안다고 생각하고 함께 살고 있지만, 사실 서로 모르고 있는 상태. 이는 지환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느낌을 솔직하게 하나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렇게 낯선 세계 속에서 익숙한 인물들이 낯설게 됨으로써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과연 나는 나인가?


그렇게 무엇 하나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소설은 끝나는데...어쩌면 단편소설이 지닌 매력일 수도 있다. 여백이 많은 소설들. 그 여백을 독자가 채워나가야 하는 소설. 그리고 작가는 다시 다른 작품에서 그 여백을 채우고 또다른 여백을 남기는 그런 과정을 계속 이어나가는.


이렇게 두 작품은 주제를 명확히 깨닫지 못하더라도 읽어가면서 빨려들어가는데, 한사코 나를 밀어내는 소설이 바로 나일선이 쓴 'from the clouds to the resistance'란 제목을 달고 있는 소설이다. 1959년과 2018년이 교차하고 있는데, 내용을 이해하기가 힘들다. 제목도 사실 이해하기 힘들다.


또 우리나라 소설이면 우리나라 말로 제목을 달면 안되나 싶은 마음이 든다. 작가들은 자기 나라의 언어를 갈고 닦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들 아닌가. 너무 고루한 생각인 듯 싶다가도 작가들 마저 이렇게 영어를 제 나라 말인양 쓰면 나중에 우리나라 말로 된 소설이 남아날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기우겠지만.


지금 노래들을 보면 영어가 대부분인데, 이제는 소설에도 이렇게, 비록 제목만이기는 하지만, 들어왔으니,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소설 내용을 이해하고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무언가 토막토막, 무의식 속에 있던 일들이 그냥 마구잡이로 나열된 느낌. 어쩌면 그런 나열 속에서 일관된 무엇을 찾아야 하겠지만, 마치 잭슨 폴록의 작품이 위대하다고 하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오랫동안 소설을 곱씹어야 하겠지만, 소설을 읽으면서까지 그렇게 할 독자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도 한다.


물론 이런 소설은 평론가들에게는 좋은 작품이다. 자신들의 현란한 지식을 드러낼 수 있는 원재료가 될테니 말이다. 하지만 나같은 독자에게는 아니다. 그냥 이상 소설이 1930년대에 나왔을 때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는 (지금도 잘 모르지만) 독자처럼 읽었을 뿐이다. 그러니 이 소설에 대해서는 무어라 말하기가 힘드니, 궁금한 사람은 작가와 평론가의 대담을 읽어보거나 직접 작품을 읽어보기를...


그래도 이렇게 짧지만 계절마다 꾸준히 소설이 책으로 엮여 나왔으면 좋겠다. 부담없이 읽을 수 있으니. 분량이나 가격 면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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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 시집을 읽으면 가능성이 보인다. 어떤 형태로든 고정이 되어 있지 않은 청소년들의 모습. 또 청소년들의 마음. 그들 마음이 하나가 아니고, 또 굳어있지 않기 때문에 성장하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간다.


  노자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딱딱함, 굳음은 죽음이다. 그러니 우리가 청소년들에게 특정한 형태로만 있으라고 하면 안 된다. 그것은 청소년에게서 생동감을 빼앗는 일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소년시집을 청소년들이 읽으면 좋겠지만, 청소년보다도 어른들이, 기성세대들이 먼저 읽어야 한다. 그들이 청소년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이렇게 문학을 통해야 한다.


직접 대면해서 이야기하다보면 청소년은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우선 어른들이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어른들이 어떤 대답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지 안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칫 잘못하면 청소년과 직접 이야기하는 일은 어른들의 일방적인 전달이 되거나, 또는 어른들 구미에 맞는 말을 늘어놓는 청소년들의 말을 듣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청소년시집은 그렇지 않다. 청소년들의 내밀한 마음들을 상상을 통해 표현한다. 우리가 쉽게 놓치고 있던 소소한 감정들을 시로 표현해 주고 있다. 또한 청소년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드러내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의 역할이다. 시인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감정들을 표현해낸다. 


시인이 꼭 청소년일 필요는 없다. 청소년시라고 해서 청소년이 써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청소년의 마음을 알고, 표현할 수 있는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면 누구나 쓸 수 있고, 써야 한다. 그런 시들을 통해서 우리는 청소년의 마음에 한발 다가설 수 있다.


오은 시집을 읽으며 청소년들의 마음이라는, 그 마음이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고, 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수시로 변하며, 과거나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로 뻗어나가고 있음을 보게 됐다. 제목도 '마음의 일' 아닌가.


그런 청소년들의 무한한 가능성, 마음의 가소성을 생각하면서 이 시를 읽었다.


그리지 않아야 그려졌다


내가 쓰고자 했던 것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

그릴 수 없다


내가 그리고자 했던 것도

쓰거나 말할 수 없다

온전하게는


창밖에는 나무가 있고

마음만 먹으면

몇 분 뒤에 나도 나무 아래에 있을 수 있다


나뭇가지 사이로 들이치는 햇살을 맞으며

아, 행복하다

여기가 따뜻하구나

여기가 시원하구나

따뜻하면서 시원할 수 있구나

말할 수도 있다


현장의 나만 아는

그때의 나만 아는

내 몸에 새겨지고 있지만

아무도 해독하지 못하는


나이테가 있다

지문이 있다


그리지 않아야 그려지는 부분이 있었다

안에 있어야 보이는 바깥 부분이 있었다


내뱉고 나면 사라지고 말까 봐

차마 말하지 못하는 꿈이 있었다


나는 아직 창 안에 있다

창 안에 있기에

백지 위에 한가득

창밖을 상상할 수 있다


오은, 마음의 일. 창비. 2020년. 초판 2쇄. 53-54쪽


청소년을 고정시키지 말자. 어떤 한 역할로 국한시키지 말자. 그들을 기대라는 이름으로 틀에 가두지 말자. 그들이 자신의 마음을 알고 행동할 수 있도록 지켜보는 일, 그들이 '백지 위에 한가득 / 창밖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 그것이 어른이 해야 할 일이다.


오은 시집을 읽으며 이렇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청소년들, 청소년의 마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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