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세상과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별다른 불편 없이 또 별다른 두려움 없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고 두려운 세상이라면.

 

  공정한 세상라고 할 수 있나? 그럼에도 내가 느끼지 못했다고 그런 세상이 아니라고 할 수 있나.

 

  아니다. 내가 느끼지 못해도 누군가에게는 공포스러운 세상일 수도 있다. 바로 내가 편안하게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어두운 거리를 어두움에 대해 약간의 두려움을 지니고 걷는 사람과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또는 성폭력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지니고 걷는 사람에게 같은 세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런 두려운 세상에서 목숨을 잃거나 상해를 당하거나 했던가. 그런 세상을 마치 없는 듯이 아주 극소수에게만 일어나는 일인 듯이 이야기 해서는 안 된다.

 

기사로만 접하는 사실과 시로 만났을 때는 느낌이 다르다. 이소호가 쓴 시는 예전 황지우가 쓴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시로 끌어와 쓴 황지우. 신문기사를 모아서도 시로 만들어냈던 그의 모습을 이소호 시에서 보게 된다. 이 시 '누구나의 어제 그리고 오늘 혹은 내일'이란 시도 그렇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기사화 됐던 사건들을 나열하고 있지만, 그냥 나열에 그치지 않는다. 시를 통해서 누구의 삶이 이렇게 불안정하고 위협을 당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그 누구가 우리는 어떤 존재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시에는 각 번호마다 설명이 달린 주가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만 시를 복사한 그림을 보면, 시 내용 곳곳에 있는 숫자들이 그 누구에게 상처를 주는 칼, 창과 같이 느껴진다.

 

주가 없을 때보다 주가 있는 시로 보는 편이 시의 내용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인쇄가 약간 삐딱하게 됐는데... 그래도)

 

 

 

 

 

 

 

 

 

 

 

 

 

 

 

 

 

 

 

 

 

 

2021현대문학상 수상시집, 현대문학. 2020년. 181쪽. (주는 182-184쪽에 있다)

 

이 시를 읽으면 섬뜩해진다. 아니 부끄러워진다. 여전히 이런 일이 뉴스에 나온다는 사실을 알기에.


평생을 살아가면서 이 시에 있는 주가 38개인데, 38개의 칼을 맞는다면 사람이 견딜 수 있을까. 아니 언제 어디서라도 칼이 날아올 수 있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시는 이런 세상이 있음을, 그것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이런 세상을 우리가 바꾸어야 한다고.


누구는 누가 될 수도 있다고. 이것이 꼭 특정 성별에게만 적용되는 일은 아니라고. 특정 성별, 또 성적 지향 때문에 이렇게 공포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누구나의 어제와 오늘은 이럴지 몰라도 내일은 이렇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메타버스 - 디지털 지구, 뜨는 것들의 세상 메타버스 1
김상균 지음 / 플랜비디자인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메타버스'란 말이 자주 나온다. 이제 메타버스는 우리에게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거부한다고 거부할 수 없는,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메타버스다.


메타버스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디지털 세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인 김상균 교수는 메타버스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코로나19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이런 언택트 세계를 메타버스(metaverse)라 부릅니다. 스마트폰, 컴퓨터, 인터넷 등 디지털 미디어에 담긴 새로운 세상, 디지털화된 지구를 뜻합니다. 인간이 디지털 기술로 현실 세계를 초월해서 만드러낸 여러 세계를 메타버스라 합니다. (11쪽)


이 말에 따르면 이미 메타버스는 오래 전부터 우리 곁에 있었다. 우리가 인지하고 있었든, 인지하지 못했든 메타버스는 이미 우리의 현실세계와 더불어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 중요성을 코로나19로 인해 깨닫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메타버스는 갈수록 우리 삶에서 중요해질테고, 우리는 현실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메타버스 속에서도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긴 지금 인식하지 않고 있지만, 핸드폰을 산 직후부터 우리는 자연스레 메타버스 속에 들어가 있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기록되고 남겨진다. 핸드폰은 내게 편리함을 주기도 하지만, 바로 나 자신을 다른 세계에 기록하고 남겨두기도 한다. 그리고 핸드폰을 통해서 다른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기도 하고.


