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가족이라는 말이 광고에 쓰이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진짜 가족처럼 여긴다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말을 이용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말로 그 사람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은 조금 희생을 해도 그것이 가족이니까 하고 넘어가지 않나 하는 생각.


지나친 생각이다. 가족을 그렇게 이용하는 사람은 없다고 믿고 싶으니까. 하지만 "우리가 남이가!" 라는 말이 포용보다는 배제를 전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에, 이때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에 가족이라는 개념이, 그러니까 무조건 함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있지 않나 하는 의심을 한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말은 나쁠 수가 없다. 빅이슈 이번 호를 보면 표지에 '우리는 모두 가족'이라는 말이 있다.


이때 '가족'은 다름을 인정하되 함께하는, 즉 함께한다고 해서 모두 똑같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솔직히 가족 구성원들도 같지 않다. 다 다르지 않나, 그러니 서로가 조금씩 양보하고 살고 있지 않나. 똑같을 수 없는 존재, 그런 존재들이 이 지구에 모여 살면서 서로가 서로를 가족처럼 여긴다면 누가 누구를 배제하고, 또 누가 누구를 착취하는 그런 세상은 아니겠지.


그래서 가족이라는 말에 좋은 감정과 좋지 않은 감정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데, 역시 말이란 어떤 맥락에서 쓰이느냐에 따라 달라짐을 생각하게 된다.


이번 호에서 이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다. 가족이라는 말이 지닌 양가 감정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사실 많이 다르다. 이 젊은 정치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정치를 싫어하지는 말되 정치인을 싫어하자고 말하고 싶다.'('정치는 당신의 삶에 관심이 있다'중에서 120쪽)


정치인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으련다. 다만, 그가 한 말. 그렇다. 정치는 우리의 생활이다. 하여 정치를 싫어하면 안 된다. 다만, 정치인은 싫어해도 된다. 어떤 정치인? 제대로 정치를 하지 않는 정치인?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나서는 정치인, 정작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정치인. 말만 앞세우는 정치인. 내 편 네 편을 갈라, 우리가 남이가를 몸소 실천하는 정치인, 혐오 표현을 혐오 표현인지도 모르고 (혹은 알면서도 아니라고 우기는) 내뱉는 정치인 등등. 그런 정치인은 싫어해야 한다. 아니, 싫어해야 하는 것을 넘어서 그런 정치인이 정치를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것이 가족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는 길이지 않을까 싶다. '가족'이라는 말이 서로에게 힘을 주는 쪽으로 쓰이는 그런 말이 될 수 있는 사회, 어쩌면 [빅이슈]가 추구하는 사회가 그런 사회가 아닐까 한다.


내가 읽는 [빅이슈] 335호는 아래 사진과 같은 표지였는데, 검색해보면 다른 표지 모델이 나온다. 두 표지가 함께나온 듯. 그렇지만 내가 본 책의 표지가 이것이고, 여기에 '우리는 모두 가족'이라는 말이 있어서 이런 생각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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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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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기 전에 작가의 말을 먼저 읽었다. 작가의 말이 두 편이나 있다. 초판을 냈을 때 썼던 작가의 말과 신판을 냈을 때 작가의 말. 그런데 작가의 말이 많이 달라졌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기에, 작가의 말이 주는 울림은 그대로다. 이 책에 쓰인 작가의 말이 과거의 말, 그때는 그랬지라는 말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초판 작가의 말에 있는 제목은 '생존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이 소설집의 내용을 잘 드러낸 제목이다. 제목이 된 '너의 유토피아'만 봐도 그렇다.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다. 기계문명이 모두 파괴된 세계.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 여기서 살아가는 로봇의 이야기. 너의 유토피아. 


만족도 설문을 할 때 1에서 5까지의 숫자를 놓고 선택하라고 한다. 이 소설에서는 0부터 10까지 중에서 선택한다. "너의 유토피아는?" 세상에 인간이 사라지고 황폐하게 변한 지구에서 유토피아 지수는 높을 수가 없다. 0이다. 그런 세상은.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있으면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지닐 수 있다.


