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SF를 쓰는가 -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 사이에서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양미래 옮김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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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작가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 마거릿 애트우드에 대해서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SF작품에 대해선 어느 정도 편견이 있었다. 공상과학소설이라고, 과학소설이라고 하지 않고, 공상이란 수식어를 붙여 생각했다. 어린시절부터 이런 용어에 익숙했고, 언어가 사고를 결정하기 쉬운데, 공상이라는 말 때문에 SF소설은 어린 시절이나 읽는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슐러 K. 르 귄을 만났다. SF소설이 공상이라는 말이 빠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학소설이라는 말도 무언가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다. 소설 자체가 상상이 창조해낸 이야기 아닌가. 소설에서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찾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 아닌가.


그런 사람이 권력자가 되면 금서다 뭐다 하면서 소설에도 간섭을 하지 않나, 그렇다면 소설은 상상 이야기니 상상을 국한시키는 수식어를 굳이 붙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애트우드는 사변소설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사변소설, 생각을 밀고 나가는 소설.


이런 생각 덕분에 애트우드가 쓴 [시녀이야기]와 [증언들]을 읽으면서 SF라는 생각보다는 맞이하고 싶지 않은 사회라는 생각을 했다.


있음직하지 않은 세상, 그러나 있음직한 세상. 어쩌면 [시녀이야기]나 [증언들]에서 그려진 사회의 모습이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에도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소설은 사회를 반영하고 있다. 그것이 어떤 장르이든.


이런 소설을 쓴 애트우드의 글쓰기에 대한 책이 나왔다. 읽어볼 만하다. 애트우드의 어린 시절부터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알 수 있게 되고, 또 애트우드가 어떤 작가들에 관심을 가졌는지, 그리고 르 귄과 애트우드의 비슷한 점도 알게 될 수 있는 책이다.


특히 애트우드 역시 SF라고 해서 공상이 아님을, 현실을 그려내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으니... 나는 왜 SF를 쓰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소설은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다양하게 표현해내는 예술이니, SF든 아니든 작가는 바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 작품을 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작품을 읽고 인간을, 바로 나 자신을 이해하려고 한다.


특히 애트우드가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유스토피아'라는 말에 공감이 갔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합쳐진 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유토피아이기만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디스토피아이기만 하지도 않다는 사실.


[시녀이야기]나 [증언들]이 디스토피아라고 해도, 그 소설 속에 이미 유토피아가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고, 유토피아로 그려진 세상이 마냥 유토피아만은 아니니, 애트우드가 말하는 '유스토피아'란 용어가 적합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느 정도의 유토피아와 어느 정도의 디스토피아가 결합된, 그래서 결정되지 않고 과정을 통해서 변화가 가능한 세상 아니던가. 우리 인간이 살아가야 할 세상이 이렇고, 앞으로도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갈테니...


소설에 대한 애트우드의 글을 보자.


나는 스토리텔링이란 미완의 작업,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많은 이들이 자문하게 되는 질문들을 통해 구현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대체 우리는 이 행성을 얼마나 망가뜨려 버린 걸까? 인간의 내면을 얼마나 깊이 파헤쳐 볼 수 있을까? 종 전체가 자기 구원을 위해 애쓰는 상황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그건 과연 어떤 모습일까? 한 가지 더. 유토피아적 사고는 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렸을까? 이 질문을 던지게 되는 이유는 유토피아적 사고란 절대 완전히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너무나 희망에 차 있는 종이므로, 그런 건 불가능하다. '좋음'이란 것이 있는 한, 언제나 '나쁨'이라는 쌍둥이가 존재할지 모르나 인간에게는 '더 좋음'이라는 다른 쌍둥이도 있다. (156쪽)


소설가의 거짓말이라 함은, 진실을 우회적으로 전달하고자 소설가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한 진실이다. (197쪽)


그래서 소설을 SF라는 틀에 가둘 필요가 없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 또는 원치 않는 세상을 작가는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어떤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고, 간접 체험할 수 있다.


1부에서는 애트우드의 자전적 이야기가 흥미를 끌고, 2부에서는 다른 작품에 대한 애트우드의 생각을 알 수 있어서 좋으며, 3부에서는 애트우드의 짧은 소설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다. [시녀이야기], [증언들]을 읽은 독자라면, 또 [눈 먼 암살자]를 읽은 독자라면 애트우드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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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차 여행을 했다. 케이티엑스를 타고 가는 길. 결코 요금이 싸지 않은데, 그래도 운전하는 내 노동력과 시간을 절약할 수 있으니, 그 가격이 상쇄되었다고 생각하고 떠난다.


