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모로우랜드 - 공상을 현실로 만드는 위대한 여정
스티븐 코틀러 지음, 임창환 옮김 / Mid(엠아이디)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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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공상을 현실로 만드는 위대한 여정'이라고 책 표지에 적혀 있지만, 공상이라는 말보다는 상상이란 말을 쓰는 편이 좋다. 상상은 공상과 다르다. 터무니 없는 생각이 아니라 언젠가는 가능한 상상. 그렇다. 인간은 상상을 현실로 만든다. 그것이 언제가 될지가 문제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생각해 낸 무엇은 언젠가는 현실이 될 수 있다. 이때 우리가 생각해 낸 무엇에 윤리적이지 않다면, 나중에 현실이 되었을 때 문제가 될 수 있다. 결국 상상에는 책임이 따른다. 책임의 윤리를 기술에 적용하지 않는다면 무한대로 기술은 확장되고,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될 수 있다.

 

이 책에 나온 유전자 정보를 가지고, 생물무기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 유전자 정보를 분석해서 질병을 치료한다는 긍정적인 측면과 그 유전자 정보를 이용해서 표적 테러를 할 수 있다는 부정적 측면이 존재하니, 기술을 어떻게 써야 할지에 대해서 치열한 논쟁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상상을 현실로 만들 때 우리가 명심해야 할 일이다.

 

환각제 사용도 마찬가지다. 환각제라는 표현은 순화된 표현이다. 우리는 이를 마약류로 분류한다. 인간에게 해롭다고 금지한 약물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다른 방향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환각제를 치료에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데... 미국이나 유럽에서 사용한 사례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고, 의학적인 처방으로 사용했을 때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다고 하니, 구체적인 사례들을 검증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 지금까지 상식이라고 생각해왔던 것과는 반대되는 주장들이 이 책에 많이 나와 있다. 환각제에 관한 이야기, 스테로이드제에 관한 이야기, 핵발전에 관한 이야기가 특히 그렇다. 좀더 구체적인 증거들을 찾고, 사례들에 대한 연구를 접하고 이 책의 주장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1부에서는 놀라운 과학기술 성과를 이야기 하고 있다. 인공관절이라고 할 수 있는, 절단된 신체를 보강하는 기술. 우리 몸보다도 더 뛰어난 능력을 지니게 하는, 그야말로 옛날 텔레비전에 나왔던 6백만 불의 사나이가 현실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시각장애인들이 볼 수 있게 해주는 시각임플란트라고 하는 기술도 발전해서, 거의 상용화되고 있다고 하니,이런 놀라운 기술발전은 인간에게 이로운 점으로 작용한다. 여기에 하늘을 나는 오토바이도 실현되고 있다니.

 

이제 영화에서나 보던 하늘을 나는 자동차들을 우리 실생활에서도 볼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우리 몸에 대한 이러한 기술의 발전말고도 우리 밖의 기술 발전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고 있고, 그동안 생각 못했던 점들을 알게 해준다.

 

소행성 광산업이라는 말도 이 책에서 처음 듣게 되었다. 소행성에서 광물을 채취하겠다는 계획이 있고, 어느 정도는 실행되고 있다고 하니, 참...

 

하지만 기술은 책임이 따라야 한다. 이 책에서도 그 점에 대해서 놓치지 않고 있다. 특히 정자 은행에 관한 장에서는 수많은 이복형제, 자매들이 태어날 수 있고, 이들이 서로 모른 상태에서 맺어질 수도 있다는 점. 자칫 잘못하면 기술발전이 헉슬리가 쓴 '멋진 신세계'가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게 우리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고 있지만, 이런 과정에서 책임에 대해서 심사숙고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어차피 상상이 현실이 되어가는 과정을 막을 수는 없다. 이미 인간이 상상했다는 사실에서 현실이 배태되어 있으니... 그러니 이러한 과정을 공개해서 책임에 대해서 공론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투모로우랜드, 미래의 땅, 약속의 땅이 될지 아니면 '멋진 신세계'가 될지, 그것은 우리에게 달려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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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라 2022-01-05 1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상상이 현실이 되는 시대네요. 이런 시대적 전환점에 태어난 세대는 어떤 면에서 축복 받은 것일 수도, 위기에 놓인 것일 수도 있구나 생각이 듭니다.

kinye91 2022-01-05 12:50   좋아요 1 | URL
이하라 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전환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이 시대는 그야말로 축복과 위기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우리가 어떤 길을 택하고 나아가야 할지 많은 생각을 하는 요즘입니다.
 