지옥 속에서도 천국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인간 아니던가. 루쉰의 말이 나오는 소설 '여행의 끝'에서도 희망은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다고, 결국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 소설 역시 좀비(?)로 변한 인간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희망이 있으면 좋겠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인간이 인간을 먹는 그런 세상이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디스토피아.


'여행의 끝'이 유토피아는 아니더라도 자신이 살 수 있는 곳이면 좋겠지만, 아니다.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관계만 남은 곳. 그런 곳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차별과 혐오를 없애야 한다.


차별과 혐오에 대한 이야기가 '그녀를 만나다'에 나온다. 왜 성적 지향을 가지고 혐오 표현을 남발하고 차별을 하나? 차별이 폭력으로 나아가기도 하는데, 자신이 폭력을 저질러 놓고도 "짜릿하지 않아요?"('그녀를 만나다'에서. 235쪽)라고 하는 인간. 그런 인간들이 존재하는 사회. 그 사회야말로 디스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직도 차별금지법은 제정이 되지 않고 있다.


하여 이 소설의 마지막은 유토피아다. 차별과 혐오가 발붙일 수 없는 사회니까.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지금 젊은 나이의 사람이 무려 100살이 넘은 나이가 된 시대. 평균 수명이 130세 정도인 시대. 그 시대에 군대에서도 성전환이 자유롭고, 군인들도 자유롭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보장받는 사회. 그러한 사회에서 과거를 기억하는 인물이 마지막에 예전을 떠올린다.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변희수 하사를 기억합니다." ('그녀를 만나다'에서. 269쪽) 


기억이 세상을 바꾸는 힘으로 작동해야 한다. 우리가 기억하자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억해야 변화 시킬 수 있다. 기억하는 사람이 많아야 변화의 힘이 더욱 세진다.


정보라는 '2020년은 무서운 해였다'(초판 작가의 말. 355)라고 했는데, 신판을 내면서 제목을 '계속 싸우는 이야기'라고 했다. 그러면서 '2022년은 무서운 해였다'(신판 작가의 말. 364쪽)고 하고 있다.


2024년은 더 무서운 해였다. 비상계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짓으로 그 해를 마무리했으니... 깨어 있는 국민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디스토피아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렇다. 정보라가 계속 싸우는 이야기라고 한 것은, 이러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쪽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기도 했고.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계속 싸워야 한다. 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계속 시위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겠다.


이렇게 계속 싸우는 이야기를 '씨앗'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자연을 정복했다고 여기는 인간들에게 씨앗들을 심어 싸움이 끝나지 않았음을, 자연은 스스로 생존 방식을 찾아가고 있음을, 당신들의 복제에 다양성으로 맞서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식물인 줄 알고 읽다가 어, 인간과 대화를 해, 그런데 인간이 복제 인간이야? 왜 똑같다고 표현을 하지? 식물은 유전자조작으로 인해 똑같은 또 씨앗으로 다음 대를 이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런 사회가 인간인들 가만 놓아두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 이렇게 작가가 설정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언급한 소설만이 아니다. 다른 소설들도 재미와 감동을 준다. 영어로 된 작품이 두 편 실려 있는데, 이 작품들은 '상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상실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따스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다. (One More Kiss, Dear라는 소설과 Maria, Gratia Plena라는 소설이다.)


작가의 상상력을 따라가면서 우리의 현실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눈 감고 듣지 않으려 했던 우리 사회의 암울한 모습들을 소설을 통해서 발견하게 된다.


발견, 이것은 다른 관점을 지니게 하고, 다른 관점은 다른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내딛게 한다. '여행의 끝'에서 루쉰의 말이 그렇게 긍정적으로 쓰이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이 작품집을 보면 희망은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루쉰의 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작가 역시 '생존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들이라고 했다가 계속 싸우는 이야기'라고 하지 않았나 싶다. 우리는 계속 싸워야 한다. 그것이 상실에 맞서는 우리의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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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 목표가 있다. 주소가 있으니, 가야 할 곳은 정해져 있는 셈. 하지만 그 주소는 낯설다. 처음 가보는 곳이다.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른다. 그 주소를 알고 있는 사람이 안내를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 사람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나는 이만큼 떠나왔는데, 주소지에는 도착하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은 그 자리에 멈춰야 한다. 그리고 살펴야 한다. 내가 떠나온 곳을 뒤돌아보고, 내가 가야 할 주소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그 주소로 어떻게 가야할지를 생각하고. 함께 갈 사람을 기다리면 된다.


