킨 (리커버 에디션) 옥타비아 버틀러 리커버 컬렉션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20년 7월
평점 :
품절


"사람들은 나를 'SF작가'라고, 내 소설은 당연히 SF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나는 소설을 쓰는 '작가'일 뿐이다. 내가 좋은 이야기를 썼는지 아닌지만 판단받기를 원하는."


소설 표지를 넘기면 표지 안쪽에 이런 글이 쓰여 있다. 틀을 정하고 그 틀에 맞춰서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그런 틀을 벗어나 작품을 작품으로만 읽고 판단하기를 바라는 말.


소설을 어느 틀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이해도가 많이 달라질 수 있다. SF소설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었는데, 소설을 통해 상상의 세계로ㅡ우리가 현실에서는 경험하지 못하는 세계로 들어가고 또 그 경험이 자신에게 좋았다면 그런 소설을 어떤 종류라고 규정하기보다는 좋은 소설이었어, 좋은 작가였어라고 생각하면 된다. 굳이 틀을 만들 필요가 없다. 옥타비아 버틀러 역시 그런 틀을 거부하고 있고.


타임슬립이라는 말을 한다. 시간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시공간을 초월해 다른 시간대의 세상을 들어가는 일. 우리는 가끔 그런 상상을 하지 않나, 시간 여행을 하는. 과거로도, 미래로도 여행을 하고 있는.


소설은 1976년이라는 현실과 - 이 현실이 지금은 2022년이니 엄청나게 과거라고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이 나온 시기가 그때니, 1970년대는 이 소설의 현시대이다 - 1800년대 초반이라는 과거가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인 다나는 1970년대에서 1800년대로 이동을 한다. 지금 그 상태 그대로. 다나에게 그 시대가 황당하겠지만,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다나가 황당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다나이기 때문이다.


노예제가 살아 있던 미국 남부. 여기에 떨어진 흑인 여성. 그것도 청바지를 입고, 당시 흑인들과는 다른, 백인들과 비슷한 말투를 지닌 여성.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여성. 


이런 다나가 루퍼스라는 백인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겪게 되는 일들이 소설 속에서 펼쳐진다. 다나는 목숨이 위태로운 루퍼스를 구하기 위해 1800년대로 가고, 그곳에서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면 1970년대로 돌아온다.


그렇게 루퍼스가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다나는 시간 이동을 통해서 경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노예제의 참상을, 여성에 대한 차별을 보게 된다.


그런 차별을 통해 미국 사회가 어떻게 변모해왔는지를 살펴보지만, 1970년대가 되어도 흑인은 노예가 아닐지 몰라도 백인과 같은 대우를 받기는 힘든 사회다. 다나가 백인인 케빈과 결혼할 때 일어나는 일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노예제는 폐지했지만, 1960년데 흑인민권운동을 통해 법률적인 평등은 확보했지만, 실질적인 평등으로는, 융합으로는 가지 못했음을 이 소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과거 미국 노예제의 참상을 고발하는 소설로 읽을 수도 있지만, 1970년대 당시 미국 사회의 인종 문제로도 읽을 수 있다.


여기에 사랑의 방식에 대한 소설로도 읽을 수 있다. 어떤 사랑을 해야 할까를 루퍼스가 앨리스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맹목적으로 앨리스를 취하려고 하는 마음이 과연 사랑일까? 앨리스의 처지에서 루퍼스는 한번이라도 생각해 봤을까? 오로지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행동 아니었을까? 즉 그는 강자로서 앨리스를 취할 수는 있지만, 앨리스의 마음을 얻을 수는 없는 행동을 한다.


그건 사랑이 아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행위일 뿐이다. 앨리스가 자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루퍼스가 다나에게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하고.


이렇게 소설은 노예제에 대한 생각과 사랑에 대한 생각을 중첩시키면서 읽을 수 있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이동하는 설정은 중요하지 않다. 다나를 통해서 노예제와 노예제 이후의 미국 사회를 생각하면서 읽으면 좋고, 1800년대를 통해서는 사랑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읽으면 된다. 


루퍼스의 사랑은 노예제에 기반한 사랑일 수밖에 없음을, 그리고 그런 사랑은 파탄으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사랑은 상호 교감을 동반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음을  루퍼스-앨리스 쌍과 다나-케빈 쌍을 통해서 생각하게 하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 결말까지 나아가고, 결말을 통해서 진한 여운을 느낄 수 있게 되는데...


