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시집을 읽으면 청소년들의 생각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다. 청소년들이 직접 쓴 시라면 더욱 그 마음을 알게 되겠지만, 시인이란 존재는 본래 철이 없는 존재라, 청소년들의 마음을 대변할 수 있기도 한다.


  우리나라 대부분 청소년시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시집들 중에서 어른이 쓴 시들이 많은데, 누가 썼느냐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청소년들이 느끼는 마음을 얼마나 제대로 표현했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청소년시집을 낸 시인들 중에 교사들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청소년들을 가장 많이 만나는 직업이 교사일테니. 청소년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이 느끼는 마음들을 많이 느꼈을테니


이 시집을 쓴 이정록 시인도 교사다. 시집을 읽다보면 학생들을 이해해주는 교사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그가 쓴 시 '의자'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다른 존재들을 이해하고 함께 하려고 노력하는 시인이라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의자가 되어주라는 어머니 말씀을 시로 표현하고 있으니, 그런 시인이 교사라면 학생들이 언제라도 와서 쉬면서 기댈 수 있는 의자가 되어 주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런 시인에게는 지금 청소년들이 살아갈 미래가 암담하게 느껴졌으리라.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이 어른이 되어서 지내게 될 사회가 그들에게 즐거움과 만족감을 주지 못하고,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런 세상을 물려주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시집에 실린 시 '슬픈 종착'을 보면 정말로 이래서는 안 되겠단 생각을 하게 된다.


   슬픈 종착


규직이는 좋겠다.

서른 살쯤이면 너를 더 좋아할 거야.

네 이름을 입에 달고 살 거야.

약사 세무사가 꿈인 친구도

검사 변호사 감리사 사업가가 꿈인 애들도

다들 주문처럼 네 이름만 부를 거야.

규직아, 오, 정규직아.


이정록, 까짓것, 창비. 2017년. 44쪽.


이런 상황이 슬픈 종착이 아니라 지금 청소년들에게는 슬픈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나이가 거의 서른으로 되어가는 지금, 그들에게는 정규직이라는 말이 삶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낱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그때가 아니라 지금, 그것을 인식하고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더 슬프다. 그렇게 우리는 이미 사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청소년들에게도 미래에 대한 희망보다는 두려움을 먼저 알게 하고 있지 않은지.


슬픈 종착이 아니라 이미 슬픈 출발을 하게 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하게 된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게 해서는 안 되는데...


청소년 시집을 읽으며 희망보다는 불안을 느끼다니... 아니, 그들이 살아갈 세상을 이렇게 만든 책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세상을 후대가 살아갈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는 다짐을 이 시에서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교사로서 청소년들을 만나는 시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경고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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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지만 없는 아이들 - 미등록 이주아동 이야기
은유 지음,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 창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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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등록 이주아동은 공부할 권리는 있지만 살아갈 자격은 없는 모순된 현실에서 '있지만 없는 아이들'로 자라는 것이다.' (8쪽)


이것도 법이 바뀌어서 공부할 권리가 생겼다. 그 전에는 미등록 이주아동들은 학교에 가려고 해도 가기가 힘들었다. 배울 권리조차도 보장받지 못하고 지냈던 현실.


지금은 조금 나아졌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학교를 갈 수 있게 하고 있으니. 그러나 학교까지만이다. 미등록 이주아동은 학교를 마치면 곧 출국해야 한다. 우리나라에 더 이상 살 수가 없다. 여기서 태어나 (또는 아주 어린시절에 들어와) 자랐기 때문에 삶터가 바로 우리나라인데, 이 나라를 떠나라고 한다. 떠나지 않으면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법체류자가 된다.


이미 이들 아동의 부모들은 불법체류자가 (이 말을 쓰지 말자고 이 책을 쓴 은유 작가는 말한다. 언어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법을 어겼다고 하기 보다는 단지 등록이 안 되어 있다고 해야 한다고) 되었다. 그래서 단속에 걸리면 추방당한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에게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학습권을 보장했다고 하지만, 부모 없이 어떻게 학교를 마칠 수 있겠으며, 고등학교를 마치고는 부모의 나라로 가야 한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말도 통하지 않는 그곳으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미등록 이주아동 또는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되어 버린다.