다른 사람 - 제22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강화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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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

 

제목을 보면서 '나'가 아닌 존재를 가리키는 말, 아니면 지금의 '나'를 벗어나고 싶어하는 존재가 바로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나 자신도 잘 모르면서도 우리는 대부분 '나'보다는 '다른 사람'을 더 좋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나도 저런 다른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특히 지금 자신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그래서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고 있다면, '나'보다는 '다른 사람' 되기를 열망한다.

 

그러면서 '나'를 잊고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그것이 결국 '나'를 갉아먹는 일임을,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지 못하고 '나'를 지워가는 과정임을 깨닫지 못하고.

 

소설을 읽는 중간에 내가 갖고 있지 않은 무언가를 갖고 있는 사람,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사는 사람, 그런 사람을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렇다면 피해자에게는 가해자가 다른 사람이고, 여성에게는 남성이 다른 사람이다. 이상하게 소설을 읽으면서 남성이 여성을 다른 사람으로 여긴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소설은 처음부터 섬뜩하게 시작한다. 피해자가 더 피해를 본다. 그렇다면 피해자로 지내기보다는 다른 존재로 지내려고 하는 마음이 생긴다.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더 비난을 받는 상황. 이런 상황은 생물학적으로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 잘 일어난다.

 

그렇게 데이트 폭력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자, 이 데이트 폭력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데이트 폭력을 공개한 피해자가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 대략 예상은 하지만 온라인 상에서는 피해자를 두둔하는 댓글과 피해자는 비난하는 댓글이 달린다.

 

그런데 그런 댓글들이 동등하게 달리지는 않는다. 동등하게 달리더라도 피해자의 눈길을 끄는 댓글은 피해자를 비난하는 댓글들이다. 그것이 비록 소수일지라도 피해자의 눈에는 그런 비난 댓글이 더 잘 들어온다. 잘 들어올 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힌다. 박혀서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피해자를 더욱 힘들게 한다.

 

(최근에 읽은 시, 이소호가 쓴 '누구나의 어제 그리고 오늘 혹은 내일'을 보라.)

 

이런 전개는 상투적이다. 이런 피해자가 비난 댓글을 극복하고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 자신 속에 있는 또 다른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면 이 소설은 힘을 잃을 것이다.

 

소설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인물들이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얽히고 설킨 관계로 맺어진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여성 인물로 진아, 수진, 유리가 있고, 이들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이강현이 등장한다. (이 이강현은 생물학적인 성별로는 여성이지만 삶의 양태로 보면 이 소설에서 말하는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남성 인물로는 류현규와 김동희가 등장한다.

 

물론 이 소설의 서술자인 진아를 나락에서 허우적거리게만 만들지 않는 단아라는 여성 인물이 등장하고, 나중에 '다른 사람'보다는 '나'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인느 당찬 젊은이인 김이영, 서술자인 진아를 서술로 이끈 이진섭이라는 남성이 등장하지만 이들이 서술의 중심에 있지는 않다.

 

진아, 수진, 유리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이 겪은 일들이 그렇고 대응하는 방식이 그렇다. 이들은 '나'보다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 그렇게 자신들의 '나'를 지우고 이 '나' 위에 '다른 사람'을 덧씌우려 했다.

 

물론 성공하기도 한다. 수진은 언뜻 보면 성공한 삶을 사는 듯하다. 그렇지만 아니다. 수진은 지속적으로 '다른 사람'의 그림자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수진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다르게 '나'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온전히 '다른 사람'이 되지 못하고 '나'임을 의식하면서 전전긍긍하는 삶. 이런 삶에서는 '나'와 비슷한 존재들을 배척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런 존재들은 '나'를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관계맺기에 실패한다. 바로 그들에게서 '나'를 보기 때문이고, 이런 '나들'이 바로 자신을 나약한 존재, 삶을 힘들게 하는 존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진도, 유리도 서술자인 진아의 '나'에 해당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이런 '나'를 힘들게 하는 존재다. '나'를 힘들게 하기에, '나'가 도저히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나'역시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한다.