끝까지 읽고 난 뒤, 옥타비아 버틀러의 말에 수긍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고 싶다.


"당신은 좋은 작품을 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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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1-22 16: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러블리땡 2022-02-11 0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kinye91 2022-02-11 07:1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2-02-11 0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kinye91 2022-02-11 07:1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2-02-11 0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축하드려요^^

kinye91 2022-02-11 07:1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Home Sweet Home - 가장 사적인 공간, 집에서 모든 이야기가 출발한다
빅이슈코리아 편집부 지음 / 빅이슈코리아 / 2021년 3월
평점 :
절판


빅이슈에서 펴낸 책이다. 여성들이 살고 있는 집에 관한 이야기. 어린 시절부터 이사를 밥 먹듯이 다녀서 정착이 되지 못했던 집 이야기부터 자신만의 공간으로 꾸미고 사는 집 이야기까지.

가끔 일러스터도 있어서, 집에 관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요소를 '의식주'라고 하니, 집은 우리 삶에서 빠질 수 없는 문제다.


그러니 부동산정책, 특히 주택 문제에 실패한 정부는 급격하게 지지를 잃고 정권 재창출에 위기를 겪는다. 부동산으로 터무니 없이 돈을 번 사람들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언론에 오르내리고... 누군가는 퇴직금으로 50억원을 받았다고도 하는데, 이 역시 부동산, 특히 주택과 연결이 되어 있다.


지금 개발이라고 하면 대단지 아파트를 많이 생각하고, 우리나라 주거 형태는 기본적으로 아파트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몇몇 돈 많은 사람들이 넓직한 땅에 주택을 짓고 마당 있는 집에서 떵떵거리며 살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 이름으로 된 아파트 한 채 소유하기 위해서 평생을 아등거리며 살아가게 된다.


이보다 더한 사람들은 집을 마련하지 못해 몇 해 간격으로 이사를 다녀야 하는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고, 또 더한 사람들은 쪽방촌으로 밀려오거나 그마저도 없는 사람들은 노숙을 하는 처지로 전락한다.


집이 우리 삶에서 필수라고 하면서, 국가가 국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면 적어도 집이 없어서 길거리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하고, 이 집 저 집을 떠돌며 불안정한 주거 생활을 하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하는데...


자본이 중심이 된 사회에서 얼마 안 되는 땅마저도 개발로 수용되는 사람들이 있는 사회는 좋지 않다.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그런 집이 아니다. 큰집도, 비싼집도 아니다. 자신들이 생활하기에 적절하게 꾸민, 자신들의 또다른 일부가 된 집이다.


그렇게 자기만의 집을 얻고(소유가 아니라 점유인 경우가 더 많다.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결코 부자가 아니다. 또한 어린 시절 이사를 많이 한 경험이 있어서 집의 소중함을 누구보다도 더 잘 깨우친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작은 공간이라도 자신만의 삶을 투영할 수 있게 하고, 그 모습을 이 책을 통해서 소개하고 있다) 자신을 표현하는 공간으로 집을 여기고 생활하는 모습이 잘 나와 있다.


이 책에 집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런 대답이 있다. 새겨둘 만하다.


나를 위한 배경이자 내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알려주는 공간(정혜윤. 49쪽)

내가 드러나는 내 내면의 일부(33쪽. 박문치)


그렇게 집은 내 내면의 일부이고 내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알려주는 공간이 된다. 그런 공간을 누구나 마련해서 살 수 있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결코 화려하지 않아도, 넓지 않아도 자신만의 공간을 마련해서 생활할 수 있는, 그런 사회. 그것이 '빅이슈'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원하는 세상이지 않을까 한다.


다양한 집, 집에 대한 다양한 태도, 생각을 만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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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1-20 12: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아파트 외벽붕괴 사고로 일고 있는 건설회사에 대한 비난과 불매운동을 생각해보게 되네요. 명품 브랜드로 포장했지만 속내는 그렇지못했다는 사실들이 드러나는 것을 보며, 자본주의에 매몰된 시선을 봅니다.

kinye91 2022-01-20 12:45   좋아요 1 | URL
집을 삶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 현실이기도 해요. 이 책은 그런 돈벌이 수단이 아닌 내 삶을 보듬어 주는 장소로서의 집을 이야기하고 있어서 읽으면서 따뜻한 감정을 가질 수 있었는데요. 때때로 일어나는 건설현장의 사고, 또 노동현장의 사고들이 자본주의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적어도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이 먼저인 그런 사회였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미지, 시각과 미디어 동문선 문예신서 12
존 버거 지음 / 동문선 / 1990년 5월
평점 :
절판


제목만 보고 책을 사면 가끔 실패할 때가 있는데, 존 버거는 믿고 읽을 수 있는 작가라는 생각. 몇 편 읽지 않았지만, 그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 중고서점에 이 책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곧장 구입.