  기차를 타니, 광고나 또는 책자에 '잇다'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잇다'

  한 지점에서 한 지점을 연결해 준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을 맺어준다. 이렇게 '잇다'는 관계맺다가 된다. 고립되어 있지 않고, 함께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여행을 하면서 보게 된 낱말 '잇다'를 [빅이슈]를 읽으면서 떠올리게 된다.


  [빅이슈]를 받아보면서 늘 느끼는 점이 바로 '잇다'란 말로 정리될 수 있다. 관계맺기, 홀로가 아닌 함께. 그렇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하는 잡지가 바로 [빅이슈]다.


판매원인 '빅판'이 전철(지하철)역에서 내리는 사람들과 연결이 되고, 또 잡지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연결되는 '함께'를 실천하는 잡지.


새해 신년호다. 무엇을 연결하고 있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번 호에서는 '노년'을 다루고 있다. 사람이 나이 먹어간다는 것, 나이 들어간다는 것, 이것은 바로 시간의 연결이다. 시간은 끊어지지 않는다. 시간의 끊어짐. 이건 죽음이다. 죽음 전까지 우리는 연속되는, 연결되는 시간 속에서 산다.


그런데 가끔 시간을 끊어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세대론이 그렇다. 이 세대, 저 세대가 다르다고, 연결되기보다는 단절되어 있다고, 그래서 소통이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과연 그럴까? 시간을 끊을 수 있을까? 다른 말로 하면 한 세대에 영원히 머무를 수 있을까? 지금 젊은 세대라고 해서 영원히 젊은 세대로 남을까? '라떼는'이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될까?


아니다. 우리는 연속되는 시간 속에서 서로 다른 세대를 살아간다. 그 살아온 시간 속에 수많은 세대들이 연결되어 있다. '요즘 젊은애들'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그런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그렇게 우리는 연결된 시간 속에서 이렇게 저렇게 불리는 세대를 통과해 왔다.


죽음으로 시간과 단절될 때까지는 연결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인위적으로 끊고 다르게 이야기를 하려는 모습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한다.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서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말은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다. 꼭 아이만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 이렇게 우리는 '잇다' 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노년'이라고 특정한 시기라고 해서는 안 된다.


노년은 장년, 청년, 소년기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 연결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빅이슈] 이번 호를 읽으면서 [빅이슈]가 바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번 호에 있는 옥희살롱 김영옥 대표의 인터뷰 글이 있는데, 이 말이 바로 '잇다'를 대표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년에 대한 추상적인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서로 돌보고 마음을 쓰는 관계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우리는 어떤 것을 연습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매뉴얼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나이 든 사람들이나 아픈 사람들을 자주 만나야 한다. 옆에서 만나본 적이 없으면 자기의 미래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나. 자기의 돌봄 역량을 측정할 필요가 있다. (46쪽)


아이들에게도, 노인들에게도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 마을은, 공동체는 그렇게 사람들을, 세대들을 잇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고 살아가기 힘든 지금 시대에도 이러한 공동체를 마련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공동체는 뜻이 맞는 사람들만이 모여 사는 장소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여러 세대들이 함께 갈등하고 그 갈등을 풀어가면서 서로가 서로를 조금씩 이어가는 그런 장소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공동체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는 세대를 막론하고 이런 공동체가 필요하다. [빅이슈]를 읽으면서 [빅이슈]가 이런 연결, 즉 '잇다'를 기차보다도 더 잘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새해 받아본 소중한 잡지, 우리와 우리를 이어주는 그런 잡지 [빅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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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 뒤라스가 펼쳐 보이는 프랑스판 ‘부부의 세계’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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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서 부부가 된다고 한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해로한다고 한다. 그렇게 사랑을 전제로 부부를 이야기 한다. 언제까지 변치 않을 사랑을 간직해야만 하는 관계.


당위다. 의무다. 상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그래야만 부부관계가 유지된다고. 세월이 흘러 사랑이라는 감정이 사라졌다고 왜 함께 사는지 모른다고 느낄 때도 부부는 사랑으로 맺어졌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소위 '쇼윈도 부부'라고 해서 유리창 안에 전시되어 보여지는 부부처럼 살아가기도 한다. 이 경우에 사랑은 없다. 그리고 부부 간에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도 없다. 부부 간에 상대에게 무한히 헌신하는 사랑도 없다.