이 책 말미에 보면 최근에 법이 바뀌었다고 한다. 미등록 이주아동들에게 조금, 아주 조금 유리하게 바뀌었는데, 이게 유리하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법무부는 2021년 4월 '국내출생 불법체류 아동 조건부 구제대책 시행방안'을 발표했다. (범부부 용어에서도 불법체류라는 말이 나오다니... 외국에서 온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잘 보여주는 용어다) 한국에서 태어나 15년 이상 한국에 체류한 미등록 이주아동들에 한해 체류자격을 심사받을 기회를 준다. (229쪽)


이 조항에 의하면 부모를 따라 아주 어릴 적에 온 아동은 해당되지 않는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부모를 따라와서 우리나라에서 초,중,고를 다녔다면 최소한 12년을 살게 된다. 그런데도 체류자격을 심사받을 자격조차 받지 못한다. 왜? 우리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또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다녔다고 하더라도, 영주권이 나오지 않고 겨우 체류자격 심사받을 기회만 주어진다. 뭐야? 만약 심사에서 통과되지 못하면 우리나라에서 살 수 없게 되거나, 아니면 부모들처럼 미등록 이주아동 또는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되어 버려야 한다.


생각해 보라.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또는 아주 어릴 적에 와) 여기서 자랐다면 언어나 친구들이 모두 우리나라에 있다. 부모 나라는 외국이나 다름없다. 그런 곳으로 가야만 한다고 하면 어떤 아동들이 가려고 하겠는가. 가려는 마음도 없겠지만 가도 우리나라에서보다 잘살 수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법무부에서 발표한 이 대책도 보완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책에는 이런 미등록 이주아동들의 이야기, 그리고 이들을 돕는 사람들 이야기, 부모 이야기가 함께 실려 있다. 운 좋게(?) 비자를 받은 아이도 있지만, 비자를 받지 못해(비자다. 영주권이 아니라) 미등록 이주아동으로 살아가야 하는 아이도 있다.


한 사람 한 사람 이야기를 읽으면서 누구보다도 국어(한국어)와 역사(한국역사)를 좋아하고 공부도 잘하지만 대학에는 갈 수 없는 아이, 비자가 없어서 통장도 만들 수 없는 아이, 그래서 비행기도 탈 수 없고, 공연장에도 갈 수 없는 아이의 이야기가 가슴을 때린다.


정말로 '있지만 없는 아이'가 되어버린 그 아이들의 이야기에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자랑스러워 하는 우리나라의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선진국이라면 적어도 사람을 등록, 미등록으로 나누기 전에 그들이 살 수 있게 해주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 후진국에서 개발도상국이 되었다가 이제는 선진국이 되었다면, 노블레스 오블리쥬라는 말이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에도 적용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우리나라가 선진국이라면 사람을 국적으로 나누기 이전에 사람이라는 공통점을 먼저 보고, 사람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 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또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아주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와 우리나라에서 고등학교까지(이제는 고등학교까지가 거의 무상교육이니) 다녔다면 우리나라에서 살아갈 권리를 주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것이 선진국이 지녀야 할 의무 아닐까. 여전히 '있지만 없는 아이들' 이 많다고 한다. 수십 만에 해당한다고 한다. 인구 절벽을 실감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아직도 국적으로 사람을, 그것도 아동들을 나눌 필요가 있을까?


국적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미국 시민권을 주는 경우와 같이 그런 아동들에게는 우리나라 영주권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국적은 논외로 하더라도 말이다.


이렇게 '미등록 이주아동 또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사회의 품격이 달라지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우리 사회의 품격이 높아지려면 이들을 먼저 사람이라는 관점에서, 사람이 지녀야 할 권리를 보장해주는 쪽으로 정책이나 법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진정한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사회의 품격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판명 된다. 그들을 지칭하는 언어에서도 사회의 품격이 나오고. 앞에서 '불법체류'라는 말을 썼지만, 이 말에는 이미 법을 어긴이라는 의미가 있으니, 이런 말 대신에 '미등록 이주'라는 말을 쓰자고 한다. 찬성한다. 