굳이 게임이나 거창한 플랫폼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핸드폰을 사용하는 순간, 이미 메타버스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고 한다면, 얼마나 많은 메타버스들이 존재할까?


이 책은 메타버스를 네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강현실 세계, 라이프로깅 세계, 거울 세계, 가상 세계.


한번쯤을 들어봤음직한 세계들인데, 증강현실은 몇 년 전에 포켓몬 고라고 해서 스마트폰으로 현실에서 포켓몬을 얻는 행위를 하게 하는 일들이 있어서 우리에게 알려진 세계다. 이런 게임 세계말고도 우리 감각으로 느낄 수 없는 세계를 느끼게 해주는 세계가 바로 증강현실 세계라 할 수 있다.


라이프로깅 세계라는 말은 낯선 언어인데, 이를 예전에 일기를 쓰고,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행위라고 보면 쉽게 이해된다. 라이프, 즉 삶을 로깅, 기록하고 남겨놓는 세계. 그래서 사소한 행위조차도 모두 기록으로 남겨지는 세상. 


몇십 년 전에 벌어진 사건, 또는 자신이 올렸던 글도 살아남아 위력을 발휘하는 경우를 지금 많이 보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라이프로깅의 힘이다. 라이프로깅의 세계는 이렇게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코로나19로 역학조사가 강조될 때 자신의 행적에 대해서 거짓을 말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핸드폰을 통한 위치 추적이나 카드 사용내역 등으로 이들이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가 속속들이 밝힐 수 있었다. 바로 라이프로깅 세계다. 그런 세계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자신이 능동적으로 참여하지 않아도 이런데, 능동적으로 온갖 사회적관계망서비스(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 글이나 사진을 올리는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거울 세계는 우리들이 직접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하는 행동을 보면 내가 하는 것과 같은 부위의 뇌가 자극을 받는다는 사실과 같다. 거울 세계를 대표하는 메타버스가 플랫폼이라고 보면 된다.


배달을 주로 하는 플랫폼이나 숙박을 주로 하는 플랫폼 등. 이들은 음식점을 소유하지도, 숙박 장소를 소유하지도 않았지만, 이들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면서 현실 세계와 같은 행위를 한다. 사람들 역시 현실 세계와 같이 느끼고 행동하고.


앞으로 더 많은 발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많은 메타버스인데, 택시 회사를 설립하지 않아도 각자 가지고 있는 자동차를 필요로 하는 사람과 연결시켜 주는 우버와 같은 플랫폼도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플랫폼들은 앞으로도 더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


가상 세계는 친숙하다. 사실 많은 영화에서 이런 가상 세계를 많이 다루기도 했고. 게임 역시 일종의 가상 세계다. 자신이 현실에서 하지 못했던 역할들을 가상 세계에서는 할 수도 있으니, 인간은 예전부터 이러한 가상 세계를 창조해 오지 않았던가.


디지털이 발전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예술을 통해서 가상 세계를 경험했다면, 디지털 세상에서는 현실과 비슷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의 경계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기도 하고.


이렇게 네 부분으로 메타버스를 나누어 설명하고 난 다음에, 앞으로 메타버스를 어떻게 이끌어가야 할지를 현실에 존재하는 기업이나 연예인들의 활동을 통해서 제안하고 있다. 


메타버스에 대해서 지나치게 열광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비판적이지도 않게, 지금까지 발전해온 메타버스를 간명하게 설명해주고, 미래에 메타버스를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도 제안하면서 책을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메타버스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나 막연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메타버스 입문서로는 참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저자가 한 이 말도 명심하면 더 좋겠다. 우리는 메타버스를 벗어나지는 못하겠지만, 우리 삶은 현실에 있다는 것을.


