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운데이션 1 - 위험한 서막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최서래.김옥수 옮김 / 현대정보문화사 / 2002년 9월
평점 :
절판


아이작 아시모프가 쓴 '아이 로봇'을 흥미롭게 읽었고,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은하대백과사전'이야기가 있어서, 이 책을 읽어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정말 흥미를 주는 책이라는 생각에... 새로운 판본이 나왔지만,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예전 판본.


무려 10권이다. 발표한 순서와는 좀 다르게 구성되었다는 해설이 있는데, 이 구성방식이 시간 순서대로 소설을 이끌어가고 있으니 이해를 돕기 위해 그렇게 했을 수 있다.


아시모프가 오랜 시간에 걸쳐서 소설을 썼다고 하니, 마치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겠다. 소설을 발표 순서대로 읽으면... 스타워즈 역시 시간 순서가 아니라 여러 그 사이사이 사건들이 에피소드라는 이름으로 영화화 되었으니 말이다.


발표할 때마다 읽지 않았으니, 시간 순서대로 구성한 소설을 읽는 일도 이해를 더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겠다. 


제목이 '파운데이션'이니 기본이라는 뜻인가 아니면 창립이란 뜻인가,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우주 멸망을 수학적으로 예언할 수 있다고 생각한 수학자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수학하면 명증한 논리니까, 수학으로 우주 멸망이 증명된다면 우주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수학적으로 우주가 번영한다고 증명이 되면 우주는 번영한다. 그것을 수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 해리 셀던이 나오고, 그를 이용하려는 우주 세력이 등장한다.


셀던은 이론적으로 증명이 가능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실현불가능하다고 하지만, 실제로도 가능하게 연구를 계속하라는 설득을 받고 연구를 하려고 한다. 그 사이에 그를 둘러싼 여러 음모가 벌어지고, 그는 자신의 연구를 성공하기 위해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으로 가게 된다.


1권은 그런 수학자 해리 셀던이 겪는 모험으로 시작한다. 그는 학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지만, 그의 이론은 이미 너무 위험하다. 다른 세력들에게 각자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당할 수가 있다.


얼마나 합리적인가? 수학적으로 예견된 일이라고 한다면... 그것도 자신들의 지배가. 이는 심리역사학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해리 셀던이 연구하고 확립하고자 하는 학문이 바로 '심리역사학'이고, 이것이 정립되면 그것은 기정사실이 될 수밖에 없다. 수많은 변수들을 계산에 넣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즉, 심리역사학이 정립되면 우연도 필연의 일부가 된다. 그러니 우연에 의해 필연이 바뀌는 경우는 없게 된다. 


하지만 지배자가 되고자 하는 세력에게는 예언(증명)의 진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는 진실이 아니라 자신에게 유리하냐 불리하냐가 더 중요하다. 그러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예언을 비트는 일쯤이야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은하제국의 황제에게도, 또 그의 이론을 알게 되는 또다른 세력에게도. 여기에 은하가 멸망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낀 사람이 등장한다. 이들에게는 은하 멸망이 예견된 일임을 증명하는 일이 중요하다. 왜? 그래야 대책을 세울 수 있으니까.


지금 기후위기를 이야기한다. 어떤 학자는 기후위기는 조작되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많은 학자들은 기후위기는 현실이며, 이 현실을 인정해야 극복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고 한다. 기후위기에 대해서도 각 나라는 서로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을 하고 정책을 입안하려고 하고 있는데...


은하멸망이라는 예언(증명)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온갖 세력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을 하려 할테지만, 정말 은하 멸망이 현실로 다가왔다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다음 방책을 마련하는 방법으로 그 이론이 필요하게 된다. 


셀던을 도우려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이론이 정립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그 이론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고, 멸망 이후를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력 유지를 원하는 세력에게는 이론 정립까지는 필요없다. 셀던이라는 사람이 했다고만 하면 된다. 그렇게 하지 않는 셀던은 위험한 인물이 되고, 그는 제거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셀던의 이론 정립이 필요한 사람들은 해리 셀던을 도우려 한다. 멸망이 기정사실이라면 그 이후의 일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인데... 아직 해리 셀던은 자신의 '심리역사학'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는 그 이론을 완성하기 위한 첫발을 내디뎠을 뿐이다. 


다양한 자료 혹은 방법론을 확립하기 위해 은하제국의 영향력이 덜 미치는 곳으로 간 해리 셀던.

이것이 바로 1권의 내용이다. 이제 그는 자신의 방법론을 확립하기 위한 연구를 계속해나갈 것이다.