 

강간당하는 사람보다는 강간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런데 이게 과연 해결책일까? 이는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일 뿐이다. 내가 가해자처럼 군다고 해서 내 피해가 사라지는가? 아니다. 사라지길 바라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피해는 내 속에 더 깊이 남아 있게 된다. 이런 피해의식들이 알게 모르게 내 삶을 규정한다. 내 행동, 내 말투 등등을.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되기보다 '나'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바꾸어야 한다. 내가 피해를 당한 것을 내 책임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가해자가 잘못한 일을 왜 피해자에게 돌리는가. 잘못은 가해자가 했고, 책임도 가해자에게 돌려야 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많은 경우에 책임이 피해자에게 돌아왔다.

 

바로 피해자들의 '나'를 왜곡하고 축소하고 '나 피해의식 있어.'라는 말로 책임을 전가한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지만, 그 '다른 사람'은 바로 '나'일 수밖에 없다. 끊임없는 도돌이표.

 

이 도돌이표는 '다른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나'로 살아가는 길을 찾았을 때 멈출 수 있다. 이는 바로 피해의식이 있다고 하는 그 말들이 바로 '가스라이팅'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일이다. 그리고 '나'가 또다른 '나'와 연대할 때, 비로소 '나'와 대척점에 있던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가 '나들'로 굳건하게 연대한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소설은 유리를 통해서 이런 '나'가 '나들'이 되는 과정, 그리고 젊은 세대인 김이영이라는 학생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진아는 뒷세대인 김이영을 통해 '나들'인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때서야 이제 과거의 인물이었던 유리가 현재로 나올 수 있게 된다.

 

이 다음부터는 우리들의 몫이다. 소설이 제기하는 문제는 바로 여기다. 소설은 사회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이 제기하는 문제는 무엇인가? 이 소설에서 '다른 사람'의 의미는 무엇인가? 왜 가해자는 당당하게 피해자에게 '너 피해의식 있어.'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도 깨닫지 못한단 말인가.

 

소설을 읽어보자. 서술자인 진아의 처지에서 읽어도 좋지만, 거꾸로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김동희의 처지에서 읽어보아도 좋다. 왜 그가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지, 그가 지니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긍정적인 면이 류현규라면 그 반대 얼굴이 바로 김동희라고 할 수 있으니...

 

하여 우리는 또다른 김동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소설은 중반을 지나면서 추리소설의 면모를 띠기도 한다. 문체의 박진감과 사건 전개의 속도, 그리고 누가 누구를 괴롭혔을까 하는 추측으로 결말이 어떻게 날 것인지 궁금하게 한다. 그렇게 끝을 향해 소설은 빠른 속도로 우리를 이끈다. 끝에 도달했을 때 여기가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유리의 보고서 제목이 '다른 사람'인 것을 보고 알게 된다.

 

소설에서 남자가 한 말을 진아가 돌려주는 장면이 있다. 끝부분에서 진아는 이렇게 말한다.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 (23쪽- 이진섭의 말)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 (329쪽-진아의 말)

 

도돌이표인가? 아니다. 이는 앞의 말을 이겨낸 '나'의 말이다. 나를 짓누르고 있던 '다른 사람'의 그늘을 벗어난 '나'의 말. 그러니 이제 소설은 끝났지만, 우리의 여행은 계속된다.

 

[소설의 이론]에서 루카치가 했다는 말이 생각났다.

 

'길이 시작되자, 여행이 끝났다'

 

그런가? 소설 읽기는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여행이다. 이 소설 읽기 여행은 끝났다. 하지만 소설의 끝은 바로 새로운 길의 시작이다. 이제 그 길은 소설 밖에 있다. 새로운 길로 우리의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어야 한다.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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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병과의 위험한 동거 - 과학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21세기 감염병 청소년을 위한 과학 읽기
김영호 지음 / 지성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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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병과의 동거'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간은 여러 박테리아, 또 바이러스들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인간의 몸에 어떤 해나 이익도 주지 않는 미생물들도 있고, 인간에에 이로운 쪽으로 작용하는 미생물들도 있고, 해로운 영향을 주는 미생물들도 있다.

