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집 제목은 '학교에는 고래가 산다'다. 학교에는 고래가 살까? 살지 않는다. 고래는 멀리 멀리 떠나버린 지 오래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학교에서 고래를 찾을 수 있다고, 아이들은 고래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들이 멀리 쫓아버린 고래를 아이들에게 찾으라고 한다.


  고래, 바다 생물을 넘어 우리가 꿈꾸는 그 어떤 모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데...


  시인이 교사였던 만큼 학교에 관한 시들이 이 시집을 차지하고 있다.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 교사들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교육에 관한 이야기 등을 시로 썼다. 마지막 5부에는 너무도 슬픈 아직도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세월호' 이야기가 나온다.


그 중에 두 편의 시를 보면서, '이런 농담'은 이런 상황에서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손에 흙 안 묻히고 깔끔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을 심어주는 학교. 그런 학교에서 우등생이란 결점 없는 학생일 터.


  장래 희망


아이들의 꿈에는

도무지 땀 흘리는 게 없다.

땡볕에서 얼굴이 시꺼멓게 타는 건

도무지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손에 물을 묻히거나 기름밥 먹는 건

작업복 걸치고 먼지 뒤집어쓰는 건

도무지 격에 맞지 않는다고

농부가 되고 어부가 되고 화부가 되는 꿈

석공이 되고 목수가 되고 잡역부가 되는 꿈

도무지 돈이 되지 않는다고

그래도

의사가 되거나 법관이 되거나

책상에 앉아서 펜대를 굴리거나

아이들의 꿈에는

도무지 흙을 묻히는 게 없다

밑바닥이 되는 꿈

다리가 되고 허리가 되는 꿈

세상을 눈물로 색칠하는

노동자는 보이지 않는다


최기종, 학교에는 고래가 산다, 삶창. 2015년. 66-67쪽.


  이런 농담


이런 아이가 있었다

너무 착실하다고나 할까

정도가 지나치다고나 할까

1년 내내 결석 지각 조퇴 한 번 안 하고

교칙도 칼같이 지키고

지시 한 번 어긴 적도 없는

이런 아이가 있었다

어느 날 그 아이보고

내일은 10분만 지각하라고 하니까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 번쯤 결석해도 좋다고 하니까

그 아이 하는 말이

"선생님! 선생 맞아요?"


최기종, 학교에는 고래가 산다, 삶창. 2015년. 71쪽.


'이런 농담'에 나오는 아이는 흙을 묻히는 꿈을 꾸지 않을 것이다. 그는 펜대를 굴리거나, 의사가 되거나 판, 검사가 될 것이다. 그래서 잘살 것이다. 다만, 그는 도무지 흙을 묻히고 사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왜 그렇게 사는지...


그래서 '이런 농담'은 '장래 희망'을 비튼 시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에게 어떤 장래 희망을 갖게 해야 할까? 아니, 아이들이 어떤 삶을 살도록 해야 할까? 장래 희망을 직업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좋은 쪽으로 만들어가는 일. 큰일이 아니라 작은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 그렇다면 '이런 농담'에 나온 학생은 학교라는 틀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칭찬을 받아도 마땅한데, 씁쓸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무언가 인간적인, 실수를 하면서 또 실수를 하는 사람을 보면서 그들과 함께 지내는 인간적인 면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렇다고 선생이 지각하라고 하면 되나 싶은 생각도 들지만, 지각하라고ㅡ, 결석해도 된다고 하는 말은 사람은 빈틈이 있어야 다른 사람과 더 잘 연결된다는 말로 받아들이고 싶다.


그래야 흙을 묻히는 사람이 되지 않더라도 흙을 묻히고 사는 사람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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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시선
김태현 지음 / 교육과실천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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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우리나라에서는 교사만큼 애증의 대상이 되는 직업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교육에 관해서는 전국민이 전문가를 자처한다고도 할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 교육에 종사하는 교사는 누구에게도 욕을 먹을 수 있는 집단이고, 또 누구에게도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집단이다. 최근에는 칭찬보다는 욕을 많이 먹고 있기는 하지만.


교사들에게 많은 비난이 쏟아지는데 그 중 많은 비난은 터무니없는 것들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아무리 터무니없는 비난이라도 비난을 받는 당사자에게는 커다란 상처가 된다.