무한한 사랑은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 신이 피조물들에게 주는 사랑이 있을 수 있다고 하지만 이 경우는 예외로 치고, 자, 부부들 간에 사랑이 어떤 의미일까? 어떻게 지내야 함께 평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위기를 겪는 부부 두 쌍과 이미 아내와 사별한 식료품점 주인, 그리고 자식을 잃은 노부부, 여기에 두 쌍의 부부 모두의 친구가 등장한다. 부수적인 인물로 가정부가 등장해서 사랑을 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이 소설에서 가정부의 사랑은 부부의 사랑을 강조하는 역할에 그치고 만다.


이탈리아 휴양지로 여름 휴가를 떠나온 다섯 친구. (사라/자크, 지나/루디 두 쌍은 부부고 다이아나만 남편이 없다) 이들은 더위에 지쳐 권태로움에 빠진다.


늘 다투는 모습을 보이지만 서로를 떠나보낼 수 없는 부부인 지나/루디 부부는 이 소설에서 중심을 차지하지 못한다. 이들의 다툼은 결정적인 위기로 치닫지 않기 때문이다.


위기로 치닫는 부부는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서로가 서로에게 데면데면해지고 있는 사라/자크 부부다.


한 남자의 등장으로, 흔들리는 사라.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자크.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그렇지만 육체적 욕망에 굴복하는 것 역시 사랑이 아니라는 생각.


소설은 '사라'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어쩌면 사라는 우리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부부 생활을 하면서 흔히 겪게 되는 일, 그런 일을 겪어가는 사람. 사라.


누가 부부가 서로를 가장 잘 안다고 하겠는가. 이 소서에서는 이런 말이 나오는데,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부부가 갖고 있는 서로에 대한 지식, 아마 그게 제일 형편없는 지식일걸." (52쪽-다이아나의 말)


아마, 자신이 부인에 대해, 남편에 대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어쩌면 그것이 오만일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어느 순간 배신당했다는 느낌을 받고 서로에 대한 증오로 치닫는 관계가 될 수도 있다는 것. 


아무리 다 이야기한다고 해도, 감출 수 있고 또 감춰진 무엇이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하고, 그것을 굳이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렇지 않고 상대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실행하는 순간, 


"어쩌면 오래된 사랑이 우리를 그렇게 악의적으로 만드는 건지도 몰라. 위대한 사랑의 황금 감옥 말이야. 사랑보다 우리를 더 옥죄는 감옥은 없지. 그렇게 오랜 세월 갇혀 있다 보면 세상에서 가장 선량한 사람까지 악의적인 사람이 돼 버려." (295쪽 - 루디의 말) 


이런 말처럼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부부는 서로에게 갇혀 있는 관계다. 그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 갇힘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 무뎌지는 관계. 사랑이 없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새로운 사랑을 만들어 가는 관계.


"세상에 서로가 서로에게 안 갇혀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90쪽 - 자크의 말)

"커플로 사는 건 피곤한 일이야. 어느 커플이든." (263쪽 - 자크의 말)


피곤하지만, 사실 자신의 전 존재를 건 모험이 바로 결혼 아니겠는가. 상대와 함께 살기로 한 것, 나와 남이 합쳐져 우리가 되는 관계. 그런 관계를 인정하고, 그 관계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말할 수 있다면 그들 부부는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해로할 수 있게 된다.


"세상의 어떤 사랑도 사랑을 대신할 순 없어, 그건 어쩔 도리가 없는 거야." (237쪽 - 자크의 말)

"사랑엔 휴가가 없어.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사랑은 권태를 포함한 모든 것까지 온전히 감당하는 거야, 그러니까 사랑엔 휴가가 없어." (306쪽 - 루디의 말)

"그게 사랑이야. 삶이 아름다움과 구질구질함과 권태를 끌어안듯, 사랑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어." (306쪽 - 루디의 말)


평생을 살아가면서 처음에 느꼈던 사랑이 평생을 지속하리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그 사랑을 만들어가는 관계. 처음 느꼈던 사랑에 더하기를 하는 관계. 상대를 구속하는 사랑이 아니라 상대와 함께 하는 사랑. 