  그 사람이 안 오면? 안 와도 나는 갈 수 있다. 시간이 더 걸리고, 좀더 많은 시행착오를 거칠 뿐. 왜냐하면 내게는 주소가 있기 때문이다. 주소는 목표다. 지향점이다. 


하여 지향점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있다는 것은 안다. 있음을 알기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그러니 이 주소를 놓쳐서는 안 된다. 꼭 쥐어야 한다.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일이다. 


주소를 모르는 일처럼 황망한 것은 없다. 아예 주소를 모르면 출발도 하지 않는다. 분명 주소를 알고 출발했는데, 도중에 주소를 잃어버렸다. 잊어버렸다가 아니라 잃어버렸다. 목표의 상실이다. 그러면 나는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 하지 못한다.


하지만 얼마나 다행인가? 누군가가 올 것이다. 나를 그 주소로 데려다 줄, 그러한 믿음이 있다면 기다린다. 시간이 걸릴지라도. 그러한 기다림 속에서 많은 생각들이 오가기는 하겠지만, 주소를 쥔 손을 펼쳐 주소를 버리지 않으면, 내게는 희망이 있다.


그런 생각을 한다. 이때 주소는 희망, 목표다. 그리고 나는 과거로부터 여기까지 와서, 내가 앞으로 갈 주소를 확인한다. 또 기다린다. 홀로 가지 않고 함께 가기 위해서.


윤은성 시집에 실린 '주소를 쥐고'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주소를 쥐고 있는 한 우리의 삶은 희망이 있다고. 그것이 우리를 버티게 해준다고. 지금까지 떠나왔던 곳에서 희망의 다른 곳으로 우리를 갈 수 있게 해준다고. 아니 힘든 이곳의 상황을 버티게 해준다고.


주소를 쥐고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제는 기다리면 되니까. 하차한 바로 그 자리에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사람들은 지나간다. 마주할 일이 있다고 하면 겁을 먹기도 하면서. 더 많은 노력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견주면서. 거대한 밤과 통로.


  폭죽을 떠뜨리고 싶다.


  그러나 어디로 가든지 상관이 없다는 게 어떤 선을 그어대도 괜찮다는 뜻인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 안내견과 그의 주인이 지나가고 동행인의 옷깃을 쥔 노인이 천천히 지하도로 사라지고.


  멀다.


  나는 계속 기다린다. "왔구나"라는 말을 대신할 말을 찾으면서. 보이지 않게 된 사람들이 다시 나타나는지 건너편 플랫폼을 살피기도 하면서.


  겨울을 여기서 맞는다면 커다란 커튼을 살 것이다. 창을 다 덮고도 바닥까지 늘어뜨려지는. 닦거나 감싸거나 누군가 잠시 숨겨줄 수도 있는.


  왔구나

  왔구나


  손을 쥐었다 펼쳐본다. 한번 죽어본 사람처럼 여기도 새가 산다. 여기도 새가 살고. 밤이 되면 어둡다.


  가방을 끌어안고 벽에 기대 조는 아이.

  아이와 인사를 주고받고 싶다.


윤은성, 주소를 쥐고. 문학과지성사. 2024 초판 5쇄. 2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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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란 돌봄 - 가족, 돌봄, 국가의 기원에 관한 일곱 가지 대화 이매진의 시선 13
조기현 지음 / 이매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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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중 한 명이 쓰러진다. 그것도 생계를 담당하던 사람이. 그러면 그 가족의 생활은 붕괴된다. 생계를 담당하던 사람이 아니더라도, 가족 중 누군가가 쓰러지면 또한 가족의 생활은 붕괴된다. 다는 아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가정은 그래도 유지된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가정은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그만큼 돌봄에는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어간다. 시간? 가정 붕괴에 웬 시간?