교육에 종사하고 있는 교사들이 큰 상처를 받고 힘들어한다면, 그 여파는 학생들에게 고스란히 갈 수밖에 없다. 사방에서 비난을 당하는 교사들이 어떻게 자존감을 갖고 자신만의 교육을 행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정말 자기 자식을 생각한다면 교사에 대한 비난은 삼가해야 한다. 물론 비난은 삼가해야 하지만 비판까지 삼가해서는 안된다. 


도식적으로 이야기하면 비난은 상대를 깎아내릴 목적으로 하는 말이고, 비판은 상대가 더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말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말 속에 들어있는 감정을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에, 교사들을 비판한다고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서로가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고, 이런 비판은 서로의 관계를 더욱 좋은 쪽으로 만들어가려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 교사들에게 가해지는 말들을 비판으로 봐야 할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코로나19가 유행하면서 교사들은 놀면서도 돈을 받는 신이 내린 직업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또 원격 수업 대충하고 시간만 때우는 직업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그리고 교육에 관한 정책들을 교육부나 교육청을 통해서 알게 되지 않고, 언론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교사들보다 다른 사람들이 학교 운영이 어떻게 될지를 먼저 알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저자가 말한 대로 학교에서 교사들은 먼저 움직이려 하지 않으려 하겠다. 어떻게 될지 예측을 할 수 없는데 어떻게 계획을 짜고 준비를 하겠는가.


그럼에도 이상하게 교사들은 교육부에서, 또 교육청에서 시키는 대로 잘해낸다. 잘해냈다. 우리나라가 짧은 시간에 전국의 학교들이 원격 수업을 하는데도 멈춤 없이 운영이 된 데에는 교사들의 능력이 한몫했다고 할 수 있다.


분명 이렇게 능력있는 교사들인데, 자기들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위축된 생활을 한다. 학교 현장에서는 학교관리자들과 학생들에게 치이고, 밖에서는 학부모들과 교육관료들에게 치이는 상황.


그냥 시키는 일만 하겠다는 교사들, 너무 앞서 나가지 않겠다는 교사들. 내 할 일만 하고 나머지는 안 하겠다는 교사들에게 저자는 아니라고, 교사는 가능성이 있다고, 잠재력이 있다고, 충분히 우수한 능력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의 경험을 섞어 가면서, 그림과 시를 곁들이면서 이렇게 교사들을 다독이고,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교사들이 주체적인 교육자로 설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교사들에게 의미 있는 책이다.  


여섯 개의 낱말로 글을 이끌어간다. 시선(보기), 심미안(느끼기), 메시지(생각하기), 커뮤니티(관계맺기), 콘텐츠(표현하기), 디자인(상상하기)가 그 낱말들이다.


그러면서 교사들이 교육의 전문가로 대우받아야 하며, 교육정책도 관료들과 대학교수들만이 좌지우지하지 않고 교사들이 함께 참여해야 제대로 된 교육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이 여섯 단어들에서 제시한 그런 활동들을 하면 된다.


아니, 이 책에 제시된 활동들을 해도 좋지만, 자신에게 맞는 활동들을 찾아 하라고 권한다. 교사들 개개인이 모두 하나의 학교이기 때문에 자부심을 지니고 자신의 교육활동을 주체적으로 하라고, 그리고 함께 하자고 하고 있다.


많은 실천들을 그냥 묵히지 말고 공개하고, 그때그때로만 여기지 말고 모으고 정리하고 공유하는 활동들을 하고, 그런 활동들을 여럿이 함께 하면 힘도 덜 들고 좋은 성과도 거둘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교직 생활을 하다보면 비난보다는 비판이 많아질 테고, 비판은 교육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갈 테니, 그런 비판으로 교사들이 위축되어 움츠러드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글을 읽으면서 이 글이 꼭 교사들에게 해당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교사들이 읽으면 좋다. 마음을 다독거리면서 더 나은 교육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테니까. 그런데 여기서 교사라는 말을 빼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넣어도 된다.