읽기를 좀 미뤄두다 최근에 읽기 시작했는데, 어라, 많이 본 내용인데, 하다가 영어 제목을 보니, 이런 열화당에서 최민 번역으로 [다른 방식으로 보기]란 책으로 나왔고, 내가 이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억의 짧음이여. 이제는 책을 읽어도 내용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시기에 도달했는가. 어린 적 읽었던 책들은 그래도 장기기억에 남아 있는데, 요즘 읽은 책들은 장기기억까지 가기가 힘들었는지, 아니면 이 책 저 책이 혼재되어 읽었는지 아닌지 헷갈리고 있는지...


책 안쪽에 영어 제목을 봤다면 그래도 읽었다는 기억은 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는데, 그럼에도 책 두께가 다르다. 무언가 다른 내용이 있다는 뜻. 살펴보니 열화당 책은 7장인데, 이 책은 8장이다. 한 장이 더 있다. 그럼 됐다. 그 한 장의 내용으로 만족하자. 어차피 헌책으로 사지 않았던가라는 여우의 신포도같은 자기 합리화도 하고.


앞 내용에서는 이름에서 예전 번역이 느껴진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이름과는 다른 이름을 쓰고 있으니... 그야 뭐. 당시 번역 용어라고 생각하고 넘어간다. 나도 한때는 손흥민이 뛰고 있는 영국 축구팀 토트넘을 토튼햄이라고 생각하고 쓴 적도 있으니...


앞 내용은 열화당 책과 중복이 되니, 생략하고, 이 책에 실려 있는 8장을 보면 '본다는 것의 위상기하학'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그러면서 '시각 메카니즘, 사진의 발생과 그 배경, 부즈즈와의 시각, 수집가 역할을 담당하는 미술관, 자연으로부터의 이탈, 복제환경의 확산, 전람회에서 광고로, 새로운 관점의 위상'이라는 8개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 8장이 '보기'에 대해서 역사적인 고찰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존 버거가 썼다고 하기보다는 존 버거의 '보기'에 대해서 정리해주고 있다고 보면 좋은 글이다. 이 글을 먼저 읽고 앞의 내용을 읽으면 훨씬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결국 보기는 개인적인 보기일수도 있지만, 사회적으로 규정된 보기임을 생각하게 하고, 이 책을 읽으면서 요즘 '악마의 편집'이라는 말로 사고를 확장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사실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기를 원하는 방향으로 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생각한다.


그렇다면 드라마야 그렇다쳐도 예능 다큐멘터리라고 하는 영상에서도 보여지길 원하는 장면으로 편집됨을, 또 다큐멘터리라고 해서 사실이라고만 믿을 수 있는 영상에서도 보여지길 원하는 장면으로 편집됨을 생각해야 한다.


이 점을 정치판으로 옮겨보면, 정치판이야말로 교묘한 보여지기 아닐까 한다. 보여지기 원하지 않는 부분은 삭제하고 보여줄 부분만 보여주는... 그런 편집기술, 보여주기 기술이 놀라울 정도로 발전한 지금이니...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믿는 시대는 지나갔다. 우리는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보여지는 것 이면에 숨어 있는 보여지길 원하지 않는 것을 찾을 수 있는 눈도 지녀야 하고.


존 버거 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한다. 그가 그림(미술-예술)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것일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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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1-19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ways of seeing의 옛날 버전인가요?
저는 계속 구입 중입니다^^

kinye91 2022-01-19 21:02   좋아요 1 | URL
네. 예전 번역인데.. 최근 열화당에서 나온 책보다 한 챕터가 더 있더라고요.
 

  올레길 또는 둘레길을 걸으면 가끔 길을 잃는다. 갈림길인데 어디로 가야 할지 잘 모를 때가 있다. 우리나라 길에서 이정표는 이상하게도 중요한 지점에 없는 경우가 있다. 다 와서 또는 갈림길에서 이정표가 없어서 어디로 가야하는지 몰라 헤매게 된다.