이 1권 곳곳에 지구를 암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태초에 인류가 한 행성에 살았고, 그 행성은 푸른색이었으며... 어쩐 일로 우주 전체로 흩어져 살게 되었고, 이제는 그 행성의 존재는 전설로 남아 있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지구 역시 몇십억 년이 지나면 사라지고 말 것임을... 태양의 폭발로 함께 사라질지, 아니면 인류의 무분별한 생활로 사라질지는 모르겠지만, 지구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아주 먼 미래라 할지라도.


자, 지금 우리는 지구가 사라지는 때를 상상할 수는 있지만 현실로 느끼지는 못한다. 너무도 멀리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지구가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면 될까? 아니, 그 이후를 생각해야 한다. 우주로 나갈 생각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겠지만, 먼저 지구를 이 소설에서처럼 전설로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들의 삶을 돌아봐야 한다.


인종, 성, 나라 등등의 차이를 부각하기보다는 인류라는 공통점을 내세워야 한다. 그리고 협력해야 한다. 우리 인류는 대동소이하지 않나. 많은 점에서 비슷하고 적은 점만 다른데, 그 다름을 부각시켜 너니 내니 하면서 갈등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이 소설, '파운데이션 - 위험한 서막'을 읽으며, 지금 지구를 생각한다. 아직 아무도 믿지 않는 은하 제국의 멸망... 우리 역시 지구의 사라짐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 될 수 있다. 준비를 해야 한다. 그 준비를 하기 위해서 그것이 진실임을 증명하려는 '심리역사학'을 정립하려는 해리 셀던과 그를 돕는 사람들, 그리고 그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사람들. 이야기는 계속된다.


이제 2권으로 간다. 아주 오래 전 역사책을 구한 해리 셀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모든 미래는 과거로부터 시작된다. 또한 우리는 방대한 우주 상상력 속에서 지구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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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주부들이 집에서 하는 가사노동을 그림자 노동이라고 한다.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일이지만 어떠한 대가도 지불하려 하지 않는 노동. 그래서 보이지 않는 노동이 되고, 보려고 하지 않는 노동이 되기에, 일을 하면서도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어디 이런 일이 가사 노동뿐일까? 우리 사회를 둘러보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가 보려고 하지 않는 곳에서 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없으면 사회가 유지되기 힘듦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외면당하고 있다. 마치 없는 존재처럼, 아니면 공기처럼 그렇게 하는 노동이 당연하다는 듯이.

 

  과연 그럴까? 그들을 보려 하지 않는 태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태도가 바로 그들을 우리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배척하는 태도 아닐까.

 

서로 어울려 살아야 한다면서도 애써 우리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들의 존재가 드러나면 마치 문제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자신들에게 꼭 필요할 때만 그들을 소환하지는 않았는지... 그 다음에는 토사구팽도 아니고, 그냥 다시 없는 존재로 취급하고 만 경우가 많은데.

 

문태준 시집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을 읽으며 시집의 마지막에 실린 시 '일원'을 읽으면서 이렇게 모두 모여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우리들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일원

- 바라나시에서

 

  누운 소와 깡마른 개와 구걸하는 아이와 부서진 집과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돼지와 낡은 헝겊 같은 그늘과 릭샤와 운구 행렬과 타는 장작불과 탁한 강물과 머리 감는 여인과 과일 노점상과 뱀과 오물과 신(神)과 더불어 나도 구름 많은 세계의 일원(一員)

 

문태준,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창비. 2015년. 80쪽.

 

이렇게 우리는 세계의 일원으로, 그냥 맑고 깨끗한 세계가 아니라 '구름 많은 세계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자신만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우리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일원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존재들이 있지 않은가. 일원이 아니라 마치 다른 존재인 것처럼, 그들을 배척하고 자신들만의 세계를 공고하게 구축하고 있지 않았는가.

 

마치 자신의 눈에 보이는 존재, 그것도 자기 밑이 아니라 자신과 동등하거나 위에 있는 존재들과만 어울리고, 그들을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살지는 않았는지.

 

이 '일원'이란 시에서 펼쳐진 세계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위만 보아서는 안 된다. 밑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문태준의 이 시집 첫번째에 나온 시를 볼 필요가 있다. 이 시집의 처음과 끝이 이렇게 연결될 수 있음을.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노랗게 잘 익은 오렌지가 떨어져 있네

붉고 새콤한 자두가 떨어져 있네

자줏빛 아이리스 꽃이 활짝 피어 있네

나는 곤충으로 변해 설탕을 탐하고 싶네

누가 이걸 발견하랴,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태양이 몸을 굽힌, 미지근한 어스름도 때마침 좋네

누가 이걸, 또 자신을 주우랴,

몸을 굽혀 균형을 맞추지 않는다면

 

문태준,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창비. 2015년. 10쪽.