단지 등록이 안 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이 등록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그래서 '있지만 없는' 이 아니라 '있으면 있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책은 그렇게 나아가도록 우리를 이끌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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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이보이는창 2021년 가을호. 127호다. 이제는 나에게 오는 몇 안 되는 잡지다. 예전에 구독하던 많은 잡지들이 하나 둘 내 곁을 떠나가거나 내가 떠나가게 했는데...

 

  노동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책. 이 책을 읽으며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생각하게 된다.

 

  이번 호에서는 마지막에 실린 이인휘 소설(시인, 강이산)이 마음에 와 닿았다. 와 닿은 정도가 아니라, 입에 이름을 담기 싫은 사람이 세상을 떠나서도 다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꼴이 싫어서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그 사람이 득세하던 시절, 그리고 그가 뿌린 씨앗들이 득세하던 시절을 오롯이 살아간 사람의 이야기가 소설로 실려 있으니...

 

 물론 강이산으로 등장하는 그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1980-199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 소설 속 인물이라고 보면 된다.

 

시대의 격랑에 온몸을 맡기고 살아갔던 사람, 그 시대의 격랑에 결국 부서져 버린 사람. 이름을 입에 담기 싫은 사람이 아무런 사과도 용서도 구하지 않고 사라져버린 날, 그로 인해 고통을 받은 분이 차가운 물 속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용서받지 못할 그 누구는 거대한 병원장례식장에서 그가 뿌린 씨앗들의 조문을 받고 있는데, 그로 인해 고통받았던 사람들은 여전히 차가운, 딱딱한 곳에서 사람들에게 잊혀져 가고 있으니...

 

격동의 시대가 지나고, 인권의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우리도 이제는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이루었다고 하는 이 시대에도, 좋지 않은 과거와 연결된 끈을 완전히 끊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인휘가 쓴, '시인 강이산'은 너무도 아프게 다가온다.

 

이번 호에서 이 소설을 온전히 읽을 수 있어서 좋기도 하지만, 읽으면서 마음에 무거운 짐이 들어차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과연 우리는 이 소설의 주인공 강이산이 살았던 시대로부터 얼마나 멀리 왔을까?

 

우리는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을 얼마나 실현하고 있을까? 광주민주화운동을 계승해야 한다고, 더 멀리 가면 4·19혁명을 계승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87년 민주화 운동을, 촛불을 계승해야 한다고 하면서, 어쩌면 자꾸 과거를 잊어가고 있지는 않았는지 생각하게 된다.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사람 대접도 못 받고 개 끌려 가듯 경찰에게 끌려가는 장면,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친구를 도와줬다는 이유만으로 고문을 받고 정신이상이 되어버린 사람이 결국 죽음에 이르는 장면, 그러면서 자신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자책하면서 세상에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강이산의 모습.

 

과거로 머물렀으면 좋겠는데, 단순히 과거가 아니라는 생각에 씁쓸하면서도 마음이 아려왔으니...

 

'삶이 보이는 창'. 여전히 우리에게 가야할 길이 있음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이 있음을, 이런 소설을 비롯해서 여러 글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삶이 보이는 창'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 과거 악의 씨앗들이 자라나지 못하게, 좋은 씨앗들이 살아갈 수 있게, 우리들 마음을 다잡게,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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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언어 - 판타지, SF 그리고 글쓰기에 관하여
어슐러 K. 르 귄 지음, 조호근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19년 5월
평점 :
절판


어슐러 르 귄. 


요즘 들어 관심을 가진 작가다. 한두 작품을 읽다가 감동을 받아 여러 권을 사서 읽게 되었다. 빌려 읽은 소설도 있지만, 왠지 소장하고 싶은 작가의 작품이다. 소설만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쓴 글도 좋다. 그런 글에서 마음의 울림을 느낀다. 그러니 어찌 이 작가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권 두권 계속 사 모으기로 하고, 이번에는 '밤의 언어'라는 르 귄이 쓴 소설이 아닌 다른 글들을 편집한 책을 읽게 되었다. 최근에 번역되어 나온 책을 사서 읽었지만, 이 책은 아주 오래 전에 발간이 되었다고 하는데도, 읽는데 오래되었다는 느낌을 받지 않는다.