  이때 사람들 발자국이 많이 나 있는 길로 가면 실패할 확률이 줄어든다. 발자국이 많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많이 지나갔다는 이야기고,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길은 올레, 또는 둘레길이기 때문이다.


  발자국이 보이는 길을 찾기가 힘들어진 요즘, 앞서 간 사람들은 뒤에 올 사람들을 위해 자국을 남기는데 그 자국이 바로 리본들이다. 나뭇가지나 전봇대 또는 담장 틈에 리본들을 묶여 놓는다.


  갈림길에서 어느 방향인지 잘 모를 때 길바닥을 보지 않고 -사실 우리나라는 도시뿐만 아니라 시골도 웬만하면 포장이 되어 있다. 아스팔트 아니면 콘크리트로 포장되어 있으니, 발자국을 남기기는 이제 힘들다. 그래서 선인들의 발자국을 좇아가다란 말보다는 선인들의 리본을 따라가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 눈 높이에 있는 앞을 보게 된다.


색색의 리본들이 이리로 오면 된다고 길을 알려준다. 그렇게 길을 잃지 않고 갈 수 있게 사람들은 서로를 도와준다. 고창환 시집을 산 이유는 제목이다. 제목이 '발자국들이 남긴 길'이다. 사람들이 자꾸 다녀서 발자국들이 포개지고 포개지고 또 연결이 되면 길이 된다. 그런 길을 따라가면 나 혼자 가는 길도 함께 가는 길이 된다.


요즘처럼 사회적 거리두기 운운하는 때, 이런 발자국이란 낱말을 만난 자체도 반갑다. 그래서 망설임없이 구입. 읽기 시작. 이 시집 도처에서 발자국들이 나오지만, 발자국은 발자국으로 남겨두고,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발자국으로 이해하기로 하다.


시인은 우리들에게 언어를 통해서 발자국을 남겨놓는 사람이니, 시를 읽는 일은 시인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일.


고창환 시인의 언어 발자국, 시 발자국을 따라가다가 만난 시가 '내 동료 K 선생'이다.


 내 동료 K 선생


바르게 사는 일이 찬밥인 세상에서

그는 기꺼이 찬밥을 택했다

나는 아무래도 찬밥이고 싶지 않아서

목구멍에 걸린 밥알을 애써 삼키며 살지만

그는 찬밥도 거침없이 삼킨다

무엇인가 한 가지라도

지키면서 사는 일이 어디 쉬운가

상한 밥알까지

우적우적 먹어치우는 세상 앞에서

기꺼이 찬밥이 되는 일이 어디 쉬운가


사는 길은 셋뿐이다

상한 밥알까지 먹어치우며 살거나

목구멍에 밥알을 걸고 살거나

기꺼이 찬밥이 되는 것이다

바르게 살려면 찬밥이 되어야 하고

찬밥이 되지 않으려면

목구멍에 밥알을 걸고 살거나

상한 밥알까지 먹어치워야 한다 나는

목구멍의 밥알 선생이고 그는 찬밥 선생이다


고창환, 발자국들이 남긴 길. 문학과지성사. 2000년. 67쪽.


'찬밥과 상한 밥과 목구멍에 걸린 밥', 이렇게 세 종류의 밥이 나오는데, 세 유형의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쉽게 '찬밥 신세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배제된 삶을 사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니 이 시에서 '찬밥'이라고 하면 밥 종류라고 하기보다는 남들에게 배척당하는 사람이라고 해석하면 된다.


'목구멍에 걸린 밥'은 살기 위해서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자신만을 위해서 살지는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상한 밥'은 앞뒤 가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찬밥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은 바르게 사는 사람이다. 남들이 뭐라 하든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다. 아니, 옳은 일을 하기 때문에, 바르게 살기 때문에 남들로부터 찬밥 대우를 받는 사람이다.


너만 잘났냐? 부터 시작해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고이지 않는다 등등... 적당히 어우러져 살라고 하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렇게 우리는 '목구멍에 걸린 밥'처럼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중간만 가라는 말, 나서지만 말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하다못해 우리가 남이가, 좋은 게 좋은 거야란 말도...


그래서 '찬밥'이 되는 사람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실제로 경외하여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저 사람은 틈이 없어라고 하거나 저 사람에게선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찬밥'같은 사람이 많은 사회가 꼭 인간미가 없는 사회는 아니다. 그들은 바르게 살 뿐이지 인간미를 잃고 살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목구멍에 걸린 밥이나 상한 밥을 먹는 자들이 자신들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찬밥을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그에 동조하는 부류들이 열심히 그 말들을 실어나르기 때문일 수 있다.