그렇게 자기 일에서 이 여섯 낱말을 명심하고 나아간다면 훨씬 좋은 성과를 얻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그러니 책 표지에 있는 '교사의 눈으로 나 자신과 교육과 세상을 깊이 들여다보기'라는 글이 있지 싶다.


적어도 이 책은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지, 교사들은 왜 교사인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으니, 법조인의 눈, 자본가의 눈, 경찰의 눈, 정치가의 눈이 아닌 교사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면 우리가 왜 살아가는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그 다음 그런 질문이 실현되는 과정으로서의 사회를 만들어가려 노력해야 하니, 교사의 눈은 코로나19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지금, 우리가 지녀야 할 눈(시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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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9-29 1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태현선생님 신간이군요! 읽어보겠습니다!^^

kinye91 2021-09-29 11:20   좋아요 1 | URL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책이더라고요.
 

 

  화려한 삶과 그늘진 삶이 공존하는 잡지. 어쩌면 끝과 끝을 이어주는, 그래서 사람들은 화려한 삶을 살아도, 또 그늘진 삶을 살아도 홀로가 아님을 알게 해주는, 서로가 연결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려주는 잡지. 빅이슈다.


  이 잡지에는 우리가 동경하는 삶이 나온다. 유명인들이 표지 인물로 주로 나오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지금 내가 있는 위치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고자 하는 욕망을 사람들이 지니고 있으니, 나보다 화려한 삶(겉보기에는)을 사는 사람들을 표지에서 보면 읽고 싶어진다. 


  그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빅이슈는 표지 인물들을 인터뷰하면서 화보도 함께 실어주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 어떤 신발을 신고 있는지 등, 그들이 꾸미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또한 디저트를 소개하는 글은 어떤가? 음식이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 삶에 또 하나의 풍부함을 더해주는 요소라는 생각을 하게 해준다. 디저트를 파는 가게의 모습이나 그 가게에서 파는 음식의 종류, 멋들. 이것이 남 이야기라고만 해서는 안된다. 바로 우리들 이야기여야 한다.


하여 빅이슈에는 해외에 관한 글도 있다. 해외 여행을 꼭 해야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세계 곳곳을 소개해줘서, 앉아서 해외 여행을 할 수도 있게 해준다.


반면에 빅이슈에는 그늘진 삶을 사는 사람들 이야기도 있다. 최근에는 빅판들의 생애를 듣고 쓰는 글이 생겼다. 이번이 세 번째 빅판.


그들이 불성실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노숙인이 되었음을, 그럼에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 하는 모습을 빅판의 생애사에서 느낄 수 있다.


화려한 삶에서 느낄 수 없는 짠함을 느끼게 되는데, 이런 짠함은 사람만이 아니라 버려진 동물들에게서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빅이슈가 사람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지구에서 살아가는 다른 존재들까지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참 좋다.


지금 코로나19가 두 해째 지속되고 있어서 어려운 지경에 처한 사람이 많다. 그 어려움을 각자도생이라고, 개인에게만 헤쳐나가라고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누구나 연결되어 있듯이, 표지에 나오는 유명인들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표지 인물이 되어 주듯이 나보다 어려운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사회가 어려운 사람들을 돌볼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도록 해야 한다. 각자도생이 아니라, 모두가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어쩌면 빅이슈에 나오는 다른 존재들, 그들이 연결되어 있음은 우리 사회가 그렇게 서로 연결되어 함께 살아가야 함을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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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출세작 - 운명을 뒤바꾼 결정적 그림 이야기
이유리 지음 / 서해문집 / 2019년 12월
평점 :
절판


수많은 화가들 중에서 지금 우리게에 알려진 화가는 몇 명? 그리 많지 않다. 특히 나에게 알려져 있는 화가는 정말로 유명한 화가이리라. 미술에는 문외한에 다름 없으니까.

 

그럼에도 미술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었더니 이제는 낯이 익은 이름들이 있다. 낯이 익은 그림도 있고. 여전히 많이 모르고, 낯선 작가들과 그림이 더 많기는 하지만.