당시 르 귄이 느꼈던 문제들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면 우리는 그 동안 거의 50년이 흐르는 동안 무엇을 했는가 자괴감도 든다. 이 책에 실린 글에서 르 귄은 자신은 페미니스트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게 왜?" 라고.


그런데 지금도 우리는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왼고개를 젓는 사람들이 있다. 또 이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과격, 편협과 연결지어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왜 그럴까? 아직도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 생각하고 대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남성이고 여성이고 또는 다른 성을 추구하든지 간에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모두가 같을텐데...


사람이라는 공통점을 먼저 앞세우고, 거기서 성별로 나는 차이를 인정하면 차이가 차별이 되지는 않을텐데, 아직도 그러니, 당시 르 귄이 난 페미니스트다. 그게 왜 문제인가라고 말하는 모습이 강렬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최근에 읽은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을 SF작품이라고 하지만, 그런 용어를 쓰기 이전에 먼저 소설이라고 하는 편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은 르 귄의 글을 읽고 더 강하게 들었지만...


이처럼 이 책에 실린 어느 글을 읽어도 좋다. 작가에 대한 이야기, 작품에 대한 이야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 글쓰기에 관한 글들이 실려 있어서 굳이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아도 된다. 그냥 아무 글이나 펼쳐서 읽어도 르 귄이라는 사람을 알아갈 수 있다.


몇몇 구절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환상 작가들은, 신화와 전설이라는 고대의 원형을 인용하는 사람이든, 아니면 보다 젊은 과학과 기술의 원형을 끌어들이는 사람이든, 사회학자들만큼이나 진지하고 어쩌면 훨씬 직설적으로,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인간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18쪽)


이것이 바로 이런 소설을 읽은 이유가 되고, 르 귄이 이렇게 평가받는 작품을 쓰는 이유다. 우리 인간의 삶에 대해서 르 귄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에 어떤 이름을 붙여 한쪽으로 규정하는 일은 잘못이다. 소설은 소설일뿐이다. 소설이라는 큰틀을 인정하고, 소설에서 작가만이 지니고 있는 특성을 찾아야 한다. 


작품을 하위 분야로 분류하고, 그 틀에 가두는 일이 문제가 있음을, 그렇게 틀로 나누고 가둬 그 작가를, 또는 그 작품을 이해하는데 한 가지 틀만 제시하면 안 된다고... 작가들은 작품을 통해서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르 귄은 이 책 도처에서 하고 있다.


  상상력을 위협이라 여기는 사람들은 보통 판타지 작품을 '유치하다'고 치부해 버린다. 그러나 이런 배제야말로 자신이 무력하며 노쇠한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판타지 세계를 창조하고 보존할 때는 어린아이의 역할이 중심이 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정치가, 이득에 눈이 먼 상인, 관능주의자들은 상상 세계의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다.(294-295쪽)


자ㅡ 우리는 얼마나 상상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또 즐기고 있는가. 예전 생각을 해보자. 학창시절에 소설책을(어떤 소설책이든 상관없었다. 세계 명작이든, 추리소설이든, 로맨스 소설이든) 읽다가 교사에게 걸리면 교사들은 대뜸 공부 안하고 이런 것이나 읽고 있느냐고 야단을 쳤다.


상상력이 가장 잘 발휘된 문학 작품을 꿈으로 가득 찬 시기에 들어선 청소년들이 읽다가 야단을 맞는 경우, 이런 경우 우리는 더이상 상상력을 지닌 존재로, 세상을 새로움이 가득찬 경이로운 세계로 보는 눈을 지닌 존재로 지낼 수가 없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자라왔다.


하지만 이렇게 자라왔다고, 후대 세대들에게까지 이런 모습을 강요해야 하는가. 입시라는 굴레로 여전히 상상력이 억압당하게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 마음보다 시험 점수를 올려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해야 하겠는가.


이런 모습들은 우리가 상상의 세계를 완전히 막아버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니 판타지라고 하든 환상이라고 하든, 아니면 고전이라고 불리는 작품이든 읽을 시간조차 주지 않고 있는 이 현실에서 르 귄이 말하고 있는 앞 구절은 우리에겐 아프게 다가온다. 그것을 '유치하다'고 표현하는 사람들, 자신이 늙어버린, 무력한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는 이 말이...