상한 밥을 먹는 일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고 합리화하는 족속들.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족속들. 이들에게 찬밥은 견딜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내로남불'이라는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을테다.


상한 밥을 먹는 자들에겐 찬밥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간이 아니므로... 하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겠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어떤 밥인지 생각하면 되니까.


정치인들이 서로를 상한 밥까지 먹는 인간들이라고 비난하곤 하는데, 모두가 상한 밥을 먹으면서, 하다못해 목구멍에 걸린 밥조차도 안 되는 족속들이면서 '찬밥'이 되고자 하는 이는 너무도 드문 이 현실에서... 누가 누가 상한 밥을 잘 먹나 경기하는 것도 아닌데...


이 시 읽어보자.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선거들에서 우리는 어떤 밥을 선택해야할지, 시인이 시를 통해 남겨준 발자국을 보자. 우선 보기라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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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와 보낸 마지막 하루 - 강렬했지만 스러진 존재의 희미하지만 영원한 온기
손홍규 지음 / 문학사상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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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세 인물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가 소설 목차를 보는데 네 인물이 나와야 한다. 날짜가 네 개기 때문이다.


1895년 4월 24일. 1956년 7월 19일. 2009년 5월 23일. 2014년 4월 16일.


년도를 보면 대강 인물을 추측할 수 있다. 특히 지금과 가까운 2000년대는 인물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2009년 고 노무현 대통령, 2014년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우리들 가슴에 상처를 남긴 세월호. 그렇다면 1895년은  1894년 동학혁명 다음 해니, 전봉준을 떠올릴 수 있다. 동학혁명하면 많은 사람을 생각할 수 있지만, 전봉준을 대표라고 할 수 있으니... 1956년은 쉽게 찾을 수가 없다. 우리나라 현대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1950년대 비극적인 죽음에서 박헌영이나 조봉암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를 추측하기는 힘들다. 이는 소설을 읽어봐야 한다. 소설을 읽는 순간, 아, 1956년은 박헌영이 사망한 해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이렇게 이 소설은 전봉준, 박헌영, 노무현, 세월호(학생)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그들을 통해서 우리들이 지나온 과거와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과 또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소설을 통해서 과거 속 인물을 만나고, 그들의 꿈을 알게 되고, 그들의 꿈이 어떻게 좌절되었는지, 또 역사에서 그들이 한 역할이 어땠는지를 체험함으로써 현실을 잘 살아내는 힘을 키울 수 있게 된다.


작가의 말이 이런 소설의 특징을 대변한다.


"우리가 어떤 일을 했는지를 기록하는 게 역사라면 우리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를 기억하는 건 소설이라고. 소설은 기억이다. 아름답고 비참했던 사람들이 어떤 세계를 꿈꾸었는지를 기억하는 가장 쓸쓸한 형식이다. 잠이 들면 그들은 내게 예언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잠에서 깨어나면 나는 무슨 꿈을 꾸었는지 기억하려 애썼다. 이 소설은 가까스로 기억해 낸 이야기다." (395쪽. 작가의 말)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을 소설가는 소설을 통해서 기억하고, 우리는 그 기억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된다. 소설 제목이 된 "예언자와 보낸 마지막 하루"는 바로 그들의 죽음 직전에서 시작해 그들의 삶을 살펴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


제목에 나온 예언자는 미래를 현실에 불러온다. 불러오기는 하지만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예언이다. 예언은 실현을 전제로 이야기되는 미래의 현실이지만, 예언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냥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예언이 실현되는 경우는 없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율성은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예언을 실현하는 힘은 바로 사람이다. 사람들 사이의 사랑이다. 사랑이 있으므로 좀더 나은 세상을 예언하고, 그런 세상을 실현하려 노력한다. 그 노력에 함께 하려고도 한다. 그러나... 예언은 실현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예언을 실현시키려 하지 않는 집단이 더 큰힘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권력, 경제력과 추종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있다. 따라서 예언자는 그 자체로 핍박을 받고 현실에서 추방당한다. 그는 미래의 꿈을 꾸지만, 그 미래가 오기 전에 현실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예언자의 운명이다.


이런 예언자의 운명을 가혹하다.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보지만 그 세상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라니... 사랑이 넘치지만 그 사랑이 자신을 더 힘들게 하고 있으니...