 

이러니 나에게 알려진 화가는 유명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유명했을까? 그들이 자신의 천재성을 처음부터 인정 받았을까? 물론 그런 작가도 있다. 피카소만 해도 어린 시절부터 나이들어서까지 천재 작가로 추앙받지 않았던가. 이 책에는 이런 피카소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반면에 죽을 때까지 무명 생활을 하던 작가도 있다. 지금은 너무도 유명해진 고흐. 자, 그들은 모두 자신의 작품에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어떤 작가와 어떤 작품은 유명해지고 어떤 작가와 작품은 묻히고 만다.

 

거기에 사람과 때라는 것이 있다. 즉 자신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 부분. 우리가 흔히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 하지 않던가. 자신의 실력을 돋보이게 해줄 운이 작동해야만 화가나 작품이 살아남을 수 있다. 그 운이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노력이나 재능을 알아준 사람으로부터 온다.

 

고흐가 죽은 다음에 유명해졌는데, 그의 작품은 지금도 전세계에서 많은 관람객을 불러모으고 있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고흐의 동생인 테오의 아내, 요한나 봉허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요한나가 고흐의 편지를 편집하고 번역하여 책으로 내고, 고흐의 그림을 버리거나 팔지 않고 보관했다는 사실. 고흐의 전시회를 열려고 노력했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으니, 고흐가 지금처럼 유명해지게 된 데는 요한나의 공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다 요한나의 아들도 마찬가지.

 

삼촌의 작품을 버리지 않고 모았다가 네덜란드에 기증을 했으니, 암스테르담에 '반 고흐 뮤지엄'을 통해 전세계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했으니, 그런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여기에 더해서 로댕에 관한 이야기도 새로웠다. 로댕이 기존 조각을 벗어나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만들어 가는데, 오해를 많이 받았다는 사실. 그 유명한 로댕도 젊은 시절에는 무척 고생을 했다는 사실. 그러니 그의 작품이 논란을 일으키게 된 일이 오히려 로댕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으니...

 

이는 뭉크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좋은 쪽이든, 좋지 않은 쪽이든 작가들은 이름이나 작품이 언급되면 유명해질 가능성이 있다. 사람들이 알게 되기 때문인데...

 

우연한 계기라고 하지만, 우연은 준비된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일이니, 화가의 출세작은 화가가 우연히 출세하게 된 작품을 말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화가의 출세작은 그만큼 화가가 준비를 했고, 준비가 된 상태에서 그를 찾아온 기횔르 놓치지 않았다고 보면 된다.

 

많은 작가들이 나왔고, 그들의 작품을 보여주고 있어서 눈호강도 하고, 작품의 이면에 있는 이야기도 알 수 있어서 좋은 책이다. 무엇보다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점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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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9-27 08: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들의 ‘광기와 우연의 역사‘!
때가 있는 건 맞는것 같아요.
그 때가 죽은 이후에 다가온 화가들은 안타깝죠 ㅠ

kinye91 2021-09-27 09:45   좋아요 2 | URL
그래요. 죽은 다음에 그림을 인정받은 화가들, 안타까워요. 그래도 그들은 최선을 다했기에 언젠가 인정을 받지 않았나 생각해요.
 

   "산업문명의 종언과 학교"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과'라는 말로 붙어 있으니 산업문명의 종언과 학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근대 학교를 의미하리라. 근대 학교 제도가 산업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양질의 노동력을 양산하기 위해서 마련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학교 교육과정은 산업 노동에 맞게 구성되었으며, 교과과정 역시 산업문명에 기여할 수 있도록 짜여졌으며, 학교에서 알게모르게 주입되는 내용은 산업문명을 체화하도록 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학교가 그렇다면 이제 산업문명을 넘어 제4차산업사회로 넘어가는 이 시대에는 과거의 학교제도는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교육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교육 내용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제4차산업혁명에 맞게 학교를 재구성하자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교육부도 스마트미래학교라는 이름으로 학교에 온갖 전자기기를 도입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학교가 각종 전자기기로 최신화된 학교일까?


녹색평론은 '산업문명의 종언과 학교'는 산업문명이 끝나가니 제4차산업혁명기에 어울리는 학교를 만들자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학교는 무엇일지, 인류가 지속하기 위해서는 어떤 교육이 필요할지를 성찰하자고 한다.