 

고고하게 홀로 유유자적 하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존재를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살기 위해서는 이렇게 자신의 몸을 굽힐 필요가 있다. 자신을 낮추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제서야 보이지 않던 존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로 인해서 우리가 삶을 영위하고 있었음을, 그동안 보이지 않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일원이다. 몸을 굽혀야 일원이 될 수 있다. 이런 행위는 그들을 자신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넘어서 자신이 그들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렇게 문태준 시는 우리가 세계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몸부터 굽힐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사람뿐만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세상의 모든 존재를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래야만 자신도 그들과 일원이 될 수 있다.

 

모두가 우리인 일원인데, 어찌 보인다, 보이지 않는다고 또는 중요하다 중요하지 않다고 편을 가르고 나누는 삶을 살 수 있겠는가.

 

시인은 그런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우리는 모두 일원이라고, 우리 모두 몸을 굽힐 줄 아는 존재가 되자고 시집에 실린 첫시와 끝시를 통해서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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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계가 불확실할 때, 관계를 잘 맺지 못할 때가 많다. 낯선 사람을 만날 때가 그렇다. 그런 낯섬에서 익숙함으로 갈 때, 징검다리가 있었으면 좀 수월하게 익숙함으로 갈 수가 있다.

 

  그 징검다리 역할을 무엇이 할까? 많은 관계들을 맺어가면서 살아가는데, 그 전에 맺었던 관계들이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도 하고, 자신이 맺어지고 싶어하는 마음이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 인간은 낯선 타자와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요즘 관계 맺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학교에서는 온갖 따돌림들이 나타나고, 그래서 따돌림을 당하지 않으려고, 관계를 계속 유지하려고 옳지 않은 일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친구들 모임에서 떨어져 나오면 다른 친구들 사이로 들어가기가 힘들다고 한다. (이 때는 익숙함이 좋음이 아니다. 이때 익숙함은 옳지 않음이다. 그러니 낯섬에서 익숙함으로 갈 때는 좋음이라는 가치가 개입되어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벽을 쌓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벽이 쌓이고 관계 맺기가 힘들어지는 데는 소통이 안 되는 이유도 있다. 소통이란 자신의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데, 내 말뿐이 아니라 다른 말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말과 말들이 얽혀서 다른 말들을 만들어내어 튼튼한 관계를 맺게 해야 하는데, 내 말을 옳고 다른 사람의 말은 그르다는 식의 태도가 많아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직장에서도 괴롭힘이 일어나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소통을 잘할 수 있나 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빅이슈] 262호에서는 그런 소통의 방편으로, 즉 서로가 익숙한 관계 맺기로 나아가는 징검다리로 MBTI를 소개하고 있다. 성격유형이라고 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검사해서 16가지 유형 중에 자신은 어떤 유형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유형이 지니는 특성들을 이해하면 그 사람과의 관계 맺기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 오랫동안 만나서 그 사람의 말투, 행동, 생각 등을 추측할 수 있어서 이해 범위가 넓어지기 전에, 그 사람이 지닌 성격을 알고 그에 대해서 받아들인다면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MBTI는 유용하다. 다만, MBTI를 그 사람을 규정하는 방편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MBTI로 성격 유형이 나오더라도 그것이 그 사람 전부를 설명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은 의식적으로 자신의 부족한 면을 고치려고 하기도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이런 유형이니 이것에는 안돼, 우리하고는 안 어울려 하면서 또다른 배제의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결국 아무리 좋은 도구라도 잘못 쓰면 해로울 수밖에 없다. 그러니 좋은 관계, 익숙한 관계 맺기를 위해서 MBTI를 활용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맹신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빅이슈] 262호에서도 그 점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빅이슈] 자체가 바로 이런 좋은 관계 맺기를 하는 잡지 아닌가. 관계 맺기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을 다시 관계 맺기의 장으로 들어오게 하는 잡지.

 

이런 빅이슈를 보며 빅이슈도 좋은 관계 맺기를 하게 하는데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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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익 중장의 처형
야마모토 시치헤이 지음, 이진명 옮김 / 페이퍼로드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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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일본군 포로수용소 소장으로 전범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사형을 당한 조선인 장군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홍사익이라는 이름을.