메타버스는 인류의 삶을 확장하기 위한 영토여야 합니다. 누군가를 위한 도피처, 누군가를 위한 수용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메타버스를 창조하고자 꿈꾼다면, 당신의 목적이 무엇인지, 당신의 메타버스가 우리 삶을 어떻게 확장할지 고민해 주시기 바랍니다. 메타버스의 사용자라면, 당신이 그 세계에 머무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 세계가 당신을 삶을 어떻게 확장하고 있는지 돌아봐주시기 바랍니다. ... 저는 메타버스의 활용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지만, 메타버스가 우리 삶을 대체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371쪽)

 

이것이 우리가 메타버스를 알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겠다. 현실에 굳건하게 발을 디디고 살아가기 위해서 매타버스를 필요로 해야 한다. 메타버스 속에 들어가 현실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쩌다 시에 꽂혀서는 텍스트T 2
정연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주인공은 고등학교 1학년 학생. 아빠는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고 밖으로 돈다. 엄마, 할머니와 함께 살다가 엄마가 돌아가신다. 충격. 아빠가 돌아왔다. 아빠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아빠라는 말을 할 수도 없다. 원망만 있다.


이제 아빠 고향으로 가게 된다. 처음으로 가게 된 아빠 고향. 왜 그럴까? 소설은 여기서 궁금증을 유발한다. 왜 아빠는 밖으로 돌았을까? 그는 왜 고향에 가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제 와서 왜 고향으로 돌아갔을까?


부모의 죽음은 충격이다.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남긴다. 그것도 받아들이기 힘든데, 남남처럼 지내던 아빠와 함께 살아야 한다. 낯선 곳에서. 어쩌면 낯선 곳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에 좋은 장소일지도 모른다.


주인공을 늘 웃는 표정의 아이로 그린 이유가 여기에 있겠다. 자신의 슬픔으로 밖으로 표출하지 못하는 아이. 이런 아이는 슬픔이 안으로 쌓이고 쌓여 나중에는 스스로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슬픔은 어느 정도 고여 있다가도 밖으로 흘러야 한다.


슬픔을 가둬두었다간 언젠가 댐이 터지듯 터져 감당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이 슬픔의 둑에 구멍을 내는 역할을 무엇이 할까? 언제까지 슬픔에 갇혀 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슬픔을 내보낼 구멍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시다. 우연히 자신에게 다가온 시. 시는 가슴 속에 남아 마음을 어루만지기도 하지만 슬픔이 나갈 구멍을 마련해주기도 한다.


이렇게 이 소설은 아이가 시를 만나면서 시를 쓰게 되고,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면서 피해가지 않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일종의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소설이 진행되면서 시가 곳곳에 나온다. 주옥같은 시라는 표현이 식상하지만, 소설에 나오는 시들은 마음 속에 콕콕 박힌다.


그런 시들을 읽는 재미, 소설의 상황에 맞게 등장하는 시는 우리에게 시가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게 해주기도 한다.


여기에 여자 등장인물, 은혜. 그야말로 은혜다. 축복이다. 이 은혜로 하여금 주인공은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모든 것이 주인공과 반대인 듯하지만, 그런 은혜에게도 상처가 있다는 사실. 그 상처를 은혜는 받아들이고 현재에 충실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자신에게도 현재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소설은 아빠와 화해하는 장면까지 가지 않는다. 아니, 갈 필요가 없다. 그 이후는 이제 많은 변화가 있을 수 있다. 때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을 지니겠지만, 그 과정은 결코 녹록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녹록치 않음을 회피로 가게 하지 않음을 예상할 수 있다. 시를 통해서 또 은혜를 통해서 자신을 들여다본 주인공은 이제 자기 삶을 긍정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까.


그렇게 자신을 긍정하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기. 이는 내가 바꿀 수 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후회 속에서 사는가? 후회는 앞으로 나아갈 발판이 되면 좋지만, 과거에 나를 머물게 하면 안 된다. 주인공인 아빠, 이 사람은 후회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는 과거에 잡혀 있었고, 또 그것으로 인해 현재를 살지 못했다. 그러니 가족을 구성하면서 아웅다웅 하면서 살아가는 일을 하지 못하고 회피했다.