일례로 이번 호에 실린 로웰 몽크의 글 '컴퓨터, 희극적이고 위험스러운 교육도구'는 우리나라 교육의 방향과는 다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 글을 읽으면 스마트미래학교라고 해서 각종 스마트 기기들을 학교에 들여와 그를 통해 교육을 한다는 발상이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적절하게 융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이 글의 제목처럼 될 가능성도 많다.


여기에 다시 문명 대전환이 필요하고, 그러한 교육을 해야 한다는 주장(심성보, 문명 대전환을 위한 교육혁명)을 싣고 있다. 이 글이 타당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갈 길이 멀어도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지는 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심성보의 글은 지금 교육부가 추진하고 있는 방향과는 다른 방향이다. 그는 '생태교육학 운동'을 주창하고 있으니, 그 점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다만, 지금 코로나19가 생태계 파괴로 인한 전세계적인 재앙이라는 데는 많은 사람이 동의하고 있으니, 미래 교육은 생태교육 쪽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생태교육은 비판적 의식을 함양하는 교육이 될텐데, 비판적 의식을 키우기 위한 교육이 꼭 제도권 학교에서만 이루어져야 할까? 오히려 제4차 산업혁명과 생태교육학이 만나는 지점이 제도권 학교라는 거대 권력을 해체하는 데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점은 박민형의 글 '학교 없는 대안 교육, 어디 없을까'를 참조하면 된다.


그렇다고 학교를 모두 해체할 수는 없다. 학교와 학교라는 이름을 버린 교육 기관(장소, 단체?)이 함께 공존하는 교육 환경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여기에 대학에 대해서 다시 생각한다. 과연 대학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기업이 원하는 노동자를 제공해주는 역할에 그쳐야 하는가? 아니면 대학은 스스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인간, 그리고 함께 자유롭게 사는 사회를 추구하는 인간을 양산해야 하는가? 닉 콜드리의 글 '대학, 그리고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대항문화'를 읽으면서 그 점을 생각해도 좋다.


이제 코로나19로 4단계가 되어도 기존 학교에 등교하는 학생수를 확대했다. 학생들이 학교에 등교한다. 그러나 학교는 과연 변했는가? 코로나19 이전의 학교와 코라나19가 한창인 지금의 학교, 또 코로나19를 이겨낸 다음의 학교는 같아야 하는가?


우리는 코로나19를 통해 학교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교육의 본질을 살릴 수 있는 학교 교육에 대해, 학교 환경에 대해 논의하는 장을 마련해야 한다. 과밀, 거대 학교로는 감염병 시대를 이겨낼 수 없다는 사실을 몸소 겪지 않았던가.


이것이 바로 "산업문명의 종언과 학교"라는 제목이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녹색평론 180호, 김종철 선생에 대한 추모글들도 읽을 만하지만 지금 현안과 관련해서 이런 학교에 관한 글들 읽고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과 연결지어서 이보 모슬리의 '민중의이름으로(6)' 실린 글을 곱씹어 보자. 우리 권리를 남에게 이양하고 손을 놓고 있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권력욕으로 동기가 부여된 사람들은 보통 선함으로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들 중 최량의 인간이라도 부도덕하고, 사람을 조종하는 데 능하며, 더 나쁜 경우에는 지독하게 사악하다. 개인적 야심은 교활함과 이중성에 통달하게 만든다. 야심가들은 "나는 공익을 위한다"고 말하고, 스스로 가장 먼저 그 말을 믿는다.

  국가 건설은, 법이나 기관을 세우는 일이 일반적으로 그렇지만, 권력과 야심을 억눌러서 그런 것들이 공익을 거스르는 쪽이 아니라 공익을 위해서 행동하게 만드는 예술이다. (178쪽)


  유권자들이 이러한 권력들을 '집단으로' 직접 감시하고 통제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아무도 그럴 시간도, 주의력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이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고, 이 권력들의 활동에 한계를 정하고 결정하는 일에 주동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게 가능하지 않다면 의미 있는 민주주의도 존재할 수 없다. (179-180쪽)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지금 우리 사회는 내년 선거를 앞두고 많은 정치가들이 '공익'을 내세우면서 '국민'을 들먹이면서 출사표를 던졌다. 이들이 '공익을 위해서 행동하게' 만들려면 '보통사람들이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투명하게 정보가 공개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의미 있는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에 정착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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