당연한 일이다. 돈으로 돌볼 사람을 구하지 못하면 가족 중 누군가가 돌봄에 전적으로 매달려야 한다. 전적으로? 이것은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돌봄에 할애한다는 말이다. 자신의 생활을 할 시간이 없다는 것.


그러니 돈과 시간은 돌봄이 잘 이루어지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그것이 바람직한가? 이것은 돌봄을 사회가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맡기는 것 아닌가.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돌봄은 가족이 해야할 일이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가족 중 누군가 쓰러지면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가 돌봄에 나서야 한다. 대부분은 여성들이 돌봄에 나서곤 했다. 자신의 시간을 희생해서라도. 자발적인 경우도 있지만 분위기로 압박을 받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돌봄이 과연 돌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러한 돌봄을 한 사람은 돌봄의 어려움을 경험했기에 자신은 가족의 돌봄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돌봄으로 인해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가 희생해야 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 구성원 중에 젊은 사람이 돌봄에 전념해야 할 경우는 어떨까? 자발적인 경우도 힘든데 (이 책에 나온 경훈의 경우는 자발적이다), 어쩔 수 없이 가족이라는 관계 때문에 해야 하는 경우(이 책에서는 성희의 경우)라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여기에 치료를 필요로 하는 돌봄(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돌보는 푸른엄마가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아름, 동생이 알콜 중독에 빠져 있는 형수, 엄마가 암에 걸린 희준)을 하는 젊은이들은 더욱 힘든 문제를 겪고 있다. 그러한 문제들, 그들이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는지를 이 책의 저자는 면담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물론 이 책의 저자 또한 자신의 아버지를 돌보는 젊은이였다. 자신의 경험이 있었기에 다른 젊은이들이 돌봄을 하면서 얼마나 힘든지를 이해하고, 그런 힘듦을 이겨내기 위해서 어떤 방법이나 제도가 필요할까를 고민하고 대책을 마련하려 노력했을 것이다.


돌봄이 전적으로 개인에게만 맡겨져서는 안 된다는 것, 돌봄을 공적 노동으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돌봄을 공적 노동으로 인정해주면 돈과 시간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돌봄에 관해 통합적인 운영을 할 수 있는 기관이 필요하다는 것 등등을 이 책의 말미에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한 방법들, 요즘 우리 사회는 곳곳에서 요양원, 요양병원, 데이케어센터 등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만큼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늘었다는 뜻이다. 이들이 돌봄을 어느 정도는 책임지고 있지만 아직도 가정에서 책임지고 있는 경우도 많으니...


돌봄은 결코 사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것, 공적인 제도로 돌봄을 뒷받침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 책을 읽으면 알 수 있게 된다.


나이듦. 남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늙어간다. 그리고 돌봄을 필요로 하게 된다. 돌봄을 주듯이 돌봄을 받는 것도 당연한 것이 되는 사회, 그것이 누군가에게 부담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함께 겪는 일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책이 바라는 사회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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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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벅찬 마음, 도무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심장이 터질 듯하므로. 그럴 때는 온몸에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다. 평생을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자식을 그리워하며 살아온 레오 거스키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이름을 쓰는 아이를 만났을 때. 그 아이가 자신이 쓴 소설의 주인공 이름을 따랐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렇다. 그 아이는 더 이상 자신이 사랑하는 앨마가 아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앨마다. 사랑하는 사람. 평생을 사랑했던 사람. 오직 한 사람인 사랑. 그런 사랑을 죽음을 앞두고 만나다.


앨마는 앨마가 아니지만 앨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역사다. 사랑은 단절이 아니라, 그렇게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말로 할 수 없기 때문에 거스키가 쓴 소설에는 '침묵의 시대'가 있고, 언제는 깨어질 수 있어서 더욱 조심해야 하기에 '유리의 시대'가 있지만, 그렇지만 결국은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아무리 시간과 공간이 떨어져 있더라도 연결되어 있다는 '끈의 시대'가 있다.


이렇게 거스키의 소설은 여러 사람을 거쳐 앨마와 아들 아이작과 연결이 된다. 사랑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음을, 책 속이 소설 '사랑의 역사'를 통해서 알려주고 있다.