 

(미생물에 박테리아, 바이러스 등을 포함시켜서 사용한다. 의학자나 생물학자라면 명확한 명칭으로 쓰겠지만...'미생물이란 말 그대로 작은 생물체로 박테리아, 바이러스, 곰팡이 등을 가리킨다.-'222쪽에 이렇게 나와 있으니)

 

사실 우리 몸 속에 얼마나 많은 미생물들이 많은가? 이들을 무조건 해롭다고 여겨 우리 몸에서 쫓아내려고 했다가는 우리가 살지 못하게 된다. 이들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은 이러한 미생물들과 동거하고 있다. 이러한 동거는 우리가 지구에서 살아가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겠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러한 아슬아슬한 균형이 깨지게 된다. 균형이 깨지면 우리 몸은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 내 한몸이 고통받으면 개인의 고통으로 끝나겠지만, 개인에게서 개인으로 전파가 된다. 순식간에 인류라는 종 전체를 위협에 빠뜨리게 된다. 이런 질병을 감염병이라고 한다. 그리고 감염병이 유행이 되면 팬데믹이 선언된다. 코로나19처럼. 그러니 '위험한 동거'라는 표현을 제목에 썼겠지.

 

코로나19로 감염병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백신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에 대해서는 서로 입을 다물고 있다. 그러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에 나온 롭 월러스의 '팬데믹의 현재적 기원'에서 제시하고 있지만, 그것은 대부분 현재 백신이나 치료제에 대한 관심에 묻혀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감염병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지, 그것이 왜 생겼고, 얼마나 위협이 되는지, 과연 우리는 그러한 감염병을 완전히 퇴치할 수 있는지...

 

이 책을 보면 감염병을 인간이 완전히 퇴치해 종식 선언을 한 경우가 있다고 한다. 바로 천연두다.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마마'라고 부르던 천연두.

 

1980년 5월 세계보건총회는 천연두 종식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는 영국 의사 제너가 종두법이라는 천연두 백신을 개발한 지 200년도 걸리지 않아 이루어낸 성과였다. (131쪽)

 

이런 성과가 있었기에 코로나19도 백신으로 종식이 가능하리라고, 아니 적어도 함께 살아갈 수는 있으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생활습관을, 경제구조를, 정치적 역학 관계를 바꾸지 않고도.

 

그런데 아니다. 백신은 여전히 변이 바이러스에 속수무책이며, 백신 개발보다 변이가 등장하는 시간이 더 빠르고, 전파 속도 역시 빨라지고 있다. 앞으로 어떤 형태로 코로나19가 우리들 삶에 위협이 될지 잘 모르는 상태다. 독감처럼 함께 지내게 될지, 아니면 우리를 공포에 빠뜨리게 될지.

 

이런 것과 더불어 백신으로 천연두를 성공적으로 종식시켰지만, 여전히 천연두 바이러스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가 있으며(연구 목적으로), 천연두 바이러스를 무기로 쓰려고 하는 집단이 있을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천연두 백신 접종을 하는 나라도 있다고 한다. 천연두 백신과 천연두 치료제를 계속 보유하고 있는 나라도 많고.

 

이는 바이러스가 바이러스만으로 존재하지 않고 인류의 정치적 관계 속에서 존재함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니 감염병의 문제는 질병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는 경제 문제이기도 하고 정치 문제이기도 하다,

 

사람-동물-환경에 대해 통합적으로 접근하는 '원 헬스' 개념이 이 책에도 나오지만 (219쪽), 여기에 더해서 정치, 경제에 대한 고려도 해야 한다. 질병은 질병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질병은 정치 속에 있다. 그래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질병 역시 정치다.

 

이 책은 역사적으로 감염병이 우리 인간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러한 감염병에는 어떤 것들이 있고, 또 어떤 식으로 발생하고 치료되어 왔는지를 살핀다. 여기에 정치적인 문제로 무기화된 바이러스들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면서 인수공통감염병이 인간이 지구 환경을 파괴하면서 더 기승을 부리게 되었음도 말해주고 있다. 우리들 생활을 바꿔야만 한다는 사실.