어쩌면 이 소설은 부부의 사랑 형태를 보여주면서 부부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이 처음 만났을 때 번쩍하는 황홀한 감정에서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처럼 소소한 일상에서 함께 하는 관계임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인공들이 소설의 말미에 에트루리아 고분에 있는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을 보러 가기로 하는 장면에서 그런 점을 느낄 수 있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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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을 읽으면 제목이 되는 시를 찾아본다. 어떤 시집은 제목이 된 시가 실려 있고, 어떤 시집은 시구절에서 제목을 따오기도 한다. 


  이 시집 제목에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시를 찾아보았는데, 시구절을 따와서 제목을 삼았다. '노스트라다무스의 별'이란 시에 '나는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람'이란 구절이 있다. 


 '나'로 시작했으니 '사랑'이라고 쓰기는 힘들었으리라. 그래서 '사람'이라고 했을텐데, 시집 제목으로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람'보다는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이라고 한 이유가 있으리라.


  그만큼 이 시집에는 사랑이 흐르고 있다. 바로 사랑, 존재에 대한 사랑이 시집 전체에 넘쳐 흐르고 있어 읽으면서 마음이 찡해지곤 한다.


'죽은 별'은 과거다. 과거를 건지는 일은 현재에 과거를 가지고 오는 일이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과거. 그 과거를 잊지 않고 현재에 되살리는 일. 어쩌면 시인은 우리가 걸어온 길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자칫하면 잊고 묻어버린 과거를 다시 살려내어 우리들에게 가져오는 역할. 그 일은 바로 사랑일 수밖에 없다. 과거 없이 현재가 있을 수 없기에.


이 시집 1부에는 시인의 가족사가 담겨 있다. 시로 쓴 가족사라고 할만큼 어머니, 아버지, 형, 누나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첫시인 '지킴이의 노래'가 1부 내용을 모두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한 편의 서사시라고 해도 좋다.


시집 2부로 가면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속도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속도에 집착해서 잃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빛의 속도를 따라잡으려 앞으로 앞으로만 내달리다 우리가 뒤에 두고 되돌아보지 않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하게 한다. 


또한 이 속도로 인해 다른 존재들에게도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2부는 부제를 '속도에 대한 명상'이라 정하고, 한 편 한 편 속도로 인해 잃어가는 존재들에 대해 표현하고 있다. 사랑이 없다면 이런 시를 쓸 수가 없다.


세상 존재들에 대한 사랑이 이런 '속도에 대한 명상' 연작을 쓰게 했다고 할 수 있따.


3부에 실린 시들은 풍자시라고 할 수 있는 시들이 많은데, 역시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풍자는 곧 사랑이다. 사랑하기에 풍자를 통해 변화를 이끌어내려 한다. 이렇게 시인은 사회의 파수꾼 역할을 한다.


이 중에 속도에 관한 시... 속도로 인해 생명이 얼마나 속절없이 사라지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짤막한 시.


  목격 - 속도에 대한 명상1


질주하는 바퀴가 청개구리를 터뜨리고 달려갔다

………

나는 한 생명이 바퀴를 멈추는 데

아무런 제동도 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반칠환,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시화시학사. 2003년 1판 7쇄. 59쪽.


지금까지는 이래 왔다. 하지만 앞으로는 아니다. 한 생명이 바퀴를 멈추는 데 제동이 되는 것을 보게 해야 한다. 아직까지는 그렇지 못했더라도... 앞으로는... 


그래서 이 시가 더 절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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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번 버스 - 두 명의 십대와 그들의 삶을 바꾼 그날의 이야기 생각하는 돌 25
대슈카 슬레이터 지음, 김충선 옮김 / 돌베개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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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실에 기반한 이야기라고 한다. 읽으면서 아직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미국이라는 나라가 인종다양성을 존중하고 있지만, 인종 차별 역시 여전한 나라라는 사실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하긴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언제 경찰에게 총을 맞을지 모르는 불안감을 늘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 사회라고도 하는데, 아프리카계 미국인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불안감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가 바로 미국 사회 아닌가 한다.