나약함, 한때 시를 썼다는 사람이 시를 버리고 자신의 삶을 내놓은 삶을 살았다. 그런 그에게 갑작스레 현재가 다가왔다. 현실이 그의 앞에 떡 나타났다. 그 역시 현재를 살아야 한다. 자식과 같이 살아야 한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선택지가 없기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자신이 떨치고 떠난 곳. 새로운 시작은 자신이 버린 곳에서 해야 한다. 그리고 그는 이제 현재 속에서 길고도 긴 미래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자식과 함께 하는 삶을.


이런 삶. 자식은 시를 통해서 자기 슬픔을 내보내는 길을 찾았고, 은혜라는 친구를 통해 현실에 충실한 삶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를 통해 더 성숙해지는 길로 접어들었다.


이렇게 슬픔을 통해 성장하는 아이의 모습. 또 그 슬픔에 함께 하는 시들. 시를 통해 마음을 어루만지고, 자기 감정을 표현하고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일.


소설은 한 아이의 성장기이기도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시가 얼마나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소설을 읽어가는 재미도 있고, 소설 속 시를 만나는 즐거움도 있다.


어쩌다 시에 꽂혀서는, 아이는 시를 통해 슬픔을 위무하고, 슬픔을 내보낼 수 있게 된다. 그는 시를 통해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래, 이게 바로 시의 힘이다. 이런 시들을 곁에 두고 자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사람들이 갖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올해 마지막 호.


  한 해를 잘 보냈다고 하고 싶지만,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19로 인해 이 말을 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잘 지내야 한다. 내년에도 코로나19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전망이 있지만, 3년이 되어가니, 사람들이 적응을 하든, 극복을 하든 하지 않겠는가.


  두 해 동안 시행착오를 거쳤으니... 바이러스가 제 자리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변이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으니.


  그런 변이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역시 적응력이 뛰어난 존재니. 우리는 이 감염병에도 적응하고, 우리들 삶을 살아갈 것이다.


다양한 분야, 다양한 사람들을 다뤄주었던 빅이슈를 한 해 동안 읽으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 그렇게 내가 직접 만나지 못하는 존재들을 빅이슈를 통해서 만날 수 있는 한 해였는데...


내년에도 빅이슈를 통해서 더 많은 존재들을 만날 수 있고, 그들 삶을 통해 내 삶을 돌아보고, 내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번 호에 영국에 사는 이항규의 글이 마지막으로 실렸다고 한다. 다음 호부터는 이항규의 글을 볼 수가 없다는 서운함이 있지만, 그의 글을 통해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고마움을 전한다.


그가 이번 호에서 쓴 글이 마음에 와 닿았다. 밤길 운전을 할 때, 낯선 곳을 그것도 가로등도 없는 곳을 운전할 때의 두려움. 어쩌면 이것은 코로나19를 겪은 우리 인류들의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낯선 곳을, 한 치 앞을 보기 힘든 곳을 운전할 때도 도움이 주는 존재들이 있다고 한다. 앞서 가는 차들. 앞서 가는 차들의 빛을 보고 따라갈 때의 안도감. 그것은 함께 한다는 든든함이다.


우리가 감염병 시대에 겪는 어려움을 이렇게 함께 함으로써 극복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또 뒤에서 차가 내 속도에 맞춰 따라올 때의 고마움. 내가 늦게 간다고 씽씽 추월해가지 않고 천천히 함께 오는 차. 이것 역시 함께 한다는 고마움이다.


차만 그렇겠는가. 감염병 시대에 우리는 이렇게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존재들을 얼마나 많이 만났던가. 그들로 인해서 이 어려운 시대를 그래도 이겨나가려는 의지를 지니고 계속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빅이슈 또한 마찬가지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분들을 끌어주고 밀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고마운 잡지다.


빅이슈가 그러한 역할을 잘해주고 있다는 생각. 내년에도 또 그 후에도 빅이슈는 이렇게 어려운 처지의 사람이 포기하지 않게 밀어주고 끌어주는 역할을 할 것이라 믿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포스트 코로나, 아이들 마음부터 챙깁니다
하지현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코로나19와 함께 살아가자고, 단계적 일상회복 정책이 실시된 지 몇 달, 아니 한 달하고 조금 넘은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강력한 통제가 시작되었다. 코로나19가 발생한 지 2년이 넘어가고 있는데, 코로나19는 여전히 우리들 생활에 위협으로 다가온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고, 사람들도 이제는 백신 완료자들만 4명까지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이 말은 백신 접종을 완료하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밖에서 밥도 같이 먹을 수 없다는 말이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에게 백신 접종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회 활동을 하지 말라는 강제가 통용된다.