 

이때는 그냥 친일을 한 사람, 그것도 일본 천황에 충성을 한 사람이라고 치부하고, 더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일제시대 일본군 중장까지 올라갈 정도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이어 일본 육군대학까지 나온 사람이니...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다. 왜 홍사익이지 하는 의문? 일본에서 중장까지 올라갈 정도의 사람이라면 창씨개명을 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왜 하지 않았을까?

 

저항시를 쓴 윤동주도 일본에 유학을 가기 위해서 창씨개명을 했는데, 왜 그는 일본 육군 중장이라는 장군이었는데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도 그런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가 하는 생각.

 

무언가 이상하긴 한데... 그러다 이 책을 만났다. '홍사익 중장의 처형'이라니... 그를 처형하기까지의 과정이 잘 나타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읽기 시작.

 

앞부분에서 그가 우리나라 광복군을 이끈 이청천(지청천) 장군과도 관계가 있고, 독립운동을 하는 동기들의 가족을 뒤에서 도와주었다는 내용도 나오는데, 이는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 연구하면 될 일이고...

 

일본군이든 광복군이든 아마도 동기라면 가족에 대한 도움을 거부하지는 못했으리라는, 그것이 인지상정이라는 생각. 그래도 민족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는 그리하지 않았을까라는 추측도 하지만, 이 책에는 그러한 증거로 '전의회(全誼會)' 회보를 들고 있는데, 이런 결정적인 증거가 있음에도 왜 그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리지 않았을까.

 

해방된 조국에서 그런 사실을 밝히는 일이 구구절절 변명한다는 느낌, 그렇게 구차하게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지 않겠다는 지사적 자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는데...

 

개인으로서 하는 행동과 사회에서 위치한 자리에서 하는 행동이 똑같은 행동이라도 결과는 다를 수 있고, 평가도 다를 수 있으니, 이에 대해서는 더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 책을 읽어보면 개인으로서의 홍사익은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일제시대 전쟁기에 과연 그는 어떤 행동을 했는가?

 

개인의 품성을 논외로 하고, 그는 포로수용소를 총괄하는 자리에 있었다. 물론 포로가 파견된 부대에 대해서는 지휘권이 없다고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지만 (전범 재판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가 포로수용소 총괄담당임은 틀림없다.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가 전범 재판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한 것은 어쩌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미 일본은 패망했고, 자신이 명령했든 명령하지 않았든 포로수용소에서는 잔학행위가 있었다. 그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침묵으로 일관하고 사형 판결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다만, 전범 재판에 대해서는 여러 방면으로 생각해 봐야 한다. 홍사익 중장은 억울한 면도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한 일본인들도 사형을 면하고, 나중에 일본 정계에 진출한 경우가 많은데, 그에게는 유독 가혹했던 이유는, 유럽에서 벌어진 포로에 대한 잔학 행위와 동남아 곳곳에서 벌어진 포로에 대한 학대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는 물어야 하고, 그 책임자가 바로 홍사익 중장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점에서 그는 자신의 책임을 받아들였을 수 있다.

 

'인간은 모든 선의를 갖고 사람을 대하더라도 그것이 죄를 저지르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죄를 범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경우가 있다.' (679쪽)

 

'홍 중장은 가능한 한 선의를 가지고 포로를 대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으며, 그 면에서는 조금도 그의 양심에는 부끄러운 점이 없었다.' (680쪽)

 

이 구절에서 쿤데라 소설에 나오는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생각났다. 오이디푸스 역시 자신이 무슨 죄를 저지른지도 모르고 지냈다. 자신은 좋은 삶을 살았다고 믿으며 살았는데, 어느날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 알게 된다. 그것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한다.

 

홍사익 중장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한다. 그는 책임을 지려했고, 그 책임을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 역사에서도.

 

그러나 저자는 일본식 사고, 또는 일본식 행동에 대해서 미군이 주축이 된 전범 재판소에서 그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논리를 앞세운 그 재판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일본의 책임을 회피하는 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일본도 잘못했지만, 미국도 잘못했다로 나아갈 수 있고, 그 주장의 한 가운데 홍사익 중장을 놓을 수가 있다. 잘못된 재판으로 희생된 사람으로.... 이렇게 보면 일본과 더불어 미국에도 비판을 가할 수가 있다.