 

버스에서 방화 사건이 일어난다. 공공 운송수단에서 다른 사람들이 타고 있는 상태에서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불을 지른다?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일을 저지른 사람은 인종, 경제력, 성별을 막론하고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만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합당한'이라는 말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 문제가 된다. 무엇이 합당한 처벌인가? 법전에 나와 있는 대로 판결하고 집행하면 합당한 벌을 준다고 할 수 있는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법률을 적용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같은 사건은 없다고 하더라도 비슷한 사건에 같은 형량을 구형하고 판결해야 합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버스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불을 지른다. 그 사람은 하체에 심각한 화상을 입는다. 불을 지른 사람은 어떤 처벌을 받아야 할까? 그가 어떤 처지에 있느냐에 따라 다르다. 또한 피해자가 어떤 처지에 있느냐에 따라서도 다르다.

 

상황과 사람에 따라 다른 판결을 내리는 일을 '합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공정이 화두가 되는 우리 사회에서 무엇이 공정인가와 맞물리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이 사건을 중심으로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주변 친구들, 가족들 이야기를 펼쳐간다. 여기서 가해자를 알려주자. 가해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다. 경제적으로는 중산층 이하라 할 수 있고, 학력은 고등학교를 아직 졸업하지 못한, 학교를 성실하게 다니지 않는 사람이다.

 

이렇게 그에 대해 서술하면 가해자에 대한 동정심이 많이 줄어든다. 가해자는 사고를 많이 친 사람이구나. 앞으로도 더 많은 사고를 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니 가해자를 교도소에 보내 사회에서 격리시켜야 한다고 결정하기 쉽다.

 

경찰이나 언론에서 그렇게 판단하고 일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이게 공정인가? 이것이 과연 가해자에게 합당한 판결을 했다고 할 수 있는가.

 

피해자를 말해 보자. 피해자는 남성과 여성 어느 한쪽 성에 속하지 않는 에이젠더다. 피해자는 남자로도 여자로도 규정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외모는 남성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는 치마를 즐겨입는다. 사고가 난 그날도 피해자는 치마를 입고 있었다.

 

피해자 역시 사회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는 혐오 표현에 쉽게 노출될 수도 있다. 피해자가 살고 있는 도시가 성소수자에 대해서 열려 있는 도시고, 피해자가 다니는 학교 역시 성에 대해서 고정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가해자는 악당 쪽으로 인식되기 쉬운데, 피해자가 성소수자다. 쉽게 그림이 그려진다. 혐오 범죄다. 아프리카계 흑인이 성소수자를 혐오해서 불을 지른 사건. 그렇다면 가해자는 용서받지 못할 범죄자가 된다. 아직 성인이 아니라고 처벌을 약화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성인처럼 죄를 물어야 한다.

 

사건은 이렇게 전개된다. 피해자, 가해자에 대해서 더 알아보지도 않고. 숨겨진 진실은 무엇일까? 많은 사실들이 감춰져 있다. 더 알려고 하지 않는다. 가해자가 혐오 감정을 지니고 불을 지른 것이 아닌데도 그렇게 몰아간다. 그에게 과연 어떤 처벌이 '합당한' 처벌일까? 이 책은 그 점을 생각하게 한다.

 

청소년 범죄에 대처하는 우리의 방식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자, 그런 청소년을 감옥에 가둬두면 '합당한' 처벌일까? 이 책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뉴욕 대학교 산하 범죄사법연구소의 소장이자 혐오죄 관련 법률 전문가이기도 한 제임스 B. 제이콥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혐오죄 법안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유주의자들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들은 대량 투옥 정책의 열렬한 반대자이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아이러니 위에 새로운 아이러니들이 쌓여 갑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구금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교도소야말로 반사회적인 태도를 양성하기에 딱 좋은 인큐베이터라고 할 수 있거든요." (204)

 

이 말에 대해 잘 생각해 봐야 한다. 이 책은 가해자가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는 서술하고 있지 않다. 감옥에서 달라져 가는 모습으로 감형을 받은 사실만 기록하고 있다. 피해자는 대학에 진학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는 모습으로 서술하고 있다.

 

비슷한 나이 대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삶이 달라지는데, 이들의 삶이 어디에서 만나게 될지, 우리는 이들의 삶이 만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사회가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이고, 그런 사회가 바로 가해자에게는 '합당한' 벌을, 피해자에게는 '합당한' 보상을 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 책 57번 버스에서 일어난 사건, 이 사건을 둘러싼 언론과 경찰, 재판 과정.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친구,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과연 무엇이 '합당한'지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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