모세가 생각난다.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구출한 사람. 신의 뜻에 따라 그들을 이끌고 나온. 하지만 모세는 자신이 이끌던 사람들과 함께 신이 말한 그 땅으로 가지는 못한다. 모세의 역할은 현실에 미래를 가져오지만 자신은 현실에서 그 미래로 가지 못하는 존재에 머문다.


이 소설은 역사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미래를 꿈 꾼 사람들. 좀더 나은 세상을 향해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려 한 사람들. 찬반 논쟁이 있을 수 있고, 그들에 대한 좋고 나쁨이 있을 수 있지만 그들이 현실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를 현재에 가져오려고 했다는 데는 동의할 수 있다.


이렇게 그들의 좌절된 꿈을 '해원'이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네 시기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이름이 바로 '해원'이다. 소설에서는 '해원'을 한자어로 표기하지 않았기에 '해원'이라는 이름에 대해서 독자가 의미를 붙일 수가 있다.


세월호에서 나오는 해원은 아빠와 엄마 이름 한 글자씩을 따서 만들었다고 하지만, 세월호라는 이름에서 바다 해(海)를 연상한다. 원(源)은 근원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으니, 유치환이 쓴 "깃발"이란 시에 나오는'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란 구절에서 우리가 바라는 세상, 이상적 세계로 해원을 생각할 수도 있다.


부모는 그렇게 아이가 이상적인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해원'이라는 이름을 지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다시피 바다는 자비롭지만은 않다. 차가운 바닷속에서 결국 생명을 잃은 아이... 이 아이가 지니고 있을 원망을 풀어야 한다. 그러니 이름에 이제는 원망을 푼다는 '해원'이란 뜻을 보탤 수 있다.


원망... 바라던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생기는 마음. 그것도 개인적인 욕망이 아니라 사회적 변혁에 대한 꿈이었다면 개인의 원망에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의 문제로 계속 남아 있게 된다. 풀어야만 하는 원망이다. 그래서 원망을 푼다가 아니라 원망을 풀어야 한다고 '해원'을 생각해야 한다.


동학혁명을 통해 전봉준이 꿈꾸었던 백성들이 잘사는 나라, 공산주의 운동을 통해 박헌영이 꿈꾸었던 민중들이 잘사는 나라, 민주주의를 통해 시민들이 잘사는 나라를 꿈꾸었던 노무현의 나라. 그들은 그런 나라가 오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그런 나라는 예언 속 나라였다. 그들은 예언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존재였고, 다른 사람들이 결국에는 그런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노력하게 하는 존재였다.


비록 자신들은 그 미래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그들은 역사 속에 살아남아 예언이 공언이 아니었음을 기억하게 하는 존재가 된다. 역사 속에서 그렇게 기억되는 존재더라도 이렇게 소설 속에 등장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보여주면 사람들 마음에 더 쉽게 다가오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머리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기억하게 된다. 이런 작업을 소설을 통해서 소설가는 하고 있고, 그래서 작가는 '아름답고 비참했던 사람들이 어떤 세계를 꿈꾸었는지를 기억하는 가장 쓸쓸한 형식'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을 통해 그들이 그런 세상을 꿈꾸었던 것은, 미래를 예언하고 실현시키려 노력했던 것은 바로 사람에 대한 사랑이 바탕이었음을. 실패할지라도 지속적인 꿈을 이야기한 것은 바로 사랑이 있었음을, 그런 사랑이 지금의 우리를 있게 했음을... 


이 소설을 통해서 그런 존재들을 마음 속으로부터 기억할 수 있게 된다.


덧글


소설이어서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들을 정확히 표기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다고 해도 실존하는 인물에 대해서는 정확히 써야 한단 생각을 한다. 아예 없던 인물을 창조해내면 몰라도...


220쪽. 앙굴마라 이야기가 나오는데... '천 번째 살인을 저지르려는 순간 붓다를 만나 회심하여 비구니가 되었지요.'라는 서술이 있다. 그런데 비구는 남자 승려, 비구니는 여자 승려라는 차이가 있으니, '앙굴마라는 비구가 되었지요'라고 해야 적절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304쪽. 박헌영을 주인공으로 삼은 장면에서... '박 선생, 정말 나를 모르겠소? 허현이외다.'라는 서술이 있는데, 박헌영과 관련 있는 변호사라면 아무래도 '허헌'이 아닐까 한다. '허헌이외다'라고 하는 편이 더 핍진감을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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