그럼에도 공동체라고, 다른 인간들을 위한다고 이것이 받아들여진다. 다시 강력한 통제가 시작되었고, 초규범사회라고 할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너무도 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는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우선하고, 또 참을성에 관해서는 거의 세계 최고 아니던가. 그러니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을 견디고 지금 우리나라를 있게 했지.


여기에 우리 조상이라고 일컬어지는 단군의 어머니 웅녀를 보자. 그야말로 인내심의 화신이다. 동굴 속에서 - 동굴은 이미 갇혀 있는, 다른 존재와 교류를 하지 않는 공간이 된다 - 쑥과 마늘로 - 얼마나 쓴가, 도대체 이것들만 먹고 견딜 수 있는가 - 버티어낸 존재 아닌가.


그런 조상의 자손이 바로 우리들이다. (이 책에 이런 내용이 나와 있다. 긍정으로 받아들이든, 부정으로 받아들이든, 우리 신화에는 이런 내용이 있으니, 우리 조상이 인내심의 화신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이렇게 협조를 잘하고, 나보다는 우리를 먼저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자 이런 인내심이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 코로나19로 다른 사람과 대면해 함께 지내면서 갈등하고 타협하는 경험을 해보지 못한 어린 세대들, 젊은 세대들이 과연 이런 인내심을 획득할 수 있을까?


웅녀 정도는 아니더라도 함께 살기 위해서는 나를 내어놓고 남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내 것과 남의 것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경험을 해야 한다. 내가 실패도 하고 실수도 하고, 또 남도 실패하고 실수하고,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경험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었다. 단지 공부라는 지식 습득만이 아니라. 코로나19로 이런 학교의 중요성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다시 전면 등교는 부분 등교로 바뀌었다. 다시 아이들을 온라인 속으로 가게 했다.


코로나19가 여전히 우리에겐 변수가 아니라 상수가 되었다. 늘 존재하는, 우리 삶에서 뺄 수가 없는 상수.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책은 제목에 '포스트 코로나'라는 말로 코로나19 이후를 생각하게 하지만, 실상은 지금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


어른들이, 특히 아이를 둔 부모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진단과 처방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좋은 처방이 있는데, 그 처방이 있는지도 모르고 지내면 안 되는데... 처방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그것은 부모들이 선택할 문제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런 처방이 있다는 사실은 알았으면 좋겠다.


부모들이 이 책을 꼭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런 진단... 판단은 각자 하지만, 코로나19 이후, 아니 지금 이후의 세계는 이렇게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먼저 인정할 것은, 이 시스템 안에서 상위 1~2%에 드는 '평균적으로 시험 보는 능력이 탁월한' 아이들은 분명히 큰 이득이 있고 좋은 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만일 아이가 이쪽에 재능이 있다면 저는 당연히 지금의 흐름대로 가는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머지 98~99%의 아이입니다. (133쪽)


자, 코로나19 시대에 우리가 우려하는 일은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가 깃드는 것이 아니라, 학력 저하 아닌가. 교육부에서도 학력 저하가 심각하다고, 학력 격차가 커졌다는 통계를 전면 등교의 가장 주된 이유로 삼지 않았는가. 아이들이 온라인 학습으로, 동굴에 갇혀 사회성을 잃어간다는 사실도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주된 이유는 이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앞으로 아이들이 살아갈 시대는 이런 학습으로 결판나지 않는다. 극소수만 지금처럼 해도 잘살 수 있다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대다수의 아이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이다. (이게 참 힘든 일이긴 하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부모들은 성적, 성적 한다. 이것을 깨기가 쉽지 않다. 이런 통계가 예전부터 주어졌지만, 읽지도 않고,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냥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치부한다. 사실 우리 아이들의 미래일 수 있는데...