제목이 된 '밤의 언어'. 자, 밤은 명징함을 넘어서 상상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는 때다. 밤의 언어는 바로 그런 상상의 세계로 들어서는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계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인도하는 언어...


르 귄의 글은 바로 그런 밤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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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장의 말이 가슴을 때린다.


  "빅이슈가 지구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잡지를 만들지 않으면 됩니다. 무엇이든 인간이 만들어 내놓는 것은, 아무리 좋은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해도 결국 쓰레기로 변합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도, 인간 한 명이 지구에서 사라지는 게 가장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렇다고 우리가 잡지를 비롯한 여러 물건을 생산하지 않고 존재하기를 멈춰버릴 순 없으니 그 외의 것들을 해보려고 시도하는 거죠.' (8쪽)


  섬뜩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이 말에 의하면 인간이 살아가는 행위 자체가 지구에는 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최소한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필요한 만큼 쓰는 일. 더 많은 욕심을 내지 않는 일. 먹고, 자고, 입는 일부터 생각해보면, 참 쉽지 않은 일이다. 필요한 만큼 먹고, 필요한 만큼만 집을 얻고, 필요한 만큼만 옷을 입는다는 일... 그 필요라는 말이 사람에 따라서는 달라질 수 있기에...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내가 쓰지 않고 버리는 일은 삼가야 한다. 버려지는 물건을 가장 작게 하는 일. 그러면 필요한 만큼에 가까워진다.


코로나19로 일회용품 사용이 늘었다고 한다. 안전을 위해서 배달음식을 먹는데, 배달음식의 특성상 일회용 용기에 담겨 오는 경우가 많다. 또 식당에서도 안전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종이컵을 내놓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은 한번 쓰고 버려지게 된다.


내가 먹을 음식을 담을 용기가 한번 쓰고 버려지는 일, 이는 필요한 만큼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한번 쓰고 버려지는 그릇들이 아니라, 한번 이상 쓸 수 있는 그릇들을 배달음식에 사용할 수는 없을까? 안전에는 문제가 없을까? 


[빅이슈]263호에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실천하는 사람들 이야기가 있다. 우선 일회용품이 아닌, 여러 번 쓸 수 있는 용품을 다회용품이라고 하는데, 다회용품에 대한 설명이 나오고 있다. '나 하나 실천한다고?' 라는 말보다는 '나 하나라도 실천해야지'라는 말을 할 때 지구에 쓰레기는 줄어들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씻기를 잘하면 안전에도 별 문제가 없고, 지구가 감당하지 못할 쓰레기를 만들어내기보다는 내가 조금(혹은 많이) 불편함을 감수하겠다는 마음이 있으면, 또 그런 불편함보다는 다회용품을 썼을 때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글들이 실려 있다.


아직은 시작단계지만 배달음식 그릇을 스테인레스 용기로 제공하고, 음식물을 가정에서 처리하지 않고, 그 용기에 그대로 남겨서 내놓으면 수거해서 세척한 뒤 다시 음식점에서 사용하도록 하는 사업이 시행되고 있다고 하니... 

(이런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데 관심이 있다면 [빅이슈]263를 참조하면 된다)


다회용품 사용이 불편하지만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배달음식을 시키더라도 일회용품으로 와도 남은 음식물을 처리해야지, 플라스틱에 묻은 음식물 흔적을 닦고 분리배출을 하는 일보다는 그냥 통째로 내놓는 일이 더 편할 수 있다.


일회용품도 줄이고 우리도 편해지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사업들이 소개되고 있으니, 자활, 자립을 이야기하는 [빅이슈]다운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편집자의 말처럼 멈춰버릴 수는 없으니 무엇이라도 시도해보려는 움직임을 보여줘 지구와 우리가 공존하는 길을 만들어가고 있음을 [빅이슈]가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편집자의 말이 가슴 아프게 다가오지 않고, 우리가 실천해야 할 방향을 제시한 말로 다가오게 해야 한다.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이번 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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