 

전범 재판의 문제점을 이야기하기 전에 식민통치를 한 일본의 책임을 먼저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자신들이 홍사익을 구하기 위해서 어떤 일도 하지 않았음도 인정해야 한다. 그가 조선인으로서 일본군 중장까지 갔고, 그 일로 인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면, 그 일에 대한 우선 책임은 일본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홍사익의 행동이 합리화될 수는 없다. 그 역시 역사의 흐름을 알지 못했고, 또 일본군에 복무했다는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갈 때 우리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의 행동에 찬성할 수 없지만, 그 역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린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 수레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 아렌트 말대로 성찰해야 한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어디로 굴러가는지 알려고 해야 한다. 자신이 그 수레바퀴가 오는 길에 있는지, 그 수레바퀴를 미는 쪽에 있는지, 또 수레바퀴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성찰에는 공부가 필요하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도, 철학을 배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홍사익 중장의 처형을 읽으면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린 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지금 우리 역사의 수레바퀴는 어느 쪽으로 가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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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lacWine 2021-11-05 17: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책이네요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kinye91 2021-11-06 15:41   좋아요 1 | URL
어느 정도는 홍사익이라는 사람을 알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들을 위해 정치를 하겠다고, 국민들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 여러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 요즘.


  기가막힌 말들의 잔치. 이 말들이 실현이 되었다면, 공허한 울림만 남기지 않고 현실에 자리를 잡았다면 지금 우리가 두려움에 싸여 있지 않았을텐데.


  사회적 재난을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시대, 이런 시대에 사람들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중무장을 하고, 남들로부터 보호하려 장벽을 쌓는다.


  함께라는 말, 더불어라는 말이 말로만 존재하고, 생활에서는 분리, 보호, 방어가 자리를 잡게 된다.


선진국에 들어섰다고 하지만, 선진국이 의미하는 바를 실제 생활에서 체감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몇몇 사람들은 우린 선진국이다라고 즐길 수 있겠지만, 더더 많은 사람들은 선진국은 말로만 존재할 뿐. 하루 벌어 하루 먹기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


먼 미래를 계획하지 못하고, 직장에서 언제 해고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삶. 해고는 죽음이라고, 해고된 이후에 사회에서 삶을 유지하게 하기보다는 개인이 제 삶을 유지하게 만든 사회. 그런 사회에서는 온몸에 가시가 돋고 남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할 뿐이다.


최승호 시집을 읽으며 자연을 파괴하는 사람들의 모습(부르도자 부르조아)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힘들게 하는 장면(늦게 도착해 본 광경)을 발견하기도 한다. 씁쓸한 마음이 든다. 


그러다 '마을'이란 시에서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본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가시를 달고 살고 있지 않은지.


마을


나비처럼 소풍 가고 싶다

나비처럼 소풍 가고 싶다

그렇게 시를 쓰는 아이와 평화로운 사람은 소풍을 가고

큰 공을 굴리는 운동회 날

코방아를 찧고 다시 뛰어가는 아이에게

평화로운 사람은 박수 갈채를 보낼 것이다


산사태는 왜 한밤중에

골짜기 집들을 뭉개버리는가

곰은 왜 마을을 습격하고

산불은 왜 마을 가까운 산들까지 번져오는가

한밤중에 횃불을 드는 마을의 소리

한밤중에 웅성거리는 마을의 소리


우리들은 고슴도치의 마을에서

온몸에 가시바늘을 키운다

평화로운 사람은 문을 걸고

잠속에서도 곰에게 쫓길 것이다


우리들은 고슴도치의 집에서

돌담을 높이 쌓는다

평화로운 사람은 한숨을 쉬고

문풍지 우는 긴 겨울 밤엔 장자를 읽으리라


최승호, 고슴도치의 마을, 문학과지성사. 2011년 재판 6쇄. 81-82쪽


평화로운 사람이 '문을 걸고', 평화로운 사람은 '한숨을 쉬고'... 과연 평화로운가? 이 평화는 언제 위협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함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문을 걸고, 돌담을 높이 쌓고, 한숨을 쉴 수밖에 없다.


이때 평화로운 사람은 힘이 없어 다른 사람을 괴롭힐 수 없는 존재다. 다른 존재와 함께 살아가야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또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힘든 상황에 처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행동할 수밖에 없다.


정말로 평화로운 사람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달릴 수 있게 하는 사회, 문을 걸지 않고, 돌담을 높이 쌓지 않고 한숨을 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 그런 마을.


말로만 그런 사회를 만들겠다고 하지 말고, 실제로 그런 사회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 그런 사람들이 정치인으로 인정받는 사회였으면 하는 생각. 


최승호 시집 '고슴도치의 마을'을 읽으면서 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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