 

미국의학원은 인수공통감염병이 증가한 주요 원인으로 일곱 가지를 주목했다. 지구온난화와 같은 환경의 변화, 해외여행 증가와 같은 인간 행태의 변화, 도시화와 같은 사회적 요인의 변화, 음식의 대량 생산·소비에 의한 식품에 관련된 변화, 항생제 남용과 같은 보건·의료에 관련된 변화, 병원체의 적응과 변화에 관련된 요인, 공중보건 활동의 감축 등이다. (217쪽)

 

미국의학원이 밝힌 이런 요소들에 저자는 몇 가지를 더하고 있다. 이렇게 더해진 요소들이 더 중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산업화와 개발이 진행되면서 사람들이 숲속 깊은 곳에 사는 동물들과 직접 접촉하는 사례증가, 가축들의 대량 밀집 사육, 도시화 등을 들고 있는데, 이는 지금 인간들이 추구하고 있는 경제 문제와 떼려야 뗄 수가 없다. 또한 경제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바로 정치, 군사력이니...

 

2년 넘게 코로나19로 고통받고 있다. 최근 몇 십 년 동안 많은 감염병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완전히 사라진 감염병은 없다. 이제 또 어떤 감염병이 올지 모른다. 더 큰 위험이 오기 전에 우리는 그것을 막을 방도를 찾아야 한다.

 

원인 진단은 많이도 했으니, 이제는 원인을 제거할 방법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실천할 방법, 그것이 바로 우리를 인류라는 이름으로 묶어줄 수 있지 않을까? 지구촌에서 살아가는 인류가 존속하기 위해서 바로 원인을 제거할 방법을 찾아 각자 할 수 있는 만큼, 아니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해야 한다.

 

이 책을 읽어보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전세계를 공황에 빠뜨릴 감염병을 계속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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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1-03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보고, 청소년 대상 책이라 생각했는데, kinye님께서 자세히 올려주신 리뷰를 읽으니 청소년과 어른 모두에게 유용하겠네요^^

kinye91 2022-01-03 11:31   좋아요 1 | URL
청소년들이 읽으면 좋겠지만, 어른들도 읽을 만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마도 어른들이 읽으면 생각을 정리하는데 더 도움이 되겠지요.
 
팬데믹의 현재적 기원 - 거대 농축산업과 바이러스성 전염병의 지정학
롭 월러스 지음, 구정은 외 옮김 / 너머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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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장면이 많다. 팬데믹에 빠져 있는 지금, 이 책은 어쩌면 우리의 현재를 알려주고 있는 책이기도 하겠다.

 

그것도 이 책에서 제시한 대안을 지금도 거부하고, 순간적인 대증요법만으로 바이러스에 대항하려고 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백신이 나오면 일상 생활이 가능해지리라 생각했다. 치료제가 곧 나온다고 희망에 차 있기도 했다. 어떤 전문가는 70%정도가 백신을 맞으면 집단 면역이 형성될 거라고 했다. 그런데 70% 접종 완료는 계속 올라가 지금은 80% 이상이 접종 완료를 했어도 집단 면역은 생기지 않았다.

 

치료제는 이제 막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 효용에 대해서는 의문이고... 그런데 이렇게 바이러스만을 대상으로 하는 치료법이, 대응책이 효과가 있을까 이런 의문을 지니고 있었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이 책이 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코로나19가 나오기 전에 나온 책인데, 그동안 우리가 겪어 왔던 감염병들에 대해서 이런 경고가 있었음에도 우리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자책을 한다.

 

그렇다고 백신이나 치료제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의 저자도 그걸 인정하고 있다.