여기에 거스키가 쓴 또다른 소설이 있다. 아들에게 보낸 소설, 그 제목은 '세상 모든 것을 표현할 말들'이다. 세상 모든 것을 표현할 말, 그런 말이 있을까? 없다고 보는데, 그것을 우리가 생각하는 언어라는 생각을 벗어나면 세상 모든 것을 표현할 말들은 있다.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 말들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그래서 모든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 역사를 통과해서 살아남는 말, 역사를 통해서 계속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말, 사랑. 그런 점에서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감동적이다. 말이 필요없다. 아니 말을 할 수 없다. 세상 모든 것을 표현할 말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아이를 두 번 두드렸다. (372쪽) ... 아이가 나를 두 번 두드렸다. (373쪽)


앨마가 아닌 앨마, 앨마이자 앨마가 아닌 아이. 그런 아이와 만나 모든 것을 깨달았을 때, 그렇게 사랑은 지속되고 있었음을, 결국 하나로 모이게 되었음을, 거스키와 소녀 앨마의 만남에서, 서로가 말이 아닌 몸으로 보여주는 이 장면은 하나의 사진처럼 마음에 각인된다.


그렇다고 마냥 사랑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격동의 역사 속에서 사랑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 사랑으로 인해 최고의 기쁨과 최고의 슬픔을 함께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가 여러 조각으로 펼쳐진다. 


우선 레오 거스키.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으로 나치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 사랑하는 앨마를 위해 소설을 쓰고, 그것을 앨마에게 보낸다. 하지만 앨마는 거스키가 소식이 없자 미국에서 아이를 낳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아이의 이름을 아이작이라고 짓고는.

거스키는 자신이 쓴 소설이 발간된 지도 모르고 지내다 나중에 자신의 작품이 출간되었음을 알게 된다. 아들을 찾아가지만 아들은 먼저 죽고, 나중에 아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았음을 알게 된다.


두번째 앨마 싱어. 사랑의 역사를 감동 깊게 읽은 엄마가 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 앨마.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고, 사랑의 역사를 번역하는 엄마와 동생과 함께 산다.

사랑의 역사 번역을 의뢰한 제이컵 마커스와 엄마를 연결시켜 주려 하지만 제이컵 마커스가 아이작이 쓴 소설의 주인공 이름임을 알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사랑의 역사를 쓴 사람인 레오 거스키를 만나게 된다.


세번째 인물은 즈비 리트비노프. 거스키의 친구지만 친구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가 쓴 소설을 번안해서 출간한다. 출간할 마음이 없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인 로사의 권유로 자신의 작품인 양 출간하고 죄의식에 시달린다. 다른 이름들은 다 바꾸지만 앨마만은 바꾸지 않는다. 이 바꾸지 않은 앨마라는 이름이 결국 소설에서 흩어져 있던 인물들을 연결지어 준다. 


결국 끈은 앨마인 것이다. 앨마. 이 이름으로 인물들은 모두 사랑의 역사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아름다운 사랑, 슬픈 사랑은 나치 학살이라는 역사적 재난이 배경이 된다.


만약 나치 학살이 없었다면 레오와 앨마는 기복이 없는 사랑, 생활을 했으리라. 그러나 그들은 역사의 격랑 속에서 각자 다른 삶을 살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지게 되며, 그것은 전쟁 이후 앨마라는 소녀와도 연결되게 된다.


역사적인 재난과 사랑을 연결짓고, 서로 다른 인물들을 등장시키면서 그 인물들이 서로 연결되어 가는 과정을 짜임새 있게 서술하고 있다. 여기에 사랑은 슬픔을 동반하고 있음도 생각하게 하고 있고, 이 슬픔이 더한 사랑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음도 앨마의 동생 버드를 통해서 알게 해주고 있다.


무척 흥미진진하면서도 마음을 울리는 소설이다. 다른 소설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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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5-29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갖고 있는데 못읽었어요
감동적이네요.
조만간 읽어야겠어요 ㅎㅎ

kinye91 2025-05-29 22:00   좋아요 1 | URL
네, 전 이 소설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