머리가 좋은 아이보다, 타인을 돌보고 협상할 수 있고 나눌 줄 아는 아이가 교육 수준이 높았고 임금도 더 많이 받는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140쪽)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등교 수업을 해야 한다. 그리고 다양한 활동을 학교에서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코로나19로 인해 학교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감염병으로부터 안전하게 학교 환경을 만들고, 학생들이 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느냐를 고민하고, 그 방법을 실천해서 학교가 아이들의 사회화를 담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활동을 해야 '타인을 돌보고 협상할 수 있고 나눌 줄 아는 아이'가 나타날 수 있다. 온라인 수업으로 집이라는 동굴에 갇혀서는 이런 아이가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학교만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교육부에서 일방적으로 정한 지침을 단위 학교에서 어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럴 때 가정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렇게라도 하자고 한다.


아이의 남는 시간을 학습지로 채우지 말고 아이를 그냥 둬 보세요. 탐색하고 끙끙대고 '와, 재미있다' 하면서 혼자 해 보는 시간을 주세요. 혼나지 않으려고 하는 행동은 아이들의 마음에 두려움의 외적 동기 부여가 됩니다. 그보다는 해 보고 싶어서 해 보고, 아니면 말고 하는 마음으로 일단 시도해 볼 수 있는 동기 부여의 판을 부모가 펼쳐 줬으면 합니다. ... 내적 동기 부여는 아이가 십 대에 접어들면 더욱 소중해집니다. 이때는 호기심을 가지고 뭔가를 해 보려는 시도와 그에 대한 보상의 힘이 두세 배 강해집니다. (155쪽)


아이들에게 심심해 할 시간을 주라는 말이다. 심심해지면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 찾는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 간다. 이것이 바로 내적 동기 부여다. 그리고 심심할 때 상상력이 발휘된다. 이런 상상력은 미래를 살아갈 때 커다란 힘이 된다. 성적이 아니라, 상상력이.


앞으로의 세상에서는 스토리텔링 능력이 중요한 재능이 될 것입니다. 기대하고 상상하면서 떠오르는 생각 조각들을 잘 꿰어서 하나의 이야기 꾸러미로 만드는 능력 말입니다. (160쪽)


다양성의 사회에서 독립적인 삶을 만들어 갈 때 필요한 중요한 능력이 바로 상상력입니다. (162쪽)


이런 상상력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않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는 방법, 그것은 많은 실패를 해보고, 그 실패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경험을 해야 한다.


아이가 자라면서 안전하게 실패를 경험해 볼 훌륭한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놀이입니다. (170쪽)

 

놀이는 상상을 자극하고, 경계를 넘어서는 용기를 주고, 규칙을 익히고 사회성을 습득하도록 합니다. 노는 것이 공부인 셈입니다. (171쪽)


놀이, 공부. 함께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학교다. 그래서 학교는 문을 닫을 수가 없다. 코로나19 이후 시대도 마찬가지다. 학교는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다만, 지금과 같은 입시교육이 주가 되는 학교가 아니라, 아이들이 함께 지내면서 규칙을 만들고 실패를 겪으며 성장해가는 학교로 말이다.


이처럼 이 책에는 진단과 처방이 명확하다. 다만, 이런 처방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뿐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단군신화. 웅녀는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먹으며 견뎠다. 그것으로 끝인가? 아니다. 밖으로 나왔다. 환웅을 만났다. 그리고 단군을 낳았다. 동굴보다 동굴 밖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지금 우리 민족이 존재하게 됐다. (과학적이 아니라 신화적인 이야기다. 이것을 과학으로 증명해라 하지 말고.. 그냥 우리 신화로)


코로나19 이후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에게 동굴(온라인)로 들어가 생활하라고 할 수 없다. 동굴에도 있어야 하지만 아이들은 밖으로 나와야 한다. 함께 해야 한다. 그리고 어른들은 바로 아이들이 바깥으로 나와 함께 지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 책은 그 점을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니 우선 읽어야 한다. 처방을 알아야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하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