 

단기적으로 감염병 발생을 억제하면서 소농들에게는 공정하게 보상을 해야 한다. 가금류의 국경 무역은 규제를 강화해야 하나.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백신과 항바이러스제를 무료로 제공하고 방역도 도와야 한다. 빈국의 동물보건 인프라를 망가뜨리는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종료해야 한다. (44쪽)

 

인플루엔자의 문제는 구조적이며 정치 체제에 깊숙히 박혀 있다. 바이러스는 공장 문을 넘어서 확장되는 인과관계 때문에 더욱더 복잡해진다. (94-95쪽)

 

만약 각국 정부가 정치적 의지를 가지고 강제적으로 동물성 인플루엔자를 막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단기적으로는 소농들에게 살처분에 따른 정당한 보상을 해 주어야 한다. 국경을 넘나드는 가축 무역 규제도 잘 정비해야 한다. 지금은 자율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축 질병 감시를 의무화하고, 재정이 충분한 정부 기관이 이를 맡아야 한다. 농장 노동자들과 세계 빈민들에게는 백신이나 항생제를 무상으로 지원해야 한다. 빈국의 동물보건 인프라를 망치는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중단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다 알고 있듯이 산업적 가축 생산을 끝내야 한다. (99쪽)

 

저자도 이렇게 개별적인 치료 노력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만 거기에만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광범위하게 농업 산업의 변화를 꾀하는 것은 인플루엔자와 다른 병원체들의 확산을 멈추는 여러 단계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또 다른 단계로, 가금류의 교차감염이 일어나는 농지에서 인플루엔자 변종의 원천인 철새들을 떼어내야 한다. 그러려면 세계의 습지와 야생의 물새 서식지를 되살려야 한다. 세계 공중 보건 역량도 다시 세워야 한다. 빈곤과 영양실조, 인플루엔자를 포함한 감염병 등으로부터 빈곤층을 구하기 위해, 당장 필요한 반창고라도 만들어 두자는 이야기다. 유행성 인플루엔자이든 팬데믹이든 독감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의 경우 한 명에게 위협이 된다면 그것은 또한 모두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 (102쪽)

 

백신이나 치료약만 쳐다봐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에서는 오히려 백신이나 치료제가 전염병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 그럴 때에는 한 걸음 물러서서 과학의 인식론과 모델들을 폭넓게 생각해 보는 편이 질병 전체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상상력이 없는 것도 때로는 죄가 된다. 어떤 병원균이 새로 생겨나는 데에 우리가 모종의 역할을 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111쪽)

 

자연을 상품으로 바꾸고, 질병에 대한 생태학적 회복력을 떨어뜨리고, 가축과 병원균이 세계를 이동하게 만드는 것은 자본에 의한 생산주기다. (300쪽)

 

이처럼 저자는 사회구조적인 면, 정치적인 면을 살펴야 한다고 한다. 지금처럼 지구가 한 세계로 묶여 있는 때에는 더더욱 그런 관점이 필요하다. 우리의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 한 나라에서 발생한 감염병은 한 나라에서 그치지 않는다. 한 나라에서 발생한 감염병은 곧 전세계로 퍼져 나간다. 그러니 이런 감염병이 발생할 환경에 대해서, 경제 구조에 대해서, 정치적 역학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나는 새로운 병원체를 식별해 낸다고 하더라도 조기 발견이 반드시 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감염증은 뒤늦게야 포착되기 때문에, 질병의 출현을 촉진할 가능성이 높은 환경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177쪽)

 

집약적 축산업은 조부모 대에서부터 자연선택을 없애기 때문에 가축들은 스스로 저항성을 키울 능력을 잃는다. '실시간 무료 생태서비스'를 받을 기회를 없애 버리는 대신에, 기업들은 약물을 투입하는 값비싼 사육방식으로 가축들을 지킨다. 대규모 사육장 밖, 기업의 대차대조표에서 벗어난 개체집단에서는 사망률이 높아지는 것 같은 부정적인 영향까지 모두 포함된 선택이 일어난다. 그 과정을 통해 진화적 이득을 거두기도 한다. 그러나 집약적 축산업에서는 진화의 이점이 차단된다. 그러므로 자연환경과 통합된 농업은 동물전염병을 통제하는 근본적인 방법일 뿐 아니라, 다음 분기 수익을 넘어 장기적으로 더 경제적인 방식이 될 수 있다. (257쪽)

 

우리의 미생물군 유전체, 면역 체계, 세포와 DNA는 결국 우리에게 기생하는 존재들이다. 다층적인 개입과 생태학적 회복력을 통해, 상품보다 먼저 사람을 보는 사회성을 통해, 병균들과의 '화해'를 통해 우리의 사회생태학적 터전을 더 깨끗하게 만들 수 있다. (274쪽)

 

우리는 자본이 주도하는 변화 속에 야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그 과정에서 농업과 인간이 건강은 어떤 변화를 겪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 주는 '구조적 원헬스 Structural One Health' 접근을 제안한다. (296쪽)

 

이렇게 이 책은 구조적 원헬스를 주장한다. 그래야만 전세계적 감염병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 표를 참고로 살펴보면 좋겠다.

 

<롭 월러스, 팬데믹의 현재적 기원. 2020년.  3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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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심너울 지음 / 아작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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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고 읽기로 결심했다.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사람은 늙어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늙어감을 추함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라는 말을 하게 되는데...


추하게 늙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소설집 제목이 된 이 소설에서는 늙어서도 젊은이들과 비슷해지려는 노인 둘이 나온다. 그들은 최첨단 기술로 만들어진 물건들을 구입하고 이용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추하게 늙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젊은이들과 비슷한 행동을 한다고 추하게 늙지 않게 될까? 오히려 젊은이들과 같아지려 하는 모습이 추한 모습 아닐까?


늙어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젊은 세대와 차이가 있음을 알고, 그들과는 다른 삶을 보여주는 늙음이 추하게 늙지 않은 삶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데...


소설은 젊은이들과 비슷해지려는 행동을 하려는 노인을 통해서 그것으로는 추함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자신의 것만을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러니 추하게 늙지 않는 일,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삶을 지키면서도 젊은 세대의 삶을 가로막아서는 안 되는 삶을 살아야 하니.


가볍게 웃으면서 읽을 수 있는 소설임에도, 읽고 나서 과연 어떻게 살아야 추하게 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주변에 추하게 늙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님을 발견하게 되고, 그와 반대로 늙어가는 것이 과연 추함과 멀어지는 일일까 생각도 하고.


늙은 세대와 젊은 세대는 다를 수밖에 없는데, 늙은 세대는 자신의 삶만을 고집하지 않고 젊은 세대의 삶을 인정해주는 포용력을 지녀야 한다. 자신들의 삶을 젊은 세대가 잘 살아가도록 하는 발판으로 만들 수 있는 행동을 해야 추하게 늙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 외에도 독특한 발상을 한 소설들이 꽤 있다. 유한한 삶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추구해 나가는 소설 '시간 위에 붙박인 그대에게'를 읽으며 지금 우리들이 추구하고 있는 불멸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과연 불멸이 축복일까? 하지만 우리는 불멸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소설은 그 항해에 성공하고 있는 인물들을 그려내고 있다.


이것이 과연 가능하냐 가능하지 않느냐를 따지기 전에 어느 정도 과학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소설이고, 또 우리 인간들의 욕망을 표현하고 있는 소설이니...


이 소설 외에도 재미 있게 읽은 소설들이 꽤 있다. 독특한 발상에 읽는 재미를 선사하고, 또 반전을 보여주는 소설들이 있는데...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처럼 중성화 수술을 받는 중년 남성의 이야기인 '저 길 고양이들과 함께', 마치 채만식의 '미스터 방'을 읽는 느낌을 주는, 'SF클럽의 우리 부회장님'같은 소설.


여기에 로봇과 인간이 친구가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는 '컴퓨터공학과 교육학의 통섭에 대하여', 식량 문제와 기후 문제를 해학적으로 풀어가고 있는 '한 터럭만이라도', 인공지능 문제, 과연 우리 인간은 어디까지를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하는 '감정을 감정하기'라는 소설도 재미 있다.


이 외에도 몇 편이 있지만 생략하고, 대체로 흥미롭게 서술되어 있어서 읽기에 편하다. 또 굳이 SF소설이라고 하지 않아도 그러한 모습을 많이 지니고 있는 소설들이다. SF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현재 우리들 모습이기도 하고, 우리들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으니, 심너울의 소설은 SF이라고 해도 좋고, 아니라도 해도 좋은 소설이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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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12-30 0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ㅜ 제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